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8월 화성청우회 역사탐험대 경주 나들이 1

달이선생 2009. 8. 13. 17:41

  

  2009년 8월 8~9일 1박 2일로 화성청우회 역사탐험대는 신라 천년의 옛도읍 경주(세계문화유산)를 간다.

 

  경주는 우리나라 경상북도 동쪽에 치우친 작은 산이 둘러친 분지로 이루어진 중소도시이다. 현재의 경주 시내의 규모와 인구로 볼 때 과거 신라의 천년 도읍이었음을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도처에 널린 고분과 유적지를 볼 때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로구나 생각이 될 정도로 그 수가 많으며 바로 경주가 신라의 천년 도읍이었음을 말해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초기 국가 시대 경주는 서라벌, 서나벌 또는 사로국 등 시 자체가 도읍이자 초기 국가의 영토였다. 그 시기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원전 57년경으로 이곳에는 6부의 부족이 있고 그들 6부가 큰 박과 같이 생긴 알에서 태어난 혁거세를 옹립하여 첫번째 왕인 거서간으로 세웠다. 이후로 차차웅, 이사금 등 무당과 연장자의 의미로 해석되는 왕호를 사용하며 박, 석, 김 등 3성이 교대로 왕위에 오르며 삼국 중 제일 늦은 역사적 발전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신라에 큰 변화가 온 것은 내물이사금(재위356-402)이 즉위하고 신라에 큰 위기가 닥치면서이다. 신라는 주변 작은 소국과 아울러 특히 김해평야의 가야에 비해 문화나 기술적으로 많이 낙후되었다. 그래서 당시 경상도 지역에서는 그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고자 벼르고 있던 김수로왕의 후예 금관가야는 가야 총연맹의 장으로 바다 건너 왜에 용병을 끌어오고 백제의 협조를 얻어 신라를 침공하였다. 신라의 내물이사금은 스스로 가야를 물리칠 힘이 없었기에 속수무책이었고 어쩔 수 없이 당시 최강이자 동북아시아 새로운 패자를 군림하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한반도 남부에 세력 확대를 노리던 광개토왕은 흔쾌히 받아들여 기병과 보병으로 이루어진 5만의 병력으로 신라를 돕게하였다. 고구려 최강의 군대는 삽시간에 신라 전역과 가야지역을 초토화하고 침략군을 모조리 무찔렀다. 이 때문에 금관가야(마지막 왕은 김구해이며 아들은 백제 성왕을 관산성에서 죽인 김무력이고 손자는 신라의 명장군인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이다.)는 이후 법흥왕 때 신라에 병합되었고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 되었다. 

  이와 같은 신라의 위기는 한편으로는 고구려의 속국으로 전락했으나 새로운 선진문화를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고 이때 처음으로 고구려 사신단에 끼어 신라 사신이 중국 북조 전진에 사신을 보냈고 사신으로 간 위두가 전진 왕 부견을 만나 신라가 크게 변하였음을 말하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신라는 국력이 신장되고 왕권이 강화되어 왕호도 박, 석씨에 우선하는 연장자 개념인 이사금이 아닌 우두머리 중에 우두머리인 마립(머리)간이 되고 왕위를 김씨들이 독점하게 되었다. 이후 지증왕(재위500-514)대에 신라의 정식 국호 사용 및 왕을 칭하고 우경(소를 이용한 농사)을 실시하여 농업 생산력이 발달하고 비인간적인 처사인 순장(무덤의 주인공을 모시던 사람을 같이 묻는 장례식)도 없어지면서 신라 사회는 내부적으로 큰 발전을 이룬다. 또 이시기 옛 울릉도인 우산국을 이사부가 점령하여 그 부속 도서인 독도가 우리의 영토가 되었다. 이와 같은 발전은 법흥왕(재위514-540) 때 불교공인(527년 박씨였던 이차돈이 순교하면서 그의 목에서 흰피가 솟아 불교를 정식으로 공인하였다. 신라에 불교는 이미 고구려에서 묵호자로 부터 들어와 있었다.)으로 완성되고 그 아들 진흥왕 대에 크게 팽창하여 한강유역을 확보하면서 삼국통일의 기반을 이루었다.

