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11일 백제의 옛수도 공주(웅진), 부여(사비)를 갔다.
대략적인 일정은 오전 8시 조암 기산약국 앞에서 출발하여 10시 20분경 부여 부소산성에 도착하여
삼충사 - 부소산성 및 건물터와 저장구덩이 - 반월루 - 낙화암 - 고란사 - 나룻터와 조룡대 - 구드래 나룻터
- 구드레 쌈밥집 점심 - 부여 정림사지 - 부여 국립 박물관 - 공주 송산리 고분군(무령왕릉)을 끝으로 오후
4시 30분 공주를 출발하여 조암에 6시에 도착, 하루 탐방을 마쳤다.
백제는 기원전 마한 54개국 중 하나인 십제라는 나라로 지금의 한강 이남의 위례성(몽촌, 풍납토성)에서 시작된 나라로 서기 660년 나당연합군(신라와 당나라)에게 멸망 하기까지 우리나라 고대사에 한 축으로 삼국시대 당당히 역사와 문화를 이뤘던 해양강국이자 문화 강국이었다. 특히 일본이 고대국가로 발전하는데 있어서 백제가 끼친 영향은 매우 크며 따라서 일본의 왕가는 백제와 왕실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인식하고 있다.
부소산성(扶蘇山城)의 입구에 부소산문의 사진으로 이 부소산은 서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에게 한강유역을 빼앗긴 개로왕(454-475년)이 붙잡혀 죽고 새로이 즉위한 문주왕(475-477년)이 공주에 천도한 이후 무령왕(501-523년)의 아들인 성왕(523-554년)이 지금의 부여 당시의 소부리=사비에 도읍을 정하고 그 왕성으로 삼은 곳이다(538년).
성왕은 백제의 중흥을 이끌었던 장본인으로 신라의 진흥왕과 한강유역을 고구려로부터 되찾고 왜(일본)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 처음으로 노리사치계를 보내 불교를 전하고 의박사(의학), 역박사(천문, 역법) 등 많은 기술자를 보내 선진문물을 전하기도 하였다. 성왕은 서기 554년 진흥왕이 백제와의 동맹(나제동맹)을 깨고 한강유역을 빼앗자 대규모 정벌군을 조직하여 신라를 공격하였는데 이때 태자 창이 이끌던 백제군이 관산성에서 대패하자 이를 구원하려고 관산성에 가던 중에 당시 신라 관산성의 군주였던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에 의해 매복된 신라병에 붙잡혀 천한 노비인 도도에게 참수를 당하게 되었던 비운의 왕이다.
여기는 삼충사로 세 명의 충신을 모신 사당이다. 부소산성 입구에 조성된 사당으로 광복이후(1945년) 조성된 곳으로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641-660년)에게 끝까지 충성을 다했던 충신 성충, 흥수, 계백장군을 모신 곳이다. 1984년 중수하여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성충과 흥수는 백제의 최고위층인 좌평에 오른 귀족이며 좌평은 오늘날 장관급 이상의 고위직으로 당시 6좌평이 있었다. 당시 의자왕은 효성과 형제애가 지극하여 마치 중국의 공자 제자였던 증자와 같다하여 '해동증자'로 불리며 백제의 태평성대를 이루던 의자왕이 사치와 향락에 빠지자 충언과 간언을 했던 인물로 특히 성충은 의자왕의 노여움을 사서 옥에 갇히고 흥수는 귀향을 갔다. 그러나 성충은 단식을 하며 죽기까지 나라의 위급함에 머지않아 당나라와 신라의 침입을 예견하며 기벌포와 탄현에서 적을 막을 것을 간곡히 충언하고 죽었다.
