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우리 역사와 함께한 강화도 1 (9월 청우역사탐험대)

달이선생 2009. 10. 27. 16:03

   매번 답사를 떠나지만 나에게는 특별히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고의 문제는 없다. 다만 오늘 찾아가는 강화도는 나 아닌 많은 사람들도 강화도 하면 참성단(塹星壇), 삼별초(三別抄), 외규장각(奎章閣) 생각나는 것이 있을 정도로 우리와 매우 친숙한 곳이며 오늘이라는 시간이 다시 오지 못할 소중한 오늘이라면 오늘의 답사 역시 특별하고도 소중한 시간이다.

   강화도(江華島)는 참 재밌는 섬이다. 섬이지만 섬이 아닌 섬... 섬은 하천이나 바다라는 자연적인 경계로 뭍(육지)과 구별되어 왠지 멀리 있고 변방이자, 구석지고 외진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강화도는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하고 가깝게 느껴지는 섬 아닌 섬이다.

  특히 강화도는 여느 섬과 다르게 상고시대부터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역사와 함께하였고 그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역사가 살아있는 '역사의 섬'이다.

 

  강화도의 행정구역은 인천광역시 강화군이며 경기만(만'灣'은 바다가 육지로 깊숙히 들어간 곳을 말한다.)의 한강 하구에 위치한다. 우리 나라에 무려  다섯 번째로 손꼽히는 큰 섬이며  면적이 293㎢(391.131207평) 달하고 인구는 대략 6만여명 정도이다.

  강화도의 대표적인 큰 섬은 남북 길이 30㎞, 동서 길이 12㎞, 해안선 길이 99㎞이며 본래 김포반도(반도=半島는 바다로 돌출된 육지로 작은 것은 곶이라고 하고 크면 반도라고 한다.)와 연결된 육지였으나 오랜 시간 침식작용으로 평탄해지고 침강하여 육지에서 떨어져나가 구릉으로 이루어진 섬이되었다.

  따라서 강화도에는 마니산(469m)·고려산(436m)·낙조봉(343m)·혈구산(466m)·진강산(443m)·별립산(400m) 등 산지가 많으며 험준하지는 않다. 또한 곳곳에 낮고 평평한 충적지가 발달해 있다. 이러한 충적지의 평야가 발달하여 농경지로 이용되면서 강화는 섬이지만 대규모의 경작이 이루어져 오래전부터 쌀을 비롯하여 잡곡 등을 길러졌다. 특히, 인삼과 화문석은 이 지방의 전통적으로 대표적 특산품이다. 그리고 알싸한 맛이 일품인 강화 순무에 밴댕이와 새우젓으로 담근 시원한 김씨도 유명하다. 섬이라서 조기·병어·민어 등 수산물도 풍부하여 곡식이면 곡식, 고기면 고기 등 무엇하나 부족할 것이 없는 풍족한 풍요의 섬이다.

  날씨는 해양성기후의 특징을 띠고 같은 위도의 내륙지방보다 따뜻하여 살기 좋으며 온화한 기후로 남부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탱자나무·동백나무 등의 난대식물이 자생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섬 아닌 섬 강화도가 섬이지만 섬이 아닐 수 있도록 하는데 일등 공신은 바로 1969년 12월에 강화도와 육지 사이의 염하(鹽河=염하는 강화도 본섬과 김포반도 사이에 해협으로 한강하구에 맞닿아서 바다지만 바다 같지 않고 마치 강과 같다하여 '소금강'이라고 부르는 명칭이다.)에 세운 강화대교(694m)와 이어 1998년에 초지진 부근 강화초지대교다. 따라서 우리는 강화도를 가는데 배를 타는 수고와 낭만보다는 편리하게 다리를 통해 강화도에 들고 날수 있으며 섬 안에서도 육지 못지 않게 도로가 잘 정비되어 강화읍을 기점으로 도로가 사방으로  통해 더욱 교통이 편리하다. 오랜 역사로 인한 정서적 가까움과 함께 현대의 기술로 다리가 놓여 섬으로의 정체성이 흔들린 육지 아닌 강화도, 역시 재밌는 섬이다.

 

   강화는 '역사의 섬'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강화도는 우리의 역사와 떼래야 뗄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 우리민족 최초의 국가이자 신석기 이후 고도로 발달된 청동기 문화를 꽃피웠던 고조선과 단군왕검의 역사가 강화도 남쪽 마니산과 정상의 참성단, 삼랑성(정족산성)에 고스란히 베어있으며 청동기시대 그 문화를 꽃피운 대표적 문화유적으로 북방식(탁자형)의 강화고인돌이 있다.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 음력 10월 3일에 건국되어 단군왕검을 국조로 모시는 대종교를 연 나철선생과 교단이 그날을 기리고 우리는 음력으로 날짜를 계산하기가 어려워 매년 양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삼아 이날을 기념하고 있는데 며칠있으면 개천절로 참성단에서는 단군제가 치러진다. 뜻깊은 개천절을 앞두고 답사하게 되니 마음 한편 뿌듯함을 느낀다. 다만 단군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마니산과 참성단. 삼랑성 등을 가지는 못하니 아쉬울 따름이다.

  이렇듯 상고시대 고조선의 발자취가 서려있고 삼국시대 삼국이 한강을 두고 그 교두보이자 방어지로 주목되어 치열하게 싸웠다. 그래서 당시의 행정구역이  고구려의 혈구군(穴口郡)으로 대부분 문헌에서 기록으로 보이나 〈대동지지-김정호〉에는 백제의 갑비고차현(甲比古此縣)이라고 나오므로 따라서 항쟁 와중에 처음 백제의 영토였다가 고구려의 남하정책으로 한강유역이 점령되어 지명이 변천된 것으로 강화도가 삼국의 항쟁이 빈번하게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삼국통일 후 신라는 이곳을 차지하고 해구군(海口郡)으로 개칭하고 한주(漢州 : 지금의 경기도 치소는 광주)에 예속하였다. 이때 영현으로 수진현(守鎭縣 : 본래 백제의 수지현(首知縣) 또는 신지현(新知縣)으로 고려 태조 때 진강현(鎭江縣)으로 개칭했으며 1018년에 강화에 합속됨)·호음현((沍陰縣) : 본래 백제의 동음내현(冬音乃縣) 또는 휴음현,아음현(休陰縣·芽音縣)으로 지금의 하점면 일대인데 고려 태조 때 하음현(河陰縣)으로 개칭했으며, 1018년에 강화에 합속됨)·교동현(喬桐縣)이 있었다. 940년에 강화현으로 개칭했다.  고려 중기 이후 유목국가이자 칭기스칸의 몽골제국의 침략을 받아  고려의 왕과 조정이 피난하여 39년간 항전을 한 국난극복의 섬이었다.

   이후 조선이 건국되기 앞서 고려 말기의 충정왕, 창왕, 우왕 등이 강화에 유배되었으며 세종의 아들인 안평대군이 세조의 즉위를 반대하여 유배되고, 최고의 폭군으로 기억되는 연산군(강화도 서북쪽 교동도에 유배) 역시 폐위되어 이곳에 유배왔다. 또한 임진왜란에 공을 세우고 중립외교로 후금의 침략을 막았던 현명한 왕인 광해군이 이복동생 영창대군과 인조의 동생인 능창대군을 유배보내어 죽었으며 사도세자의 후손이자 세도정치시기에 마지막으로 왕이되었던 철종의 할아버지 은언군이 유배와서 죽었고 철종도 형 원경이 연루된 '민진용의 옥'으로 유배되었다. 이처럼 강화도는  '유배의 섬'이다.

