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8월 화성청우회 역사탐험대 경주 나들이 2

달이선생 2009. 8. 19. 20:11

 

 

  대릉원 후문부터 걸어서 월성(月城)으로 이동하였다. 서남쪽 문지(성문자리)를 통해 월성에 들어갈 수 있었다. 월성은 조선시대 이후 반달 모양이라 하여 반월성(半月城)을 불리기도 하며 신라시대에는 임금이 산다하여 재성(在城)이라고 하였다. 월성에 관련한 설화로 석탈해가 꾀를 내어 월성을 호공에게서 빼앗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초기 월성은 101년 파사이사금이 경주 동남쪽 성을 쌓아 그 길이 무려 1,023보에 달했으며 재성(在城)이라고 하였다. 이후 475년 자비마립간에서 소지마립간 시기인 487년을 제외하고 줄곧 신라의 궁궐이었으며 초기 도성으로 출발한 월성은 점차 국가 규모가 커지면서 궁성으로서 면모를 갖추었다. 따라서 월성 앞 뜰에는 월성에 위치했던 많은 관청이 이전하고 월성 안에는 많은 궁궐이 지어졌을 것이다.

  현재는 신라와 관련이 없는 1741년 조선 영조 때 축조한 석빙고가 남아있고 드문드문 정리 안된 건물터가 보인다.

 

 

  현재 월성의 성곽은 거의 허물어져 그 석축 잔해인 돌무더기만 즐비하여 예전 성곽의 모양을 알기 어렵다.

성곽은 원래 내성과 외성을 통틀어 이르는 말인데 일반적으로 성벽을 말한다. 월성은 평지에 위치한 도읍의 역할을 한 도성이자 왕이 거처한 궁성이다.

 

 

  신라의 수도 금성에서 아주 중요한 시설이었던 월성은 그 방어면에서 취약하였다. 따라서 성을 방어하고자 월성밖으로 폭 3~4m의 해자를 파서 물을 채워 성을 방어하였다. 통일기에 들어가면 수도 경주가 커지면서 인구가 늘고 거주지가 늘어나면서 해자가 축소되거나 파괴되었다.

  선덕여왕 때 월성과 관련한 일화로는 비담의 난이 있다.

  647년 1월 비담과 염종은 "여자가 왕이 되어서 정치가 문란하다."는 당태종의 말에 동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비담은 드라마에서는 미실의 아들로 나오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당시 645년에 상대등에 임명되어 신라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진골귀족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상대등 비담의 반란은 여성왕에 불만이 많던 여러 귀족들의 호응에 힙입어 명활성에 본부를 두고 그 기세가 등등하였다. 선덕여왕은 당황하여 어찌할바를 몰랐는데 이 때 김유신과 김춘추가 월성에 지휘본부를 꾸리고 비담과 대치하였다. 10일간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지만 서로 결판이 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한 밤 중에 월성으로 유성이 떨어졌다. 드라마에서 보듯 별자리와 별의 움직임은 왕의 행적과 매우 밀접함으로 별이 월성으로 떨어진 것은 월성의 명운이 다했다는 것이고 따라서 선덕여왕이 폐위되어 죽는 것을 의미하였다. 때문에 경주의 민심은 곧 비담에게 유리해지고 월성을 지키던 군사들은 사기가 떨어졌다.

  이와 같이 위급한 순간 지혜를 낸 사람이 바로 신라의 대장군이자 명장군인 김유신이다.

  김유신은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끌어안게 하고 밤중에 그것을 연에 매달아 줄을 당겨 다시금 하늘로 날려보냈다. 그리고는 심복들을 이용하여 경주 시내에 나가 "월성에 떨어진 별이 다시 승천하였다. 이는 반란군이 지는 징조이다."라고 소문을 내게 하였다. 아울러 백마를 잡아 신성한 제사를 올리고 장졸들을 격려하여 사기를 올린 후 반란군을 공격하였다.

  이는 적중하여 비담이 지키는 명활성에 사기가 떨어져  비담과 염종은 도망가다 잡혀 죽임을 당하고 무려 9족이 멸하는 극형을 당했다. 만약 이때 비담이 이겼다면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상대등 비담의 난이 여파가 컸던지 그 심리적 불안과 급박함을 이기지 못한 선덕여왕은 재위 16년만에 승하하였다. 그리고 김유신 및 김춘추 세력은 이를 통해 확고히 신라 정계와 군사를 장악하여 김춘추가 태종무열왕에 즉위하는 토대가 되었다.  

