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강화성당을 나와 언덕을 내려가다가 왼편 골목으로 접어들면 용흥궁(龍興宮)이 나온다. 용흥궁은 이곳과 인연이 깊은 왕의 옛 사저로 '강화도령'이라 불리던 순박한 농사꾼이던 원범의 집이다. 그 원범이 바로 조선 제25대 왕 철종(1831년생. 재위 1849-1863)이다.
강화도행렬도(1849. 6. 24) 12폭의 병풍. 강화도령 원범을 맞아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역사기록화
철종은 정조의 아우 은언군(恩彦君)의 손자로 전계대원군 광(全溪大院君饍)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廉氏)이다. 당시 영조의 혈손으로는 제24대 국왕 헌종과 원범 두 사람뿐으로1849년 6월 6일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 : 純祖妃, 金祖淳의 딸)의 명으로 정조의 손자, 순조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19세의 나이로 등극한 철종은 학문과는 거리가 먼 농부였다. 1844년(헌종 10) 형 회평군 명(懷平君 明)의 옥사로 인해 가족들과 강화도에 유배되었고 그러던 중 별안간 한양에서 대신들이 몰려와 봉영의식(奉迎儀式)을 행한 뒤(당시 철종은 자기를 잡으러 왔는줄 알고 야산에 피해있었다고 한다) 6월 8일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이어 이튿날인 6월 9일 창덕궁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였다.
나이가 어리고 농사짓다가 갑자기 왕이 되었기에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1851년(철종 2) 9월 대왕대비는 같은 안동 김씨의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明純王后)로 맞아 김문근은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이 되어 왕비의 아버지로서 왕을 곁에서 보좌하니 순조 때 김조순에 일가에서 시작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계속되었다. 이들 안동 김씨는 장의동에 모여살아 장동 김씨 혹은 장김이라고 부르며 세도가 하늘을 찔렀다.
1852년부터 철종은 친정을 하였다. 특히 철종은 자신이 농부였기에 고단한 농부의 삶, 즉 백성의 마음을 잘 알기에 민생을 보듬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이듬 해 봄 관서지방의 기근대책으로 선혜청전(宣惠廳錢) 5만 냥과 사역원삼포세(詞譯院蔘包稅) 6만 냥을 진대(賑貸)하게 하였고 1856년 봄 여주에 화재로 고통받는 민가 1000호를 구호하였다. 또한 함흥의 화재민과 7월 영남의 수재지역에 내탕금 내려 빈민을 적극 구호하였다.
그러나 철종의 이런 행보와 달리 세도가 안동 김씨는 정권을 쥐고 정치를 마음대로 하였기 때문에 철종은 한계를 느꼈다. 특히 세도가 권신들은 임금인 철종을 면전에서도 스스럼 없이 능멸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철종이 의욕을 가지고 친정을 하려하자 그 반발로 결재시 올린 글에 점을 찍어서 선택하도록 하여 왕을 조롱하고 자신들 마음대로 선택하면서 정사를 주물렀다. 이렇게 한데는 철종이 당시 문서들이 한문으로 적혀있어 글을 몰라서 한 이유도 있었으나 그보다는 대놓고 임금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하고자한 것이다.
따라서 약화된 왕권에 비해 권력을 쥔 안동 김씨는 관리들의 인사권을 장악하고 과거 시험의 부정을 일삼으며 관직을 사고 파는 매관매직(賣官賣職)을 늘어나 정치기강이 무너졌다. 그래서 돈 있는 사람들은 한양의 권력자에게 돈을 바리바리 보따리로 싸서 바치고 벼슬을 샀고 과거 시험을 준비하면서 공부하는 초야의 선비들은 더욱 더 입신양명(立身揚名 입신=출세하여 이름을 세상에 떨침)의 길은 멀었고 사회 전반적인 불만이 내재하는 가운데 당연히 학문의 깊이는 얕아졌다.
