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8월 화성청우회 역사탐험대 경주 나들이 3

달이선생 2009. 9. 2. 13:13

 

 

 

  감은사지3층석탑을 동쪽에서 서쪽의 경주 방향으로 본 모습이다. 황량한 절터에 단아한 석탑의 위용이 영광에 시간을 뒤로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바라다 보이는 저 멀리 보이는 산이 토함산이다. 경주 보문호를 지나 추령고개를 내려오면 대왕암이 있는 봉길해수욕장에 이른다. 산 아래로 작은 천이 시작되는데 토함산에서 발원하여 함월산 기림사 아래 천이 만나 동해에 이르는 '대종천(大鐘川)'이다.

  이곳에서 나신 남옥순 선생님에 따르면 하천의 이름의 유래는 이렇다.

 

  "때는 고려 말기 몽골의 침략으로 황룡사와 황룡사지9층탑이 불타는 큰 재난이 있었는데 그때 몽골군이 황룡사에 걸려있던 황룡사대종을 가져가고자 이 하천을 이용하여 운반하였다. 그래서 '큰 종을 옮긴 하천이다'하여 '대종천'이라고 하였다.

   몽골의 욕심이 과하다고 하늘도 느끼셨는지 그들의 야욕은 제대로 실현될 수 없없다. 그래서 그만 큰 종을 풍랑으로 바다에 빠뜨렸다. 그 일로 이후에 바다에는 풍랑이 일면 종소리가 난다고 한다." 

 

  이 황룡사대종은 삼기종(三奇鐘)이라고하여 '신라의 세 개에 신비한 종'을 말한다. 성덕대왕신종, 홍효사 석종(石鐘)과 함께  황룡사대종을 포함하며 현재는 성덕대왕신종 말고는 전하지 않아  그 신비한 종에 대한 이야기가 더욱 흥미롭다.

  삼국유사에는 황룡사대종이 성덕대왕신종보다 4배가 크고 그 무게가  49만근으로 나오며 그 무게를 환산하면 29톤으로 현재 성덕대왕신종의 무게 25톤보다 많이 나가니 그 크기가 어마어마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지금은 확인 할 수 없다는 것이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근데 '대종천이야기' 가 일제에 의해 날조, 확산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증거들이 지역 옛문헌과 자료를 통해 속속들여 밝혀지고 있다. 이러한 일은 현재 일본이 벌이고 있는 국제적 활동과 무관하지 않는 것으로 일본이 오랫동안 독도와 동해에 대한 영유권 및 고유명칭을 국제사회로 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것으로 현재는 경제력과 자금력에 따른 대단한 로비를 통하여 세계 여러나라들이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동해를 일본해로 부르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야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는 우리나라를 본격적으로 침략하면서부터이다. 그래서 현재 대종천이라는 하천의 명칭이 본격적으로 각종 기록에 등장하는 시기가 1910년도 이후부터로 이를 뒷받침하며 그러한 주장에 따라 실제로 필자가 우리나라 고지도의 대명사인 고산자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를 확인하니 역시 대종천은 보이지 않고 동해천(東海川)이라고 나왔다.

   또한 지리지인 경주부지지 등도 확인 한 결과 대종천이라는 지명은 보이지 않고 다만  대왕암이 위치한 봉길리해변이 양북면 지역으로 과거 조선시대 그 소재지가 '어일'이라고 하는데 경주부 지도에는 '동해' 또는 '동해창'(東海倉은 조선시대 세곡미=세금으로 바치는 쌀.을 바닷길을 이용=조운,한 조운로의 임시 조창에 해당하는 곳으로 이곳에서 모아진 쌀이 남해와 서해를 거쳐 한강을 따라 서울의 경창으로 운반되었다.) 이라 나온다.

 

 

사진은 대동여지도 경주부 부분으로 토함산과 토함산 아래

동해(오른쪽)로 흐르는 것이 대종천이 아닌 동해천이라고 분명히 적혀있다.

붉은색

세로줄로 표시한 부분이다.(필자가 확인하고 표시함)

 

  또한 동해 또는 동해구라는 지명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고서적에서도 나오며 옛부터 우리 조상들은 바다를 '해가 뜨는 바다' 즉 동해라고 불렀고 이에 따라 천년고도의 경주지역에서 제일 가깝게 동해와 맞닿아 있는 이 지역을 '동해','동해구'라고 불렸다. 그러나 일제가 동해를 자신들의 바다인 것처럼 '일본해'로 만들기 위해 각종 옛기록에 나오는 동해라는 명칭을 없애고 그때 동해천도 대종천으로 이름을 바꿨고 대종천이야기 역시 이때 널리 확산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본은 우리나라를 1910년 강제합병하고 전국팔도 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바꾸면서 각종 지명과 명칭을 손 본 사실이 이를 증거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야만 그들이 강제로 점유한 우리의 바다를 합법적으로 자신들의 고유 영해처럼 할 수 있는 구실을 만들 수 있고 그러한 침략은 바로 2000년이 넘도록 '동해'라고 불린 바다를 하루 아침에 '일본해'라고 둔갑시킨 것이다. 이처럼 작은 이야기에 불과한 대종천이지만 일본은 동해라는 명칭을 없애고자 저지른 역사침략이었던 것이다.

 

  또한 일설에 의하면 황룡사대종이 아닌 인근 감은사종을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빠뜨렸다는 설도 있는데 이는 몽골군이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는 확실하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기마민족으로 배를 부리고 항해하는 기술은 없었다. 때문에 물에 약한 몽골이 아닌 왜군에 의한 약탈로 본 것이다. 