 

 

  영조 때 축조한 석빙고는 돌로 만든 창고 시설로 겨우내 언 얼음을 가져와 짚과 겨를 덮어 보냉하여 한 여름에 얼음을 사용하고자 만든 얼음창고이다. 경주 월성내 석빙고는 한 때 신라 중대 이후 만들어진 돌방무덤으로 알려졌었는데 빙고 아래 이맛돌에 기록과 모양으로 석빙고 임이 밝혀졌다. 경주부윤 조명겸이 축조했다.

 

  석빙고는 월성 둑을 자라 흙을 파내고 그곳에 돌로 둥그런 천장으로 축조하고 환기구을 천장에 3개나 뚫었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것 중에 제일 보존 상태가 좋다.

 

 

   안압지는 기러기와 오리가 노니는 곳이라 데서 유래한 말로 신라가 망하고 월지(月池)가 폐허가 되어 그냥 한적한 연못이 되어서 이를 조선시대 이후 일컬른 말이다. 이러한 안압지는 931년 신라 마지막 경순왕이 왕건을 위해 임해전에서 잔치를 베풀었다는 것에서 임해전지라고도 불린다.

  674년 문무왕이 궁안에 못을 파고 화초를 길렀다는 기록으로 통일기 별궁으로 각종 연회와 귀빈의 접대 장소로 사용된 시설로 파악된다.

  못에는 비단잉어 떼가 노닐고 수면 위로 단아하고 청초한 희 수련이 꽃을 피어 빼어난 경치를 이룬다.

 

  

  임해전지는 백제의 궁남지, 조선시대 경복궁의 경회루와 창덕궁의 비원 등 신라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원지(苑池연못정원)이다. 1975년 임해전지에 대한 정확한 규모와 시설을 파악하고자 발굴을 하여 현재에 이르렀으며 특히 요즘에도 즐기기 무난한 주사위 놀음인 주령구가 발견되어 당시인들의 풍류를 짐작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연못에서 한가로이 노닐던 배와 노, 실생활에 사용됐을 도구 및 토기들이 다량 발굴되어 당시의 생활모습을 추정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안압지 출토 유물은 현재 경주박물관 특별 전시실에서 확인 할 수있다.

 

 

  안압지에서 토요일마다 공연이 이루어지고 있다. 항상 아이들에게 관람질서 및 문화재를 사랑하고 보호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안압지에 와서 경주 시청 관계자들이 임해전지 초석 위에 버젓이 공연시설을 설치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말이 안나왔다.

  더욱이 경주는 일본인 등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각국의 외국인들이 찾는 유적지인데 그 유적을 보호하고 보존하는데 앞장서는 것이 아닌 행사장으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 부끄러웠고 화가 났다.

  참여정부 시절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서울 덕수궁에서 외국인 만찬 행사를 가져 논란이 되었었는데 문화재를 보호하고 보존에 적극 나서야 하는 문화재청이 이 모양이니 지방의 경주야 뭐가 문제가 될까...

  문화인이자 지성인이라면 문화 알고 문화를 지키고 향유하는 사람이다. 유적 위에 행사장을 꾸려 노는 것은 문화를 향유하는 것이 아닌 문화적 교양이 없는 추잡한 모습이다.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는 선진국일지는 몰라도 문화적 소양으로 봐서는 후진국을 면하진 못한 단면은 아닐까...

 

 

  경주국립박물관은 현재 우리나라 박물관 100주년 기념으로 무료 관람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전국 어디서나 국립박물관이라면 무료관람을 할 수 있다. 평소 더운 여름, 따분한 일상이라고 방에서 뒹굴뒹굴 한다면 근처에 가까운 박물관을 찾아보자 더위도 피하고 문화적 소양도 쌓고 일석이조다. 이런 것이 생활의 지혜!!

 

 

  경주 박물관의 상징이자 신라하면 생각나는 유물 중 단연 으뜸은 바로 성덕대왕신종이다. 다른 이름으로 에밀레종이다. 종을 만들어도 만들어도 소리가 나지 않자 아이를 시주 받아 쇳물에 넣으니 소리가 났다라는 에밀레종의 설화가 전해질 만큼 그 종소리가 은은하면서도 신비하여 한국의 소리를 대표하는 최고의 종소리로 찬사를 받는다. 또한 그 규모도 단연 최대로 실제로 타종이 이루어지고 소리가 나는 종으로는 세계 최대이다.  