드디어 나당연합군이 쳐들어오자 부랴부랴 의자왕은 성충이 죽고 흥수만이 남아있자 흥수에게 일러 조언을 구하자 성충과 마찬가지로 이를 간언하지만 당시 귀족들의 반대로 기벌포와 탄현에서 각각 당과 신라를 막지 못하고 결국 백제 마지막 명장 계백 장군이 5천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진을 치고 신라 김유신 장군과 결전을 벌여 모두 전멸하였다. 계백 장군은 전장에 나아가기전에 처자식 모두 '적에 노예가 되느니 내 칼을 받아 죽는 것이 낫다.' 하여 부인과 자식을 모두 죽이고 자신도 전장에서 최후를 맞았다. 이 황산벌 싸움이 그 유명한 화랑 관창의 이야기가 전하는 곳이다.
삼충사를 나와 옆 길로 오르면 부소산성의 일부를 보게 되는데 현재 그 성벽은 토성의 형태로 남아있다.
토성으로 이루어진 산성길을 조금 오르면 정자인 반월루(半月樓)가 나오는데 그곳에서 그 아래를 바라보면 마치 바둑판처럼 구획이 잘되어 있는 부여읍 전경을 볼 수 있다. 현재의 이 시가지 형태는 당시 부여가 백제의 마지막 도성(都城-수도를 두른 성, 수도를 이름)으로 조성되면서 구획된 모습이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이다.
반월루를 가기 전에 들렸던 부소산성 안에 위치한 백제의 주거지 모습이다. 가장자리에 기둥자리와 오른쪽 돌을 모아 놓은 옛 구들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구들은 후에 온돌로 발전하였으며 우리나라 유일의 난방장치이다.(구들은 고구려의 대표적 난방장치로 우리 고유의 시설이다.)
또한 아래 저장공이라 불리는 저장구덩이가 있는데 목적은 말그대로 먹을 거 따위를 저장하는 시설로 요즘도 농촌에서 구덩이를 파고 음식을 저장하는 것과 유사한 시설이다.
반월루를 나와 북쪽으로 경사면을 내려 가다보면은 산성 북쪽 끝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바위와 암석
으로 이루어진 낙화암(落花巖)이다. 낙화암은 백제가 멸망하면서 당과 신라에 노예로 사느니 죽는 것을 택한 많은 여자들이 그 아래 백마강(白馬江)으로 몸을 던진 곳으로 당시 마치 치마폭에 감싸져 떨어지는 여인들이 꽃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그곳에는 백화정(百花亭)이라는 정자가 세워져 삼천여인들의 원혼을 달래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의자왕의 삼천궁녀가 떨어져 죽었다고 많이 알려져 있으나 삼천궁녀는 많다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 때 강에 몸을 던진 사람은 궁녀만이 아닌 다수 여러 신분의 여인들이었을 거라는 것이라고 추정한다.
백화정에서 바라본 백마강의 전경이다. 당시 이 강은 백제의 중요 뱃길로 부여로 천도하기 전에는 여기를 거슬러 수도였던 웅진, 즉 공주에 이르고 중국 등 여러 나라의 배들이 오갔던 중요한 뱃길이다. 또한 낙화암 서쪽으로 대략 2km 정도에 위치한 구드레 나룻터(위 두 번째 사진)는 백제 마지막 수도인 부여의 관문으로 이곳을 통해 노리사치계(552년 성왕이 보낸 승려로 일본에 불교를 전했다.)가 왜에 가고 중국에 사신을 보내고 오기도 한 국제 무역항이자 중요한 항구였다.
낙화암 아래 위치한 고란사로 고란정이라는 시원한 우물로 여행자의 갈증을 풀어주고 있고 그 벽면에는 낙화암에서 떨어지던 여인들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곳 고란사는 강에 몸을 던져 지조를 지켰던 삼천여인들을 기리는 사찰이다. 일설에 의하면 백제 때 왕이 노닐던 정자가 있었다고 하며 백제가 멸망 후 삼천여인을 기리고자 고려시대 때 백제 후예들이 사찰을 건립하였다. 절의 이름은 벼랑에 희귀한 고란초가 자라서 고란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고려 현종 때, 조선 인조와 정조 때 각각 중건하였고 현존하는 당우(절 건물)는 1931년 지은 것을 1959년 보수 한 것이다.