  왕실 종친이 죄를 지으면 벌을 주어야 하지만 왕실이 왕족을 보호하고자 하는 생각도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 처벌 수위를 놓고 고민이 많았다. 따라서 강화도는 가깝지만 섬이라는 이유로 멀고도 먼 유배지가 아닌 가까이 살필 수 있는 조선 왕족의 유배지로 적격이었던 것이다.

  아울러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은 서양과 통상 거부 정책 즉 쇄국정책(鎖國政策)을 펴며 프랑스, 미국과 각각 병인, 신미양요라는 전쟁을 치루고 서구 열강과 대립하며 조선의 주권을 지켰던 섬이었다.

  또한 우리 민족 최대의 시련이었던 일본 침략의 시작 역시 이곳 강화도에서 '병자수호조규(丙子修好條規)'라는 이름의 강화도 조약(1876)의 체결로 민족적 시련과 아픔도 고스란히 간직한 섬이다.

  때문에 이러한 역사적 전통은 강화주민들을 강인하고 내부적 결속을 더욱 다지게 하여 특히 "암강화 숫통진" 이라는 말은 즉 "강화의 처녀가 이웃한 김포의 통진으로 시집가면 잘 살지만 통진 처녀가 강화에 시집 오면 못 산다."라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고 특히나 강화도 조약 이후 우리나라에 들어와 우리의 경제를 장악한 일본 상인들도 강화에 발 붙이지 못하고 나갈정도로 배타적이면서도 강인한 민족주의 정신은 역시 역사의 고장 답게 역사적으로 그 유산을 고스란히 생활로 이어오고 있는 강화도만의  특색이자 자랑(전통)이다.

  현대에는 미국과 소련이 우리나라를 각각 북위 38도선으로 분리하여 그 38도선에 접하여 특히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이후 휴전선이 그어지면서 인접한 이북 지역 황해도에서 많은 실향민이 내려와 살아 민족분단의 아픔이 고스란히 베어있다. 이렇듯 강화도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변방의 섬이 아닌 우리 역사의 중심으로 오늘 우리에게 소중한 역사의 현장이자 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수많은 사연과 역사가 담긴 강화도, 이제 그곳으로 떠난다...

 

 

 

  경기도 김포 통진에서 강화대교를 건너서 10여분 가다보면 강화읍이 나온다. 강화읍은 강화도의 중심지로 고려 때 몽골의 고려침입으로 1232년 도읍을 강화로 옮겨 지군사(知郡事)로 승격되어 1270년 개성으로 환도하기까지 39년 동안 도읍으로 있었다. 조선에 들어서 그 중요성으로 1413년 도호부(都護府종3품)로 승격되고 1618년 부윤(府尹종2품), 1627년 정묘호란(후금의 침략)이 일어나자 인조가 일시 피난했다가 환도 후 국방상의 이유로 유수부(留守府정2품)로 승격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후금이 청으로 고쳐 조선을 침략) 때에는 함락되어 청나라와 강화를 맺었다. 이렇듯 강화도가 국방상 중요한 위치를 점하며 유사시 임금이 거쳐할 행궁(강화유수부터)까지 갖추고 있어 섬이었으나 일반 지역보다 격이 높은 중요한 행정구역으로 인정되었다.  

   강화도 말고도 조선 후기에는 수도의 외곽을 방어하기 위하여 경기도 광주, 수원에 유수부를 두었으며 이들 역시 군사적인 행정이 주임무였다.

   바로 강화유수부의 관아 정문인 승평문(升平門)이다. 관아(官衙)는 벼슬아치들이 나랏일을 보던 곳을 이르는 것으로 서울의 한성부나 지방에 강화유수부 등 다 관아라 이르며 지방 관아의 책임자는 종2품 관찰사에서 하급관리인 종6품 현감에 이르기까지 모두 '사또'라고 부른다. 

 

  여기서 잠시 용어에 대해 살펴보면 정1품, 종1품이라고 하는 것은 관리들의 품계(品階)를 말하는 것으로 품계는 직급이다. 오늘날 공무원 9급, 2급 등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따라서 품계가 높은 사람은 고위직의 직책을 받는다. 이를테면 오늘날 총리에 해당하는 정승이 정1품의 품계를 갖는다. 고려에서 995년(성종 14) 문관과 무관에 품계를 정하고 조선에서 이를 계승하여 정1품에서 종9품까지 18품계(등급)으로 나누고 품계 안에 상하를 두어 총 36단계로 관리의 등급을 매겼다. 정3품 상 문반(문관) 통정대부, 서반(무관) 절충장군 이상의 관리들은 최고위직 관리로 임금과 정사를 논의하였다. 

 

 

  승평문을 지나면 동헌인 명위헌(明威軒) 건물에 닿기 앞서 뜰 앞에 나무와 꽃, 잔디로 이루어진 정원이 나온다. 고려궁지와 오랫동안 강화의 중심지였던 터답게 오래된 느티나무와 회나무가 서있어 기나긴 시간을 함께 지냈을  세월의 잔상을 보여준다.

 

  

  명위헌은 강화유수부의 동헌(東軒)으로 동헌은 조선시대의 지방 관아에서 정무(政務)를 보던 중심 건물이다. 지방관인 사또(관찰사·병사·수사(水使)·수령(守令))들의 정청(政廳)으로서 지방의 일반행정 업무와 재판 등을 행하였다. 동헌이라고 불려지게 된것은 지방관의 생활 처소인 내아(內衙 : 西軒이라고도 함.)와 구분되어 보통 그 동편에 위치했기 때문에 동헌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이밖에 아사(衙舍)·군아(郡衙)·현아(縣衙)·시사청(視事廳)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강화유수부의 동헌 건물은 1638년(인조 16년) 개수하여 내려오다 일제시기를 거치면서 훼손된 것을 1977년 에 지금처럼 복원하였다. 복원된 동헌의 모습은 1638년에 개수되었을 당시의 모습이다. 동헌 건물의 특징은 주심포 양식으로 지붕을 떠받드는 공포 하나와 기둥이 짝이 된다. 일반적인 큰 건물은 다포식으로 여러개의 공포가 있고 기둥을 세우지만 강화유수부의 동헌은 3층의 석축 위에 정면 7칸, 측면 4칸의 목조 주심포(柱心包) 구조에 팔작지붕의 장중한 체제를 갖추고 있어 조선후기의 일반적인 동헌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동헌의 안에는 예전 강화유수와 판관 및 아전들이 정무를 보는 모습을 밀랍인형으로 꾸며 보는 이들의 이해를 돕고 있어서 아이들이 관람하기에는 좋다.

 

 

 고려궁지를 알아보고자 이루어지는 학술 발굴 모습

 

 

  강화유수부 관아가 있던 자리는 예전 고려의 궁터였다. 지금도 강화유수부 동헌 뒤에 외규장각 건물 옆으로 당시 고려 궁궐의 모습을 알아보고자 발굴 조사가 한창이었으며 우리가 갔을 때는 주5일 휴무로 발굴을 중지하고 그 위를 포장지로 덮어 유적을 보호해놨다.