  당시 몽골의 침략이 있었던 시기는 칭기즈칸이 몽골제국을 만들고 각지를 정벌하는 과정에서  고려는 아직 투항하지도 않았고 또한 중국 송나라도 몽골의 손아귀에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몽골군은 고려와 송의 도움없이 직접 배를 이용해 대종을 약탈하였다는 것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실제로 몽골의 황제 쿠빌라이가 송를 병합하고 고려가 투항하자 유일하게 동아시아에서 몽골에 굴복하지 않은 일본을 정벌하려고 하자 몽골은 바다에 익숙하지 않아 배와 배를 부리기 위해 고려와 송에 군선을 만들라고 지시하였다. 이렇게 몽골은 1,2차로 일본정벌을 단행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몽골이 굳이 가져 가려고 했다면 해로가 아닌 육로로 가져 가야했으며 당시 해로는 이들에게 위험천만한 모험이었다. 당시 우리 고려군은 물에 약한 몽골군을 피해 바다와 인근 섬 등을 장악하고 몽골과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화에 따라 종소리가 난다는 동해구를 수중발굴조사를 한 결과 종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구름과 안개를 토해 머금는 산... 그래서 토함산(吐含山)이다.  우리들이 찾은 오늘은 토함산이 제대로 자기의 존재를 뽐내고 있었다. 아침부터 우의를 입고 벗느라 수고였지만 그래도 신비로운 비경에 절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신라 불교 미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세계문화유산 석굴암(石窟庵), 토함산은 석굴암을 끌어안고 있는 신라의 성산이다.

  석굴암의 건축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김대성(金大城)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전한다.

 

   "경주 모량리()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대성은 어머니 경조(祖)를 모시고 부잣집에서 날품팔이를 하며 살았다. 하루는 ‘하나를 보시()하면 만배의 이익을 얻는다’는 스님의 말을 듣고서 그동안 품팔이하여 마련한 밭을 시주하고, 갑자기 죽었다. 죽은 날 밤 신라의 재상 김문량의 집에 그 혼이 이르러 태기가 생겨 다시 태어났다. 자라서 전생의 어머니 경조를 떠올리고 모셔다가 함께 살았다.

  사냥을 좋아하던 대성은  어느 날 사냥 중에 곰을 잡고 나서 잠을 자는데,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하여 자기를 죽인 것을 원망하였고 대성이 용서를 청하자 곰이 자기를 위하여 절을 지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잠에서 깨어난 김대성은 깨달은 바가 있어 사냥을 중단하고 불교의 가르침을 따랐다. 아울러 현생의 부모님을 위해 불국사(佛國寺)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石佛寺)를 세웠다."

 

   김대성의 효심이 깃든 이 이야기는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설로서 죽고 남이 반복된다는 설로 현재의 삶이 행복하고 불행한 것은 다 전생에 쌓는 덕에 달렸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신라인들이 내세를 위해 현재의 삶에 충실하고 덕을 쌓고자 하였다는 것을 반영한다.

  이와 같이 석굴암에 깃든 설화와 함께 중요한 역사적 사실 중 하나는 우리가 석굴암에 올라가서 보면 가운데 부처님인 본존불(석굴암 보존을 위해 경내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어 사진을 올리지 못함)을 보면서 그 아름다움과 웅장함에 감탄하게 된다. 근데 이와 같은 불상을 조성하는 양식이 멀리 그리스로 부터 왔다면 정말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고대 이란 땅에서 대제국을 건설하였던 페르시아는 그리스 북부에 위치한 마케도니아왕 알렉산드로스대왕에게 정복당하고 그 군대가 인도 서쪽 인더스강 유역까지 미치게 되었다. 당시 인도 서북부지역에서는 불교를 믿고 부처님을 상징하는 불탑을 만들었는데 이곳을 침략한 그리스인들이 자신의 신을 돌로 조각하여 모시는 것을 보고 처음 불상을 만들게 되었다.

  이것이 간다라 지역에서 유행한 것으로 우리는 간다라 미술 혹은 간다라 불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초기 간다라 불상은 그리스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 사람처럼 묘사되었는데 시기와 지역을 달리하면서 그 불상이 비단길(실크로드로 고대 동과 서를 이어주던 주요 교통로이자 무역로 이곳을 통해 중국의 많은 비단이 거래되었다고 하여 실크로드 즉 비단길이라고 한다.)을 통해 아프카니스탄과 중국에 전해저 중국 최대의 건축물인 돈황석굴을 만들었고 신라에 전해져 석굴암에서 그 위용을 한층 빛나게 하였다. 더욱이 일본 동대사로 이어져 불교미술의 동과 서가 만난 역사적 유물이자 유산이되었다.

 

  동해의 일출과 함께 그 빛이 서서히 석굴암에 들어와 본존불을 비추고 자연스럽게 석굴암 전체로 퍼져나가 부처님의 공덕을 나타내듯 맑고 영롱한 빛을 내게 하는 석굴암의 신비...

  안타깝게도 이는 현재 구경할 수 없다. 일제시대 일본이 석굴암을 가져가고자 해체하였다가 다시금 시멘트를 발라서 맞춘 결과 그전까지 없었던 석굴암의 균열과 습기 및 이슬이 맺히는 현상으로 인해 석굴암이 폐쇄되었기 때문이다. 예전 교과서를 통해 현진건의  불국사 기행문을 접할 때면 익히들었던 석굴암의 신비... 이제는 우리 시대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안타까운 유산이 되어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문화재를 아끼고 보존하는 일 그것은 내일의 미래를 위해 우리가 꼭 해야하는 최선의 노력일 것이다.

   석굴암은 동해를 조망할 수 있는 수려한 공간이지만  안개와 구름, 이어서 가랑비까지 내려 토함산은 쉽게 동해의 경관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한다...

 

 

 

   토함산을 내려와 김대성이 현세의 부모님을 위해 지었다는, 신라 사찰의 신비를 고이 간직한 불국사를 찾았다. 후문을 통해 불국사를 들어 갔는데 위의 사진은 후문이 아닌 정문의 사진이다.