당시 관찰사의 매관매직 가격은 10에서 20만 냥이 넘었고 수령은 대개 5만냥 이상을 받았다. 그러니 자연히 벼슬을 산 지방 수령들은 입신에 만족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바친 돈을 생각해서 그 곱절을 빼내고자 탐학과 갖은 수탈을 일삼았다. 따라서 세도정치기의 조세수탈은 지역과 계층 등 사회 전반적인 광범위한 문제였고 이 때문에 조세수취제도인 삼정(三政 : 전정田政-토지세·군정軍政-군포 군대 대신 납부·환곡還穀-춘궁기 때 빌려주고 가을 추수기에 받는 구휼 정책 후에 변질되어 일종의 고리대가 됨)이 더욱 문란해지고 탐관오리의 횡포가 극에 달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더욱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마침내 농민들이 전국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하였고 1862년 봄 진주민란을 시작으로 해 삼남지방(충청, 전라, 경상도)을 중심으로 전국적 농민봉기로 이어졌다. 그래서 당시 전국적 농민봉기를 임술년에 일어난 전국적인 민중봉기라고 하여 '임술농민봉기'라고 한다.
철종 땐 이미 세도정치가 극에 달해있었고 정부는 부랴부랴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이라는 임시 특별기구를 설치하여 민란의 원인이 된 삼정의 폐해를 바로잡기 위해 애썼다. 또한 모든 관료와 선비들에게까지 그 방책을 강구해 올리게 하는 등 민란 수습에 힘썼으나 세도정치의 폐해는 뿌리 깊었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여 삼정을 개혁하기 전까지는 해결될 수 없었다.
이처럼 세도정치기의 정치기강이 무너지고 백성이 도탄에 빠지자 경주의 몰락한 양반(잔반)이었던 최제우(崔濟愚)는 동학(東學)을 창시해 보국안민(保國安民 나라를 보호하고 백성을 평안케 한다)과 광제창생(廣濟蒼生 널리 백성을 구제한다)을 내세워 전국에 포교하고 확산되자 조정에서는 교주 최제우가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혹세무민惑世誣民)는 죄를 씌워 처형하였다. 이와 같은 동학은 교조 최제우가 서교(西敎:천주교)를 반대하며 '동쪽 나라인 우리 나라의 도를 일으킨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었고 2대 최시형(동학농민운동 당시 전봉준과 연합)을 거쳐 1905년에는 손병희(孫秉熙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독립운동가)에 의하여 천도교(天道敎)로 개칭되었다.
무지한 농꾼에 불과했던 사람이 안동 김씨 등 세도가의 무시 등 한많은 삶을 살다. 이듬해 1863년 12월 8일 재위 14년 만에 33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였다. 수용(睟容 : 임금의 畵像=어진) 4본이 천한전(天漢殿)에 봉안되었다.
슬하에는 궁인 범씨(范氏) 소생의 영혜옹주(永惠翁主)가 있고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급진개화파로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갑오개혁 때 친일내각을 이끌었고 일제에 협력한 친일파이다.)에게 출가했을 하였다. 시호는 희륜정극수덕순성문현무성헌인영효(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 묘호는 철종(哲宗)이다. 능호는 예릉(睿陵)(경기도 고양시 원당읍 원당리)이다.
골목 깊이 그리 크지도 화려하지 않은 용흥궁 대문 앞에 서면 대문 위로 '용흥궁'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용흥궁은 철종의 사저이자 잠저(潛邸-창업의 임금이나, 종실에서 들어온 임금으로서,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로 철종이 가난하게 유배됐던 강화도시절에는 초가였으나 왕위에 오르자 1853년(철종 4) 강화유수 정기세가 주변 가옥을 사들여 지금과 같이 기와집을 세워 용흥궁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일은 오늘날에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김대중 대통령이나 신채호 선생 등 그 집을 보수하고 꾸며서 당대 그 사람에 대한 권위와 존경에 대한 의미로 일종의 기념사업과 같은 것이다. 다만 철종은 보위에 올랐기 때문에 잠저를 왕을 상징하는 용이 흥한 궁이라고 하여 용흥궁이라고 이름을 붙였고 또한 왕의 권위를 위해서 원래 초가의 허름한 모습대로 꾸미지 않고 기와집으로 단장하였다.