고란사를 나와 조금 밑으로 가면 선착장이 나오는데 예전 금강을 다니던 황포돛배를 재현해 놓고 있었다. 형태는 누런 황포돛을 올린 우리 전통배이지만 실제 운항은 돛으로 나아가기가 힘들 거 같았고 그 모양도 조잡해서 영 눈에 거슬리는 것이 아니다. 너무 흥미 위주로 조급하게 정확한 고증없이 만든 티가 많이났다.
선착장를 바라보고 우측으로 보면 물가에 바위가 솟았는데 그 바위가 바로 조룡대(釣龍臺)이다. 조룡대는 당나라 백제 정벌군의 장수인 소정방이 부여를 함락하고 그 함대를 백마강에 정박하고 있는데 풍랑이 일어 많은 배가 침몰하자 그 이유를 물으니 의자왕의 아버지 무왕(600-641년)이 청룡으로 나타나 당나라를 공격한다고 하자 그 청룡을 잡으려고 용이 좋아한다는 백마의 머리로 낚시를 하여 청룡을 낚았다는 조룡대 바위이다. 이야기는 설화로 당시 소정방이 조룡대에서 낚시를 하여 큰 고기를 낚았는데 옛부터 큰 물고기는 신성하게 여겨 어룡이라는 말을 썼는데 이와 같은 고사가 설화로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구드레는 백제의 말로 대왕(大王)을 칭하는 말이며 구는 큰 드레는 왕을 칭하는 '어라하'에서 유래하였다. 어라하는 백제 지배층이 호칭한 왕의 표현이며 당시 백성들은 왕을 '건길지'라고 불렀다. 이는 백제 지배층과 백성이 각각 고구려계 유이민이라는 사실과 백성 대다수는 마한의 옛주민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백제어는 일본에도 당연히 전해져 일본은 백제를 '구다라'라고 하는데 이는 '큰 나라'라고 하는 말로 백제가 당시 국력이 강한 큰 나라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구드레 나룻터에서 점심으로 쌈밥을 맛있게 먹고 찾은 곳은 부여 정림사지(定林寺址)이다. 정림사지는 고려 때 창건된 사찰이 있던 터이며 이 곳에 서 있는 탑은 고려 이전 성왕이 부여로 천도하면서 세운 사찰의 탑으로 전하며 그 정확한 명칭과 당시 창건된 절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이 정림사지 5층탑에 1층 탑신부에서 당나라 소정방이 '대당평 백제국비탑(大唐平 百濟國碑塔)'이라는 글귀를 새겨 놓아 평제탑(平濟塔), '백제를 평정한 탑'이라는 잘 못된 명칭이 전하였으나 1942년 발굴조사 때 강당지에서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부초(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라는 글귀가 새겨진 기와(명문기와)가 발견되어 중건 당시 절이름이 정림사였으며 태평 8년은 요나라(거란) 성종의 연호에 해당하여 서기 1028년이며 고려 현종 19년에 해당하므로 이 때 중건되었으며 1979~84년에 걸친 대대적인 발굴조사에 의해서 절터가 소정방이 불태우기 이전 중문·석탑·금당·강당이 남북선상에 일렬로 배치되고 그 주위를 회랑으로 두른 전형적인 백제식 가람배치인 남북일탑식임이 확인되었다.
현재도 발굴 중에 있으며 전면에 전각이 있고 그 안에 고려 때 조성된 석불좌상을 모시고 있다. 형태상 미륵불로 보이나 머리에 쓴 관을 만든 돌과 아래 불상의 석재가 달라 후에 관을 제작하여 올린 것으로 추정하여 정확히 불상이 미륵불로 단정할 수는 없다.
일반적인 탑의 구조는 맨 아래 기단부-기단부 위로 탑의 몸이 되는 탑신부-지붕같이 생긴 옥계석 위로 상륜부로 세 구분으로 나누는데 층수를 나누는 것은 탑신부의 옥계석의 수를 세어 그 수에 따라 몇 층탑인지 나눈다.
