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과거의 그늘과 현재의 연해주1(우수리스크)

달이선생 2010. 6. 20. 08:00

  연해주는 한반도의 두만강 건너 넓은 지역을 이르는 말이다. 연해주는 현재는 러시아의 영토에 포함되어 우리의 역사에서 우리의 관심에서 벗어난 매우 이질적이고 이국적인 곳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말한다.

 

"연해주는 비행기로 2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아주 가까운  거리지만 그보다도 훨씬 마음의 거리가 있다."
                                                                          - 동북아평화연대 김승력 연해주지국장 -

 

  연해주를 찾은 것은 대안학교인 마리학교 성장기(고등과정) 길잡이 교사로 해외이동수업을 진행하면서이다. 이동수업의 주 내용은 '러시아 연해주 고려인 마을 자원활동'이었다. 사실 자원활동을 주로 하고 그 외에 특별 프로그램으로 지역탐방을 고려하였으나 역사를 공부하고 역사적 지식에 목마른 나는 연해주의 역사와 연해주의 오늘이 더욱 잡아당겼다.

 

  2010년 6월 14일부터 26일까지 총 12박 13일에 걸친 연해주 이동수업은 그곳의 역사와 직접 맞닿는 희열이었다. 역사를 공부하며 현장에서 느끼는 감정은 나에게 언제나 큰 자극이 된다. 나에게 영감을 주고 나를 깨우는 힘이랄까..

 

  연해주.. 연해주는 한자풀이로는 물길따라갈 연(沿)에 바다 해(海) 고을 주(州)를 쓰며 '바다 가까이 있는 주'라는 의미이다. 과거 블라디보스톡에서 해삼이 많이 난다고 하여 우리에게 '해삼위'라고도 불렸다. 제정러시아 때는 담비 가죽이나 등등의 원인이 되어 서서히 시베리아로 세력을 뻗치며 "동방(블라디)을 정복(보스톡)하라"라는 블라디보스톡을 건설하여 본격적인 시베리아 개척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연해주는 만주와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의 옛터전이자 현재도 우리 민족인 고려인 동포사회가 건실히 지키고 있는 우리의 영역이자 삶이다.

 

  연해주의 총 면적은 한반도와 비슷하거나 조금 작고 인구는 200만에 못미치며(지금도 서서히 줄고 있어 러시아 정부의 고민이 깊다) 주도는 블라디보스톡이다. 주요도시는 우수리스크, 나후도카가 있다. 고려인 동포는 4만명에 이르며 러시아 슬라브, 타타르 족에 이어 그 수가 많다. 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각국의 정치, 경제적 사정에 따라 많은 고려인 동포들이 조상들의 옛터전인 연해주로 재이주하고 있어서 조만간 안정적이고 규모가 확대된 한인사회가 구축될 것으로 보여 잠재력이 매우 높은 곳이다.

 

  우리가 탐방한 지역은 오랜 한인들의 이주지역이었던 우스리스크시와 연해주 주도인 블라디보스톡시이다. 우수리스크는 '우수리'라는 오로치 토착부족의 말로 오로치족은 이곳의 오랜 주인이었던 말갈, 혹은 여진, 만주족으로 불린 이들이다. 우수리의 어원은 이곳 우수리강 지형이 마치 화살촉 모양과 같아보여 부른 말이며 러시아어의 '스크'라는 도시 명칭이 붙어 여느 러시아 지명과 달리 순수한 토착 느낌의'우수리스크'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우수리스크(니콜리스크)는 연해주에서 시베리아횡단철도와 중국의 수분화, 동녕, 훈춘 등과 통하고 동해까지 열려있는 연해주 교통, 통신의 중심지이며 물류의 집산지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일찍이 고대 국가 발해시대부터 지역의 중심지였고 과거 발해의 5경 15부 62주 중 솔빈부가 위치했던 역사와 문화의 유례가 깊은 곳이다. 그런 연유로 고구려 이성체제로 우스리스크에도 내외성을 갖춘 토성이 시내와 서북쪽에 각각성터가 있어서 우리 조상들은 이곳을 쌍성자(雙城子)라고 불렀다. 발해의 솔빈부의 특산품은 말이었다. 넓디넓은 초원을 바라볼 때면 왜 말이 특산품이었는지 단번에 알 수 있다. 지금도 초원에는 말이며, 소며 목축이 이루어진다. 