  불국사는 신라인들이 자신들의 나라 신라를 부처님의 나라 즉, '불국토'를 만들기 위해 그 이상을 담아 건축한 사찰이다. 그래서 이름 역시 불국사이다. 경덕왕 때 불국사와 석굴암을 조성하였다니 당시 신라의 문화가 불교를 바탕으로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음을 확인 할 수 있는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이다. 불국사도 세계문화유산(유네스코)으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불국사하면 떠오르는 유물 중에 오래도록 기억되는 것이 돌계단과 난간이다. 맨 앞에 보이는 것이 연화교(蓮華橋)이고 다 나오진 않았지만 위쪽이 칠보교(七寶橋)이다. 그뒤로 보이는 것이 아래 백운교(白雲橋)와 청운교(靑雲橋)의 옆 모습이다.

  많이들 불국사의 백미 돌계단을 보면 어디가 청운교고 백운고인지 어리둥절하다. 마치 보면 하나의 다리로 되어있는 것 같지만 이렇게 옆에서 보면 분명히 다리는 2층으로 이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1층과 2층의 다리를 구분하여 각각 이름을 달리 부르고 있는 것이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불교에서 말하는 33개의 하늘을 의미하여 총 33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다리이고 연화교는 10계단 하나하나 연꽃무늬로 화강암을 다듬었고  칠보교는 금, 은, 유리, 거거(석영), 산호, 마노(조개껍데기), 파리(수정) 7가지 보물을 뜻하며 디딤돌(계단)이 7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돌난간교는 모두 각각 국보 22호와 23호로 지정되어 국가 보물로 보호되고 있으며 보호를 위해 계단에 오를 수는 없다.

 

 

 

  성덕대왕신종 등은 모두가 사찰들에 있는 범종이며  '청정한 사찰에서 지옥의 중생에게 부처님의 음성을 전한다'는 의미의 법구(法具)이다.  이와 함께 북을 법고라 하여 중생에게 불법을 전하여 해탈을 하게 하기 위해 북을 친다. 이처럼 절에는 범종(梵鐘), 법고(法鼓), 어고(魚鼓), 운판(雲板) 등 법구를 이용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중생에게 전하고자 친다. 

  고요한 사찰에서 새벽과 저녁에 울리는 법구들의 소리는 한번 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법구인 어고(목어)와 오른쪽은 청동으로 만든 운판이다. 어고는 부처님의 말씀을 미물인 물고기에 전하는 것이고 운판은 새나 허공을 떠도는 영혼을 인도하고자 치는 법구이다.

 

 

 

  법구 중에 대웅전 앞에 서있는 큰 석등(石燈)을 보게 된다. 석등은 부처님의 말씀을 통해 진리의 불을 지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불국사 대웅전 앞에는 석등 외에 우리나라 불탑을 대명사인 불국사3층석탑인 석가탑(釋迦塔)과 다보탑(多寶塔)이 서있다. 다보탑은 흔희들 10월짜리 화폐 도안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문화재이다. 현재 다보탑은 보존을 위해 보수가 한창이다. 

 

 

 

   석가탑 역시 신라시대 대표적인 신라의 문화유산이다. 특히 석가탑도 통일기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탑의 형태인 3층탑 구조로 되어있다. 이 석가탑과 다보탑을 만들었던 사람은 아사달과 아사녀라는 설화로 전해지는데 역시 이들도 당시 탑을 제일 잘 만들 수 있었던 기술자를 보유한 문화의 나라 백제의 사람이었다.

 

  "석가탑을 창건할 때 김대성은 당시 가장 뛰어난 석공이라 알려진 백제의 후손 아사달을 불렀다. 아사달이 탑에 온 정성을 기울이는 동안 한 해 두 해가 흘렀다.
  남편 일이 하루빨리 성취되어 기쁘게 만날 날만을 고대하며 그리움을 달래던 아사녀는 기다리다 못해 불국사로 찾아왔다.
   그러나 탑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여자를 들일 수 없다는 금기 때문에 남편을 만나지 못했다. 그래도 천리 길을 달려온 아사녀는 남편을 만나려는 뜻을 포기할 수 없어 날마다 불국사문 앞을 서성거리며 먼발치로나마 남편을 보고 싶어했다.
  이를 보다 못한 스님이 꾀를 내었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그마한 못이 있소. 지성으로 빈다면 탑 공사가 끝나는 대로 탑의 그림자가 못에 비칠 것이오. 그러면 남편도 볼 수 있을 것이오."

  그 이튿날부터 아사녀는 온종일 못을 들여다보며 탑의 그림자가 비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무심한 수면에는 탑의 그림자가 떠오를 줄 몰랐다. 상심한 아사녀는 고향으로 되돌아갈 기력조차 잃고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못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탑을 완성한 아사달이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그 못으로 한걸음에 달려갔으나 아내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아내를 그리워하며 못 주변을 방황하고 있는데, 아내의 모습이 홀연히 앞산의 바윗돌에 겹쳐지는 것이 아닌가. 웃는 듯하다가 사라지고 또 그 웃는 모습은 인자한 부처님의 모습이 되기도 하였다.
  아사달은 그 바위에 아내의 모습을 새기기 시작했다. 조각을 마친 아사달은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하나 뒷일은 전해진 바 없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 못을 '영지' 라 부르고 끝내 그림자를 비추지 않은 석가탑을 '무영탑' 이라 하였다.