  30대 태종무열왕(김춘추)과 문무왕, 신문왕 등 통일기의 진골왕들은 고구려, 백제, 나아가 말갈까지 포함하는 신라 중심의 민족문화를 이룩하였고 한국문화의 원류가 되었다. 선덕왕(37대, 재위780-785) 이후 진골귀족의 왕위다툼과 인도의 카스트제도와 같은 신분제도인 골품제도 등의 많은 문제로 신라 천년의 역사는 무너진다.

  초기 국가 시기 고대국가로 발돋움 하기 위해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던 내물왕과 신라인들... 고구려, 백제 등 삼국의 항쟁에서 삼국을 통일하고 당나라 세력을 물리친 신라인들, 그러나 그들의 나라가 천년을 지나오면서 스스로 변화하고 시대를 앞서가던 지혜는 사라졌고 역사는 냉험하게 그런 신라를 무너뜨리고(935년 신라 마지막왕 김부 경순왕이 왕건에 귀부하였다.) 높고 아름다운 나라 고려에게 민족의 운명을 맡겼다.

 

  최근 유명 방송사의 사극인 선덕여왕이 인기를 끌면서 신라사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그와 같은 와중에 신라 역사와 문화의 중심지 경주를 가게되어 큰 기쁨이다. 다만 사극에서 보여지는 내용이 그대로 역사로 인식되는 것은 문제이다. 우리가 직접 경주에서 신라의 진면목과 역사적 정확한 사실을 찾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경주를 간다. 화성청우회 역사탐험대가!!

 

  새벽잠을 미루고 이른 아침 6시에 출발한 우리는 충북 옥산 휴게소에서 아침을 떼우고 오전 11시 경 경주에 도착하였다. 임진왜란 때 많은 충신을 배출한 추녀동 입구는 그들의 업적을 높이 사 하마비(궁궐, 왕릉, 위인의 유적 등 그곳을 지나는 모든 사람은 그 위엄을 기리면서 신분이 높은 이라 할지라도 말에서 내려 걸어가면서 예의를 갖추라는 비석, 하마는 즉 말에서 내린다라는 것이다.)가 놓여 그 위엄을 더하였고 신라의 명장 김유신 릉이 있는 곳이라서 그런지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그 어느 곳보다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삼문으로 이루어진 흥무문을 거쳐 김유신 릉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의문이 든다. 김유신(595-673)은 분명히 왕이 아니고 신라의 명장으로 알고 있는데 왜 릉이라고 했을까?

  김유신은 화랑으로 그가 이끈 낭도가 용화향도이다. 신라 진평왕부터 통일기 문무왕에 이르기까지 신라 조정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했으며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에서 신라군의 대총관이 되어 진두지휘하며 그 업적은 신라 최고 관직인 상대등 및 신라 17위 관계에서 제일 높은  각간보다 그 공을 높혀 대각간을 제수하고 고구려 정벌 이후로는 태대각간에 오르며 그 업적을 높이 칭송하였다. 하지만 신라 전제 왕권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김유신의 가야세력은 외척세력(김춘추와 김유신 누이가 결혼)으로 왕권에 위협적이었기에 점차 정치적 박해로 몰락한다. 그후 835년 흥덕왕 10년에 그 업적이 다시금 칭송되고 흥무대왕(王)으로 추봉되었다. 그래서 김유신 장군은 제왕에 올랐기에 장군도 되고 군왕도 된다. 그래서 후대에는 이를 두고 장군으로 볼건지 왕으로 볼건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또한 후세의 경주 선비들이 장군을 기리며 서악서원에 위패를 모시고 설총 및 최치원과 함께 제사를 지냈다. 

  

 

  김유신 장군의 릉은 그의 업적과 위용을 대변하듯 고려의 문신이었던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 열전에도 그 서술분량이 3권으로 이루어져 제일 많으며 무덤 역시 일반의 묘를 능가하는 규묘에 왕에 필적하는 둘레돌(護石 호석)과 돌난간을 둘렀다 둘레돌에는 12지 신상인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쥐,소,범,토끼,용,뱀,말,양,원숭이,닭,개,돼지)를 세겨넣어 그 화려함을 더하였다.

  김유신 장군의 업적을 기리며 참배를 하였다.