  우수리스크의 환경은 넓은 평원과 작은 하천 및 늪지대, 호수가 많아 땅이 기름지고  돌이 없는 천혜의 자연조건을 가진 기회의 땅이다. 이런 우수리스크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우리 조상들 역시 농업을 조건으로 대거 이주하여 정착하고 한인사회의 기초를 닦았던 곳, 역시 우수리스크이며 그 결과 현재 고려인 재이주 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어 살고 있다.   

 

 

발해로

 

  속초항 여객터미널에 지리한 기다림을 그치고 드디어 출항이다.

 

  뱃고동이 시간두고 두 번 길게 울리더니 짧게 한 번 더 울린 뒤 배가 출발했다. 뱃머리가 먼저 동으로 향하고 늦은 밤 북쪽을 향했다. 낮에 선상에 올라 해를 등지고 가는 것을 확인하고 밤이 되어 선수에서 하늘을 보니 카시오페이아와 북두칠성 별자리 사이로 북극성이 보이므로 배가 북쪽을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연해주는 북쪽이다. 그러나 북으로 바로가지 못한다. 남북분단에 따라 군사분계선에 해당하니 공해상으로 멀리 돌아가야했다.

  

   "망망대해 사방이 수평선이고 뱃머리에 파도가 부서지며 고요했다. 밤사이 배가 요동친다. 밖에 나가 선미에서 바람을 쐬니 좀 나아진다. 지금 가는 이 길이 옛사람 발해인의 길이다. 그 길을 간다. 검은 바다 흰물결짐을 보며 그 사람을 생각한다. 잡을 수 없는 그 사람을 떠나오면서 가장 마음 쓰이고 뒤돌아 보게 된 사람..-일기중에서(중략)-"

  

 20시간이 넘는 긴 항해로 선실에서 들었던 생각이다.  오후 2시 45분에 출발한 뉴동춘호는 다음날 10시 40분경 연해주 첫 기항지 자루비노항에 도착했다. 자루비노는 작은 어촌에 불과했으나 한국과 러시아의 문호가 개방되면서 많은 화물이 선적되고 푸는 무역항이 되었다.

 

"연해주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다. 작은 관목과 초목이 어우러진 숲, 그리고 넓은 평원, 연해주는 이웃 하얼빈의 만주벌판과 유사한 풍경이다. 곳곳에 하천이 흐른다. 석회수라 마시기 어렵다. 아직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가능성의 땅, 연해주..

  자루비노에서 라즈돌로에로 가는 길은 초목이 우거진 인적이 드물고 호랑이가 출몰하는 곳이라 한다. 포장과 비포장도로를 2시간이 넘게 달렸다. 엉덩이가 쑤신다. 세계기네스에 등재될 정도로 이색적인 긴 마을 라즈돌로에, 제정러시아의 군사주둔지였던 마을이 시베리아횡단철도의 지선이 놓이면서 철도역이 세워지고 마을이 커졌다. 라즈돌로에.. 1937년 한인강제이주가 단행된 가슴 아프고  수많은 사람의 피눈물을 뿌린 곳이다. -일기중에서(중략)-"

 

 

 

 

  라즈돌로에역은 스산했다. 많은 한인들이 1937년 소련의 스탈린에 명령으로 대거 이곳에 열차객차도 아닌 화물칸에 지붕 위까지 실려 멀고먼 중앙아시아(카자흐, 우즈베크스탄 일대)로 쫒겨갔다. 이처럼 우리 한인들의 아픈 역사가 깃든 곳이라는 의미가 있었지만 우리말고 저들에게는 의미있는 역사가 아닐테다. 자기들 슬라브도 수많은 외침과 대응으로 많은 생명들이 값없이 사라져 갔으니..

  동네 꼬마 몇몇이 즐겁게 뛰어놀고 있어 반갑게 인사하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러시아 연해주 이동수업 인증샷^^

 

 

 

   우리가 주로 머물며 자원활동을 했던 지역은 우수리스크이다. 연해주하면 의례 블라디보스톡이 떠오르기 마련이지만 구한말 조선을 떠나 우리 선조들이 정착한 곳은 농사짓기 좋은 넓은 평원이 있는 우수리스크지역이었다. 현재 우수리스크시는 연해주에서도 대표적인 도시이며 중앙아시아를 떠나 다시 고려인들이 정착하는 1순위의 땅이다. 그래서 현재 한인의 수도 제일 많으며 러시아 연해주지역 최초로 고려인문화센터도 건립되어 위치하고 있다.

