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우리 역사와 함께한 강화도 3 (9월 청우역사탐험대)

달이선생 2010. 4. 8. 11:30

  차를 달려내려오니 너무도 익숙한 풍경이다. 교과서 사진으로 보았던 광성보.. 실제로 보니 가슴이 설렌다. 

 

 

   신미양요 당시 최대 격전지 광성보, 광성보는 우리 군 2~300여명이 주둔하던 중요한 거점이었다. 광성보의 정문인 안해루(按海樓)를 들어서니 홍예문 안쪽 천장에 황룡 한마리가 늠름하게 바라보고 있다.


 

  낯이 익는 광경이다. 어디서 봤을까? 생각해보면 학창시절 국사교과서는 물론 외세극복과 관련하여 보여지는 대표적 광성보의 사진구도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교과서에서 보던 모습을 그대로 그 구도로 바라보니 새삼 '이런 것이 답사의 묘미구나' 생각된다.

  돈대를 들어가려면 안해루 좌측으로 작은 사각의 문이 나있는데 그곳을 통해 들어가면 광성보 돈대가 나온다. 광성보 돈대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코스로 그 속에는 당시 격전에 사용된 화포는 아니지만 그 재현품인 대포(홍이포)와 소포, 불랑기 등이 전시되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 이해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포대에 설치된 것이 아닌 중앙에 전시된 형태이므로 당시 어떻게 화포를 운영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어렵다. 

  돈대의 구조는 강화도의 일반 돈대와 마찬가지로 둥근 타원형의 형태에 바깥에 석축을 쌓고 흙을 돋아 성벽을 두루고 성벽 위로 작은 담인 여장(성가퀴)를 쳐 타에 원, 근총안을 뚫고 타구로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아래 염하를 향해 포대를 구축하고 있고 중앙에 원형의 공간이 있다. 

 

 

  광성보의 모든 성곽은 현재 석축으로 구축되지 않고 보이는 것처럼 토성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원래를 석축으로 구축되었으나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훼철되거나 무너졌을 것이다.


 

  19세기 서구열강에 의해 서세동점(西勢東占)이 일어나던 암울한 조선 말..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도 더이상 조용할 수가 없었다. 결국 1866년 프랑스 해군의 침략인 병인양요를 시작으로 대동강에 들어와 행패를 부리다 불탄 미상선 제너럴셔먼호 사건, 독일인 오페르트의 남연군묘(흥선대원군 아버지) 도굴사건 등 서구 열강의 끊임없는 도발이 진행되었다. 모두가 문호를 개방하지 않고 쇄국(문을 닫다=통상수교거부정책)으로 일관하던 조선을 차지하고자 벌어진 일들이다.

  이러한 국난의 시기, 강화도는 조선의 문이자 조선의 아픔을 정면으로 겪어나갔던 곳이다. 병인년에 있었던 참혹한 기억이 채 가시기도 전에 1871년 신미년 또 한번의 대규모 함대가 조선을 향해 출격하였고 조선의 도읍인 한양을 거슬러 가는 길목인 강화도는 다시금 전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게되었다. 바로 미국과 싸운 신미양요다. 

  신미양요의 전쟁은 비참하였다. 당시 엄청남 사상자를 남기고 그 주검 조차 거두기 힘들었는데 그 때 나라를 위해서, 또는 가족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던 우리 조상들이 여기저기 주검이 되어 나뒹굴던 시신을 모아 작은 흙무덤을 만드니 바로 '신미순의총'이다. 신미순의총에는 7기의 무덤 봉분이 있고 신원을 파악하기 힘든 사람 등 사졸 51분의 시신을 모셨다. 당시 이름 없는 조선 각지의 포수(조총=화승총을 가지고 사냥을 하던 사람)들을 모아 군대를 조직하여 서구열강과  결전을 벌였으니 고향을 떠나 주검이 된 병사들은 누가 거둘것이며 그가 못돌아온들 그 가족들은 그 생사여부를 어찌 알았겠는가~~  원통하고 원통한 일이 또 어딨을까

  양지바른 터에 낮은 담을 친 신미순의총의 모습에서 맑고 푸른날 그 서러움이 더욱 북받친다. 힘약한 조선의 아픈 기억이..  