  세계에서 제일 큰종은 모스크바의 '짜르 대종'(111톤)이 있으나 완성 직후 깨졌으며 노틀담의 종(8톤)과 동양의 북경 대종사에 '영락대종'(53톤) 등이 있지만 조형과 미, 소리에서 성덕대왕신종이 최고이다. 또한 그 무게는 18900kg 무려 18.9톤에 이르는 거대한 종이다.(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고 우리나라의 명종으로 꼽히는 또 다른 종은 상원사 동종이 있다.)

  성덕대왕신종이라는 이름은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 제3권 탑상 八 '황룡사 종, 분황사 약사, 봉덕사 종'편에 전하며 경덕왕이 황동 12만근을 내어 주조시켜 아들 혜공왕이 완성하여 봉덕사에 봉인되었고 그 이름은 성덕대왕의 복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으로 '성덕대왕신종지명'이라 하여 여기서 유래한다.

  성덕대왕신종은 위에서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 성덕왕의 복을 기리며 발원(만들기 시작)하고 그 아들 혜공왕이 완성(771년)하였다. 신라 왕실의 원찰 경주 봉덕사 진납하였고 이후 영류사에 옮겼다가 사찰에 화재가 나자 경주 남문 밖 봉황대로 옮겨졌으며 이때부터 불가의 범종에서 경주 성문을 여닫는 관종으로 바뀌었고 1915년 경주 문화원으로 옮겨 1975년 경주박물관이 건립되면서 지금의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이와 같은 우리나라 종의 모양은 외형적으로 중국, 일본과 비슷하지만  그 특색은 우리가 뛰어나며 과학적이다. 특히 음색을 좋게 하기 위해 종의 상단(종정)에 만들 용통(음통), 그리고 종소리의 파장이 은은하게 멀리 울릴 수 있도록 바닥을 움푹 패어놓은 시설은 우리나라만의 특색이자 과학적인 원리라고 한다. 또한 그 표면에 당좌와 여러 무늬, 그리고 단연 비천상의 아름다움은 성덕대왕신종 만이 가지는 최고의 아름다움이다.

  또한 이 음통의 모양은 용이 대나무를 받들고 있는 모양으로 이는 통일신라의 태평성대를 염원하는 바람인 만파식적의 설화(아랫글 이견대를 참조) 를 표현한 것으로 성덕대왕신종이 가지는 의미가 단순한 범종의 의미를 넘어 신라 태평의 기원을 상징하는 신라의 대표 종이다.

  "신과 사람의 뜻이 모여 진기한 종이 만들어졌으니 신령스런 용이 우는 것과 같았다. 보는 자는 기이하다 할 것이고 듣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다." 라고 전해질 정도로  은은하면서도 장중하고 신비한 성덕대왕신종소리를 들으려면 박물관에 들어가 종각에서 매시 정각에 직접 타종이 아닌 스피커를 통해 들을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성덕왕을 위해 그 아들 경덕왕이 만들기 시작해 그 완성을 못보고 죽자 아들 혜공왕이 완성한 신종은  경덕왕부터 혜공왕에 이르기까지 왕들의 효심과 정성을 엿볼 수 있는 수작이다.

  혜공왕은 진골인 태종무열왕에서 시작된 왕계의 마지막을 이룬 왕으로 태종무열왕계의 마지막 왕이다. 무열왕의 손자 신문왕 때 강력한 전제왕권을 확립하고 신라 문화의 중흥은 혜공왕 대에 이르러 세력이 커진 여러 진골귀족의 난립과 함께 신라 사회는 혼란기로 접어든다. 특히 혜공왕은 반란이 일어나 그 난리 중에 살해되고 난을 평정한 김양상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선덕왕으로 역사에선 이때부터 신라 하대 즉 신라의 혼란기이자 말기로 평가한다. 이 때부터 신라는 지방에 대한 지배가 약화되고 특히 장보고의 난과 우리나라 최초의 민중 봉기인 원종, 애노의 난 이후로 지방에는 각기 성주, 장군 등을 칭하는 군사세력이 득세하는데 이들을 역사에서는 호족이라 부른다. 신라를 통합하고 후백제를 멸한 고려의 왕건은 개성의 중소 호족이었다. 