 

  석가탑에 어린 애잔한 사랑이야기와 함께 석가탑에서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751)'이라는 불교경전의 일부가 발견되었다. 이는 현존하는 세계에서 최고 오래된 목판인쇄본이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활자인쇄술이 발달하여 목판인쇄술이 발달하였고 거기에 성덕대왕신종 등을 만드는 높은 수준의 구리합금 기술을 보유하여 최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하는 토대가 된 사실을 일러주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금속활자로 인쇄된 세계에서 제일 오래되고 현존하는 유물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직지심체요절(-節1377)즉 직지심경이다.  기록으로는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 1234)' 금속활자로 인쇄된 최초의 책으로 나온다. 이렇듯 우리나라는 세계 제일의 인쇄술을 보유하였고 특히 금속활자의 발명(1460)은 독일의 구텐베르크보다 무려 200년이 앞서고 현존하는 직지심경 역시 77년이나 빠르다.

  지난 2001년 유네스코에서는 '직지심경'과 '구텐베르크 42행 성서'를 함께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하고 타임지 등 세계 유수의 언론과 학계에서 "세계인이 지난 1천년 역사동안 인류를 바꾼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자 지식 정보 혁명이다."라고 평가하였다.

 

 

 

  

   석가탑과 달리 형식이 자유롭고 조형미가 뛰어난 탑은 다보탑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다보탑을 우리나라 최고의 탑으로 꼽고, 이러한 의견이 반영되어 우리나라 금속화폐인 10원짜리 동전에 화폐도안으로 오랫동안 사랑 받고 있다. 다만 현재는 10원짜리 동전의 가치가 매우 낮아 저금통, 책상서랍 구석, 오래된 가방이나 옷 등에 방치되어 천덕꾸러기로 전락하였지만 말이다...

  이러한 아름다운 다보탑은 우리나라의 비극적인 역사와 같이하여 그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일제는 1925년경 다보탑의 조형미가 아름다워 특히 공을 많이 들였음을 판단하고 일반적으로 석탑 속에 감실(사리함을 두는 공간)을 두고 매우 아름다운 사리와 사리장치를 했을 것으로 생각하여 다보탑을 해체하였다.

  석가탑처럼 그에 상응한 유물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현재 그 속에서 무엇이 나왔는지 또 어디에 있는지 알길이 없다. 또한 석가탑 네 방향 모서리에 사자상을 배치하였는데 일제는 사자상 1기만 남기도 일본으로 모두 가져가 그 유물의 소재 역시 알길이 없다.    

  그리고 당시 일제가 해체하고 복원을 하면서 그냥 대충대충 시멘트로 마무리하여 다보탑은 현재 균열이 가고 보존이 어려워 우리나라 문화재청이 다보탑 보수를 위해 해체 작업을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다보탑의 구조가 안전하게 유지되도록 비가 올시 자연적으로 배수가 되도록 만든 구조가 있었는데 이를 일제가 시멘트를 발라서 막음으로 해서 비로 인해 누수가 이루어져 다보탑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음을 확인하고 원형으로 복원하고 있다.

 

  불국사 대웅전 앞 석등을 정면으로 좌우에 석가탑과 다보탑을 세웠는데 이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한 것으로 어려운 불법을 이해못하는 중생도 불국사 대웅전 경내에 들어서면 자연스럽게 부처님의 불법을 이해하고 구원이 되도록 반영된 구조이다.

 

  또한 그리스도가 미래에 오실 메시아라면 불교에서는 미래에 오실 부처님을 미륵불, 석가모니를 현세불, 이미 다녀가신 부처님을 다보불이라고 한다.

   

 

  

   나한전 옆의 돌탑군이다. 나한이란 부처님의 제자로 아라한과(소승불교에서 이를 수 있는 최고 성인의 경지로 윤회를 겪지 않는 아라한에 오르는 것)에 오른 제자들로 오백나한상를 모신 불전이다. 16나한상을 모신 곳은 응진전이라 한다.

  부처님이 수행을 통해 열반에 오르시고 해탈을 하자 그 제자들도 부처님을 따라 고행을 거쳐 성자가 되듯이 이곳 나한전을 찾은 많은 사람들도 저마다 자기 사연을 간직하고 그 마음을 부처님께 기원하고 있는 많은 탑들...

  이곳을 다녀간 사람이라면 불자가 아니더라도 마음 속 소원을 돌 하나하나에 정성을 담아 쌓을 것이다. 그것들이 모여 이렇게 불국사 나한전 뜰을 가득 메우고 있다.

   하나를 버리면 열을 얻는다고 하는데 우리는 하나라도 악착같이 가지려고 아둥바둥 산다. 욕심을 버리는 것, 정말 쉽지 않은 것이다...

  

 

 

   선덕여왕과의 인연이 깊은 또 하나의 사찰 분황사

 

   분황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佛國寺)의 말사(큰절의 관리를 받는 작은 절)이자 전불시대 7처 가람이다. 전불시대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현하기 전부터 해동 신라 땅이 부처님과 인연이 깊은 불국토였다고 하는 신라인의 믿음으로 7처 가람이란 석가모니 이전의 일곱 부처님의 절터를 찾아 지은 국찰이며 분황사 외에 흥륜사. 영흥사. 황룡사. 영묘사. 담엄사, 사천왕사를 이르는 것이다. 이는 신라인의 불교에 대한 깊은 심신과 불국토에 대한 염원이 얼마나 간절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이야기다. 


   분황사는  634년(선덕여왕 3)에 용궁(龍宮)의 북쪽에 건립되었다.

   643년에 자장(慈藏)이 당나라로부터 대장경 일부와 불전(佛殿)을 장식하는 번(幡깃대)·당(幢기당)·화개(花蓋꽃덮개) 등을 가지고 귀국하자 선덕여왕은 그를 분황사에 머무르게 한 뒤 많은 급여를 내리고 호위를 붙이는 등 대접을 극진히 하였다.

   특히 우리나라 불교의 큰 스님이자 민중불교를 연 원효(元曉)대사는 이 절에 머물면서 '화엄경소 (華嚴經疏)'·'금광명경소 (金光明經疏)' 등의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의 교학(敎學)이 이 절을 중심으로 하여 널리 퍼지게 되어 분황사는 불교 종파의 하나인 법성종(法性宗)의 중심 사찰이 되었다.