   우수리스크의 관문은 우수리스크역이다. 러시아의 역들의 특징은 역 앞에 광장이 있고 그곳에 레닌의 동상이 우뚝 솟아있다는 것이다. 역에서 나와 시내 중심가로 이동하다보면 꺼지지않는 불이 있다. 다름 아닌 러시아혁명기념탑 앞의 불을 말함이다. 비가 많이 와도 항상 불꽃이 인다고 하니 혁명에 대한 추념이 얼마나 강렬한지 알 수 있다. 이 기념탑의 뒤로 병풍처럼 우수리스크에서 러시아 소비에트혁명을 위해 숨져갔던 러시아 및 여러 민족 열사들을 이름이 빼곡히 적혀있다. 잘 찾아보지는 못했지만 이곳에 터를 잡고 러시아혁명에도 이름을 날렸던 민족이니만큼 우리 조상들의 흔적도 남아있을 것이다.

 

 

 

   솔빈강, 중국어로는 수이푼강이라고 불리고 러시아어로 로잔느돌로에이다. 솔빈이 중국말로 음차되어 수이푼이라고 불리게 되었을 것이다. 솔빈이란 말은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단번에 발해를 떠올릴 것이다. 이 솔빈이 발해의 행정구역인 5경 15부 62주 중 한 부이고 특히 말이 많이 생산된다고 기록에 나타나는 지역이다.

   지금도 드넓은 평원에 목초지가 발달한 모습에서 충분히 가축사육에 적임지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말을 방목하는 곳을 쉽게 볼 수 있다. 이 솔빈강은 우리나라 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1870.12.7-1917.3.2)과 관계가 깊은 곳이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

                                       - 이상설 유언 -

 

  바로 1917.3.2일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 선생의 유언에 따라 그의 시신을 화장하여 재를 뿌린 곳이다. 이러한 연유로 그 자리에 러시아정부의 협조를 받아 고려학술문화재단에서 2층 기단의 비석을 세웠다. 이처럼 이상설 선생의 비석이 세워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러시아의 이상설 선생에 대한 평가가 반제국주의 영웅이었기에 가능했다.

  이상설 선생하면 따라다니는 것은 '헤이그특사'이다. 헤이그특사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듯 선생께서 우리 독립운동사에 미친 영향이 크며 우리들에게도 매우 친숙하다.

    선생은 충북 진천군 덕산면 산직마을 경주이씨 집성촌에서 아버지 이행우 선생과 어머니 벽진 이씨 사이에서 맏이로 태어났다. 7세 때 이용우의 양자로 들어가 서울로 가서 한학을 공부하고 독학으로 신학문을 깨우치는 등 남다른 재능과 학문에 대한 열의가 있었다. 1894년 마지막 갑오문과로 입신하고 이후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따른 반대 상소를 시작으로 을사늑약 파기 및 을사오적 처단 상소, 민영환 등의 자결에 따라 자신도 자결을 시도하는 등 항일운동을 본격화 하였다. 1906년 만주 용정으로 망명하여 서전서숙을 세워 민족교육을 하는 한편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위종과 고종의 특사자격으로 참석하여 을사늑약과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알렸다.

   그러나 일제의 방해로 성과가 지지부진한 채로 헐버트, 이위종, 송헌주, 윤병구 등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유럽순방을 하고 미국에 머물며 연해주 대표로 애국동지대표자회의에 참석하여 1909. 4월 대한인국민회를 창립하였다. 이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 돌아와 항일독립운동기지론에 입각한 한인 집단촌인 신한촌을 개척하고 연해주와 북간도 및 국내까지 아우르는 의병세력을 집결시켜 13도 의군을 조직하였다. 이때 고종의 아령파천을 추진하여 망명정부를 세우고자 기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한일강제병합)을 당하자 연해주 한인동지들을 규합하여 성명회, 이어 권업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일제가 러시아에 압력을 넣어 모두 해산되었다. 1914년 연해주 지역에 최초의 망명정부라 할 수 있는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하고 정통령에 1915년 박은식 등과 신한혁명단을 조직하고 본부장이 되어 국권회복과 항일운동에 전념하다.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에서 순국하였다.   