소정방과 김유신(595-673년)의 신라군이 부여를 함락하니 무려 7일간 불탔다라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하는데 그 기록을 증거하듯 비문 곳곳이 그으름이 있어 당시 이곳에 큰 화재에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사진의 검은 부분이 화재를 당한 부분이고 작지만 언뜻 보이는 글귀들이 660년 소정방이 새겨 놓은 '대당평 백제국비탑(大唐平 百濟國碑塔)'이라는 글귀로 백제의 통한이 깊게 새겨진 아픔을 담은 기록이다.
당의 백제 정벌 선봉장이던 소정방의 백제 정벌에 관한 일화가 전한다. 소정방은 금강 하구에서 별다른 저항없이 지나서 백제 수도인 부여에 이르러 진을 치고 있는데 약속되었던 신라군이 백제의 계백 장군이 이끄는 5천 결사대에 발이 묶여 그 약속 기일이 한참을 늦어 도착하였다. 대노한 소정방은 신라군을 꾸짖고 그 죄를 물어 김유신 장군의 부하 장수를 참하려고 하자 김유신 장군이 나서며 '전쟁을 하다보면 늦을 수도 있는 것이요 그 때마다 죄를 물어 장수들을 죽인다면 누가 싸울 수 있겠나 정 우리 장수를 죽이고자 한다면 나를 죽이고 우리 신라군과 싸워야 할 것이요'하면서 당차게 이야기를 하는데 때마침 김유신 장군의 칼집에서 칼이 스르륵 나왔다고 한다. 이에 소정방은 그 기세와 신라군의 사기에 눌려 그 뜻을 굽혔다는 일화가 전하기도 한다.
정림사지를 떠나 부여 국립 박물관에 들렸다. 먼저 눈에 들어 온 것은 백제 성왕의 아들이자 성왕이 죽음에 이르는데 원인이 되었던 위덕왕 창(554-598년)의 사리함이다. 위덕왕은 성왕의 맏아들로 관산성 전투의 패배로 전멸의 위기에 놓이자 아버지 성왕이 구원하려고 오다 전사하자 그와 같은 치욕당하고 원통한 한이 되어 왕위에 대해 부담스러워 평생을 가슴 아파하다 말년에 불교에 귀의 하여 출가하였다는 비운의 왕이다.
사리함 오른편에 백제 창왕이라는 글귀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사리함은 부처님과 고승이 죽으면 그 고행에 따라 다소의 구슬 모양의 사리가 나오는데 이를 모아서 탑이나 승탑에 모시는 시설을 말한다.
전시관 입구에는 백제 마지막을 장식했던 의자왕의 맞아들 부여 융의 묘지석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 묘지석은 당나라 이전부터 왕과 귀족들만 묻힌다는 중국의 옛 수도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것이다.
부여 융은 소정방에게 단 아래에서 항복을 하고 술잔을 따르는 등 치욕을 당하고 당에 끌려간 의자왕의 태자로 당은 이들을 귀족으로 대우 해주고 이후 부여 융은 당 황제에 명에 따라 부여에 설치된 웅진도독부의 도독으로 부임하여 복신과 도침의 백제 부흥운동을 진압하였던 인물이다. 이와 같이 백제의 태자가 망국의 한을 뒤로 하고 당에 협조하였던 것은 기본적으로 당은 주변국과 민족들을 제압할 때 중국 전통의 외교책인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를 오랑캐로 제압한다.)에 따라 정복한 지역의 왕과 왕족, 귀족을 보호하고 그들을 이용하여 정복지의 저항을 무마하고 통치를 하는 기미정책의 일환이었다.
백제 부흥운동을 진압하였던 당 장수 유인원의 '당 유인원 기공비'로 박물관 뜰 앞에 조성되어 있다.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우리 치욕스런 과거를 기록한 비석을 보물을 지정한 것에 대하여 논란이 있으며 비석에는 당시 의자왕과 그 아들들 및 백제 귀족과 사람들이 끌려간 기록이 나타나고 백제 부흥운동에 대한 기록도 담고 있는 중요한 사료이다.