이후 1903년(광무 7)에 청안군(淸安君) 이재순이 중건하였다. 이렇게 중건을 거듭하며 단장은 하였지만 왕이 살았던 곳같은 화려함보다는 철종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호화 사치와는 어울리지 않아 단촐하고 검소한 느낌이 많이든다. 철종은 강화도를 떠나 그 후로 한 번도 오지 못했다.
그가 유년기를 보냈던 강화에는 철종에 대한 애뜻한 이야기가 많이 전한다. 그중 원범과 양순의 사랑이 유명하다. 무지랭이 농사꾼 원범은 이웃한 양순과 스스럼없이 지내고 있었다. 둘이 정이 깊어질 즈음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이 찾아와 원범이 왕위 옹립되어 강화를 떠나게 되었다. 이 때 양순은 천한 신분으로 역적이자 한미하게 살아가는 원범과 정을 나누는 사이었으나 함께 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원범과 양순은 이별하게 되었다. 양순과의 이별에 대한 슬픔은 원범에게 큰 아픔이었고 하루아침에 왕위에 오른 원범 역시 조정에 일은 낯선 것으로 그 괴로움이 컸다. 이렇게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원범을 보다못한 대비전에서는 결국 원범이 마음을 잡지 못하는 것은 정인이었던 양순 때문이고 그래서 사람을 보내 양순을 죽였다. 이렇게 비극적으로 양순이 죽게되고 철종 역시 정사에 마음이 떠나 조정의 일을 그르치다 짧은 생애를 마감한다는 이야기다. 이는 실제 있었다는 것보다는 당시 역적이자 농사꾼을 살다 왕이 된 철종의 처지를 애뜻하게 여긴 백성들과 후세인들의 생각이 반영된 높은 관심으로 보인다. 이렇듯 철종은 백성들에게 친근한 왕이었고 불행한 왕이기도 하였다.
용흥궁 별전 서측에는 비각이 있는데 이는 강화유수 정기세가 세운 '철종조잠저구기(哲宗朝潛邸舊基)'라고 새겨진 비석이다. '철종조잠저구기'는 '철종 잠저 옛 터'라는 것이다.
철종과 강화도의 인연은 잠저구기비에서 보듯 각별한 것으로 1853년(철종 4) 5월 '내가 심도(沁都. 강화의 다른 이름)에 대해 늘 한 번 뜻을 보이려고 하였으나 실천하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강화에 대한 애착을 보였다. 따라서 강화 사람들에게 외방 별시(특정지역에서 인재 등용이나 격려 하고자 시행하는 과거시험)를 보기도 하고 묵은 세금을 탕감해 주었다. 이런 때 정기세는 용흥궁을 만들었던 것이다.
비각을 살펴보고 그 옆으로 시선을 돌리면 ㄱ자 형태의 별전이 있다. 별전이란 별도의 격이 높은 건물을 이르는데 일반 사가의 건물이라서 격이 높은 전이라는 느낌이 별도 들지 않는다. 일반적인 전은 왕궁의 정전(가장 큰 건물로 품계석이 놓인 뜰이 있어 각종 의례를 행하는 중요 건물)이나 편전(임금이 정사를 보는 건물) 혹은 사찰의 대웅전(부처님을 모신 불당), 서원의 대성전(공자님을 모신 사당) 등의 건물을 이르는 것으로 이곳 용흥궁도 궁이라는 명칭으로 딸린 건물의 격을 높여 별전이라 이른 것이다. 별전의 규모는 앞면 6칸, 측면 2칸 이다. 별전 마루 앞으로 작은 정원이 있고, 별전 오른쪽으로 조금 더 큰 정원이 있으나 화초를 심어 가꾸진 않았다.