  이런 선생의 됨됨이를 일찍이 안중근 의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상설의 포부는 대단히 크다. 세계 대세에 통하고, 동양의 시국을 간파하고 있다. 여러 차례 만나서 그의 인물을 보니 기량(器量)이 크고 사리(事理)에 통한 대인물로서 대신(大臣)의 그릇됨을 잃지 않는다. 이상설은 재사(才士)로서 법률에 밝고 필산(筆算)에 통달하고 영불일어(英佛日語)에 통한다. 애국심이 강하고 교육발달을 도모하여 국가백년대계를 세우는 사람은 동인(同人)일 것이다."

 

  비석의 2층 문양은 태극과 불꽃을 음각하여 선생이 저승에서 편히 쉬길 바라는 염원을 담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우수리스크 탐방에는 동북아평화연대 연해주지부 김승력 국장님이 함께 해주셨다.(이상설유허비 우측 설명하는 분)

  멀리 솔빈강의 건너편으로 우수리스크의 발해성이 보인다. 이 수로가 과거 자연적 해자의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마치 초원의 구릉과 같은 민둥산을 올라갔다. 말을 해주지 않았다면 이곳, 우리가 발디디고 있는 이 자리가 성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을 것이다. 대관령목장의 목장길을 오르듯 오르니 우수리스크에 위치한 발해성, 그 토성의 외성 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과거 우수리스크에 들어와 살던 우리 조상들은 이 지역을 쌍성자(雙城子)라고 불렸다. 이는 현재 우수리스크 외곽에 위치한 발해성과 함께 시내에도 동일한 토성이 존재하여 이 두 성의 위치하여 그렇게 불렀다.

 

  이 발해성은 토성으로 이루어져 고구려의 일반적 성곽과 차이가 있다.  고구려의 일반적인 성곽은 만주 서부와 한반도 북부의 산악지형에 위치하며 토성이 아닌 돌로 쌓은 석축성이 발달하였다. 이와 달리 우수리스크의 발해성은 넓은 평원지대이며 돌을 쉽사리 구하기 어려운 자연조건이다. 다만 이 발해성의 구조는 고구려 성곽의 방어체제를 고스란히 따르고 있다. 특히 쌍성자라고 불리듯 두 성은 고구려의 일반적인 방어체제로서 평지성과, 산성을 구축하여 평상시 평지성을 통해 행정과 생활의 지역거점이 되고 비상 시에는 산성에 모여 방어를 했던 특징을 보여준다. 다만 시내의 성지를 확인할 수 없어서 단정할 수는 없으나 시내에 위치했던 성은 평지성의 기능을 했을 것이고 우리가 찾은 이 발해성이 산성의 특징을 가진 주된 방어성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방어성이지만 성곽의 둘레가 상당히 넓은 것과 주변지역이 너른 평지이기에 평시에도 생활을 했을 것이다.)

  

  우리 고구려는 성곽을 잘 쌓는 민족이었다. 그 전통에 따라 우리나라는 성곽을 잘 축조하였는데 그 큰 특징이 바로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한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고구려 여러 성곽에서도 나타나며 특히 현재의 토성의 특징은 서울 한성 백제의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에서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발해성도 솔빈강을 자연지세로 이용하여 해자로 삼았고 구릉이 진 곳은 흙을 깍아 경사를 급하게 하고 경사가 없고 완만한 곳은 흙을 돋아 성벽을 높이 쌓았다.

 

  토성을 쌓는 방식(판축)은 일정공간을 흙, 자갈, 석회, 또는 소금, 재 등을 마치 시루에 떡가루와 고물을 켜켜이 쌓듯 촘촘히 기구를 이용해 다지는 방식으로 만들어 매우 견고하였다. 흔히 우리 주위에 남아있는 토성 대부분이 이러한 방식을 따르고 있다.

  현재 발해성은 마을 주민들이 주거지와 목초지로 사용되고 있어 문화재 보존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발해성의 구조는 외곽을 두른 외성과 그 안에 내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발디딘 곳은 발해성 외성에 해당하며 그 외벽 위쪽에는 토성의 방어시설인 참호(북참)가 둘러져 있다.(마지막사진의 도랑같은 모습) 이 참호는 군사들의 방어공간으로 석축성에 보이는 여장(성가퀴-성곽위의 낮은 담장)과 같은 것을 대신하는 시설이다. 깊이는 대략 1m가 넘고 너비는 2m가량이다. 흙으로 이루어진 구조물이기에 당대의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다. 다만 방어적 성격에 따라 유추할 뿐이다.  