 

 

  쌍충비각은 중군장 어재연과 이름없는 95명의 순절병사의 광서파수순절비와 장군 어재연과 동생 어재순의 순절비로 1873년에 건립되었다. 조정에서는 이들의 공을 치하하고 제사를 지내왔으며 1970년부터 어재연 장군 후손들이 제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병인양요나 신미양요가 미친영향은 대단하였다. 이는 즉각적으로 조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대원군에게 더욱 그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게 되었고 그 결과 전국에는 이른바 '척화비'가 건립되었다.

 


척화비(척화비)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戒吾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계오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이라 적혀있다.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다.

 우리의 만대자손에게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


 

 

   강화 역사관 전시실 2층에 오르다보면 수자기(帥字旗)가 보인다. 수자기는 광성보 전투에서 중군장 어재연 장군의 장수기로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당시 광성보(廣城堡) 전투에서 미군이 전리품으로 가져가 미국 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이 소장해 왔다. 그 ‘수자기(帥字旗’)가 136년 만인 2007년 10월 장기 대여(10년) 형식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수자기는 깃발 한가운데 장수를 뜻하는 ‘수帥’자가 적혀  있어 조선 후기 중앙의 독립 군영 혹은 지방 군사조직의 총 지휘관이 있는 본영에 꽂는 깃발로 생각된다.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때 왕명으로 진무영(鎭撫營) 부지휘관인 중군(中軍)에 임명된 어재연(魚在淵1823~1871) 장군은 진무사(鎭撫使)의 명으로 광성보(廣城堡)를 본진(本陣)으로 하여 수자기를 걸고 싸웠다.

  이 전투에서 미군의 근대적인 군사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광성보가 함락되었지만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350여명의 조선군이 전사하는 치열하고 끈질긴 저항에 미군은 결국 퇴각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강화도의 진무영(鎭撫營)에 내걸렸던 수자기는 미군이 전리품으로 가져가 미국 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왔다가 136년 만에 귀환하게 되었다.
          



수자기는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보여 주는 역사의 한 단면이자 강압에 의한 개항을 거부한 조선왕조의 의지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장렬하게 싸우다가 전사한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수많은 조선 병사들의 용기와 불굴의 정신을 상징한다. 엄혹한 세계정세 속에 놓여 있던 조선 말의 급박했던 시대상을 생생하게 느끼고 역사의 어제와 오늘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작은 야산과 같은 소나무 숲 길을 가다보면 손돌목돈대가 나온다. 광성보돈대와 함께 손돌목돈대, 가장 아름다운 외관을 자랑하는 용두돈대 등 광성보는 강화도 나들길인 '호국돈대 길' 코스이기도 하다. 제주도의 올레길, 지리산의 둘레길이 있다면 강화도는 나들길이 유명한데 이곳 광성보는 나들길 코스인 '호국돈대 길'의 출발지이다.

 

 

 

  손돌목돈대도 여는 돈대와 마찬가지로 그 형태가 타원형이며 주요 시설의 구조와 모양이 같다. 이곳 손돌목돈대는 신미양요 당시 미해병과 치열한 백병전이 이루어진 격전지이다.