별전을 나와 내전에 이르면 팔작지붕에 홑처마에 주심포(공포와 기둥이 한 개씩 짝을 이루는 구조)의 구조로, 앞면 7칸, 측면 5칸의 규모이다. 별전과 마찬가지로 내전의 오른쪽에도 우물이 하나있으나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때때로 방문한 아이들이 침을 뱉거나 이 물질을 넣는 것으로 볼 때 지하수 보호 차원에서 조치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한다. 내전과 함께 정면 6칸 측면 2칸의 바깥채와 행랑채도 볼 수 있다.
강화 고인돌이 중앙 고지에 위치하고 뒤에 보이는 산이 봉천대가 있는 봉천산이다.
강화읍에서 서북쪽으로 가다보면 하점면 부근리에 이르면 북으로 봉천산(291m)이 남으로 고려산(436m), 서쪽으로 별립산(399m) 등 높고 야트막한 산이 둘러쳐져 있는 넓은 분지가 나온다.
이 중앙에 강화의 대표적 문화재인 강화 지석묘 혹은 강화 고인돌이 있다.
강화 북쪽의 병풍을 두른듯 강화도를 굽어보는 봉천산은 예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조선시대 봉화를 올리던 봉천대가 있어 봉천산이라고 한다. 지금도 봉천대를 볼 수 있으며 특히 이 지역에서 가장 유서가 깊은 산은 남산에 해당하는 고려산이다. 이 고려산은 특히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 전설로 유명한데 1932년 박헌용(향토사학자) 쓴 속수증보강도지에 따르면 연개소문이 고려산 북편 시루미산에서 출생하였다고 전한다. 따라서 연개소문과 관련한 집터며 우물(오련정-연개소문이무예를 닦고 말의 물을 먹였다는 곳) 등 곳곳에 연개소문의 일화가 전하는 곳이 많다.
또한 이러한 연개소문의 연고성을 강하게 보이는 강화도는 다른 지역 산신각이 관우를 모시는 거와 달리 연개소문을 산신으로 모신다. 때문에 고려산은 예부터 산신제와 서낭제를 지내는 등 영산으로 숭앙되어 무속인들이 신내림을 받고 신을 모시는 신령한 산이다. 실제로 연개소문이 태어나서 자랐다고는 할 순 없지만 분명히 연개소문과 어떠한 것이든 연관이 있었을 것이고 이곳 고려산은 그러한 전설을 담기엔 충분한 공간이다.
이렇듯 강화도는 역사가 깊고 남달리 출중한 인물이 많이 나고 글이 깊다라고하여 '강화삼다(江華三多)'라 하였는데 연개소문에 대한 강화도의 애착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강화 고인돌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기념 표재석이다.
강화 지석묘='고인돌'는 세계문화유산(2000 유네스코 전북 고창, 전남 화순지역 고인돌군과 동시)에 등재된 세계적인 문화유적이다. 특히 강화 지석묘는 강화도가 일개 작은 섬이 아닌 역사가 깊고 오래된 지역이며 이곳이 예부터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대변해준다. 또한 강화 지석묘가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이라는 점에서 특히 서북방지역이 우리 민족의 최초 국가 고조선과 관련된 지역이라는 점에서 강화도의 고인돌 유적과 고조선의 단군왕검과 관련된 참성단(마니산 정상의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제단) 및 삼랑성(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성으로 현재는 정족산성이 남아있다) 등의 존재는 당시 이 지역과 세력이 단군 조선과 직간접적으로 깊은 연관이 있었을 것임을 말해주는 중요한 문화유적이다.
고인돌은 지석묘라고 부르며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무덤유적이다. 흔히 고인돌하면 선사시대의 원시인을 떠올리는데 이는 선사시대가 석기시대니까 돌로 만들어진 무덤을 석기시대의 유물로 생각하는 것이다.(고인돌이 다수 분포된 고창에서 고인돌 축제를 하는데 원시인을 모델로 한다.) 하지만 이는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원시인이 살던 시대는 작은 주먹도끼와 같이 석기를 사용하기는 했으나 대규모의 건축을 하지 못했고 또한 이 시기 사람들 사이는 평등했기 때문에 고인돌과 같이 거대한 돌로 만든 무덤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고인돌을 만드는 것은 계급이 존재하여 특정 지배층이 자신의 무덤을 만들었던 정치적, 경제적 우월성을 대변하는 상징물인 것이다.