  곳곳에 많은 돌과 석축으로 보아 발굴 조사가 상당히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었고 앞으로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바람이다.

 

  이곳 강화도 고려 궁지가 조성된 이유는 고려 중기의 정치적 변화와 당시의 국제정세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추진된 강화도 천도의 일환이었다.

  1170년 고려 의종 24년 의종은 보현원(普賢院)으로 행차하던 도중에 장기간에 걸쳐 자신과 문신들을 호종한 무신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오문(五門) 앞에서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戱5명의 군사가 한조를 이루어 태견을 겨루는 경기)를 열었다.  그때  대장군 이소응이 하급무관인 석린(石隣)을 이기지 못하고 물러서자 종5품의 젊은 문신 한뢰(韓賴는 중서문하성 속관 기거주起居注였다. 기거주는 사관직이나 서경과 봉박을 하는 간관을 역할도 하였다.)가 무신들을 욕보일 목적으로 자신보다 높은 종3품의 대장군 이소응의 뺨을 때렸다. 이 모습을 의종과 문신들이 손벽을 치면서 크게 웃자 분노가 치밀어오른 상장군(上將軍) 정중부(鄭仲夫)가"이소응이 비록 무부(武夫)이나 벼슬이 3품인데 어찌 욕함이 이토록 심한가"라고 꾸짖고 그날 화평재(和平齋)에서 의종이 문신들과 밤늦도록 연회를 즐기자 견룡행수(牽龍行首)였던 이의방과 산원(散員) 이고가 상장군 정중부에게 "문신은 배부르게 취하여 뛰노는데 무신은 배 고프고 피곤만 하니 이를 참을 수 없다" 하자 정중부는 이의방과 이고 및 휘하장수들과 무신란(무신정변)을 일으켰다.

  난 중에 정중부는 "무릇 문관을 쓴 자는 비록 서리(胥吏)라도 죽여서 씨를 남기지 말라"고 할정도로 문신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고 고위 문관 200여명이 살해당했다. 이처럼 무신들이 문신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은 문치주의(文治主義)에 따른 문벌귀족들이 자신 문신들이 학식이 높고 학문을 했다는 우월감에 젖어 무신을 무부라고 낮추며 차별하였던 것이고 아울러 정중부도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으로부터 수염이 태워지는 치욕까지 당했었다.(의종의 아버지 인종은 정중부의 수염을 보고 "가히 대장군의 재목이다"라고 칭찬하자 곁에 있던 김돈중이 시기하여 수염을 태워 정중부가 그를 심하게 구타하였다. 이에 김부식은 정중부를 엄히 처벌하고자 하였다.) 이때 김돈중은 감악산에 도망하였으나 종자의 밀고로 잡혀 죽으며  "유시의 화에 죄없는 사람이 많이 걸렸으니, 지금 나의 죽음은 마땅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무신의 난으로 인해 왕권과 조정의 권력은 흔들리고 무신들 안에서도 권력다툼으로 이의방이 명종 옹립 후 이고를 죽이고 태자비를 올려 권력을 쥐었다. 이에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이의방을 죽여 권력을 장악한 다음 경대승이 정중부 부자를 죽였으며  이 때 무신들은 중방(重房)을 중심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관직의 독점, 사전(농장)을 확대하며 정치적 지위와 경제적인 실력까지도 차지하게 되었다. 따라서 일반 백성들의 피해는 막심하여 크고 작은 농민들에 의한 민란이 각지에서 일어난다.(공주 명학소의 망이망소이난, 최충헌의 종 만적의 난 등 무신집권기 국가 및 사회기강이 무너지고 각지에서 권력자들의 수탈은 광범한 농민봉기로 이어졌다.) 따라서 최충헌 동생 충수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고 집권 명분으로 1196년(명종 26) 봉사십조(封事十條)를 올려 폐정을 개혁하고 왕의 반성을 촉구하였다.

 

  봉사십조의 내용은 이러하다.

① 구기(拘忌)의 설을 믿어 새로 짓고 사용하기를 꺼리는 궁궐에 입어(入御)할 것

② 용관(冗官 : 중요하지 않은 벼슬아치)을 도태시킬 것

③ 대토지 소유자가 겸병한 공사전(公私田)을 문적(文籍)에 비추어 환원할 것

④ 공사(公私) 조부(租賦)의 공정을 기하고 권세가의 민산(民産) 침해를 금할 것

⑤ 왕가의 제도(諸道) 공진(供進 : 임금에게 음식을 바침)을 금할 것

⑥ 승려의 왕궁출입과 왕실의 민간에 대한 고리대업을 금할 것

⑦ 염직(廉直)한 주·군리(州郡吏)를 채용할 것

⑧ 조신(朝臣)들의 사치생활을 금할 것

⑨ 비보사찰(裨補寺刹) 이외의 것을 삭거(削去)할 것

⑩ 성대(省臺)의 기능을 바로잡을 것

 

  봉사십조는 권세가의 대토지 소유 문제를 엄단하고 왕가와 사찰의 폐해와 인사의 공정성 등을 시정하고자 하는 내용으로 당시 폐정을 바로잡으려는 충정이 담겨 있는 것이었으나 최충헌은 권력을 잡고〈봉사10조〉의 내용이 무색할 정도로 탐학과 횡포가 심하였기에 오히려 무신집권기 초기부터 이어진 민란이 줄어들기는 커녕 더 확산되기까지 하였다.(1198년 개성에서 일어난 '만적의 난'은 최충헌의 노비가 일으킨 봉기이다)

  경대승은 앞서 많은 무신집정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신변보호를 위해 도방(都房)을 설치하고 일찍 병사하였다. 따라서 정중부의 수하였던 이의민(李義旼)이 권력을 잡아 그들 이의민 부자들은 왕을 능멸하고 자신이 왕처럼 위세를 부리자 최충헌(崔忠獻)·최충수(崔忠粹) 형제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로써 최씨 무신정권 시대가 도래하였고 바로 강화도 천도는 이 최씨 무신정권의 집정자 최우(崔瑀후에 이怡로 개명)가 단행한 것이다. 이는 당시 동아시아정세의 변화에 따른 것으로 북방의 금나라가 몽골부족을 통합한 칭기스칸이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몽골제국을 세워 우리나라를 침략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몽골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1218년(고종 5)에 몽골군에게 쫓긴 거란의 유민(遺民)들이 고려에 들어오자 이를 뛰따라 온 몽골군과 함께 거란을 물리치면서 몽골과 관계를 가졌다.

  이후 몽골은 거란을 물리친 대가로 고려에 지나친 공물 요구를 하고 특히 고려에 파견된 몽골사신들의 횡포는 도를 넘었다. 때마침 몽골 사신 저고여(著古與)는 돌아가는 길에 영문도 모른채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몽골대군이 고려를 침공하게 되어 이로부터 기나긴(1231년부터 1258년까지 28년) 7차에 걸친 몽골의 침략이 이어지는 고통스런 대몽항쟁이 시작되었다.