백제의 사택지적의 비로 사택씨는 백제 대성 8족의 하나인 큰 귀족으로 사비시대 유력한 왕비가문이었음이 여러 기록에서 확인되고 있다. 특히 최근에 발견된 미륵사지석탑 사리봉안기에 따르면 사택적덕의 딸이 시주하여 탑을 세웠다고 하는데 그 딸은 다름아닌 백제 무왕의 왕비로 무왕과 선화공주의 설화에 상당한 의문이 제기된다.
이는 공식적인 기록으로 무왕의 왕비가 선화공주라는 명확한 사실이 없는 가운데 무왕의 왕비로 사택적덕의 딸인 왕비의 존재로 인한 논란이다. 다만 이를 두고 선화공주 옹호쪽(이도학 교수)에서는 신라의 공주가 적국 백제와의 관계로 인해 정확한 기록이 되지 않은 가운데 특히 무왕과의 사이에서 나온 의자왕이 출생미상이나 30년이나 지나 태자가 되어 보위를 이은 사실과 그 모후에 대한 정확한 사실이 나오지 않은 것, 그리고 즉위 후 신라와 처절한 싸움을 한 것 등은 의자의 태생적 한계인 동시에 선화공주와의 관계로 비롯된 것으로 추정 할 수도 있다라는 새로운 학설을 제기한다. 확실한 것은 사택왕후가 의자왕의 생모는 아니며 사택왕후 이전에 의자의 생모가 백제 주류가 아니기 때문에 그로 인해 '해동증자'라고 칭송되고도 태자책봉이 성년이 되고도 한참 뒤에 되고 보위에 오른 사실은 의자왕이 적자이자 장자이지만 그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특히 의자왕 말고도 아버지 무왕 역시 의자왕을 낳을 당시 왕위 후보자로서 위치가 탄탄하지 않았다. 참고로 의자왕의 명은 의자왕의 이름이고 시호는 아니다. 백제가 멸망하지 않았다면 무왕 다음의 왕으로 문왕으로 칭호 되었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미륵사 창건이 무왕에 의해서 창건된 사실이 증명되었다. 이 사택지적은 사택적덕의 아들로 추정되며 일본 역사서인 일본서기에 사택적덕과 사택지적의 기록이 나온다.
의자왕 때 대신이자 귀족인 사택지적이 말년에 은퇴하여 그 마음을 시로 적은 비석으로 백제 시대 높은 한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그 내용은
“갑인년 정월 9일 나지성의 사택지적은 몸이 날로 쉬이 가고 달로 쉽게 돌아오기 어려움을 한탄하고 슬퍼하여, 금을 뚫어 진귀한 당을 세우고 옥을 깎아 보배로운 탑을 세우니, 외외한 자비로운 모습은 신광(神光)을 토하여 구름을 보내는 듯하고, 아아한 인혜로운 모습은 성명(聖明)을 풀어서 ??한 듯하다(甲寅年正月九日奈祗城砂宅智積慷身日之易往慨體月之難 還穿金以建珍堂鑿玉以立寶塔巍巍慈容吐神光以送雲峨峨悲貌合聖明以).”
라고 되어 있다. 이 비문의 문체는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이며 문장이 유려하고 글씨는 웅건한 구양순체(歐陽詢體)로서, 당시 백제의 문화수준을 알 수 있게 한다. 또한 부여에서 발견된 화려하고 실용적인 백제시대 벼루를 통해 아주 오래전부터 한자와 한문이 전래되어 수준 높은 문자생활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목간(나무쪽 면에 글을 쓴 편지나 문서)의 존재로 볼 때 일상에서도 자유로이 한자생활이 가능하였음을 알 수 있어 백제의 수준 높은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특히 위 6번 목간은 2002년에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목간 중 '보희사(寶熹寺)' 란 절 이름이 적힌 목간으로 보회사는 백제 사비시대 능산리에 있던 왕실 사찰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보희사 먹글씨 목간은 능산리사지 하부층에서 출토된 목간으로 양면에 먹글씨가 있었으나 뒷부분 일부만 남아있다. 한쪽 면은 윗 부분에 7자의 먹글씨가 세로로 쓰여 있고 아랫 부분에 좌우 두 행의 먹글씨가 세로로 쓰여 있으나 오른쪽 행은 2자, 왼쪽 행은 1자만이 남아 있다.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목간들은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등의 문헌에는 누락되었거나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소중한 기록이 많다는 점에서 백제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많은 사람들은 고분 벽화하면 고구려를 떠올리는데 고구려 말고도 백제, 신라의 돌방무덤 역시 그 영향을 받아 무덤벽화가 그려졌으며 이는 부여 능산리 1호분에서 출토된 백호 벽화이다. 백호는 동서남북 방위를 나타내는 사신으로 좌청룡우백호북현무남주작에 따라 우백호에 해당하여 서쪽을 지키는 상서로운 동물이자 신이다. 2010년은 경인년으로 60년만에 처음 맞는 백호랑이띠, 즉 백호에 해당하는 해이다.