  따라서 왕위 혈통은 무열계가 아닌 내물왕계가 이때부터  왕위를 독점했으며 무열왕계는 왕권에서 밀려난다. 특히 이에 반대하며 무진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김헌창의 난이 유명하며 이 난을 계기로 더욱 왕권쟁탈전이 치열해졌다. 이후 끊어졌던 밀양 박씨 혁거세 후손이 왕위에 오르는(신덕왕, 경명왕, 경애왕) 것등 신라 말기의 혼란이 얼마나 복잡하고 치열했는지 알 수 있다.

 

 

 

  첨성대가 선덕여왕의 재능을 상징한다면 진흥왕이 세운 황룡사에 있었던 황룡사9층목탑은  선덕여왕의 불심과 나라를 생각하는 호국의 의지였다.

  당시 신라의 대표적 사찰이었던 황룡사는 그 규모만도 1만 5천평의 대지에 사진에서처럼 건물 지붕 양끝을 장식하는 거대한 치미에서 보듯 그 크기는 우리나라 최고의 사찰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당시 백제에서도 미륵사라는 큰 절을 지었는데 황룡사에 버금 갔다고 전한다.

  황룡사 9층탑을 세우게 된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내우외환으로 정치가 부덕함을 걱정하던 선덕여왕은 중국에서 유학하던 승려 자장을 불러 이 위기를 모면할 방책을 세우게 하였다. 그래서 자장은 여왕에게 9층탑을 세우면 주변국들이 신라에 복속된다고하였다. 이는 불심을 통해 주변국의 침략을 막고 신라가 중심국가로 거듭난다는 호국불교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9층탑의 기원은 각 층마다 각기 왜, 말갈, 당, 백제, 고구려 등 주변국을 상징한다. 

  9층탑을 세우는 것은 지금도 무려 높이 80m가 넘는 탑이라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것이다. 특히 이 기술은 아직 신라에는 없어서 신라는 백제 기술자 아비지를 데려와 목탑을 지었다. (당시 백제는 미륵사를 창건하고 그곳에 거대한 목탑을 세워서 그 위용을 뽐냈다.)

  이 황룡사9층목탑에 관련하여 아비지의 꿈 이야기가 유명하다. 아비지는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꿈에 탑이 완성되면서 백제가 멸망하였다. 이때부터 아비지는 목탑을 짓지 않았다. 이후 꿈속에서 부처님이 나오자 이는다 부처님의 뜻이라 여기며  마음을 고쳐먹고 9층탑을 완성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9층탑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또한 그 결과로 세워진 웅장한 탑은 많은 사람들에게 자부심이 되었고 신라의 국력이 신장되었음을 의미하였다. 그래서 후일 삼국통일까지도 할 수 있었다라고 이야기가 만들어질 정도로 황룡사 9층탑이 갖는 신라인들의 의미는 각별하였다.

  현재 황룡사는 고려 후기 몽골의 말발굽에 짓밟혀 불타고 그 터만 남아있으며 분황사 앞 쪽 넓은 뜰이 옛 터이다.

 

 

  신라가 국력을 키우고 전통적인 귀족세력을 눌러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고등 종교였던 불교의 역할은 대단하였다. 특히 동아시아 문화와 역사에서 불교의 역할은 고대 국가의 출발과 통일국가의 사상적 통합이라는 의미에서 불교가 가지는 역사성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신라에서 법흥왕과 박씨 왕가의 후손인 이차돈의 만남은 극적이자 중요한 만남이었다. 새롭고 강한 나라 신라를 만들고 싶었던 법흥왕과 신라를 불국토 즉 부처님의 나라로 만들고 싶었던 이차돈은 각기 추구하는 바가 맞아떨어져 일을 벌이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이차돈의 희생이었다.

  모두가 반대하지만 선진문화를 받아들이고 국가통합을 위해서 불가피했던 불교의 공인, 이차돈은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의 목을 베어 흰피가 솟으면 불교를 공인할 것을 약속하고 죽음을 맞는다.  이차돈의 말대로 그의 목에서 흰피가 솟구쳤고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며 그의 희생을 추모했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그 사실을 적어 증명하고 있는 것이 이차돈 순교비이다.  

  서양에서 소개된 기독교가 서학이라는 학문으로 받아들여지고 조선 왕조에서 많은 이들이 가톨릭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면서 수 많은 사람들이 순교하였던 것이 100여년 전에 일이다. 이처럼 새로운 종교이자 학문이고 문화의 응집체인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종교이자 문화를 주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우리 문화에 제대로만 수용한다면 그 자체로 개혁이자 혁명으로 역사의 큰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신라시대 나라의 인재이자 재목은 화랑이었다. 신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관창도 화랑이었고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김유신도 화랑이었다. 특히 후에 왕이 되는 김춘추와 원성왕도 화랑이었다.