  이때 고종은 개성에서 이곳 강화로 천도하고 약 2년에 걸쳐 본궁인 연경궁과 관아를 지어  전부 개성의 궁궐과 관아의 명칭을 쓰고 궁궐뒷산인 북산(강화산성)도 송악산이라 하였다.(원과 강화이후 궁궐과 강화에 축조한 성은 몽골의 요구에 따라 모두 허물었다.)

   7차에 걸친 대몽항쟁은 대체적으로 몽골의 침략적 우세 속에 우리가 방어전(청야수성靑野守城은 '들판을 비우고 성을 지킨다.'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전쟁 전술)을 하였는데 특히 몽골장수 살리타(撒禮塔)가 1차에 이어 2차로 고려에 침입하자 처인성(處仁城 지금의 경기도 용인)에서 김윤후(金允侯) 이끄는 처인부곡의 농민군이 몽골에 대항하면서 김윤후가 적장 살리타를 활로 쏘아 사살하는 등 값진 승리를 얻기도 하였지만 대체적으로 몽골의 침략과 약탈에서 거의 무방비였으며 1254년 6차 침입에서 자랄타이(車羅大)가 이끄는 몽골군이 고려에 침입하여 전국토를 무자비하게 약탈, 방화, 살인을 저지르고 이 때 포로로 잡힌 사람이 20만이 넘었다.

  때문에 우리 백성들이 겪어야할 피해와 시련은 막심하였다. 당시 몽골군에 대한 민심은 "몽고군은 사람의 기름을 짜서 쓴다"라고 할 정도로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특히 싸움시 붙잡은 포로를 몽골기병 앞에 활받이로 세워 전투를 하여 아군은 몽골군에게 활도 제대로 쏘지 못할 정도로 야비하고 잔인하게 전투를 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처럼 몽골의 침략은 재앙이었으며 따라서 1차 침입에 이어 본격적인 몽골의 침략이 우려되는 가운데 최충헌을 이어 당시 무신집정(武臣執政)이던 최우(최충헌의 아들)는 몽골군이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못한 것을 이용하여 1232년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각지의 주민들을 산성과 바닷가와 섬(海島해도)에 들어가 보호시키는(入保입보) 등 몽골에 대한 항전한다.

   이와 같은 강화도 천도는 무신정변에 따라 성립된 최씨 무신정권이 자신들의 정권을 보전하는 1차적 목표와 함께 세계제국으로 발돋움 하고 있는 몽골제국에 대한 항전을 위해 단행되었던 사건이다. 이때부터 몽골은 고려 왕과 조정이 강화도를 나와 개성에 환도할 것(출륙환도出陸還都)과 강화를 요구하며 지리한 전쟁이 이어졌다.

  이 시기 강화도에서 최씨 무인집정자 최우는 불심으로 몽골을 극복하고자 하는 염원에서 지금의 해인사에 보관 중인 제조대장경(팔만대장경)을 강화도 선원면 선원사에서 목각하였으며 강화도 천도에 따라 국왕이 머물 고려궁을 현 유수부터에 세우고 강화도를 방어하고자 내성, 외성을 쌓았다. 특히 육지에 접해있는 강화도 북쪽과 동쪽 해안선을 따라 토성으로 강화외성을 수축하였으며 강화도 주변의 간석지를 간척하여 농토로 개간하는 등 강화도를 정치, 군사, 경제의 중심지로 탈바꿈 시켰다.    

 

 

 오른쪽 건물이 강화유수부 동헌이고 포장 덮개로 덮힌 곳은 고려궁지, 그 왼쪽은 외규장각이다.

 

  세월의 무심함일까 옛 고려궁의 위엄과 정취는 사라진지 오래고 그 터에 조선의 행궁과 유수부, 그리고 왕실 도서관 격인 외 규장각 등 건물이 지어지며 고려를 이어 조선에서도 여전히 강화도가 중요한 지역으로 주목되었지만 옛 영광은 몇 채의 건물과 그 자리를 오랫동안 지키고 섰던 고목만이 그 흔적으로 남아있다.  

 

 

 

  우리가 강화도 하면 생각나는 것은 외규장각이다. 특히 외 규장각 도서들이 프랑스군대에 의해 약탈되었다는 역사와 프랑스로부터 반환받고자 국민적 운동으로 확대되는 문제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외규장각은 원래 서울 창덕궁에 위치한 왕실도서관으로 강화도에 있는 외규장각은 궁궐에 있는 규장각과 더불어 1781년(정조 5) 3월에 궁궐 외의 지역인 강화도에 설립된 것을 말한다.

  정조는 외규장각을 강화유수 서호수(徐浩修)에게 명을 내려 강화행궁 동쪽, 장녕전 서쪽 사이에 있던 연초헌(燕超軒)을 헐고 그 자리에 세웠다. 외규장각에 보관된 서책은 1753년 유수 신사(申思)가 객사 동쪽에 내책고(內冊庫 효종 이래 강화부에 둔 책을 보관한 건물이며 1778년에 반고어사反庫御史 심염조는 내책고에 쌓여 있는 물건들을 직접 보고 "선대로부터 전해내려와 봉안하고 있는 용적璿籍, 어필, 어제, 금보金寶, 옥인玉印, 죽책竹冊, 교명敎命, 전장典章의 문자文字, 문부文簿가 너무 많아 가득 넘친다."라고 정조에게 보고 하였다. 정조는 "봉안한 전장 문자가 많은 것이 사각史閣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하니 외규장각이라고 할 만하다"고 찬사를 하였다.)를 세워 보관한 서책과 창덕궁 봉모당에 모셨던 물건, 대비전과 혜경궁, 정조의 책보, 의궤, 옥책 등을 옮겨와 보관하였다. 특히 여러 사고에 흩어져 있던 어제와 어필은 모아서 창덕궁 규장각과 이 외규장각 두 곳으로만 봉안케하므로써 외규장각은 중요한 왕실도서고가 되었다.

 

  외규장각에 비극이 찾아온다. 1866년(병인년) 당시 조선은 서양 선교사의 천주교 전파를 막고자 프랑스 신부를 처형하고 조선이 신도를 박해하는 병인박해가 있었다. 이때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861년 베르뇌 주교 이하 11명의 신부에 속해 입국한 리델 신부(한국 이름은 이복명李福明)가 조선인 신도 11명과 중국으로 도망쳤다. 당시 프랑스 인도차이나 극동함대사령관인 로즈 제독은 상해에 머물고 있었다. 리델은 로즈를 만나 병인박해 소식을 전하고 이 기회에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고자 생각하던 로즈는 리델을 길잡이로 세워 조선으로 출병하였다.   

  처음 이들은 강화도를 지나 한강을 거슬러 양화진까지 진출하였는데 양화진에서 한양 도성까지 4km에 불과하였으니  조선 정부가 느꼈을 위기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로즈 역시 처음 온 조선에서 그 내지를 깊숙히 들어가는 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그 후방에 위치한 강화도를 점령, 조선을 압박하여 통상조약을 맺고자 후퇴한다.