 

 

  김유신 릉은 후대에 릉이라고 할지 아니며 묘로 할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였다. 이에 흥무대왕으로 추봉된 사실에 받아들여 릉으로 고쳐 부르면서 초기에 묘라고 썼던 비문을 고쳐 릉으로 썼다. 하지만 비가 오면 비문이 물에 젖어 사진처럼 묘자가 나타난다. 이러한 일로 최근에 '세상에 이런 일이'에 신기한 비문으로 소개도 되었는데 이유를 알아보니 비문이 원래 돌에는 묘라고 글을 세겼으나 릉자로 고치기 위해 묘자를 메꾸는데 사용한 돌이 달라서 물에 젖으면 그 성질에 따라 그 색깔이 달리 나와서 생기는 현상이었다. 우리가 방문한 그날도 가랑비가 내리고 있어서 릉(陵)이라는 글자가 묘(墓)자로 보였다.

 

 

  김유신 릉의 둘레돌을 장식한 12신상 중 진(辰)에 해당하는 용신상이다. 이렇게 둘레에 12지 신상이 양각되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김유신 보다 힘이 센 장수가 나온다. 그는 바로 알천으로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알천랑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진덕여왕 때 하루는 화백회의를 위해 남산 오지암에서 상대등 알천을 중심으로 회의가 열렸는데 갑자기 안으로 호랑이가 뛰어들었다. 이때 모두가 놀라 어쩔 줄 몰라했는데 그때 알천은 호랑이의 꼬리를 잡아 패대기를 쳐 호랑이를 죽였다. 이에 같이 자리한 사람들이 알천의 기개를 칭송하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같이 있는 김유신의 눈치를 살폈다."

  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이야기는 얼핏 알천의 용기와 담력을 보여주는 일화로 보이지만 사실은 상대등 알천이 그 만큼 힘도 있고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당시 큰 세력을 잡고 있던 김유신의 힘을 어찌 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결국 선덕여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진덕여왕이 후사없이 죽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알천이었지만 김유신이 김춘추를 지원함으로 그 왕위를 김춘추에 양보하게 되었다. 그가 바로 태종무열왕 신라 제 29대 왕이자 진골이다. 반면에 혁거세 거서간부터 진덕여왕까지 28대 왕들은 성골이라 부른다.

 

 

  김유신 릉을 올라가는 입구에는 경주시내를 관통하는 철길이 지나고 있다. 이와 같은 철길이 놓이게 된 배경에는 일본의 치밀한 음모가 있는데 원래는 철길이 이곳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나 일제가 우리나라의 민족정기를 훼손하고자 김유신 장군의 릉 앞으로 철길을 놓아 망자의 쉼을 방해하여 그 기운을 누르려는 음모로 자행된 것이다.

  또한 일본은 우리나라 유적 및 명산 곳곳에도 쇠말뚝을 박아 우리의 정기를 훼손하고자 하였다.

 

 

   김유신 릉을 나와 그 근처에 자리잡고 있는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능으로 갔다. 김춘추는 김유신과 떼레야 뗄수 없는 사이이며 폐위된 왕가의 자손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김유신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그 무열왕릉 앞에는 김춘추의 똑똑한 아들이었던 김인문(629-694)의 묘가 있다. 김인문은 큰 형 김법민(후일 문무왕)과 함께 아버지를 도와 당에 유학하며 당나라의 대군이 신라와 함께 통일 전쟁에 나아가는데 큰 공을 세웠다. 당은 고구려를 멸하고 신라까지 넘보며 전쟁을 일으켜 문무왕을 폐하고 신라왕으로 책봉되었던 인문이다. 

  뒤의 무덤은 김춘추의 9대손인 김양(808-857)의 무덤으로 김양은 사극 '해신'으로 유명한 장보고에서 후일 신무왕이 되는 김우징을 도와 민애왕 김명을 죽이고 왕으로 옹립한 인물이다. 신무왕 즉위에 함께 공을 세운 장보고는 흥덕왕 때 청해진대사가 되어 완도를 무대로 중국과 일본의 삼각무역을 이끌었던 해상세력으로 신무왕의 아들인 문성왕과 자신의 딸을 왕비로 삼게하는 약조를 하고 군사 5천을 동원하여 왕위를 옹립했던 인물이다. 후일 문성왕이 귀족들의 반대로 왕비를 옹립하지 않자 장보고는 반란을 일으켰고 조정에서는 염장을 보내 암살하였다. 그 당시 신라 조정에 막강한 힘을 가지고 창부령을 거쳐 시중을 지내고 병부령까지 지냈기에 장보고 세력의 척결에 김양이 배후였을 것이다.