  이렇듯 진흥왕 대 정립된 화랑제도는 신라의 중심이었다. 화랑은 진골 귀족 화랑과 평민 낭도로 이루어진 단체로 좋은 산과 계곡을 다니며 수련을 했던 단체이다. 이러한 화랑의 일화에서 경주 서쪽의 단석산의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화랑 김유신이 수련을 위해 매일 산 정상에 올라 검으로 바위를 치니 바위가 갈라졌다는 것이다. 이렇듯 매일매일 무예와 학문에 정진하는 화랑은 나라에 위기가 닥치면 그 선두에 서서 적과 싸웠던 용맹하고 살신성인(자신을 죽여 인을 이룬다)을 실천했던 장본인이다. 드라마 선덕여왕에도 유신의 용화향도, 비천지도, 일월성도니 하면서 나오는 사람들이 화랑도이다.

  화랑은 싸움에 나서면서 분을 칠하고 나가는데 이는 적에게 죽임을 당해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한 것이라 한다.

  위의 임신서기석은 임신년에 화랑이 맹세한 내용을 기록한 금석문(쇠, 돌 따위에 글을 새긴 것)으로 나라에 충성하고 학문에 힘쓸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 크기는 대략 30cm에 이른다.

 

 

  "문무왕 21년 7월 1일에 왕이 돌아가니 여러 신하가 유언에 의하여 동해구 대석상(大石上)에 장사하였다. 속전에는 왕이 용이 되어 그 돌을 대왕석(大王石)이라 한다." 

   위 기록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문무왕(30대 재위661-681) 최후에 대한 기록이며 대왕석이란 현재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봉길해수욕장(일반적으로 경주에 간 사람들이 감포로 부르는 장소이다. 하지만 정작 감포항은 31번 해안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8km 더 가야한다.) 앞 바다의 암초를 말한다. 현재 이곳은 문무대왕릉 혹은 대왕암이라 불리며 세계 유일의 해중릉(海中陵)이다.

  그러나 발굴 조사 결과 유골함이 발견되지 않아 실제 장례를 했는지 논란이며 다만 하늘에서 바위를 내려다 보면 마치 십자 모양으로 물길이 나고 그 가운데 인위적으로 바위를 다듬은 흔적이 있으며 큰돌이 얹저 있어서 실제로 유골을 안치하진 않았다고 해도 문무왕을 뼈가루를 뿌린 산골처(散骨處)가 아닌가 추정한다. 

  문무왕이 바다의 해중릉에 장사를 한 이유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평소 지의법사에게 말하기를 "짐은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되어서 불법을 지키고 나라를 수호하고자 한다."라고 하여 문무왕이 삼국통일 이후 신라에 큰 근심은 바다 건너 왜(일본)이므로 그들이 경주를 침범할 때 이곳 감포지역 바다로 들어오므로 그 길목에 감은사를 지어 왜병을 막고자 했으며 그 완성을 못보고  죽자 자신이 직접 용이 되어 바다에서 왜병을 막고자 하였다고 한다.

 

 

  사중기(寺중記)에 따르면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려고 감은사를 지었으나 완성시키지 못하고 죽어 해룡이 되었으며, 그 뼈를 장사한 곳이 대왕암이며 절 이름은 감은사(感恩寺)이고 후에 용이 모습을 드러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고 하였다.

  이견대는 '이로움을 본 곳'으로 신문왕(31대 재위 681-692)이 행차하여 용을 보고 용에게 신기한 대나무를 받아 피리를 만들어서 불었더니 적병이 들어오면 물러가고 재해가 들면 재해가 없어지고 경주를 벗어나면 그 능력이 없어졌다가 경주에 들어오면 능력이 생기는 신비한 피리였다는 만파식적의 전설이 있는 유서 깊은 장소이다.

  현재 이견정(亭)이라는 정자가 서있고 그곳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대왕암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 중에 명당이다.

  신문왕대 왕권이 안정되고 나라가 태평하자 그런 이유에서 만파식적이라는 설화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또한 아버지 문무왕의 치적과 김유신의 충성은 신문왕대 신라에 더없는 발전에 기반이 되었기에 만파식적 설화에는 만파식적이라는 보물이 해룡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이 내려준 보물로 이야기가 전하는 것으로 본다.