이와 같은 고인돌은 그 형식(모양)에 따라 덮개돌을 양쪽 굄돌(고임돌)이 떠받치고 있는 탁자형(북방식=강화고인돌이 전형적임)과 양쪽 고임돌 없이 작은 굄돌로 놓고 커다란 덮개돌을 덮어 그 아래 돌널무덤(석관)을 만든 바둑판형(남방식=전북 고창, 전남 화순 지역 고인돌이 대표적임)이 있다. 또한 덮개돌만을 얹은 개석식(개석식은 굄돌이 유실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다.)이 있다.
탁자형 고인돌은 주로 북쪽지방에서 나오며 그 규모가 크고 소량이다. 반면에 바둑판형은 주로 남쪽지방에 나오며 그 수가 많고 무리(군집)를 이루는 특징을 가진다.
코스모스가 쌀쌀한 바람에 날리며 파르르 떨리는 것이 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고인돌 공원에는 원래는 큰 고인돌이었을 고임돌 일부와 청동기 시대 대표적인 주거 형태인 길고 네모진 모양(장방형)의 집을 재현하고 있다. 이와 같은 주거지는 청동기 시대 이르러 농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고 분업과 가족이 구성되고 마을을 이루는 시대상을 반영하여 점차 주거지도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 형태인 움집 형태에서 규모도 커지고 지상 가옥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이곳 고인돌 공원이 청동기 시대상을 정확히 고증하고 보여주는 공간으로는 많이 아쉬움이 남는다.
강화 고인돌이 있는 부근리에 이어 갑곶진으로 갔다. 가는 길에 도로 한켠에서 동리 아낙으로 보이는 어르신들이 파라솔에 의지해 노상을 하고 있었다. 커다랗게 쓴 글귀를 보니 '강화순무판매합니다'였다. 강화의 특산품이 순무라는 것을 처음 알았고 그 모양이 마치 양파같은 모양에 붉은빛이 도는 것을 보니 특이했다. 이 순무를 강화에서 나는 짭쪼름하고 담백한 새우젓에 고춧가루를 버무려 담그면 쌉싸름하면서도 시원한 순무김치가 된다. 순무는 우리 몸에도 이로운 성분이 많아 순무추출물로 혈액을 만드는 성분이 있어 혈액제를 만들기도 하는 매우 쓰임새 많은 먹러리이다.
강화의 명물 순무는 재밌게도 앞서 강화성공회성당에서 살펴봤던 통제영학당의 콜웰 대위와 인연이 깊다. 근대 해군창설을 위해 고종이 모셔온 영국해군 대위 콜웰은 강화읍에서 살면서 뒷마당에 영국에서 가져온 붉은 순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 순무가 우리 흰무와 섞이며 지금의 강화순무가 되었고 강화를 대표하는 특산품이 되었다니 근대사의 도도한 역사의 물결이 강화의 먹거리에도 닿아있음이 매우 흥미롭다.
갑곶진에는 현재 강화역사관이 위치하고 있으며(2010년 하점면 부근리 강화고인돌유적공원으로 이전 함) 그 앞에는 강화에서 발견된 무수히 많은 공덕비 및 선정비 등의 비석을 한데 모아놓고 있어 재밌는 볼거리가 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흥미를 끄는 비석은 금표禁標(금지나 경고를 나타낸 표지석으로 그 아래 법규를 적는다)로 1733년(영조 9)에 원래 고려궁지 앞에 세웠던 것으로 그 내용이 '방목축자장일백, 기회자장팔십'(放牧畜者杖一百, 棄灰者杖八十) 즉 '가축을 놓아 기르는 자는 장 100대를 재를 함부로 버리는 자는 장 80대를 때린다.’는 경고한 내용이다. 그 뒷면에는 ‘계축사월일립'(癸丑四月日立)이라고 쓰여 있다.
