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마리 강화나들길 '산길따라 뚝방 길따라'

달이선생 2010. 4. 1. 14:28

 역사의 고장 강화에서 농촌, 산촌, 어촌이 어울린 자연경관을 보고 느끼는 '마리 강화나들길'

 

 '마리 강화나들길'은 제주도의 올레길, 지리산의 둘레길이 있다면 우리 강화에는 나들길이 있다. 나들길의 유래는 강화군

불은면 두두미 마을에 살던 화남 고재형 선생이 구한말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고 자신이 살던 강화에 물밀듯 밀려드는

서구문화에 위기감을 느끼던 차에 강화의 전통과 역사를 지키고자 강화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살피고 시를 남겼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화남 선생이 걸었던 그 길을 오늘 강화 관광개발사업소가 개발하고 강화시민연대(시민단체)가 함께 강화의 문화적 자산으로 나들길을 보급하고 있다.

  우리 마리학교에서는  마리학교를 중심으로 강화도의 역사. 문화, 그리고 농, 산, 어촌의 어울림이 있는 환경을 접목하여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마리학교에서 운영하는 산촌유학 프로그램이 '마리 강화나들길'이다.

 

 그럼 마리 강화나들길을 따라 가보자!

 마리 강화나들길 1코스는 마리학교에서 출발하여 뒷산 길(강화나들길 제7코스 - 화남생가 가는 길)을 따라 두두미 마을 - 두운2리 경로당 - 장한평- 고능2리 - 뚝방 길 - 오두돈대(강화나들길 제2코스 - 호국돈대 길) - 염하변 해안도로 - 화도돈대 - 삼동암천 - 뚝방 길 - 고능1리 - 마리학교로 오는 코스이다. 시간은 대략 2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마리 강화나들길 처음 답사에 밝은마을 기획과 마리학교 컴퓨터, 과학 교사 선생님이신 정암(오수영) 선생님께서 동행하였다. 학교의 입구 간판에서 시작된 나들길.. 봄날이라 그런지 따사로운 햇볕과 포근함이 나들이 하기에 아주 좋은 날씨였다.

 

 

  한옥으로 이루어진 마리학교의 내부와 지붕 모습이다. 한가로이 나들길을 떠나기 앞서 교정을 둘러보고 뒷산 길을 오르면서 학교를 보니 아기자기한 기와지붕과 멀리 갑곶진 맞은편에 우뚝 솟은 문수산성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마리학교 뒷산 길로 몇 분 가다보면 두두미에 이른다. 또한 이 길은 화남 고재형 선생이 다녔던 옛 그 길이며 강화나들길이기도 하다. 현재 이 길은 강화나들길 제7코스인 '화남생가 가는 길'로 지정되어있다.

 

 산길을 따라 내려오면 처음 만나는 낮선 풍경으로 작은 사당이 나온다. 사당의 이름은 영모사로 제주도의 옛나라인 탐라의 왕 고을라를 시조로 모시고 중시조 고말로와 조선 개국공신 고성군 고여를 모신 제주도 고씨 사당이다. 또한 화남 선생의 집안이기도 하다.

 

 

 여느 강화나들길과 다르게 두두미 마을 입구로 들어온 것이 아닌 두두미 마을 뒤로 해서 앞으로 나왔다. 우리 나들길이 학교에서 시작하기 때문에..두두미 마을은 두운리와 함께 마치 한 마을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역사적으로는 고려 대몽항쟁기에 문신이자 학자였던 이규보 선생이 사셨던 곳으로 이곳을 두루두루 살피며 한가로이 시도 지었고 최씨무신정권의 학정으로 가슴 타는 쓰라림에 세상을 비판하고 고뇌하였던 이규보 선생의 숨결이 배인 곳이기도 하다.