  이때 프랑스 군은 강화읍을 침입하여 양민을 학살하고 방화하였으며 조선의 국립문서고에 해당하는 이 곳 외규장각에 난입하여 의궤를 비롯한 340여 책의 국가문서와 은궤 수천 량을 약탈하고 나머지 책과 외규장각 건물은 불태웠다. 이 때문에 확인되지 않은 많은 책들이 불태워짐으로 우리 역사에서 중요할 사료가 될 여러 소중한 도서들이 완전히 없어지는 불운을 겪게 된 것이다.

  약탈된 도서들과 여러 유물들은 다수가 프랑스 정부에 기증되고 나머지는 로즈 개인의 지인들에게 진귀한 선물로 나눠줬다고 하니 힘없는 백성의 통탄할 한(恨)인 것이다. 

  이후 조선의 문서와 책들은 프랑스의 국가재산으로 편입되고 특히나 우리 학자들이 학술적 연구목적으로 열람하고자 하나 프랑스의 반대로 하지 못하는 프랑스의 납득 못할 처사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때문에 우리의 문화유산인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 받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들은 난항을 겪고 있다. 

  1993년 9월 15일 프랑스 대통령으로는 처음 방한한 미테랑 대통령이 외규장각 도서를 영구임대 형식으로 반환하는 것으로 협상을 처음 시작하였는데 이는 당시 우리 정부가 고속철도 사업을 추진하면서 일본의 신칸센과 프랑스 TGV를 두고 막판 조율 중이었고 프랑스가 낙찰을 위해 꺼내든 마지막 카드가 외규장각 도서였던 것이다. 이때 처음으로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이 김영삼 대통령을 통해 외규장각 약탈한 의궤 중 휘경원원소도감의궤(徽慶園園所都監儀軌) 상권을 처음으로 반환하였다. 하지만 프랑스는 우리와 약조한 대로 이행하지 않고 오늘까지도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본 174종 297건의 우리 도서가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으며 이중에서 30종의 고서는 현재 우리가 보유하지 않은 유일 본으로 그 안타까움이 더욱 크다.  

  또한 현재 프랑스는 문화우월주의를 내세우며 우리보다도 자신들이 우리 문화재를 보다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다는 점과 아울러 우리 문화재를 자신들의 박물관에 보관하면 자연스럽게 우리 문화를 유럽에 널리 알리는 홍보 효과가 있다는 점을 들어 우리에게 반환되는 것을 반대한다고 한다.

  하지만 1975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근무하던 박병선 박사가 베르사이유 '파손도서' 서고에서 중국장서(fonds chinois)로 표기된 것을 찾을 때까지 방치되었었고 그 의궤상태도 임금님이 보시던 어람용으로써 우리의 고운 비단으로 책 표지를 했던 것을 12권만 빼고 나머지는 서양 비단으로 교체되었다.  그 과정에서 표제, 제본 등이 훼손되었으며 쪽수도 뒤엉켰다. 이는 한문을 제대로 구사하는 연구원이 없는 관계로 빚어진 일이며 이렇듯 프랑스는 우리 문화유산을 보존도 관리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 것이다.

  또한 기사진표리진찬의궤(己巳進表裏進饌儀軌) 1권은 1891년 중국서적과 마구 뒤엉킨 의궤를 몰래 한권을 빼내 작물로 대영박물관으로 팔기도 하였다.(현재 영국에서는 동양의 값진 보물로 보관 전시하고 있다. 특히 프랑스와 달리 옛 표제와 표구 등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의 나라에서 우리 문화유산을 대신 홍보한다고 하는데 이는 우리 의궤가 갖는 성격을 제대로 모르는 어리석은 이야기로 우리 의궤는 그 가치는 현재 국내의 분상용(동일한 의궤를 제작하여 여러 사고에 보관하는 본)과 달리 어람용으로 임금만이 볼 수 있는 작품으로 그 자체의 가치도 높을 뿐 아니라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왕조의 존엄성과 함께 그 하나가 조선의 제도 등  많은 문화적 연구의 기초 자료로써 단순히 관람 문화재와 다른 우리 역사연구의 열쇠이다.

  그들의 이와 같은 지나친 처사는 바로 그들 스스로 문화국이라는 자부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고 과거 침략적 행태를 반성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을 주장하는 문화제국주의의 단면이자 자문화 우월주의에 도취된 것이다.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도덕성을 무너뜨리고 있는 프랑스의 작태가 한심할 따름이다. 병인양요 당시 종군하였던 화가이자 장교였던 앙리 주베르("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또 한가지는 아무리 가난한 집에라도 언제든지 책이 있다는 것이다"라고한 감탄한 장본인)는 당시 우리는 약탈자에 불과했다는 자기 반성을 한 사실과 대조적으로 현재 프랑스 최고의 지성들이 우리 문화재 반환을 반대하며 아직도 약탈자에 머물고 있는 모습이 안까울 따름이다.(그러나 최근 몇몇 지식인들이 우리의 요구에 자체적 조직을 만들어 여론 환기를 하고 있어 다행이다.) 

  최근 G20 서울회의에서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5년간 영구임대와 무기한 갱신으로 의궤를 반환 하기로 하여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직도 프랑스내 반환에 대한 반대여론이 있고 그 방식도 영구임대라는 형식이라는 사실이 씁쓸하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7대학 이진명 교수가 찾아낸 '천하여지도'(프랑스는 중국지도로 분류 보관하였는데 이진명 교수가 로즈제독의 약탈문화재 목록을 입수하여 연구한 결과 병인양요 당시 외규장각에서 약탈된 문화재로 확인되었다.)와 갑옷, 천문도, 옥책, 은괴 등등 의궤말고도 우리가 반환을 요구하고 받아내야 하는 문화재가 많다.  특히 병인양요 당시 강화 뿐 아닌 김포 통진에서도 약탈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우리 문화재의 약탈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프랑스내 양심있는 학자들과 연대하고 끊임없이 우리 약탈문화재에 대한 관심으로 가지고 연구하여 우리도 제2, 제3의 박병선 박사와 이진명 교수가 되어 정당한 방법이 아닌 약탈된 우리의 문화유산을 돌려 받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강화부종각(江華府鐘閣)과 강화역사관에 전시 중인 강화동종(江華銅鐘보물 11-8호)

 

   

  일반적으로 동종하면 사찰에 있는 범종을 떠올린다. 하지만 우리나라 서울 한양의 사대문을 비롯한 각 성,읍에는 종각을 마련하고 사대문(四大門동서남북으로 낸 성문)을 열고 닫는 시간을 알리는 역할을 동종이 하였다.  따라서 이곳 강화부도 강화읍성 남문 동쪽에 종각을 마련하고 강화동종을 타종하여 사대문을 열고 닫을 때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은 강화동종도 약탈하여 배에 싣으려고 했으나 싣지 못하고 갑곶리 토끼다리 근처에 버려두고 떠났다.

  현재 강화동종은 김상용순의비자리에 있던 것을 1977년 강화중요국방유적복원정화사업에 따라 강화부종각은 강화유수부 이방청 건물 뒤편으로 옮겨왔다. 1995년 1월에 종의 균열이 생겨 타종이 중지되었고 현재는 원래 모습으로 복원한 종을 종각에 걸고 균열된 진품 강화동종은 강화역사관으로 옮겨와 보관 전시하고 있다.

 

  강화동종은 조선시대 1688년(숙종 14년) 강화유수 윤지완이 주소한 것을 1711년(숙종 37년) 강화유수 민진원이 부임하여 정족산성에서 다시금 녹여 만든 것으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동종이다.