   원효가 죽은 뒤 아들 설총(薛聰)은 원효의 유해로 소상(塑像흙으로 만든 상)을 만들어서 이 절에 안치하고 죽을 때까지 공경하고 모셨다. 하루는 설총이 소상 옆에서 절을 하자 소상이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는 일화가 전하며 일연(一然)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까지는 원효의 소상이 남아 있었으며, 그때까지도 소상이 고개를 돌린 채로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이 절에는 솔거(率居)가 그린 관음보살상이 있었고, 좌전(左殿) 북쪽 벽에 있었던 천수대비(千手大悲) 그림은 영험이 있기로 유명하였다.

 

   경덕왕 때 한기리(漢岐里)에 사는 여자 희명(希明)의 아이가 다섯 살 때 갑자기 눈이 멀게 되었다. 희명은 아이를 안고 천수대비 앞에 나아가서 '도천수대비가 (禱千手大悲歌)'를 가르쳐 주고 노래를 부르면서 빌게 하였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 도천수대비가는 도천수관음가이기도 한 10구절로 나누어지는 10구체 향가이다.

 

 

   -도천수대비가-

 

    무릎을 끓으며                                   

    두 손바닥을 모아 괴어서                   

    천수관음 앞에                                   

    축원의 말씀을 올리노라                     

    천 개 손으로 천 개 눈에서                    

    하나를 내 놓아 하나를 덜도록             

    두 눈이 다 먼 내라                             

    하나나마 주어 고칠레라                      

    아아! 내게 끼쳐준다면                         

    내놓아도 자비심 뿌리로 되오리              

 

 

 

 

   755년(경덕왕 14)에는 약사여래입상을 만들어서 이 절에 봉안하였는데, 그 무게는 30만6700근이었고, 만든 사람은 본피부(本彼部)의 강고내말(强古乃末)이었다.

 

   또한 분황사 경내에는 원효대사의 성덕을 기려 고려 숙종 때 평장사(平章事) 한문준(韓文俊)이 지은 원효의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가 건립되었다. 이 비는 1101년(숙종 6) 8월에 내린 숙종의 조서에 의해서 건립되었는데 숙종은 원효와 의상(義湘 625-702 성이 김씨 혹은 박씨로 알려져 신라 진골귀족으로 여겨지며 원효대사와 친구이다. 둘은 함께 당으로 유학하려던 중 원효는 해골물을 마시고 중도 포기하지만 혼자 당에 들어가 화엄종 2조인 지엄에게 가서 나중에 지엄을 이어 3조가 되는 법장과 공부하였다. 귀국 후 우리나라에 부석사를 비롯한 많은 절을 짓고 제자를 양성하며 화엄종을 일으켰다.)이 동방의 성인인 데도 불구하고 비기(碑記)와 시호가 없어 그 덕이 크게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히 여겨서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유사(有司)로 하여금 연고지에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화쟁국사비의 비편은 지금도 가끔씩 발견되고 있는데, 비신(碑身)을 받쳤던 비대(碑臺)는 절 근처에서 발견되어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이를 확인하였다. 현재 비대에는 ‘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차신라화쟁국사지비석)’이라고 쓴 김정희의 친필이 음각되어 있다. 현재는 비는 일부 편이 발견되고 비부만 남아있다.

 

  몽골의 침략과 임진왜란으로 사찰 대부분이 훼손되었으며 현존하는 당우는 약사여래입상을 모신 보광전(普光殿)과 승당(僧堂)·종각(鍾閣) 등이 있으며, 이 밖에도 석등·대석과 많은 초석들이 남아 있다.

  1974년의 발굴조사에서 금동보살입상과 귀면와(鬼面瓦), 신라 및 고려시대의 와당 등이 많이 발견되었으며 현재는 분황사 주변 가람의 크기를 파악하기 위해서 분황사 입구 정면으로 황룡사 방향으로 발굴 조사를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분황사를 찾는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벽돌식 석탑(중국의 석탑은 벽돌탑이 많다.)으로 국보 제30호인 분황사석탑을 보기 위해서일 것이다. 분황사석탑은 원래 9층이었으나 현재 3층만이 남아 있다. 분황사석탑은 벽돌식이지만 벽돌을 구워서 쌓은 것은 아니고  재료인 돌을 다듬어 벽돌처럼 쌓은 탑이며 이를 통해 당시 중국 등 여러나라와 교류를 하였던 신라 불교의 특성상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분황사석탑 역시 당시 빈번하였던 문화교류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굴곡많은 우리 역사처럼 분황사 역시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이  탑을 반쯤 헐었다고 전한다. 그 뒤 절의 승려들이 탑을 다시 쌓기 위하여 헐었더니 바둑알만한 작은 구슬이 출토되었는데, 그 구슬은 수정처럼 빛나고 투명하였으며 태양을 쪼여 솜을 가까이 대면 불길이 일어났다고 한다. 당시 이것을 백률사(栢栗寺)에 보관하였다.

   탑신부는 3층까지 남아 있으며 회흑색의 안산암(安山岩)을 작은 벽돌모양으로 잘라서 쌓았는데 위의 폭이 아래폭보다 약간 좁다. 탑신 4면에는 입구가 뚫려져 있는 감실(龕室)을 개설하고, 입구 좌우에 거의 원각(圓刻)에 가까운 인왕상(仁王像 인왕은 금강신을 말하는 것으로 오백 야차신을 부려 여래(부처)의 천불에 법을 지킨다는 불교의 신이다. 절문에 주로 세우며 허리에만 옷을 걸치고 있는 용맹한 모습이다. 왼쪽은 밀적금강으로 입을 벌리고 있고 오른쪽은 나라연금강으로 입을 다물고 있다.)을 배치하였으며 두 짝의 돌문을 달아 여닫게 하였다.