  설화는 그 자체로 황당무개한 이야기나 허풍으로 비춰질 수 있지만 대개 설화와 신화 같은 이야기에는 당 시대의 역사적 의미와 사실을 내포하여 그 역사적 의미를 고찰할 수 있는 소중한 이야기이다.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그 이야기에는 무수히 많은 사실이 동물, 신비한 능력 등 여러가지로 표현되어 그 시대를 보는 역사의 눈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단군신화에서 환웅의 신하로 풍백, 우사 등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정말 바람과 비를 다스린 사람으로 믿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이들이 의미하는 것이 특히 바람과 비로 계절, 일기에 변화에 따라 큰 영향을 받는 것이 바로 농사로 당시 농업이 중심이 된 사회였다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견정에서 바라본 대왕암의 전경이다. 신문왕이 행차한 장소라 그런지 주변 경치를 둘러 보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수원에서 과천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지지대(遲遲臺)고개라 한다. 조선 22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참배하고 서울로 돌아가면서 고개에 올라 서면 멀리 묘가 있는 화산이 보이고 내려가면 보이지 않아 한참을 그곳에서 어가(임금이 타는 가마)가 머물렀다고 하여 지지대라고 했는데 이곳 이견정 역시 아버지 문무왕을 기리며 오랫동안 바다를 바라봤을 효심 깊은 신문왕이 서성인 장소는 아니었을까...

 

 

  왜병을 막고자 절을 지었고 그 완성을 못보고 죽은 문무왕을 위해 완성한 신문왕이 아버지의 은혜를 기린다 하여 절이름을 감은사라고 한 감은사지이다. 감은사는 현재 그 터에 웅장하고 단아하면서 아름다운 감은사지 3층탑 2기와 예전 대웅전 및 가람 터 일부만이 남아있다.

  감은사지를 오르기 전에 작은 못이이었을 터가 그 앞에 조성되어있다.

  예전 대학 때 오늘처럼 새벽이 아닌 해가 막 진 무렵 하늘에 어느 정도 빛이 있고 주변이 어스름이 내린 상태에서 그 하늘 높이 솟은 감은사지석탑의 모습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최고의 절경이자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에 무수히 많은 탑이 있지만 그중에서 나는 특히 감은사지3층탑을 좋아한다. 별 기교는 없으나 단조로운 모습과 균형, 그리고 주변 경관과 어울리는 절묘함, 역시 탑은 감은사지3층탑이 아닐까

  더욱이 문무왕의 호국정신과 신문왕의 효심이 깃든 곳의 탑이라면 그 의미 역시 다른 탑에 전혀 손색없는 명물 중에 명물이다.

  감은사지3층탑에서도 보듯 통일신라를 상징하는 유물 중 3층탑의 형식도 대표적이다. 아무 절이나 가서 옛날 탑이 서있다고 치자 그런데 그 탑이 3층이라면 대부분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탑이다.

 

 

   감은사 금당 터 석물이다. 예전 바닥을 이루던 돌로된 시설로 보이는데 그 중 가운데 돌이 부러져 있다. 남옥순 선생님 말로는 예전 이곳을 다녀갔던 수학여행 온 학생이 함부로 유적을 밟고 돌아다니다 그만 돌을 부러뜨렷다는 것이다. 돌이 부러지고 그 자리에서 치울 수도 있었으나 이 돌을 보며 문화재를 소중히 하고 관람할 때 조심히 할 수 있도록 그 귀감으로 남겨두었다고 한다.

  우리 화성청우회 역사탐험대도 항상 유적의 중요성과 관람질서를 교육하고 답사를 한다. 그렇지만 아이들이기 때문에 가끔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다.  돌을 보면서 쉽게 문화재를 생각했던 마음이 있었다면 다시금 고쳐 먹을 수 있는 소중한 기억이 되길 고대한다.

  문화재를 지킨다는 것은 역사를 지킨다는 의미이고 문화재를 파괴한다는 것은 역사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역사를 지키는 사람이 될지 아니면 역사를 파괴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사종기에 따르면 또 다른 재밌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바로 감은사에는 금당 아래 계단에 구멍을 파고 용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바로 그런 이야기를 증명하듯  예전 금당 터에 용혈(龍穴) 즉 용의 구멍이라는 곳이 존재하고 있었다.

  정말 역사는 이야기 속에서 그 이야기를 증명하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 할 때 그 재미가 정말 큰 기쁨이된다.

 

경주에서 만나는 큰 기쁨의 마지막은 '8월 화성청우회 역사탐험대 경주 나들이 3'에서 확인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