백호랑이띠는 황금돼지띠와 마찬가지로 이 때 태어나는 아이는 매우 좋은 운을 타고 난다고 하여 산모들에게 선호의 대상이다. 특히 백호랑이 즉, 백호(白虎)는 상상 속 동물이지만 현재 우리가 눈으로 확인 할 수 있는 동물로 예부터 백호가 나타나거나 태어나면 나라에 큰 경사가 있다고 여겼다. 또한 백호는 사신(四神)으로 방위를 나타내는 상서롭고 신비로운 동물로 남쪽을 주관하는 주작(朱雀), 북쪽으로 주관하는 현무(玄武), 동쪽을 주관하는 청룡(靑龍)과 함께 서쪽을 주관한다. 올 한해 모두가 백호의 씩씩하고 용맹한 기상이 함께하길 기원한다.
이와 같이 무덤에 벽화를 그린 것은 고구려 무덤벽화의 영향이며 공주 송산리 고분 6호분 에도 보인다.
이 1호분은 동하총이라고도 하며, 단면 4각형의 널방의 구조로 되어 있으며, 널방에는 사신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북벽에 현무 즉 거북, 남벽에 주작, 동벽에 청룡, 서벽에 호랑이 백호가 있으며 천장에는 연꽃과 구름무늬가 있다. 이런 벽화는 판자돌의 겉면을 곱게 다듬은 뒤 그 위에 직접 그림을 그리고 사신이 표현된 특징으로 고구려 후기 벽화무덤의 영향으로 보인다.
웅진시대 유일한 백제의 고분벽화인 송산리 6호분도 사신을 그렸고 특징은 벽돌로 쌓은 벽에 사신 그림의 윤곽을 따라 진흙을 바르고 그리고 다시 좌우에 해, 달, 구름을 표현하였다. 따라서 1호분과는 차이가 있으며 중국 남조 벽돌무덤과 고구려 벽화무덤 어느 쪽이 더 관련이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흔히 고대인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생각하게 되는데 그 물음에 대답은 그림이나 조형물이 대변한다. 특히 백제는 현존하는 유물이 턱없이 부족하여 그 자세한 내막을 알기 어려운데 부여 관북리에서 나온 토기에 백제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어서 흥미를 끈다. 물론 해부학적으로 자세하게 백제인의 특징을 나타내주는 상세한 자료는 아니지만 우화적으로 표현한 백제인의 얼굴에서 더욱 친근한 조상의 숨결을 느껴본다.
백제는 지배층과 백성이 그 이질적 특성을 가진다고 위에서 설명하였듯이 당시 백제의 세력이 미치지 못했던 경기, 충청, 전라도 지역에는 토착 지배층이던 마한(삼국시대 이전 철기 시대 여러나라 중 만주의 부여, 고구려, 한반도 북부의 함경도 일대 옥저, 강원도 북부와 함경도 남부의 동예와 함께 한반도 남부의 진한을 이루고 이들이 지역적으로 영남은 진한과 변한, 경기와 충청, 호남은 마한으로 세력으로 분포하였다.)의 지배자들이 무덤에 옹관묘(위 사진)를 썼다.