 

 

 

  태종무열왕 김춘추(604-661)의 무덤이다. 김춘추의 아버지는 용춘, 어머니는 천명부인으로 진평왕의 차녀이다. 요즘 선덕여왕에서는 천명이 덕만보다 언니이자 쌍둥이로 나오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역사에서는 김유신과 백제의 계백처럼 물과 기름처럼 어울릴 수 없는 관계도 있지만 두 사람이 꼬옥 함께해야 할 친구이자 동지도 있다. 특히 김유신과 태종무열왕인 김춘추는 대표적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삼국사기에 전하는데 처음부터 두 사람이 가까운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데는 그 처한 상황이이 같았다. 김유신이 망한 가야의 후손이라면 김춘추는 쫓겨난 진지왕의 손자라는 처지가 였던 것이다. 그리고 김유신이 군사적 재능 탁월하였다면 김춘추는 정치, 외교적 수완을 가진 인재로 두 사람은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였고 일찍이 선덕여왕은 이를 잘 알아 보고 이 두 사람을 발탁하여 그 재능을 펼치도록 도왔었다. 이렇게 신라에 큰 인물이었던  김유신과 김춘추는 김유신의 꾀로 더욱 밀접한 관계가 되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하루는 김유신이 김춘추를 초대하여 축국(공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차는 놀이)을 하였다. 과격한 만큼 옷이 상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고 결국 김춘추의 옷고름이 김유신에 발에 밟혀 끊어졌다. 이를 기회로 김춘추의 옷고름을 손보기 위해 평상시 같았으며 시종을 보내 했을 것을 김유신은 누이 동생 문희를 시켜서 옷을 꿰매게 했고 그날밤 시침(시침은 고대사회에서 손님을 모셔서 여종이나 등등을 시켜 남자손님을 접대하는 것으로 손님에 대한 주인의 최고 예의이다. 우리가 잘 아는 고려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 오씨의 만남도 이렇게 이루어졌다.)까지도 시켰다. 이렇게 두 사람이 관계를 맺으며 문희가 임신까지 하게 되자  유신은 당시 선덕여왕이 남산으로 행차하는 것을 알고 마당에 나무를 쌓아 동생 문희를 화형에 처하고자 하였다.  선덕여왕이 그곳을 지나다  큰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그 연유를 물으니 김유신의 집에서 나는 연기라고 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여왕이 김춘추에게 물으니 유신이 몰래 외간남자와 정을 통하여 임신까지한 누이 동생을 화형 시키려고 한다고 하자 선덕여왕이 그 외간남자가 누구냐고 묻자 김춘추는 낯빛이 변해서 가만히 있었다. 이에 현명한 여왕은 이 일이 김유신이 꾀를 내어 김춘추와 자신의 동생을 맺어주고자 벌인 일이란 것을 짐작하고 당장 김춘추를 보내 화형을 중지시키고 후일 두 사람을 혼인 시켰다." 

 

  위 일화에서 보듯 김유신은 김춘추와 맺어지기를 고대했고 그 둘의 결혼은 여왕이 직접 나서지 않으면 성사되기 힘든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이는 신라가 최고의 귀족인 진골의 나라였고 그 진골은 자신들의 신분에 맞는 사람 말고는 혼인을 하지 않았던 신분적으로 폐쇄적인 사회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례는 이미 아버지 김서현이 어머니 만명부인과 결혼하고자 야반도주를 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문희 역시 김춘추의 배필이 되어 왕후가 될 수 있었던 이야기도 전하는데 문희는 그 위로 보희라는 언니가 있었는데 그 언니가 하루는 서형산에 올라 오줌을 누니 경주가 잠기는 꿈을 꾸고 이상하게 여기며 문희에게 말하자 문희는 이 꿈이 범상치 않음을 알고 보희에게 말하여 그 꿈을 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오줌 자체로 경주가 잠기는 것은 이상하고 부끄러운 꿈이지만 자신의 치부로 경주 전체를 아우르는 모습에서 후일 왕비가 될 꿈이었다는 것이다.