   인왕상은 모두 8구로서 조각의 형태는 인간적인 모습이나 얼굴이나 신체 등에서 형태가 불균형한 면을 보이는 등 추상화된 면이 남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인왕의 역강한 힘을 느끼게 하는 조각으로서 7세기 조각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지금 감실 안에는 머리가 없는 불상을 안치하고 있으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초층탑신 4면에 감실을 개설한 예는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 국보 제11호)에서 초층탑신 4면에 통로를 개설하고 그 중심에 찰주(擦柱 : 탑의 중심 기둥)를 세운 점과 서로 통하며, 이러한 형식은 목탑에서 초층탑신 내부가 공간이 되고 4면에 내부로 통하는 문을 개설하는 형식에서 유래한 것이다.

 

 

  

   벽돌처럼 다듬은 돌과 탑신부의 모습이다.

 

 

 

  기단 위에는 네 모퉁이에 화강암으로 조각한 사자 한 마리씩을 배치하였는데, 두 마리는 수컷, 두 마리는 암컷이다. 따라서 사자의 모양은 4마리 모두 각기 다른 모습이다. 이와 같은 배치는 불국사 다보탑에  배치한 사자상과 같은 것으로 신라 석탑에서 기본 형식(석가탑과 같은 3층탑)을 따르지 않은 탑에서 보이는 특징으로 보인다.

 

 

 

   탑 앞에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인 석정(石井) 이 있다. 석정은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이라고 불리는 신라시대의 우물이며 틀의 외부는 8각, 내부는 원형으로 다듬었는데 이것은 불교의 팔정도(열반에 이르는 올바른 여덟가지 길로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을 이른다.)와 원융(圓融모슨 법의 이치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융합되어 구별이 없다.)의 진리를 뜻하며 4각형의 격자는 사성제(석가모니가 깨닳음을 얻고 베레나스 지금의 바라나시 녹야원에서 최초 설법한 내용으로 현실의 고통을 벗어나 진리 구현을 위한 수행의 길을 가르쳐 주는 것)를 상징한다. 이 석정에도 재밌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신라 38대 원성왕이 즉위한지 11년 을해(795)에 당나라 사신이 서울에 와서 한 달 동안 머물다가 돌아간지 하루만에 웬 여자 두 명이 대궐 안뜰에 나와 이뢰기를,  " 저희들은 바로 동지(東池), 청지(靑池*청지는 동천사에 있는 샘으로 이 샘은 바로  동해의 용이 내왕하면서 설법을 듣던 곳이다.  동천사는 진평왕이 세운 것으로서 500성중(聖衆부처의 제자 500나한)및  5층탑과 아울러 밭과 작인을 바쳤다. ) 두 못에 사는 용의 아내들입니다. 당나라 사신이 하서국(河西國)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들의 남편인 두 용과 분황사 우믈의 용 등 세 마리에게 술법을 써서 작은 물고기로 변하게 해서 통에 넣어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그 두 사람에게 명하여 나라를 보위하는 우리 남편되는 용들을 두고 가도록 해 주소서." 하였다.

   왕이 하양관(河陽館, 지금 영천지방)까지 그들을 뒤쫓아가서 그들에게 친히 잔치를 베풀어 주고 하서 사람에게 말하기를, " 너희들은 어째서 우리나라의 용 세 마리를 잡아서 이 곳까지 왔는가? 만약에 사실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극형에 처할 것이다." 라고 하였더니 그제야 고기 세 마리를 내어 바쳤다. 

   고기를 세 군데에 놓아 주도록 하였더니 놓은 곳 마다 물이 한 길이나 솟고 용이 기뻐 뛰놀면서 가버렸다. 당나라 사람은 왕의 명철하고 거룩한 데에 감복하였다. 그 뒤부터 삼룡변어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이야기 역시 신라인에게 있어서 불교가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 볼수 있다. 신라인들의 불교는 자신들의 현실에세 복을 비는 현세구복적인 의미도 있지만 나라를 지키고 나라를 보호하는 호국불교 사상이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원광의 화랑도에 대한 세속오계 및 황룡사9층탑, 문무왕 이야기 등과 성격을 같이한다.

 

 

 

  분황사지에 대한 정확한 가람의 규모를 알아보기 위해서 발굴 조사를 하고 있다. 뒤 흰 표지판 좌측 돌기둥은 옛분황사의 당간지주로 파악되며 그 뒤로 넓은 뜰이 옛 황룡사지이다.

  황룡사는 그 규모면에서 신라의 대표적인 사찰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쉽게도 그 면모를 확인할 수 없다. 몽골의 침략으로 모두 불탔기 때문이다. 이 황룡사에는 그 규모면이나 다양한 이야기가 전하는데 그 중 유명한 이야기가  솔거의  '노송도'이다.

 

   신라의 최고 화가로 꼽히는 솔거는 황룡사 법당 사방 벽을 그림으로 장식하였다. 그 중에 늙은 소나무 그림이 한 폭 그렸는데 소나무가 살아있듯 생생하게 표현하였다. 그래서 법당 문이 열리면 까치와 참새들이 정말 소나무로 알고 날아와서 앉으려 하다가 벽에 부딪혀 떨어지곤 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벽화의 색깔이 퇴색되어 희미해지자 스님들이 단청을 새로 입히고 그림도 다시 색칠하였는데 이후로는 법당 문이 열려도 새들이 날아오지 않았다 한다.


    당시 사실적 묘사를 하였던 신라미술의 특징을 말해주는 이야기이며 이는 우리가 봤던 석굴암의 여러 불상과 분황사의 인왕상 등에서 보이는 사실적 표현을 확인을 한 것처럼 그림 역시 이들 조각처럼 사실적으로 그렸을 것으로 본다.