이처럼 금표를 하는 것은 일종의 경계의 표시로 출산을 한 집에서 금줄을 걸고 잡인의 출입을 막는 것과 같은 것으로 특히 조선시대 금표의 역할은 조선 왕조가 소나무의 보호에 특히 힘을 쓰면서 이곳 고려궁지 및 강화 유수부 지역의 소나무 숲을 보호하고자 한 것이다.
이처럼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조선의 노력은 1788년(정조 12)에는 '송금절목'( 松禁節目)같이 소나무를 보호하는 법규를 책으로 만들기도 하고 1838년(헌종 4)에 금송계에 관한 좌목(座目)인 '금송계좌목'(禁松契座目)처럼 마음마다 금송계라는 자치조직을 만들어 소나무 보호에 힘쓰기도 하였다.
따라서 금표는 바로 우리 조상들이 일찍부터 우리 주변환경을 보호하고자 무분별한 자연 훼손을 막았던 환경보호 노력의 표본이다.
강화 역사관의 정면 모습이다. 강화의 유구한 역사에 비해 전시수량도 적고 규모도 작은 박물관이다.
과거 외침이 많았던 강화도의 역사를 상징하듯 무기류가 많이 전시되어 있다. 위는 전통적인 우리나라 화포인 총통의 모습과 총통에 사용된 돌로 된 탄환이다. 그 아래는 화승총(일명 조총 강화 유물이 아닌 육군박물관에서 대여) 2정과 맨 아래는 쇠로 만든 철퇴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긴 쇠사슬에 날카로운 송곳이 솟아 있는 철환이 걸려있는 모습이 아니라 흥미롭다.
조선시대 무장의 갑주(외피는 없고 안에 바처입는 내피)와 신발, 그리고 투구이다. 투구의 모습도 챙이 넓어 TV에서 보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주요 무기들로 위는 각궁(뿔로 만든 활)과 칼(刀), 그리고 그 아래 삼지창과 언월도, 총통이 전시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 군이 주요 병장기로 사용되는 것은 활이고 개인 구비 장비가 칼과 창이다. 하지만 과거 전투시 병장기를 갖추기란 쉽지 않았다. 따라서 실제 전쟁이 벌어지면 칼과 창과 같은 병장기보다는 실제 농사에 이용되는 각종 농기구와 죽창, 나무창 따위로 대나무와 나무를 뾰족하게 깎아 사용하였다.
암행어사 절목이다. 강화역사관에는 암행어사 절목을 암행어사가 출두하여 그 소임을 마치고 보고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절목은 암행어사가 수행해야할 일을 적은 지침서이다.
암행어사는 조선시대 왕의 측근으로 당하(堂下 : 정3품 하계 통훈대부 이하로 편전에 들어 왕과 조회를 함께하는 당상과 구분되지만 고위 관료이다.) 관원을 지방군현에 비밀리에 파견한 왕의 특명사신으로1392년(태조 1) 의주 등 국경지역의 불법적인 월강무역(越江貿易강을 넘어 무역)을 금지시키기 위해 행대어사가 최초로 파견되었으며 이후 그 성과가 좋아 지속적으로 파견하여 수령의 무능과 비리 등을 시정하며 1892년(고종 29) 전라도 암행어사로 이면상을 끝으로 폐지된 제도이다. 암행어사가 폐지된데에는 지방 수령과 결탁하여 오히려 문제를 일으키며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지 못해 결국 폐지된 것이다.
암행어사의 일반적인 임무는 왕이 암행어사를 추천하라 이르면 의정부의 삼정승이 심의하여 선발하고 죽통(대나무통)에서 전국 군현의 명칭이 쓰인 가지를 뽑아 시찰지를 적은 봉서를 어사에게 내린다. 봉서는 받은 즉시 볼 수 없고(봉서는 암행할 군현을 적은 문서로 겉에 '도남모처개탁'到南某處開拆 : 남쪽 모처에 이르러 열어보도록 하라고 적음) 승정원으로 가서 사목(지침서 및 시찰 임무=절목), 마패(말이 그려져 있는 금속패로 암행시 역마와 역졸을 부릴 수 있고 모든 문서 및 신분을 증명시 인장으로 사용됨), 유척(임무 수행시 지급된 일종의 계량형 자로 이를 가지고 지방 창고를 감찰함)을 지급받고 암행을 떠났다.