  문희는 후일 문명왕후가 되어 김유신과 김춘추는 서로 사돈관계를 되었으며 김유신 역시 김춘추이 셋째딸을 맞아 부인으로 삼으니 그가 바로 지소부인이다. 이렇듯 김유신과 김춘추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그 힘은 결국 한 사람은 왕이 되었고 또 한 사람은 신라 최고의 명문가로 거듭났다.

 

 

 

  문무왕이 아버지 김춘추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그 비문이 실린 비신은 없어지고 그 아래인 귀부와 머리인 이수만 전하고 있다. 이수 가운에 선명하지 않지만 양각이 된 전서체로 '태종무열대왕지비'라고 썼는데 이는 당시의 문장과 학식이 높았던 김인문의 글씨이다. 귀부의 거북이와 이수의 용의 문양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당시 최고의 미술품으로 평가된다.

  김춘추에 관련한 고사는 그의 행적만큼이나 정말 많다. 특히 그가 삼국통일전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는 일화로 알려진 이야기는  대야성 성주이자 사위인 품석과 그 아내인 딸 고타소의 죽음이 평생을 두고 백제에 대한 원한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때 고타소랑의 죽음을 두고 하루종일 기둥에 서서 사람들이 드나드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이 나가있었다가 "대장부로 백제를 멸망시키리라"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와 같은 백제에 대한 원한은 그가 본격적인 삼국통일전쟁을 위해 외교로 나아가게 하였다.

  그래서 김춘추는 처음 고구려에 가서 연개소문을 만나 원병을 청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진흥왕 이후 신라가 차지한 고구려 영토 반환을 내세우며 김춘추 마저 인질로 잡을 상황이 되자 김춘추는 당시 보장왕의 대신이던 선도해에게 청포 300보를 주어 자신을 풀어주길 부탁하였다. 선도해는 지금의 토끼와 거북이라는 동화로 잘 알려진 구토지설을 말해주었고 이를 알아차린 김춘추가 이야기속 토끼처럼 연개소문을 만나 영토를 반환하도록 신라 조정에 가서 적극 주장하겠다고 거짓 약속을 하였으며 또한 김춘추와 약속한 60일이 되도록 소식이 없자 김유신은 결사대를 조직하여 고구려를 공격하려하자 이 소식을 전해들은 고구려 보장왕은 김춘추를 무사히 신라로 돌려보냈다. 이후 김춘추는 당에 들어가 대당외교를 펴며 당군의 원정을 이끌어내었다.

  오늘날 당시 김춘추의 대당외교로 빚어진 당의 개입을 두고 신라의 삼국통일이 자주성이 결여된 미완의 통일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당시 그의 선택은 중국의 통일제국에 맞서 단일한 민족국가을 만들고 민족문화를 이루는데 역사적 사명이 있었던 만큼 그의 행동은 평가의 여지가 있다.

 

 

 

  태종무열왕릉을 참배하고 찾은 곳은 경주의 시내의 상징이 된 대릉원이다. 대릉원에서 첨성대, 월성, 임해전지, 경주박물관까지 도보로 이동하기로 하고 그 후문으로 들어갔다.

  대릉원은 신라 경주 김씨의 첫 왕인 미추왕이 죽자 그 무덤을 쓰고 대릉(大陵)이라고 했다는 기록에 따라 이곳 고분군을 대릉원이라고 하였다. 황남리 고분군이라고도 하며 무덤이 30여기가 된다.

  일반적으로 대릉원의 무덤양식을 김씨 왕족을 전형적인 무덤으로 말하고 있으며 이들 무덤이 김씨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이곳 대릉원의 상징은 무엇보다 가장 큰 규모와 함께 봉분이 하나도 아닌 쌍분으로 된 황남대총이 대표적인다.(남북길이 120m, 높이 최고 23m) 특히 황남대총은 신라의 고유 무덤양식인 돌무지덧널무덤으로 발굴 조사 결과 다량의 황금제 유물과 페르시아 양식의 서역에서 들어온 유리잔 등 당시의 문화 교류와 무역 관계에 대한 소중한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또한 무덤 안에서 무덤 주인 외에 시신이 발굴되어 신라에 순장 풍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경주를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 맛보았을 황남빵 혹은 황남대빵의 이름도 여기에서 기원할 정도로 유명하다. 황남대빵은 1930년대 황남대총이 있는 황남동에서 처음 만들어 팔아 황남빵이라고 하였고 팥 앙꼬를 넣은 작은 매우 달콤한 빵이다.