  이 종은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 사인비구에 의해 만들어졌던 사인비구주성동종 8개 중 하나로 전통적인 신라동종의 제조기법에 각기 독창적인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강화동종의 특징으로는 꼭대기(용뉴=고리역할을 하는 부분)에 두 마리 용이 몸을 얽힌채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고 종의 몸통 가운데는 두 줄의 도두라짐이 띠로 위는 가늘고 아래는 좀 더 굵은 형태로 구분되어 있다. 그리고 전통적인 종 용뉴에 보이는 음관(음통)이  없고  맨 아래에 넓은 꽃무늬 띠를 돌린 것이 것이 특징이다.

  한편 중량 2,490kg, 두께가 15cm에 높이가 198cm로 입지름만 해도 138cm라서 조선 후기 동종으로는 매우 큰 편이다.

 

  

 강화유수부 이방청 건물

 

   

  강화유수부이방청(江華留守府吏房廳)은 강화유수부 안에  이방·호방·예방·병방·형방·공방 6방의 건물 중 이방에 해당하는 이방청으로 조선 중기의 관청 건물이다. 조선 효종 5년(1654)에 유수 정세규가 세웠고, 정조 7년(1783)에 유수 김노진이 건물 내부를 고쳐 괘홀당이라고 불렀다. 

  강화이방청의 건물의 특징은 나무로 된 1층의 기와집으로 ㄷ자형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여러 차례 고쳐서 옛날 관청의 모습을 잘 알 수는 없으며 조선시대 지방의 이방청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방은 당시 이서=아전들 중에서 우두머리로 수리(首吏)라고도 했는데 강화유수부를 통해 이방청의 규모가 15칸의 큰 규모의 청사로서 당시 이방의 권위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특히 조선 후기 수령권의 강화와 함께 실무를 모르는 수령을 대신해서 실무에 능한 이서들의 횡포가 극에 달했고 그중 이방은 공방, 형방과 함께 삼통이라 불리며 진주민란 등 조선후기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날 때 민중의 공격대상이 되었을 만큼 그 위세가 대단하였다.

  흔히 사극이나 소설 춘향전 등에 보면 사또 옆에 서서 "예 사또", "나오랍신다" 등등 살살 거리는 말투와 가는 수염이 난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이방이 당시 위세가 높아 그 횡포가 민간에 대단하여 민중은 문학작품과 이야기에서 이방을 풍자 한 것이다. 우리 속담에 '호랑이 없는 숲에 여우가 왕노릇 한다"라고 한 것처럼 수령에 붙어서 민중을 힘들게 했던 이방은 민중에게는 고달픔이었고 풍자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방청을 둘러보고 유수부의 정문 승평문을 지나  나왔다.

 

 

  멀리 오래된 고목 느티나무와 외규장각이 보인다. 숱한 일들과 시간 속에서 그 자리를 지켰을 느티나무와 이제는 옛모습을 잃고 쓸쓸히 서있는 외규장각 건물이 지나간 영광의 시간이 오래였음을 말하는 듯 싶다.

 

 

  강화유수부를 나와 왼쪽 산 위로 난 도로를 따라 오르면 강화산성의 북문인 진송루(鎭松樓)가 나온다.  이 강화산성은 1232(고종 19년) 고려 때 최씨무신정권의 수장 최우는 정권의 보위와 대몽항쟁을 위해 수전에 약한 몽골군을 피해 강화천도를 단행하였다. 이때 흙으로 토성을 쌓았다.

  강화천도는 왕과 조정이 옮겨온 것으로 고려시대 전통 도성의 형태로 내성을 쌓고 육지와 접한 해안에 외성을 수축하였다. 지금 남아있는 강화산성의 자리는 이 때 쌓은 고려 내성자리이다. 몽골과 화의를 하고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고려가 쌓은 강화의 성은 모두 헐리고 터만 남았는데 조선 초 토성으로 쌓았다가 다시금 1637년(인조 15년)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에 의해 모두 파괴되었던 것을 1652년(효종 3년)에 일부를 개축하고 숙종 때 강화유수 허질이 성벽을 석축으로 쌓으면서 1711년(숙종 37년)에 강화유수 민진원이 34년 만에 강화산성을 완성하였다.

   강화산성의 규모는 둘레가 1947m이고 치첩이 1813개소, 4대문(동문=망한루, 서문=첨화루, 남문=안파루)과 4소문, 수문 2기,성곽 9기, 성문장청 4기 등으로 완성되었다.  당시 북문에 지금처럼 누각이 없었으나 1783년(정조 7년) 강화유수 김노진이 누각을 세워 진송루라하였고 이후 파괴되어 석축만 남아있던 것을 1976년 강화중요국방유적지복원정화사업으로 복원되었다.

  강화도가 국방유적이라하여서 주목된 것은 군부독재시절 박정희 대통령이 군부정권의 이미지를 바꾸고 당시 주력해야는 경제개발 등 국가시책에 있어서 국민정신을 무장시킬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역사 교육이 강조되어 국사라는 과목이 국정으로  독립하였고 1973년 제3차교육과정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이러한 정치상황에 따라서 애국심을 강조하며 호국정신 및 국난극복의 역사로써 강화도가 주목되었다.

  

  

  진송루의 모습과 누각 안의 대청을 깔은 모습이다. 아울러 진송루 양옆으로 이어진 성벽 안쪽 길로 낮은 여장이 아담하게 둘러있다. 여장의 높이가 상당히 낮은데 이는 주변 경관을 볼 수 있도록 관광객 눈높이로 복원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장은 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몸을 숨기고 여장과 여장 사이의 타구를 이용하여 밖의 적병의 동태를 살피며 총안과 타구 사이로 활과 총을 쏘며 방어하는 성곽의 중요한 방어시설이다. 그럼에도 외관상 조망권 때문에 실제적인 여장의 기능을 무시한채 복원된 점이 역사를 공부한 사람으로 아쉬움을 넘어 성곽 본연의 가치를 무시한 것이 되어 못내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강화산성 진송루의 홍예문(무지개 모양으로 둥근 문)을 나와 진송루를 바깥에서 바라보았다.

 

  

  양 옆의 성벽이 산세에 어울려 능선을 밟아 뻗은 모습이 용이 마치 구름을 헤치고 지나가듯한 신비한 풍광을 이룬다. 거기에 성벽을 이루는 크고 작은 돌들의 굴곡진 이음새는 마치 용의 비늘(용린龍鱗)처럼 보이니 더욱 그 모습이 기묘하고 장관이다. 

 

  강화산성이 헐리던 당시 최씨 무신정권은 최우의 서자이자 승려로 있던 최항이 집권하였다가 죽고 그를 이어 또한 송서의 여종을 통해 본 최의를 끝으로 최충헌에서 시작된 4대 60여년 간의 최씨 무신정권은 무너졌다. 최의를 제거한 김준(김인준)은 최충헌의 가내노비인 김윤성의 아들로 최의의 총애를 잃자 병사를 일으켰으며 대몽정책이 새로 등극한 원종의 강화입장과 달리 강경노선을 추구하면서 원종을 살해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원종은 임연과 임유무 부자를 시켜 김준을 살해하였다. 이후 임유무 역시 대몽강경책으로 원종과 대립하면서 살해당하고 1270년 원종이 칸계승을 두고 내전을 치루던 쿠빌라이를 만나 쿠빌라이 칸이 등극하고 따라서 고려와 몽골은 강화를 맺었다.