암행어사는 항시 수행할 시종 2명을 대동하고 수령을 치죄하거나 논공(공을 논함)시 동헌의 대청으로 출두하는데 이때 역졸을 대동한다. 역졸은 동헌의 삼문을 두드리며 '어사출두야'를 외치고 어사는 동헌 대청에 앉아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때 어사의 권한은 지방 수령에 대하여 봉고와 파직을 할 수 있었다. 봉고는 관아의 창고를 닫아 임의로 수령과 향리가 행정권을 남용하는 것을 막는 것이고 파직은 지방관인 수령을 그 직위에서 해제하여 서울로 압송한 것이다. 이 때 감옥에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는 백성들은 풀어주었다.
임무를 마친 어사는 서계와 별단 1부씩 작성하여 보고하였는데 서계는 일종의 보고서이고 별단은 어사 본인의 임의로 작성한 문서로 서계를 보충하거나 폐정 개선책 등의 의견서로써 어사 본인의 역량과 식견을 담는 중요한 문서였다.
흔히 암행어사하면 떠오르는 것은 단연 춘향전의 이몽룡과 실존 인물인 박문수다. 박문수는 영조 때 문신으로 어사로 많이 알려져 그와 얽힌 일화가 민담으로 많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지은이는 모르지만 당시 백성들이 처한 힘겨운 상황에서 암행어사가 가지는 의미는 구세주와 같은 것이었고 그러한 민중의 열망은 조선후기 대표적 한글 민중문학인 춘향전에 반영되어 고스란히 백성들의 뜻을 담았는데 그중 극중 암행어사인 이몽룡이 읊었다는 시와 실제로는 지은이 미상으로 암암리 통용된 '원성가'라는 시가 유명하다.
원성가(怨聲歌)
금준미주(金樽美酒) 천인혈(千人血) 금동이의 좋은 술은 백성들의 피요
옥반가효(玉盤佳肴) 만성고(萬姓膏) 옥쟁반의 좋은 안주는 백성들의 기름이다.
촉루낙시(燭淚落時) 민루락(民淚落) 촛물이 떨어질 때 백성들의 눈물 떨어지고
가성고처(歌聲高處) 원성고(怨聲高)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높더라
'국난', '외침' 등의 수식어가 반영하듯 강화도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섬이라는 방어의 이점으로 오랫동안 중앙정부인 조정과 왕이 피신하는 곳으로 중요하였다. 따라서 고려와 조선에서는 강화도를 중요시하며 이곳에 왕이 머물 수 있도록 행궁을 짓고 군량미를 보관하는 등 각별히 신경을 썼다.
이와 같은 강화도의 특성을 반영하는 재밌는 볼거리가 있는데 바로 수령 4백년이 된 탱자나무 그것이다.(위 사진) 일반적인 탱자나무의 식생은 난대성 식물로 우리나라 남부지방에 주로 서식한다. 그런데 강화도 해안에 탱자나무가 자란다는 것은 강화도의 기후가 온화하다는 반증이다. 그런데 이곳 강화도의 탱자나무는 자연적으로 자란 것은 아니고 외침과 방어가 중요했던 만큼 탱자나무의 가시가 철조망 구실을 하여 육지와 접한 염하가에 인위적으로 탱자나무를 심었다. 따라서 기록에는 탱자나무가 잘 자라는지 지방 관리의 보고를 받은 기록이 있다.
이처럼 탱자나무가 북한계선을 높였던 이유가 자연적인 것이 아닌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이루진 사실이 여간 흥미로운 것이 아니다. 마치 쌀농사를 짓지 못했던 만주 지역이 대단위 논농사 지역이 되었던 이유와 같을 것이다.