 

  바라다보이는 곳이 손돌목이다. 목이란 바닷물이 돌아나가는 곳을 뜻한다. 손돌목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경위는 두 가지 설화가 존재한다. 대체적으로 그 주요 내용은 나라에 전란 시 임금이 피난을 와서 강화로 들어가고자 배를 타려는데 물쌀이 빨라 쉽사리 건너지 못하자 이곳 물길을 잘 아는 손돌이라는 사람을 불러와 배를 띄어 노를 젓게 하니 손돌이 여울쪽으로 뱃길을 잡았다. 혹여 자신을 해하고자 손돌이 그런다고 생각한 임금은 손돌을 죽이라고 명하였다. 억울한 손돌은 "여울쪽인 안전하며 만약 정히 믿지 못하겠다면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그걸 따라가면 된다"고 하고 죽임을 당했다. 손돌을 죽이고 마땅히 건널 방법이 없자 조급한 맘에  그의 말대로 바가지를 띄우고 바가지를 따라가니 무사히 바다를 건널 수 있었다. 이에 억울하게 죽은 손돌을 위로하고 그 은혜에 잊지 않고자 제사를 지냈고 이후 광성보 앞 여울을 손돌목이라고 불렀다는 고사가 전한다. 이와 같은 고사가 고려 때 몽골의 피해 고종이 피난을 와서 일어났다는 설과 후금의 처들어온 정묘호란 당시 인조가 피난을 왔다가 일어난 일이라는 설 두 가지가 있다. 정확히 어떤 이야기가 맞는지는 모르나 당시 극박했던 전란의 위험과 무능하고 사람을 잘 믿지 못하던 임금과 지배층의 허위의식을 비판하는 것만은 확실할 것이다.

 

 

 

  울돌목을 향한 광성포대의 전경은 마치 야전을 방불케하는 은폐시설이다. 염하에서는 도무지 포대의 위치를 가늠하기 힘들지만 아군 진지에서는 정열된 진지구축으로 화력을 집중할 수 있는 효율적 방어시설이다. 현대의 야전포대 시설을 보는 것  같다. 조선 말 외세에 맞서 불을 뿜었을 광성포대 그곳에는 힘없고 무지한 백성이 강인한 정신으로 서있었다. 목숨마저도 던질 수 있었던..

 

 

  광성보에서 가장 아름답고 운치있는 돈대로 손꼽히는 용두돈대(龍頭墩臺), 용두돈대의 용두는 용의 머리를 뜻하며 돈대가 마치 용의 머리형상을 닮았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용두돈대에서는 울돌목과 염하가 한눈에 조망된다. 돈대 아래 바닷물이 들고 나는 기암괴석이 인상적이다.

 

 

 

  강화의 돈대 유적이 본격적으로 복원되는 것은 1977년 강화중요국방유적복원정화사업이 시작이다.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는 강화의 중요유적을 정비하고 그 사업을 기념하면서 용두돈대 안에 자신의 친필로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를 세웠다. 유적복원사업상 의미있는 역사복원이라는 점에서는 기꺼운 일이나 용두돈대 안에 덩그라니 놓인 기념비는 유적를 단순한 조형물 내지는 관광에 지나지 않다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마치 정권의 나팔수 마냥 얼굴마담이 된듯이.. 

 

  

용두돈대를 돌아나오면서 바라본 모습이다. 저 숲속에 광성포대와 손돌목돈대가 있다.


 

  강화 초입에서 외롭게 외세에 맞서 싸운 초지진. 초지진은 알려진 명성과 달리 그 현재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 없다. 단순한 돈대만이 덩그란히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지진이 가지는 역사성은 매우 깊다. 특히 조선이 문호개방을 하고 본격적인 개화를 시작한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바로 강화도조약의 빌미가 되었던 '운요호(운양호)사건'이 일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1875년 9월 20일(고종12) 일제(일본제국주의)는 측량을 구실로 군함 운요호를 조선에 보내어 초지진을 파괴한다. 이는 일제가 조선에서 자신의 영향을 확대하고자 한 의도이며 메이지유신 이후 문명개화에 박차를 가하던 메이지 정부의 강한 의지였다. 아쉽게도 그 의지는 '정한론', 즉 '한국을 정벌한다.'라는 생각이었지만..