  강화의 내용은 제후국으로 굴욕적이었으나 고려의 토풍(고유의 풍속)을 지키고 왕실을 보전하는 등 당시 몽골제국이 다른 민족과 나라에게 보였던 방식과 다르게 고려의 독자성을 지켜주게 된다. 이는 단순히 몽골이 편의를 봐준 것이기도 했지만 40여년 간 이어졌던 고려의 대몽항쟁이 없었더라면 있을 수 없던 일인 것이다. 

  따라서 원종은 귀국 후 출륙환도를 단행하여 개경으로 환도하고 강화도의 무신정권의 군대였던 삼별초를 해산하고자 하였다. 이에 삼별초는 배중손 등이 중심이 되어 승화후 온을 추대하여 대몽항쟁에 나선다.

  삼별초(三別抄)는 최씨 정권 때 최우가 도둑이 들끓자 병사를 모아 매일 밤에 순찰 하고 단속하게 하여 그들을 야별초(夜別抄)라고 하였다. 그러나 도둑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야별초도 늘게되자 이들을 나누어 좌별초와 우별초라 하고 또한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도망온 자들로써 편성된 신의군(神義軍)을 합쳐 삼별초라 하였다.

  삼별초의 시작은 야별초였으나 우리가 아는 완전한 형태의 삼별초로의 정립은 최씨정권 말기의 모습이며 이들 삼별초는 이 때부터 무신집정자들의 주요한 무력적 기반이되었다. 특히 그들이 무신정권의 보호로 우대되었다. 또한 이들이 대몽항쟁에 본격적으로 나선 이유는 무신집정자들이 몽골과 강화를 반대하고 강화를 나섰던 왕과 대립하며 몰락하자 신변의 위험이 빚어졌고 신의군처럼 몽골에 포로였던 사람들은 몽골에 대한 적개심이 높았기 때문에 대몽강화 이후에 삼별초가 주도로 대몽항쟁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진도로 옮긴 삼별초는 용장사를 행궁으로 삼고 용장산성을 개축하여 장기항전에 들어갔으나 고려와 원(몽골제국 제 4 대 쿠빌라이 칸은 중원을 차지하고 나라를 원元이라 고치고 칸을 황제로 고쳐 스스로 등극하였다.)의 여원 연합군은 원종 12년(1271) 5월 1일, 고려 장수 김방경과 원 장수 홍다구(남양 홍씨 중흥조)를 지휘관으로 하여 병선 400여척과 군사 1만명을 이끌고 10여일 동안 싸움으로 승화후 온은 죽임을 당했고 배중손도 섬 남쪽 남도포의 남도석성에서 전사했으며 동쪽의 금갑진으로 퇴각했던 김통정은 남은 군사를 이끌고 제주도로 건너갔다.

  진도 정부가 무너진 후, 1만여명의 남녀가 포로로 잡혀갔으며  제주도로 옮겨간 김통정 휘하의 삼별초도 자주 본토의 전라도와 경상도를 공격 하는등 고려 정부를 압박하며 2년 가량을 버텼으나 원종 13년(1273) 2월에 여원 연합군에게 진압되었다. 이후 일부가 유구 즉 지금의 오키나와로 이주하여 오키나와가 문명화 되는데 기여하였다(오키나와에서 처음으로 지어진 성곽과 건물에 쓰인 기와에서 고려장인이 만들었다는 명문기와가 다량 출토되었는데 그 시기가 대체로 제주도에서 삼별초가 진압된 시기와 비슷하다.)

  이러한 삼별초의 항쟁은 3년 가까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뛰어난 군대이기도 했지만 남도 각처의 민심이 이미 외적과 결탁하여 자기들을 쥐어짜는 고려정부를 떠나 삼별초에 호응하였기 때문이다. 삼별초가 진압된 후 고려 왕실은 완전히 원(몽골)의 종속되어 고려 왕들은 원나라에 가서 청소년기를 보내다가 원의 공주에게 장가 든 후 고려로 와서 왕이 되었고 왕족과 고관들 사이에서는 몽골식 옷차림(호복)과 변발 등 몽골풍속이 유행하였으며 1352년 공민왕의 반원정책이 실시되기 전까지 80여년 간 원간섭기로 보내게 되었다.

 

 

 

  강화산성 북문에서 내려와 강화유수부를 지나 내려오다 보면 성공회 강화성당을 들어가는 입구에 선원김선생순의비(仙源金先生殉義碑)가 있다.(강화읍 관청리) 선원 김선생은 김상용이다. 김상용은 본관이 안동, 자는 경택, 호는 선원, 풍계, 계옹이며 서울 출신이다. 돈령부 도정 김극효의 아들이고 척화파(화의를 말고 청과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 대신 김상헌의 형이다.

  1636년 누르하치가 세운 후금은 새로 등극한 태종이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치고 조선을 침략하였다.(병자호란 인조 14) 이때 선원 김상용은 나이가 많아 벼슬에 물러나 원임대신이 되어 강화도에 세자비와 원손(세자의 장자)을 모시고 피난을 왔다. 청 장수 용골대는 강화도를 점령하고자 문수산성에서 갑곶을 둘러보고 방비가 허술한 틈을 이용하여 민가를 부숴 뗏목을 만들어 강화를 공격하였다.

  이때 황성신 등이 잘 싸웠으나 수비대장 김경징과 부장 이민구는 "제놈 군사가 날아서 이 강을 건너겠느냐"며 술을 마시고 놀기만 일삼다 청나라 군대가 강화해협 염하를 건너자 모두 달아나고 강화도는 함락되었다. 따라서 김상용은 청에 맞서 싸움을 독려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배를 마련하였으니 대피하소서"라고 사람들이 말하자 "전하께서 적에게 포위 당해 계시어 안후를 알 수 없고 종묘사직과 원손께서 모두 여기 계시니 만약 불행한 일이 있으면 죽을 뿐이오"라고 하면서", "오랑랑캐의 포로가 되어 구차한 삶을 사느니 깨끗한 죽음을 택한다"면서 종자(어린 시종)와 서손(서자 손자) 김수전 등과 함께 강화 남문 위에 화약을 쌓아 놓고 담뱃대에 불을 붙여 순절하였다.

  아울러 문응규, 이일영, 이일노, 강위빙 등 문신들과 의병들, 그리고 부녀자들까지 김상용을 따라 죽는 이들이 많았다.

  김상용의 충절과 의기는 이후 깊이 숭앙되어 비각 우측 구비는 1700년(숙종26)에 증손자 김창집이 강화유수로 부임하면서 건립한 것이고 좌측 신비는 순조 때 강화유수로 부임한 7대손 김매순이 강화남문에 세웠다. 현재처럼 구비(舊碑)와 신비(新碑)가 원래 한 자리에 있던 것은 아니고 1976년 강화중요국방유적복원사업 때 구비가 발견되어 지금처럼 비각 안에 나란히 세웠다.