   이러한 신라의 명화 솔거의 그림은 우리가 확인할 길은 없다. 1238년에 이르러 몽골병들이 침입하여 불을 질러 황룡사가 법당을 비롯하여 9층탑, 강당, 49만 7,581근이나 되는 신라 제일의 동종(감포로 흘러드는 대종천 이야기의 대종)까지 모두 불에 타고 녹아 없어졌다.

  솔거의 명화도 이 때 없어지고 현존하지 않는다. 솔거에 대해서는 평민 신분이며 그 자세한 내력은 전하지 않는다. 
   김유신릉부터 대릉원, 첨성대, 월성, 임해전지 등을 둘러보고 경주 시내를 지나치면서 그 가운데로 철길이 항상 곁에서 우리의 눈길을 끈다. 경주를 마치 동서로 나누듯 그 중앙을 가로지르는 철길...

  이는 앞에서 김유신릉의 정기를 훼손하고자 일제가 일부로 철길(동해남부선 철도)을 내었듯 경주 중심의 여러 유적 역시 한 지역의 문화유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민족정기를 훼손하고자 일제는 그 중심을 양 쪽으로 갈라놓으려고 철길을 내었다.

  이렇듯 일본은 우리나라를 영토를 침략하는 것에 넘어서 민족의 정신까지도 침략하며 우리의 정기를 끊었다. 이러한 침략을 풍수침략이라고 하며 그들의 폭압적이고 야만적인 침략의 역사가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는 대표적 사례이다. 때문에 역사 바로 세우기는 이러한 것을 하나하나 다시금 원 상태로 되도려 놓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경복궁에 당당히 서있던 옛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경복궁을 복원한 것처럼 ...

   

 

 

   아마도 경주를 찾는 사람이라면 그 마지막을 항상 포석정에 들리지 않나 싶다. 왜 그럴까? 그건 바로 이곳이 신라 천년의 역사가 비극이 되고 종지부를 찍은 곳이기 때문이다.

  신라 중대 무열왕계의 전제왕권이 무너지지면서 왕위를 두고 진골귀족간에 치열한 다툼으로 이어져 '96각간의 난'이 일어나 혜공왕이 피살되고 내물왕계인 선덕왕이 즉위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혼란은 그뒤 끊임없이 왕위쟁탈전으로 이어져 민생은 파탄나고 왕실의 권위는 실추되면서 더 이상 신라는 옛영광을 이어갈 수 없었다.

   마침내 신라 멸망을 촉진 하였던 무능하고 음란한 진성여왕이 즉위하여 889년 농민 최초로 '원종,애노의 난' 이 일어나 전국적 내란에 휩싸였다. 신라의 지방 지배체제는 이때 사실상 무너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가 배출한 학자이자 당나라 '토황소격문'을 통해 그 문장력이 칭송되었던 최치원이 당에서 귀국하여 894년 시무책를 써서 진성여왕에게 상소하여 신라를 개혁하고자 하였으나 이는 멸망으로 치닫는 신라에게 실현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진성여왕이 선위하여 왕위에 오른 효공왕 대에는 이미 지방 각지에서 도적이 일어나고 지방 군진세력 및 세력가들이 각기 성주, 장군을 칭하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을 호족이라 하는데 그 중에서 당시 궁예와 견훤의 세력이 가장 강성하여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다. 898년 궁예가 패서도(황해도 일원), 한산주(경기도 일대) 일대 30여 개 성을 차지하고 900년에는 무진주(전라도 광주광역시)일대는 견훤이 차지하였다. 

  또한 궁예 밑에 있던 왕건이 금성(錦城전라남도 나주) 등 10여 개 군현를 빼앗는 등 신라 왕실의 지배와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이러한 국가적 위기에서 주색에 빠져 천첩(종이나 기생으로 남의 첩이 된 여자)과 놀아나던 효공왕이 후사없이 죽자 귀족들은 아달라이사금의 후손인 53대 신덕왕(박씨, 912∼917)을 옹립하였다. 이는 내물마립간 이후 신라의 왕성으로 박, 석씨가 있음에도 경주 김씨가 왕위를 독점하였는데 말기의 혼란 속에서 김씨 세력의 퇴보와 새로이 박씨 왕가의 등장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신라는 경주 일원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대부분을 이미 궁예와 견훤 세력에게 상실한 상태에 있었으며, 916년 견훤이 대야성(大耶城:지금의 경남 합천)을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한 사건이 있었다. 하지만 신라는 스스로 막아낼 능력이 없었다. 신덕왕을 이어 승영(昇英)과 위응(魏膺) 두 아들이 뒤를 이어 각각 경명왕(박씨, 917∼924)과 경애왕(박씨, 924∼927)이 되었다. 
   바로 이 경애왕(景哀王)이 박씨 마지막왕이며 경애왕이 견훤의 침입으로 자살하고 신라는 거의 망한 것이나 다를게 없었다. 이름도 슬플 '애(哀)'자를 썼듯 비운의 죽음을 맞은 경애왕의 처지와 신라 처지를 반영하고 있다.
  당시 경애왕이 즉위하기 이전 이미 신라의 각 지방은 궁예와 견훤이 각각 후고구려, 후백제를 세우고 신라는  그 틈에 끼어서 겨우 왕실과 조정만 보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와 같은 시기를 후삼국(後三國)시대라고 하며 당시 후삼국의 패권다툼은 이미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창건한 태조 왕건(王建)의 우세 속에서 전개되었다. 따라서 신라군은 925년 고울부장군(高鬱府將軍), 능문(能文)이 고려에 항복하였고, 927년 강주(康州 : 지금의 晉州)의 왕봉규(王逢規)가 관할하는 돌산(突山) 등도 항복하였다.