  이와 같은 일제의 방식은 이미 자신들이 미국 페리제독에 의해 문호가 열리면서 경험했던 '함포외교'의 전철을 답습하고 고스란히 조선에 적용한 결과였다. '함포(포함)외교'란 당시 제국주의 열강(서구열강)에서 일반적으로 널리 쓰인 강압외교 방식으로 무장한 군함을 보내 함포로 포격을 가하며 약소국을 위협하여 자신들의 요구사항(문호개방=통상)을 관철시키는 외교였다.

  결과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은 통상수호에 반대였던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시기와 맞물려 드디어 빗장을 열게되었고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병자수호조규(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다. 


 

  초지진에 명물이 된 소나무이다. 소나무에 흰색으로 그린 원은 포흔으로 운요호 사건 당시 일제의 맹포격으로 소나무 가지가 상한 자리라고 한다. 두 그루의 소나무에 포흔이 여러군데 있는데 특히 그 포탄흔적이 현재 염하쪽인 아닌 강화도 들판을 향한다는 것이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포흔자체만도 신기하여 별 생각이 없지만 설명을 듣다보면 포흔이 생긴 위치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특히  함포사격에 의한 흔적이라면 함포는 배에서 쏘는 것이고 그렇다면 배는 바다로 다니는 것인데 포를 쏜 위치는 초지진 앞의 너른 들판에 해당함으로 이와 같은 일이 성립될 수 없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그러나 그 의문은 의외로 간단하다. 현재의 초지진 앞의 들판이 모두 매립된 간척지라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이 너른 들판에 바닷물이 들고 나던 갯벌과 바다였고 그래서 운요호가 그곳에서 초지진을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답사를 하다보면 의외로 그 유적지의 환경이 심하게 변하여 본래의 취지를 벗어난 경우가 허다하다. 예를 들어 동학농민운동의 원인이 되었던 만석보 자리에 보가 없고 후대 기념비만 있다던지, 혹은 충주 청풍문화단지처럼 댐으로 인해 수몰지구가 되어 본래 위치를 이동하여 호숫가 옆에 문화재를 보존하게 한 사례만 들더라도 본래적 의미는 상당히 퇴색된 경우도 있다. 하지만 초지진은 본래적 의미의 퇴색까지 생각하기 보다는 강화의 과거와 오늘을 가늠해볼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대규모 간척이 고려 때 시행되고 지금껏 이어지며 오늘날 넓은 섬이 되었으니 말이다.

  답사는 본래적 의미를 찾고자 현장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장에서 현재적 의미를 읽고 그 변화를 역으로 본래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찾아가는 것도 역사적 상상력을 펼치며 흥미를 돋우고 탐구도 할 수 있는 소중한 역사탐구의 장은 아닐까

  

 

  우리가 초지진을 지키던 조선군이라면 바라다 보이는 곳이 운요호가 정박했을 위치이다. 바로 저곳에서 우수한 근대적 함포로 무장한 일본군함이 우리의 초지진을 갈갈이 찢고 부수고 황폐화시켰다.  

 

 

 초지진도 여느 돈대와 마찬가지로 타원형의 돈대를 구축하고 있고 그 문 역시 사각의 문으로 구성된 요새이다. 

 

  초지진은 널리 알려진 만큼 중요한 유물도 전시 중인데 과거 초지진에 사용하던 대포(홍이포)가 포각을 씌어 전시하고 있다. 광성보에서 봤던 노천에 놓인 화포들은 모두가 재현품이라서 지붕과 같은 보호 시설까지는 없었는데 초지진의 화포는 실제 화포로 지붕을 씌운 포각 안에 있다. 돈대나 유적을 다니다가 포각을 본다면 그 포각 안에 있는 화포는 실제 화포이다.  


 

  강화대교를 건너 눈비비며 처음 찾았던 강화에서 정신없이 둘러보고 초지대교를 건너 집을 간다. 말로만 듣던 역사를 실제 그 역사적 장소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며 과연 강화가 '역사의 섬'이자 우리나라 역사의 축소판은 아닌가 생각을 하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