섬이었던 강화도가 육지와 연결된 것은 1969년에 강화대교가 개통되면서부터이다. 특히 강화역사관이 위치한 이곳 갑곶진은 고려 대몽항쟁 때 "갑옷만 벗어 메워도 물길을 건널 수 있다."고 하여 갑옷의 갑(甲)자와 곶(串)자를 합쳐 갑곶이라는 지명이 붙여졌다는 이야기가 전하며 육지에서 강화도로 들어가는 제일 가까운 곳이자 배가 정박하는 나루가 있었다. 그 반대쪽에는 문수산성을 설치하여 한강본류로 들어가는 제일 중요한 요충지인 이곳을 양쪽에서 방어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청장수 용골대는 이러한 지리를 이용하여 문수산성에 올라 강화도를 살피고 그 아래 민가를 헐어 뗏목을 만들어 강화로 건너갔던 곳이기도 하다. 병자호란 이후 강화 방비를 위하여 1644년(인조 22)에 여러 진을 설치하면서 갑곶진도 설치하였고, 이후 방어를 강화하고자 돈대(돌이나 벽돌로 높이 쌓아 망루나 포루砲樓로 사용하는 시설)를 1679년(숙종 5)에 축조하였다.
서울로 가는 수로로 중요했던 갑곶진은 이후 서구열강(병인양요-프, 신미양요-미)과 일본의 침략(운요호 사건)으로 파괴되었다. 일제시대를 거쳐 정부 수립이 이루어지도록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훼손된채 방치된 유적을 1977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유적이 정비되었다.
갑곶진에는 당시 조선군이 실제로 사용하던 화포가 배치되어 있다. 조선군의 화력이 되었던 화포는 흔히 '대포'라고 불린 홍이포로 포각으로 보호되고 있다. 포각에 보호되지 않는 포들은 재현품이다.
홍이포는 1604년 명나라 군대가 네덜란드와 전쟁을 치를 때 중국인들은 네덜란드인을 ‘홍모이(紅毛夷: 붉은 머리를 한 오랑캐)'라고 부르며 그들이 사용하던 대포를 ‘홍이포(紅夷砲)’라 부르게 된데서 유래하였다. 네덜란드와 싸움 당시 명나라군은 그 위력에 크게 압도되었으며 1618년 홍이포를 수입하고 1621년에 가서는 복제품을 만들었다. 특히 홍이포는 명나라군이 만주족(여진족)을 통일한 건주여진의 누르하치와의 싸움시 그가 이끄는 8기군을 격파하고 그를 부상을 입혀 죽음에 이르게 한 무기로 유명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인조 때 정식으로 들여오게 되었으며 네덜란드인으로 제주도에 표류한 벨테브레(박연-병자호란시 전투에도 참여하고 조선여인과 결혼하여 가계를 이었다.), 히아베르츠(병자호란 때 전사), 피아테르츠 (병자호란 때 전사)등이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조선군에게 홍이포의 제작법, 조종법을 가르쳤다.
강화도에 배치된 홍이포는 영조 때 만든 것으로 포구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한 다음 포 뒤쪽 구멍에 점화하여 사격하는 포구장전식 화포로 화약의 폭발하는 힘으로 포탄이 날아가나 포탄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통상요구를 하던 열강과의 싸움 때는 위력이 약했다. 길이는 2,150mm이고, 구경은 100mm이며, 사정거리는 700m이며 홍이포가 나올 당시에는 가장 크고 강력한 무기였다.
이밖에도 불랑기와 소포가 재현품으로 비치되어 갑곶포대를 지키고 있다. 불랑기는 처음 임진왜란 때 명군이 들여와 사용된 화포이며 불랑기라는 말은 중국과 교역을 하던 아라비아인들이 서양인을 파랑기(Farangi:中世의 Frank에서 유래)라고 말한 데서 유래한다.
조선에서는 임진왜란 이후에 만들어 썼으며 1628년(인조 6) 제주도에 표착(漂着)한 네덜란드인 J. 벨테브레(박연)와 그의 동료들의 공헌으로 화포를 제작하고 포술을 익혔다. 이러한 불랑기는 포탄이 터지는 인마살상용으로 홍이포보다 활용도가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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