 

 

 두운리를 지나 장안촌에 들어왔다. 장안촌이란 마을이 오래되었다는 것을 오래된 고목이 말해주듯 길 옆에 우뚝 서있었다. 멋스런 서양식 가옥 옆으로 텃밭에서는  봄날 한 해 농사를 준비하며 밭고르기를 하는 시골 아낙의 바쁜 손놀림.. 푸근한 햇살에 웅크리고 알을 품는 암탉들이며 시골의 정겨움을 더한다.

 

 

 장안촌을 지나 고능2리에 오니 예쁜 낮은 돌담이 둘러친 아담한 작은 한옥이 즐비하다. 더러는  남녘에나 볼 수 있는 대나무를 돌담에 두른 멋스런 풍경도 있어 눈이 즐겁다.

 

  강화는 인삼의 고장이다. 인삼하면 개성이고 개성하면 인삼이듯 일찍부터 개성과 가깝고 대중교역로에 위치하다 보니 널리 인삼이 심어져 강화의 특산품이 되었다. 따라서 강화의 특산품하면 인삼, 그리고 화문석이 대표적이다. 인삼밭이 즐비한 강화도.. 인삼이 생각나면 강화에 오자

 

 

   고능2리 마을회관을 지나면 바로 너른 들녘이 펼쳐진다. 일명 뚝방 길. 뚝방 길은 강화도 동편에서 김포 사이에 흐르는 염하(강화도와 김포시 사이로 흐르는 바다로 마치 강과 같다고 하여 소금강이라 불린다)로 이어진 들녘으로 강화나들길 코스인 호국돈대 길과 만난다. 이 돈대 길은  강화해안도로에 접해있다.

  뚝방 길은 뚝방이 말하듯 강화도가 섬이란 지형적 특성으로 너른 간석지가 발달된 곳이었는데 뚝을 쌓아 바닷물의 유입을 막고 간척이 이루어졌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곳 너른 들녘은 예전에는 망둥어와 작은 게가 노닐던 갯벌이었다.

  강화도가 본격적인 간척이 이루어진 것은 언제였을까? 혹자는 6~70년대 경제개발과 함께 이루어졌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고 좀 더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제 때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을거라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강화도의 간척은 이보다도 훨씬 오래 전인 고려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때는 북방유목민족이 동요하고 유라시아대륙 전체를 포효하던 몽골제국, 즉 칭기즈칸의 시대였다. 이 때 고려 역시 몽골의 말발굽을 피할 수 없었고 살레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의 침략을 받게된다. 당시 고려 조정은 최씨 무신정권시대로 최충헌이 죽고 그 아들 최우가 정권을 잡아 고려를 좌지우지 하던 때이다. 이 때 최우는 몽골과 결사항전을 주장하고 고려의 도읍을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다.(1232)

  고려의 임시정부가 강화에 구축되면서 현재 강화 군민이 6만여명인데 이 시기 무려 그 열배에 달하는 15만호가 들어와 살게 되었다. 이 때문에 고려 정부는 식량을 자구적으로 확보하고자 적극적으로 강화간척을 주도하였고 오늘날 강화도가 너른 들판을 가지게 된 것이다.

 

 

   오두돈대를 향하는 뚝방 길 좌우로 넓은 논들이 펼쳐져 있다. 과거 이 논들이 갯벌이었겠지?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강화도의 들판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런지..

 

 

  오두돈대 말미에서 뒤를 돌아 뚝방 길을 바라보았다. 멀리 진강산(443m)과 덕정산(320m)이 앞서니 뒷서니 보인다. 

 

 

  해안도로를 건너 오두돈대 입구에 다다르니 산위로 돌계단이 나있다. 커다란 돌계단으로 만들져 있는 돈대 길을 오르려니  오르기란 쉽지않다. 외관상 보기는 좋지만 그다지 실용성은 없었다. 우리도 돌계단 보다는 그 옆에 사이사이로 올랐다. 