 

 

 

  우리가 오른 발해성은 서북쪽 성곽으로 성벽으로 치면 서벽에 해당한다.(성곽의 벽은 바라볼 때 해당방위로 표기한다) 그 아래를 내려가 서벽의 위용을 살펴봤다. 그 높이 대략 10여미터를 웃돌고 경사가 가파르다. 앞에 보이는 넓은 평원은 만주를 향하고 있어 내달리면 요동, 요서, 화북, 중원에까지 이르게 된다.

  과거 이곳을 지키던 발해 병사들은 항상 이곳에 서서 멀리 이 평원을 주시했을 것이다. 당나라의 침략군이든, 북방의 거란 등의 유목민이든 다 이곳으로 몰려들었을 테니까 이처럼 우수리스크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였다. 만주와 연해주를 잇고 시베리아와 한반도, 나아가 바다건너 일본(왜)까지 연결되는 중요한 중심부의 거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외성에서 내려와 1~2km 안쪽으로 차량으로 이동하니 둥근 원으로 환호를 파고 그 위에 흙을 돋어 흙과 석재 따위를 켜켜이 쌓고 다진 판축을 해서 쌓은 내성이 나타났다. 차를 타고 무심결에 지나쳤던 숲이 우거진 구릉이 내성이었던 것이다. 내성 역시 외성과 마찬가지로 독립적인 방어시설로 해자와 같은 기능을 한 환호(내성벽 바깥 아래)를 둘렀다. 환호의 깊이는 성벽이 많이 무너져 2m남짓이었고 그 너비는 4~7m로 너른편이었다.

 

 

 

  둥근 원으로 돌아가는 내성의 위쪽 부분과 성안이다. 이 내성의 구조도 고구려성의 특징을 따르고 있다. 또한 외성에서는 확연히 확인할 수 없었던 치가 발달해있는데 치란 완만한 성곽둘레에 돌출되게 만들어 방어를 용이하게 하였던 우리 민족 고유의 성곽구조물이다.  내성 위로 참호를 두르고 있다. 초여름 발해내성을 직접 다 돌아보고픈 욕심이 컸으나 이미 이곳의 주인으로 사람들의 방문을 흔쾌히 반기고 있는 모기 떼로 인해서 잠깐 둘러보고 줄행랑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연해주는 기후가 서늘하고 활동하기 좋은데 특히 집에는 모기가 없어서 잠을 자기가 좋았다. 하지만 숲이 우거진 곳에는 모기들이 마치 하루살이 모이듯 들끓고 있어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다. 잠시 잠깐이었지만 옷조차 뚫고 들어오는 모기의 침으로 어느 새 온몸이 욱신거리고 간질거려 혼났다. 

 

                                                                                   

                                                                                          

 

발해 토광묘 발굴과 출토유물

 

 

  우수리스크 지역은 발해의 역사의 중심지이다. 우리 역사에서 발해가 외면되고 우리 스스로 선조의 역사를 모르고 있을 때 특히 발해성 역시 우리 민족이 만든 성으로 확인될 수 없어 대개 금나라 혹은 거란의 유적으로 오인되었다. 그런데 다행히 최근에 러시아의 고고학적 유물조사로 성내 치의 존재와 고구려 및 우리민족 특유의 난방시설인 구들(온돌)을 발굴, 확인으로써 현재의 많은 성들이 발해의 성으로 밝혀져 발해의 영역과 고구려의 문화를 계승하고 특성들이 하나하나 밝혀져 발해가 우리 민족국가임이 확인되고 있다.

 

 

 

  차량을 통해 우스리스크 시내에 들어와 우수리스크의 대표적인 공원에 들렀다. 공원은 '천년거북바위 공원'으로 불리고 있었다. 공원이라는 말에 무슨 큰 바위가 거북의 형상을 하고 있겠거니 생각하고 들어와서 보니 거북은 거북이나 바위는 아니었다. 혹여 거북의 형상으로 만들어지기 전에 바위였을 수는 있겠으나..