 

 

 

  황남대총과 함께 대릉원의 간판이 되는 무덤은 천마총이다. 천마총은 무덤 주인을 알 수 없어 당시 무덤 안에서 발굴된 특징적인 유물인 천마도에 따라 천마총으로 이름되었다. 천마도는 하늘을 나는 말을 말 안장 아래 가리개(장니障泥=말다래)에 그린 그림으로 신라 김씨 왕족이 말을 숭상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황금유물과 함께 신라의 김씨 왕족들이 고구려와 신라와 다른 문화적 특징을 보여 그와 같은 특징은 기마유목민적 특성으로 이들 왕가를 흉노의 후예로 추정하기도 한다.

  천마총은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의 내부를 볼 수 있는 유일한 유적으로 그 안에 들어가면 가장 가운데 나무관을 놓고 나무관과 여러 껴묻거리를 넣을 수 있는 나무 곽을 만들어 막고 그 위에 크고 작은 돌을 쌓고 마지막으로 흙을 다져 봉토를 만들었다. 이와 같은 무덤 양식은 북방의 유목민족인 흉노와 유사하며 고구려 및 백제와 달리 무덤이 매우 견고하여 도굴을 하기 어려웠다. 특히 황남대총을 발굴하면서 돌무지 가운데 시신이 나왔는데 유골과 함께 출토된 물건을 통해 무덤을 도굴하려던 사람이 돌을 꺼내 공간을 만들며 들어가다 무너져 죽음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천마총 양 입구 가운데 기둥에는 무덤의 주인에 대한 예로 정숙하게 참배하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서 왼쪽으로 나온다.

 

 

 사진 위는 현재 천마도의 모습이고 아래 사진는 적외선으로 촬영한 천마도

 이다. 위 그림에서 머리 위에 뿔이나 갈퀴는 보이지 않으나

영 영상에는 선명하게 그 모습이 드러나 있다.

 

 

  최근 한국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 전시에 관련하여 국보 제207호인 ‘천마도(天馬圖)를 적외선 촬영을 한 결과 그 전에 보이지 않던 머리에 두 개의 뿔과 긴 갈퀴가 발견했다. 이는 이전에 이미 긴갈퀴가 뿔이라는 주장으로 전설 속의 신비한 동물인 기린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었는데 이번 촬영의 결과로 확실하게 2개의 뿔이 그려진 것이 확인이 되었다. 

  기린(麒麟)은 전설 속의 동물로, 인수(仁獸)라고도 한다. 사슴과 소가 교미하여 생겨난 것으로, 수컷을 ‘기(麒)’, 암컷을 ‘린(麟)’이라고 한다. 기린은 모든 동물 중에서도 으뜸으로 간주되었으며, 기린이 세상에 나오면 성인 혹은 성군(聖君)의 세상이 도래한다는 뜻이며, ‘획린(獲麟)’, 즉 “기린이 잡혔다”는 의미는 붓을 꺾었다는 뜻이거나 성인의 죽음을 상징한다.

  그 모습에 대해서는 중국 '역전'에 신령스러운 상상 속 동물로 이리의 얼굴을 한 머리 위에는 사슴의 뿔이 달렸고 몸과 다리는 말의 형상이며 꼬리는 소와 닮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양에서는 상상의 동물인 기린(麒麟)은 봉황, 용, 거북과 함께 신령한 4가지의 동물 가운데 하나로 숭배했다.  중국에서는 오랫동안 기린을 우주운행 질서의 가장 중심이 되는 신으로 고대부터 내려오는 오행사상(五行思想)에서 동서남북의 중앙의 위치를 차지하며, 사후 세계의 수호자, 살생을 미워하며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덕의 화신이자 뿔은 살과 같아서 받아도 사람을 해치지 않아 인(仁)의 상징 360종류의 털이 있는 동물들의 우두머리로 여겨져 왔다. 때문에 용, 봉황 등과 임금을 상징하는 성스런 동물이다.

  또한 동물원에 가면 볼 수 있는 아프리카 초원의 목이 긴 '기린'은 명나라 황제 영락제가 정화 원정을 통해 바쳐진 것을 기린이라고 불러 기린이란 이름을 얻었으며 현재 중국어는 기린을  ‘장경록(長頸鹿)’이라고 한다.