현재 옹관묘는 전국에서 나오지만 특히 전라남도 영산강 유역에 다수 분포하며 그 크기도 소형에서 대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특히 주목하는 것은 대형옹관으로 당시 옹관을 만드는 기술은 대단히 어려워(현재도 복원하기가 힘듬) 지배자를 묻기위한 최대한의 예우에 해당하는 중요한 유물로 파악된다.
부여 박물관을 나와 북쪽으로 달려 백제의 두 번째 수도인 공주(웅진)를 방문하였다. 희대의 발굴인 백제 무령왕릉이 나온 공주 송산리 고분군을 찾았다. 현재 송산리 고분군은 '송산리고분모형관'을 만들어 참배객들의 백제 왕릉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사진은 송산리 고분군 입구와 모형관, 그리고 뒤쪽의 송산리 고분군의 전경이다.
송산리 고분군 5호분과 6호분의 봉분과 돌방(무덤방=현실) 입구 사진이며 그 사이에 봉분이 유실된 채 위치한 무령왕릉의 돌방 입구이다. 예전에는 물을 개방하여 안을 들어가지는 못했으나 볼 수 있도록 공개하였으나 무덤 내부의 훼손이 심해 보호차원에서 비공개하고 있다.
무령왕릉은 백제 유일의 도굴되지 않고 원형으로 발굴된 왕릉이다. 당시 무령왕릉은 5호분과 6호분 사이에서 발견되어 그 봉분을 확인할 수 없었기에 오랫동안 그 사이에 왕릉이 존재할 거라는 생각을 못했다. 따라서 1971년에 왕릉의 발견은 큰 주목을 받았고 서울대 고고학과 김원룡 교수는 황급히 발굴을 하여 단 하루만에 끝을 내었다. 이 과정에서 널길 바닥에 놓여있던 청동제 숟가락이 밟혀 부러지고 사진 촬영차 들고나다가 돌짐승의 머리 장식이 부러져 떨어졌다. 천년이 넘는 시간을 버티어 산화된 것이 조심스럽지 못한 발굴단으로 인한 불상사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또한 발굴조사를 통해 알아낼 수 있는 수 많은 정보를 그저 유물을 끄집어 내는데 급급 하였기에 김원룡 스스로 자책한 이야기도 전하는 우리나라 발굴사에 가장 형편없는 발굴이었기도 하다.
이집트 피라미드의 발굴에서 생긴 파라오의 저주처럼 이 무령왕릉을 발굴한 사람들 역시 크고 작은 피해를 당하는 의문(발굴 후 운전기사의 의문의 교통사고)이 있어서 일부에서 무령왕릉의 저주라고도 불린다.
무령왕릉 발굴 당시 널방 모습의 재현한 전시실(맨위 사진) 입구를 향해 무덤을 지키고 있는 무령왕릉의 상징인 돌짐승이 이채롭다. 이와 같은 무령왕릉은 연꽃무늬 벽돌(양나라) 등과 함께 중국 남조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백제와 중국 남조간의 교류를 나타내준다. 아래는 무령왕(오른쪽)과 왕비(왼쪽)의 묘지석
무령왕릉은 검은 벽돌을 쌓아서 만들었으며 그 벽돌은 산수무늬, 연꽃무늬 등으로 장식되었다. 무덤의 구조는 무덤방으로 들어가는 중앙에 널길을 마련했고, 무덤방의 북벽 중앙에 1개소, 동, 서벽에는 각각 2곳 등 모두 5곳에 불을 밝히기 위해 등을 놓았던 등감(燈龕)이 마련되어 있다.
천정은 네면 벽을 곧게 쌓아 올리다 윗부분을 아치형으로 쌓아 무덤방이 어떤 외부 압력에서도 무너지지 않게 만들었고, 가 가운데 무령왕과 왕비의 관을 나란히 안치했다. 흥미로운 것은 왕릉 안에서 왕과 왕비의 관이 안치되어 있는 곳을 지키기 위해 널길 가운데 버티고 서 있는 특이한 돌짐승(진묘수[鎭墓獸])이다.