  또한 김상용과 김상헌은 신안동 김씨로 흔히 안동김씨 세도가로 알려진 일명 장동 김씨의 선조이다. 장동은 김상헌이 살던 경복궁 북쪽 한옥마을 장동을 말하는 것으로 대대로 이곳에서 살면서 이들 가문을 장동 김씨라 불렀다. 특히 정조 대 김조순이 정조에 발탁되어 초계문신을 지내고 정조의 아들 순조를 부탁 받으면서 그의 딸을 왕비로 들이니 그로부터 순조, 헌종, 철종 3대 60년 동안 권세를 누리는 세도가가 되었다. 당시 장동 김씨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할 정도로 그 권세가 하늘을 찔렀고 실제로 조선 후기 국가 중요회의를 전담하고 명실상부 최고 합좌기구가 되는 비변사에 당상(비변사에 합좌할 수 있는 당상관)에 무려 15%를 차지 할 정도로 장동 김씨의 권력독점은 대단하였다.  

  아울러 반남 박씨 달성 서씨 등 일부 가문과 폐쇄적인 통혼을 통해 더욱 그 권력을 공고히 하였고 이들의 권력 독점은 결국 조선 사회과 사회 정화 능력과 정치 기강의 혼란, 거기에 매관매직을 일삼아 조정에 출사하는 벼슬아치들이 너도 나도 돈을 바쳐 벼슬을 사고 그 결과 지방관이 된 벼슬아치들이 백성을 수탈하여 일명 삼정(조선 후기 조세로 토지세인 전정과 춘궁기에 꿔주는 환곡, 군적에 올라 군포를 내는 군정을 이른다)의 문란이 극에 달했다.

  결국 1862년 진주에서 시작된 농민봉기가 전국적으로 이어지며 조정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결국 장동 김씨의 묵인과 헌종의 모후 조대비의 결탁된 흥선대원군의 등장으로 이 혼란은 무마되고 장동 김씨의 세도도 끝난다.

  김구 선생도 안동 김씨라고 알려졌는데 그 선조는 김자점으로 장동 김씨와는 다른 일명 구안동 김씨이다.

  

 

  강화도가 세월의 모진 풍파 속에서 잦은 외침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문화교류 측면에서 본다면 이곳은 외국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이는데 선구자와 같은 곳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면에서 본다면 현재 성공회 강화성당은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성공회는 원래 크리스트교의 한 종파로 16세기 유럽 영국에서 추진된 구교인 가톨릭을 반대하며 신교인 영국 국교회이다. 당시 영국왕 헨리 8세가 교황을 반대하고 수장령(교회의 수장을 교황이 아닌 영국왕이라 법률로 선포)을 발표하며 영국 교회를 교황에서 분리하였고 이후 그의 딸 엘리자베스 1세 때 정식으로 성립한 교회이다. 이후 세계 각지에 선교하며 성공회로 확대되었고 명목상 영국 캔터버리 대주교가 수장이다.

  대한성공회는 1889년 영국해군 군종신부인 코프(Corfe,C.J. 한국명 고요한)가 초대 한국 주교로 서품을 받아 한국 선교를 시작하는데 우리 나라 사람으로 성공회를 믿는 신도는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특히 1892년 12월 고종은 영국총영사를 통해 영국이 해군 교관 을 파견해줄 것을 요청하여 최초로 근대적 해군학교인 통제영학당을  강화읍 갑곶리에 세웠다. 따라서 영국정부는 군사교관 대위 콜웰(W. H. Callwell)과 조교로 하사 커티스(J. W. Curtis)를 파견하였다. 

  당시 성공회 한국 선교 책임자로 처음 부임하였던 코프 주교는 이들 영국해군 아동기금으로부터 선교자금을 지원 받아 활동하였으며 통제영학당의 교관이었던 콜웰 대위는 군종신부로도 활동하면서 강화도 성공회 회당(위 사진)에서 생도들을 대상으로 영어 및 서양문화를 교육하였다. 이로써 강화도에서 성공회는 본격적으로 선교를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896년 6월 13일 강화도에서 처음으로 우리 나라 사람에게 세례가 주어졌고 1900년(광무 4) 코프 주교는 이곳 강화에 제일 먼저 강화성당을 건립하였다.(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1호)  대한성공회의 성당으로도 가장 오래되었고 현존하는 한옥 교회로도 가장 오래되었다.

  강화성당의 양식은 서유럽의 바실리카(Basilica)양식과 동양의 불교사찰양식을 합하여 지어졌다. 따라서 교회의 내부는 바실리카양식을 따라 전형적인 교회의 직사각형의 예배당 형식으로 정면 4칸, 측면 10칸의 바실리카식 평면구성으로 지었으며 외관과 마찬가지로 우리 전통 목조 건물인 한옥의 특성을 살려 예배당을 꾸몄다.

  강화성당은 외부에서 보면 마치 불교사찰과 같아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런 곳에도 절이 있네"라고 할 정도로 이색적이다. 또한 강화성당을 짓는데 사용한 목재는 백두산 산림의 나무를 벌채하여 압록강으로 운반해다가 사용하였고 경복궁 공사에 참여했던 대궐 목장(조선시대 관아에 속해 나무를 다루던 사람)이 건축을 맡았으니 강화성당에 깃든 한국적 정서와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 오기위해 노력한 성공회의 초기 모습이 정감있다. 또한 백두산에서 가져온 목재를 사용해 지은 만큼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더욱 크다. 

 

 

 

  강화성당 건축의 특징은 경사지의 구릉 위에 지어졌고 높은 입구 계단을 올라 팔작지붕으로 된 솟을 대문인 외삼문으로 들어가  내삼문을 지나면 성당 주건물에 이르게 된다. 동남향으로 사제관을 배치하여  불교사찰의 구릉지가람(丘陵地伽藍)과 비슷하다. 또한 성당 앞마당에는 큰 보리수나무 두 그루와 은행나무가 서 있어서 절을 특징과 서원의 특징 등 여러 복합적인 요소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전체적인 모습이 마치 사찰과 비슷하나 지붕 위 십자가를 세우고 지붕 처마 아래 나무기둥 단면에는 단청으로 십자문양을 하고 우리의 태극무늬도 하면서 교회의 상징을 섬세하고 세밀하게 표현함과 아울러 우리의 문화와 조화를 추구하였다. 

 

 

   이는 예배당 건물에도 역시 반영되어 우리 전통 건물 양식에 따라 '천주성전'이라는 편액을 걸었으며 순수한 한식목조건축이면서도 교회기능에 충실한 내부공간 만들었다. 이와 같은 노력은 초기 성공회 선교사들이 다른종파의 선교사들이 서양문화와 교회를 내세워 우리의 전통문화를 홀대한 사실에서 보면 우리 문화를 존중하며 토착화 하려는 의지가 나타나 있는 문화존중에 따른 바람직한 한국기독교 교류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내삼문 안쪽 서쪽편에 마치 범종을 모방한듯한 종을 설치하였다. 종에도 기독교적 문양인 십자 모양을 남기고 있어 당시 성공회 선교사들의 세심한 배려가 눈길을 끈다.

 

 

   교회 종으로 쓰인 우리나라 전통 종 모양에 십자가를 양각형태로 표현한 것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