  우리의 경우, 단군릉 우측에 있는 청계골 안에는 ‘말묘’라고 불리는 큰 무덤이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단군이 타고 다니던 기린의 무덤이라고 한다. 신라시대에는 기린의 문양을 부조한 벽돌을 만들어 건축에 이용하였으며,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황제의 호위군을 ‘기린군(麒麟軍)’이라 칭하였다. 조선에서는 왕족의 관복에 흉배(胸背) 문양으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천마도의 재발견은 그간의 논란을 더욱 가열하고 있다. 특히 기존의 천마라는 명칭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페가수스’를 일본인들이 번역한 것이 바로 ‘천마’ 이고 따라서 연구 결과 어떤 결론이 나도 ‘천마’라는 이름은 맞지 않는다는 의견 등 분분하다. 

  천마도는 장니 즉 말다래의 그림이다. 천마도의 제작과 양식을 신라의 외래적 문화의 기원을 북방에 두느냐 중국에 두느냐는 고대 신라를 이해하는데 큰 차이가 있다. 최근 유라시아 파지릭 문화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면서 고대 신라문화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고 있다. 천마도의 대상이 말이냐 기린이냐의 논쟁이 여전한데 파지릭의 돌무지덧널무덤에서 나온 그들의 말꾸밈이 마치 일각수와 같은 형태로 말머리 장식을 하는 것이 고유한 풍속으로 밝혀져 주목된다. 더욱이 천마도의 소재가 자작나무로 북방에서 제작되어 전래된 유물일 가능성도 있어 경주에서 발견된 황금보검과 같은 신라공예품이 아닌 직수입품의 존재로 그 가능성이 충분하다. 향후 파지릭 등 유라시아 문명에 대한 많은 고고학적 조사와 더불어 신라로 이어지는 초원길의 문명이 한국 고대사 특히 신라사의 정확한 복원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된다. 똑같이 북방유목민족과 교류했던 고구려는 자신들의 발달된 철제무기류와 철제 등자 등 각종 철제도구를 주고 그들의 우수한 문화를 받아들였다.(말을 달리며 뒤로 돌아 활쏘기인 파르티아 사법[무용총 수렵도*고구려기마무사의 연습용 호시를 뒤를 돌아 사슴을 쏘려는 그림])

  신라는 무덤과 무덤주인들의 상징인 금관과 여러 유물을 통해서 주변의 고구려, 백제 등과 다른 문화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경주분지에 거대한 봉분(돌무지덧널무덤)으로 대변되는 4세기에 나타나 2백년 간을 이어간 파지릭과 유사한 신라의 독특한 문화, 이 수수께끼의 역사가 조만간 풀리길 고대한다.

 

 

  대릉원의 고사와 함께 신라 경주 김씨 왕가의 태조왕으로 일컬어지는 미추이사금(재위 262-284), 미추왕은 시조 김알지의 6대손으로 김씨로서는 첫 번째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래서 신라의 임금들은 미추왕을 태조왕으로서 시조로 숭상하고 있다.  

  미추왕릉은 봉분 한편이 대나무숲으로 우겨져 있다. 이는 미추왕 이후 제 14대 왕이된 유례이사금(석씨)이 즉위하고 많은 외적의 침입이 있었는데 특히 말년에 지금의 경북 청도군에 있던 이서국의 군대가 경주에 침입하여 위기에 닥치자 이 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는 군대가 머리에 대나무 잎을 꼿고 신라군과 함께 이서국군대를 물리쳤다. 이후 그 군대가 소리없이 사라지고 다만 미추왕릉에 많은 대나무 잎이 떨어져 있어서 이를 본 백성들은 백성과 나라를 사랑하는 미추왕이 죽어서 자신의 군대(竹葉軍죽엽군)를 보내 나라를 도왔다라고 하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고사로 인해 무덤 봉분에는 대나무가 심어져 있다. 