  러시아는 그 영토가 동서로 길게 늘어져 있으며 다수의 민족은 동유럽에 넓게 분포하는 슬라브계통이다. 이렇듯 시베리아 개척을 통해 동으로 들어온 사람들의 언어와 문화는 동양의 문화와 많은 부분 혼재하거나 동화되었지만 그들의 주 문화는 유럽지역의 문화로서 동양의 문화에 대해서는 그 관심도 낮고 잘 알지도 못한다.

  내가 처음 본 거북바위는 거북바위가 아닌 큰 비석을 바쳤던 귀부로 비석받침이며 비석은 인근에 건축자재로 쓰이고 없어졌다고 한다. 거대한 비석을 받쳤던 귀부가 아무것도 모르는 러시아사람들에게는 큰 돌로 다듬어져 있었으니 그저 거북바위에 불과했으리라..

  기분이 묘했다. "이 무식한 러시아놈들"이라고 내 뱉고 싶었던 속내와 저들의 역사와 문화를 나 스스로 잘 이해하고 있는가 반문하고 반문하면서 이 웃지못할 촌극에 그저 어안이벙벙할 따름이다.

  문화재의 발견과 보존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 재반 지식과 특별한 관심과 애정이 없으면 특히 문화재를 문화재로 보지 못한다. 실례로 우리나라 최초로 구석기 주먹도끼가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에서 발견되었다. 이 대단한 발굴에 우리나라 전문연구자가 아닌 휴가로 계곡에 놀러왔던 미군 병사만이 찾았다. 많은 사람이 찾았던 한탄강 유원지 계곡이었는데도 말이다. 이처럼 문화재를 알아보고 찾기란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니 이 귀부가 러시아인들에게는 그저 거북모양 바위로 보였음이 당연했다.

  귀부의 존재로 보아 법이 높았던 승려나 사찰의 비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발해인지 금나라의 유물인지는 비석이 없어 그 출처를 알 수 없다. 다만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고 초기에 당과 대립하였으나 문왕 이후 당의 문화를 적극받아들이고 불교가 융성하였다. 따라서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 내에도 무려 9개의 사찰이 위치했을 정도로 불심이 깊었다.(문왕은 자신을 '대흥보력효감금륜경법법대왕'이라고 칭할 정도로 황권이 불교와 밀접했다.)  따라서 이 솔빈부 내에도 여러 사찰이 존재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사찰의 일주문으로 쓰였을 주춧돌이 4기가 발견되어 적어도 2개소의 사지가 존재하여 불교가 융성하였던 당시의 모습을 말해준다. 또한 발해가 거란에 망하고 후에 들어선 여진족의 금나라 역시 불교가 융성하였다. 그리고 금나라의 왕과 귀족들 역시 자신들의 위용을 비석을 만들어 과시하였다. 

  거북모양의 돌덩어리에 치부된 귀부지만 이 귀부가 가지는 역사적 내용은 상상의 나래를 포함하여 무궁무진한 역사의 잔상이다.

 

 

 

  공원을 나와 오른편 대로변을 걸었다. 걸으면서 들었는데 과거 이 일대가 한인들이 밀집하여 살았던 지역이라고 하였다. 대로가 꺽이는 교차로에서 좌측으로 서양식 건물이 있었다. 그 건물이 만주의 걸출한 인물이었던 최재형 선생님의 생가였다.

  나는 가슴이 벅찼다. 그 말로만 듣던 숨은 영웅, 최재형 선생님의 집이라니.. 많은 이들은 최재형이라고 하면 갸우뚱 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숨은 공훈과 더불어 남북분단이라는 상황에서 빨간색만 언급해도 빨갱이로 매도되는 상황에서 소련지역에서 활동한 선생을 연구하고 기리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소련이 무너지고 러시아와 빈번한 교류를 하면서 우리 연구자들이 러시아에 가서 자료를 찾아 연구하는 통에 러시아 지역에서 이루어졌던 항일운동이 많이 밝혀지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조선 남로당의 영수였던 박헌영이 국내 학자인 서울대 박태균 교수에 의해 평전까지 씌여질 정도로 오늘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로운 사상을  만끽하고 있다.