  오두돈대는 오두(鰲頭) 즉 '자라머리'라는 뜻으로 이곳 지형이 자라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돈대(墩臺)는 흙이나 돌 따위로 평면에 원형으로 높이 축을 쌓아 만든 요새로 외적의 침입을 방비하거나 정탐하는 방어시설물이다. 이곳 강화에는 오두돈대 말고도 염하변과 강화해안에 돈대와 진이 설치 되었는데 특히 강화 전해안을 하나의 방위체제하로 운영하고자 조선 숙종5년에(1679) 강화 전지역에 설치되었다.  

  오두돈대도 여느 돈대와 마찬가지로 정상 부근에 평면으로 원형의 형태로 지어졌다.

 

 

   돈대를 들어가는 문은 일반적인 성문(홍예문-무지개모야의 아치)과 달리 작고 낮은 직사각형태의 문이다. 이는 작고 독립된 요새의 형태에  따라 그 특성이 반영된 것이다. 낮은 성문을 지나 1m정도의 문턱을 오르면 원형의 돈대 안의 둥근 구조가 한눈에 들어온다. 구조는 상단에 여장(성가퀴=성벽 위에 낮은 담장)이 설치되고 그 아래 염하를 향해 포대가 설치되어 있다. 

 

 

   상단 여장에서 타구(여장 사이사이의 구멍)를 통해 염하를 바라보니 구한말 외세를 맞서 싸우던 우리 조상들이 이곳을 통해 적을 감시하고 강화를 지켰을 생각에 가슴이 벅차다. 여장 위로 염화를 조망하기는 조금 어렵다. 주위에 소나무와 여러 나무들이 뒤엉켜 시야가 트이지  않아서이다. 과거에는 돈대 주변으로 커다란 나무가 없었을 것이다. 세월에 따라 돈대의 기능이 국방의 기능과는 거리가 생기면서 그 성격 그대로 문화재가 보존되기는 힘들다는 세태의 영향일 것이다. 

 

 

   염하변은 강화나들길의 호국돈대 길과 통하며 강화해안도로와 맞닿아 있다. 따라서 강화군에서 관광을 목적으로 길가에 많은 조형물을 배치하여 그 운치를 더하고 있는데 특히나 염하변 봄바람에 새차게 돌던 바람개비가 인상적이었다. 쌔앵 쌩~~ 쉬이 쉭~ 바람개비의 도는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울린다.

 

 

  호국돈대 길은 염하에 접한 흙길도 있으나 도로에 접한 포장도로가 더 많아서 한가로이 흙길을 걷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그러나 간간히 염하변에 걸처진 해안두둑길은 퍽이나 운치가 있다.  염하변 마른 갈대의 바람 쓸리는 소리와 흔들림..

 

 

   화도돈대에서 삼동암천 옆 길로 고능1리로 갔다. 과거 이곳은 청나라 사신이 드나들던 곳이라고 하여 '대청뚝'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현재  화도돈대는 그 위치만 알 수 있도록 기단 일부만 남아있을 뿐, 정식으로 복원되진 않았다. 그리고 돈대 옆으로 수문이 있었다고 하나 그 역시 터만 있을 뿐이다.

  삼동암천에는 때때로 세월을 낚는.. 물고기를 낚는.. 강태공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고능1리 마을 길을 따라 이집 저집을 지나는 길에 집앞 화단에 산수유가 몽오리에서 점점 피어나기 시작했다. 3월 말 봄이 성큼 우리 발 아래 깊숙하게 왔음을 실감한다. 조금 있으면 이 싸늘함도 금새 가시고 언제 그랬냐는듯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 쬘 것이다.

 

 

   학교 입구에 다다라 입구에서 한 10여m 떨어진 곳에 스트로베일하우스가 있다. 이 집은 백일학교 학생들이 짚단을 쌓고 황토를 바른 생태집으로 생태집짓기 프로그램을 하며 지은 집이다. 현재도 완공이 덜되어 공사 중인데 지난해 온돌을 잘 못 놔 아직도 온돌 공사 중이다. 때문에 마리학교 목공 선생님인 성배경 선생님이 바쁘다.

 

 

   아직은 쌀쌀함이 가시지 않은 봄날 마리 강화나들길에 동행을 해주신 정암 선생님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