  이 일화를 통해 당시 신라 김씨 세력이 무력적으로 상당한 힘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특히 유례이사금조 기사에 따르면 미추왕의 동생이 되는  말구를 이벌찬으로 삼고 그를 왕이 친히 방문하여 정사를 물었을 정도로 김씨의 세력이 막강하였다

 

 

 

  대릉원 정문을 나와 그 앞을 바라 보면 대릉원 못지 않은 무덤군과 함께 넓은 건물지가 나타나는데 이는 뒤의 왕성이었을 월성의 앞으로 신라시대 많은 관청이 이곳에 자리잡아 신라 왕경인 금성의 중심지였다.

 

 

  선덕왕 혹은 선덕여왕(재위632-647)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이자 현명한 여인으로 나오며 드라마 선덕여왕의 인기로 그 어느 때보다도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선덕여왕에 관한 일화는 삼국사기에 전한다. 진평왕 때 당에서 모란 꽃 그림과 씨앗을 보냈다. 이를 보고 덕만은 그 꽃씨는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자 진평왕이 이유를 물으니 원래 꽃은 벌과 나비가 꼬이는 것인데 그림 속 모란에는 그렇지 않아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답하자 정말 그 씨앗을 심어 꽃을 피우니 향기가 없었다. 이밖에 여왕이 간밤에 옥문지라는 연못에서 개구리가 시끄럽게 우는 꿈을 꾸고 그 꿈을 해몽하여 옥문지는 지금의 옥문곡(여근곡)지역이고 개구리의 눈은 마치 성난 모습으로 보여 군사를 상징하니 이는 백제의 매복군을 암시한다고 하였다. 이에 알천이 군사를 이끌고 가보니 백제군이 매복을 하고 있어 이를 물리쳤다.  이와 같이 선덕여왕은 예지력도 있고 현명한 임금이었다.

  이러한 선덕여왕과 매우 밀접한 유물이 바로 이 첨성대이다. 첨성대는 현존하는 동양에서 제일 오래된 천문대이자 우리나라 천문과학을 대표하는 유물이다. 이 첨성대를 만든 사람이 바로 선덕여왕이다. 첨성대의 둘레는 둥글게 건축되었는데 이는 둥근 하늘을 상징하며 그 위 단의 사각형은 대지를 상징한다고 한다. 정면에 보이는 구멍은 창문이 아니고 사다리를 놓고 그 구멍을 통해 내부로 이어진 길로 꼭대기에 이르는 입구이다.

 

 

 

  첨성대 맞은편으로 뒤 숲은 월성이며 그 앞의 관청건물터로 위에서 설명한 지역이다. 현재 이곳은 그 건물 위치에 기둥 받침으로 쓰였을 초석이 남아있고 잔디를 깔아 보존하고 있다. 또한 주변 산책로를 만들어 여러 꽃을 심어 나들이객의 낭만적인 산책을 유도하고 있다. 주변에 가족들과 또는 연인들이 삼삼오오 거니는 사람이 많다.

 

 

 

  관청터와 월성으로 가다보면 그 중앙에 오래된 고목이 즐비한 작은 숲이 나온다. 그 숲은 무려 2천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곳으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서기 65년 탈해이사금 때 시림(계림의 옛이름)에서 닭울음 소리가 들려 호공을 시켜 가보니 황금빛의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그 아래 흰닭이 울고 있어서 왕이 친히 나아가서 그 궤를 여니 그 속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 그 때부터 이 시림을 계림이라고 불렀고 왕이 그 사내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황금빛궤에서 나와 성을 금씨로 하였으며 자라면서 총명하여 알지라하였다. 이 아이는 신라 김씨의 시조 김알지이다.

  신라의 경주 김씨는 신라시대부터 김씨라고 부르지 않았다. 이는 고려까지도 한자대로 쇠금인 금으로 불렀는데 고려 다음으로 조선 왕조가 개창되면서 왕가의 성이 이(李)로 즉 성에 나무목변이 들어가 그 나무를 베는 것이 쇠로 그 쇠가 금(金)이되니 후일 금씨가 이씨를 베고 나라의 주인인 된다는 참언(예언)에 따라 금씨를 김씨로 부르도록 했다. 그래서 조선시대 이전 정식으로로 김씨를 부른다면 김알지, 김춘추, 김유신 등은 모두 금알지, 금춘추, 금유신이 되야한다. 

 

 

 

  경주 계림을 나타내는 비석이 서있는 비각이다.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월성이다. 사진과 내용이 많으므로 '8월 화성청우회 역사탐험대 경주 나들이 2'로 이야기를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