  최재형, 그는 진정한 영웅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매국노, 일본간첩이라고 매도할 때도 그의 사람됨과 의지를 높이 샀고 막후에서 지원하였다. 최재형이 믿어준 사람, 바로 안중근(1879-1910)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1841-1909 메이지유신과 총리대신을 역임하고 1대 조선통감을 지낸 제국주의자)이를 저격하여 사살한 사건은 안중근 의사 개인의 역량도 작용했지만 그 치밀한 계획과 거사의 준비는 연해주의 최재형이 없이는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당시 안중근 의사는 1908년 6월 아령지구군사령관으로 의병부대를 이끌고 함경북도 홍의동 등 국내진공작전을 폈다. 그 때 패퇴시킨 일본군 정찰대 포로를 사로잡고 여러사람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풀어주었다. 그런데 그만 수비병이 돌아가  길잡이가 되어 일본군 본대를 이끌고 의병을 추격하였다. 그때문에 혁혁한 전공을 세우던 의병부대는 일시에 일본군의 역습으로 궤멸되고 말았다. 이 일로 연해주 한인사회는 격앙되었다. 안중근 개인의 역량은 물론 사상이 의심되었고 민족반역자로까지 매도되는 상황에서 그를 믿고 그와 큰 거사를 도모한 막후 인물이 바로 최재형이었다.   

   1860년 8월 함격북도 경원에서 가난한 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난 선생은 아버지를 따라 만주를 거쳐 연해주로 이주하였다. 11살 어린 나이로 가출을 하여 선원생활과 상업에 종사하며 러시아어를 익혔다. 이러한 재능으로 최재형은 남다른 수완으로 러시아군대와 거래를 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가난한 소작인의 아들에서 러시아 부호로 일약 출세한 최재형, 당시 조선은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일제는 마지막 가는 숨마저 틀어쥐고 누르는 절박한 시대였다. 이와 같은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던 최재형은 1908년 동의회를 조직하여 이범윤의 의병부대에 군자금을 대고 동포신문인 '대동공보', '대양보'의 사장으로 취임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경술국치 이후 국민회와 권업회를 설립하여 회장에 추대되고 1917년 전로한족회중앙총회 의원, 대한국민의회 외교부장을 역임하였다. 1919년 4월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재무총장에 선임되었다. 1920년 4월 이른바 '4월 참변'이라고 불리는 그 때 일본군에 납치되어 피살되었다. 이 참변은 러시아 소비에트 혁명을 무력화 하기 위해 적군 토벌을 명목으로 연해주에 출병했던 일본이 한인 항일세력을 무력화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벌이었다.

 

  당시 일본군에게 납치되었던 생가이다. 생애 마지막 순간을 살았던 그곳에서 비운의 최재형을 그린다. 일제가 그토록 제거 하고 싶었던 인물 그래서 우리는 그를

 

 "'아령 한인사회의 개척자'. '러시아 한인사회의 제일 인물', '시베리아 동포의 대은인'이라고 추앙한다."

                                                                                                                       - 재러 한인회 -

 

  선생이 머물렀던 생가는 한인들이 집중적으로 살았고 그의 후원 아래서 문창범과 같은 독립운동가 다수가 이웃하며 살았다.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전로한인회중앙총회가 결성되고 이어 1919년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에서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가 결성되었다. 최재형 선생 저택 근처에 당시 대한국민의회의 임시 회의실이 있다. 현재는 초등학교로 사용되다가 방치되어 창문의 유리가 깨지고 스산하다. 당시 정면으로 보이는 아치형 창문 네 개 정도만 임대하여 임시로 회의실로 썼다고 한다. 이 역시 최재형 선생의 지원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대한국민의회는 상해 임시정부로 통합되기 전에 한성정부, 상해 임시정부와 함께 각 지역을 대표한 해외 망명정부로서 만주와 연해주지역의 한인을 대표하고 무장항일독립투쟁의 중심이었다. 1차세계대전의 종식과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등 그 어느 때보다도 약소국의 독립의 열망이 실현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높았던 당시 발빠르게 망명정부를 구성하고 서구열강과 교섭에 나섰던 정부이다.   

 

 

 

   우스리스크 시내는 모습은 낮은 단층 건물이 즐비한 도시는 현대적 도시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낡은 건물과 무너져가는 건물들.. 폐가가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내 눈을 의심이 될 정도로 우리 상식에 벗어난 이 집들에는 너무나도 소박한 러시아의 서민들이 살고 있었다. 잘 정돈된 거리와 집들이 있는 고급주택가가 조금 있었으나 대부분은 다 쓰러져가는 집이나 너무나도 낡은 건물들이 삶의 터전이었다.