  이 때 사실상 신라는 통일기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경계의 영토는 고려와 후백제가 각기 나누고 있었고 신라는 그저 경주 일원만을 차지한 채 유명무실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왕건과 견훤(甄萱)은 지속된 싸움에 지쳐 잠시 강화하였다. 하지만 그 평화도 오래지 않아 견훤이 보낸 질자(質子강화를 맺으면서 각각 인질을 교환했다)인 진호(眞虎)가 고려에서 죽자 견훤은 926년 이를 문제삼아 출병하여 고려를 공격하였다.

   이후 견훤의 군대는 927년 신라의 수도 경주를 직접 공격하여 거의 저항이 없는 가운데 쉽게 경주에 도달할 수 있었고 당시 포석정에서 연회를 하고 있던 경애왕은 견훤의 군대가 침입했다는 소식에 놀라 미쳐 피하지도 못하고 자살한다. 경애왕을 잡지 못한 견훤은 궁궐로 들어간 왕비를 강간하여 능욕을 보이고 궁궐을 노략질하며 신라에게 커다란 치욕을 안겨 주었다.

   사실상 신라는 이 때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경애왕을 자살케하고 왕비를 범한 견훤은 신라의 민심을 고려해 바로 강제 병합하지 못하고 새로이 김부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갔다. 그가 바로 신라 56대 경순왕(김씨927∼935)으로 신라의 마지막왕이 된다. 이후 경순왕은 신라를 들어 935년 고려에 귀부하고 이어 후백제가 내분으로 역시 고려에 병합되면서 민족재통일을 이루게되었다.(936년) 

 

   망국의 한이 서린 이곳 포석정은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이라고 하여 석재로 만든 구불구불한 수조에 물을 흘려서 그 위에 잔을 띄우고 잔이 머문 자리에 앉은 사람이 술잔을 받아 벌칙을 받고 노는 신라 풍류를 대표하는 곳이다. 이렇게 신라인의 유희는 이미 임해전지에 안압지에서 출토된 주령구를 통해 확인하였다.

   경애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고 자결할 때 역시 유상곡수연을 하며 연회를 벌이고 있었다고 하며 망하는 나라에 부정한 임금으로 경애왕의 마지막을 그리고 있다.

   '역사는 승자의 편에 선다고 한다.' 포석정의 일화처럼 망국의 책임을 지는 경애왕은 주색에 빠져 나라를 망친 왕으로 비쳐지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습은 이후 고려에 귀부한 경순왕을 띄우고 그 정당성을 주고자 전 왕이었던 경애왕의 폄하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사실 이 포석정은 유상곡수연을 하며 연회를 베푸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신라의 성지이자 성산으로 일컬어지는 경주 남산자락 아래 위치하며 이곳은 신라인들이 불국토를 염원하며 남산 전체를 석불사원처럼 일군 성스러운 장소이다. 실제로 경애왕이 당시 술 마시고 논 것이 아니라 나라의 명운을 지키고자 이 곳 성지에서 제사를 지내다 참변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설득력이 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사실 여부를 떠나 국난에 있던 신라에서 그 조정과 왕실을 이끌던 경애왕이 나라를 위해 노력했다고 하는 것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으며 실제로 경애왕은 후백제를 견제하고자 고려에 접근하여 고려를 통해 후백제의 위협을 막아내고자 하였다. 그래서 당시 포석정에서 있던 연회는 국가기강을 세우고 민심을 모으고자 치러진 국가제례로 우리나라의 국가제례가 춤과 음악이 어우러져 마치 축제를 연상시키는 점으로 인해 이를 마치 단순히 술을 마시고 춤을 춘 것으로 해석하였을 수 있다.
  그러나 냉혹한 역사의 심판은 신라의 멸망이라는 큰 죄가 가볍지 않음으로 인하여 누군가는 그 막중한 책임을 필요로 하였으며 애석하게도 경애왕은 신라 망국의 책임을 지고 비운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죄인의 굴레가 씌여진것이다.

 

 

 

   불국사와 전불시대 칠처가람의 이야기와 함께 신라인의 불교에 대한 염원을 현세에 표출한 경주 남산이다.

 경주 남산을 오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경주 남산은 신라 불교를 이해하고 신라인들이 불교에 대한 염원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의 산 현장이다.

  예전 대학교 답사에서 찾았던 남산은 산을 오르는 순간부터 바위와 절벽에 무수히 많은 부처님과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어 마치 야외 미술관처럼 느껴졌다. 또한 만든 사람, 시대에 따라 다양한 부처님의 모습은 속세에서 우리가 저마다 제각각 삶을 살고 있듯 남산에 흩어져 있는 많은 석불들은 우리를 닮아있었다.

 

  1박 2일간 진행된 경주답사는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가슴에 남기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지루하고 힘들었던 긴 시간이라고 느낄 수도 있었지만 지난 신라 1천년의 역사를 품고 있는 경주를 돌아보기엔 너무나 짧게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시간이 좀 더 있었더라면 요즘 인기절정의 '선덕여왕'의 릉도 찾아 보고 그 아버지 진평왕의 릉도 찾을 수 있었을텐데... 아쉬움으로 남는다.

  들고 남에 무슨 미련이 남겠느냐만은 그래도 다음을 기약하면서 가슴 퍽찼던 경주답사를 마친다.

 

  화성청우역사탐험대 대원 한 명 한 명 소중한 경험과 추억이 함께하였길 기원하며 오늘의 여정이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는데 늘 공부하고 깨닳아 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학자였던 노자의 말로 끝을 맺는다.

 

 노자가 이르길 "가고 가고 가는 중에 알게되고 행하고 행하고 행하다 깨닫는다."

 (老子曰 "去去去中知 行行行裏覺"노자왈 거거거중지 행행행리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