   연해주 최초의 한인문화센터인 '고려인문화센터'이다. 우수리스크 시내 중심에 현대식으로 잘 꾸며진 건물이 많지 않은데 그 중에 손꼽히는 시설로 현지 교민과 동포 고려인사회의 자랑이 되고 있다. 문화센터 안에는 동북아평화연대 등 여러 단체 사무실과, 직영 만찬홀, 한국어교실, 고려인역사관 등이 입주되어 명실상부한 한인중심문화복합공간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고려인역사관에는 시대적으로 이른 시기에 이곳에 있었던 역사유물과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특히 발해가 위치했던 연해주 지역에 일찍이 고대 여러국가 중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옥저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옥저의 존재는 고고학 발굴에 따라 옥저시기의 옥저문화층의 존재로 조금씩 이야기가 되고 있는데 이 사실로 미루어볼 때 당시 우리 민족의 활동범위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그 영역이 넓었음을 시사한다고 하겠다. 옥저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고구려의 속국이자 고구려의 서옥제(데릴사위제)와 달리 민며느리제라는 혼인풍습이 있는 나라라고 소개된 나라이다.

  고려인역사관을 관람하면서 그 사료와 사진을 올린다.  

 

 

 

 

    구한말 함경도의 대기근이 들자 본격적으로 시작된 한인의 연해주 이주와 개척을 보여주는 사료이다. 특히 가수 서태지의 뮤직비디오에도 소개되고 서태지가 자비로 비석을 세웠다고 하여 유명한 지신허는 현재 확인되고 있는 한인 최초의 이주 마을이다. 하지만 러시아의 총독들과 우리 측 여러 기록에서 지신허 이전부터 한인이 두만강을 월강하여 농작을 하는 기사가 많이 확인되고 있어서 실제로는 지신허 마을의 역사보다 앞서서 한인이주 터전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만주와 연해주의 공통점은 바로 우리 한인들이 고토이자 농업이주를 시작한 땅이라는 사실이다. 뿐만아니라 이 곳에서 우리는 망국의 한을 품고 나라를 구하고자 민족의 역량을 결집을 하고 조선독립의 염원이 피어난 곳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앞서 이야기했던 헤이그특사 보재 이상설과, 연해주 한인의 대부 최재형, 그리고 안중근 의사, 독립운동단체인 성명회, 권업회의 사료, 그리고 고종의 밀명으로 간도에 파견되어 최초의 간도관리사가 된 이범윤이 일제로부터 조선을 구하고자 간도 및 연해주 한인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조직하였던 통문 등이 전시되어있는 것을 보면서 이곳 연해주가 만리타국이라는 이질적 괴리감은 어느 새 우리 삶과 밀접했던 과거의 향수와 오늘의 끈을 생각하게 한다. 

 

 

 

   '이글거리는 눈빛은  엄연한 역사의 사실을 목도한다. 가슴이 뜨겁고 거북하다. 나라잃은 슬픔을 나는 모른다. 나라를 구하고자 가슴 뛰는 삶을 살았던 그들의 심장의 고동소리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흘렸을 피눈물과 가슴절절이 애가 탄 한(恨)은 내 눈으로 보고 있다. 처참하게 고단했던 삶의 자리에서 내쫓기고 죽임을 당하고.. 연해주는 우리 피눈물과 한이 서린 우리의 또다른 자화상이다.'

 

  2011년 오늘 동일본대지진으로 일본 센다이 북동쪽 해저에서 발생한 지진과 해일, 연쇄적으로 일어난 지진은 일본 동부지역을 초토화시켰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은 삶을 이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고통위에 고통으로 이어가고 있다. 거대한 자연의 힘앞에 초라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모습이다.

  2011년 오늘 우리들은 우리나라 북동쪽 연해주에서 자연이 아닌 인간에 의해 철저하게 삶의 공간이 파괴되고 고통을 삶으로 받아들였던 역사를 알까.. 

  대자연은 때론 대재앙을 통해 너무도 참담한 삶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그 대재앙을 인간 스스로가 저지르기도 한다. 지난 세기 우리는 광기의 시대를 살았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만이 감당했던 역사는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 다른 국적과 다른 민족에게서 인간이 인간에게 자행된 참혹한 광기.. 우리의 비극은 망국으로 이어졌다. 

 

 

   

 

  우수리스크 탐방은 여기까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