돌짐승은 무덤의 입구를 처음 열 때 마치 침입자를 막듯 버티고 선 모습이었고 그 모습은 머리에 철제의 수탉 볏 같은 장식물이 꽂혀있고 마치 돼지의 주둥이를 연상하게 하는 두터운 입술에 입술 주변으로 붉은색을 칠하였으며 뒷모습은 마치 돼지의 뒷모습이 연상된다. 이와 같은 돌짐승은 중국 남조의 무덤과 유물에도 다양하게 나타나 중국 남조 특히 양나라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중국 남조의 수도였던 난징(남경)에 난징박물관에 가면 무령왕릉 출토 유물과 전시유물이 매우 유사하다.
이와 같은 돌짐승이 무슨 동물인지 알 수 없지만 그저 상징성을 나타내고 있는 상상의 동물이며. 그 쓰임새는 무덤 내부로 들어오는 악귀나 악령들을 막고 왕과 왕비의 혼령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무령왕릉의 발굴로 무령왕의 계보가 바뀌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동성왕의 아들이라고 하였는데 묘지석을 통해 무령왕은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아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사마왕인 개로왕의 동생 곤지의 아들로 정리되고 있다. 이는 개로왕, 문주왕, 곤지 형제 계보에서 곤지로 이어지는 왕통이다.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하고 왕권이 약하되어 문주왕 이하 여러 왕들이 피살되는 가운데 무령왕의 동생 동성왕이 즉위하여 신라와 혼인을 통한 결혼동맹으로 왕권을 강화하였으나 자신도 자객에 의해 죽었다. 이에 배다른 형, 사마, 즉 무령왕이 40세에 즉위하여 백제를 다시 일으키게 된다. 무령왕 아버지 곤지와 함께 일본으로 가다 가카라시마(加唐島)에서 태어나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일본에서 살고 있었다. 고구려 장수왕의 적극적인 백제 공략이 야기되는 가운데 백제 개로왕은 동생들을 시켜 백제의 구원을 준비하는데 문주왕은 신라로 곤지는 왜국으로 보낸 것이다. 이런 인연으로 무령왕은 자신의 관을 자신이 살던 일본 지역의 금송으로 만들었다.
우리 역사에서 무령왕은 백제의 지방 행정구역인 22개 담로를 설치했으며 중국 남조 양나라 무제와 교우하여 영동대장군이라는 책봉을 받을 정도로 백제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국력을 신장시켰던 유능한 왕이다. 그와 같은 백제의 힘은 아들 성왕으로 이어져 백제 중흥을 이끌지만 성왕의 죽음으로 시련을 맞았다. 하지만 서동, 무왕의 즉위하여 익산 미륵사 창건과 익산 왕궁리로 천도 준비 등 백제 국력이 다시금 회복되어 의자왕 초기 신라에 대해서 밀리던 백제는 신라에 대하여 40 여개 성을 빼앗고 김춘추(후에 신라 태종무열왕)의 사위 품석이 지키던 대야(경남 합천)을 함락하는 등 그 기세가 등등 했으나 신라와 당이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함으로써 660년 백제는 멸망하였다.
우리의 생각에 작은 영토를 가졌던 백제는 초라하고 힘약한 나라로 생각되었지만 서울의 몽촌, 풍납토성과 공주, 부여를 거치면서 살펴본 백제의 문화적 역량과 해상활동 등은 작은 나라 백제가 아닌 동북아시아 강자이자 문화강국이었던 백제를 만날 수 있었다.
특히 백제의 그 힘은 오늘날 일본의 뿌리가 되었으며 일본은 백제가 위급하자 660년 1만의 군대를 파병하여 구원하고자 하였으나 금강 하구인 백강구전투에서 패전하여 많은 백제 유민과 함께 돌아가 그동안 왜라고 불리며 문화적으로 낙후했었으나 백제 유민과 그 힘으로 일본이라는 국호를 만들고 헤이안 시대를 열며 고대국가로 발돋음하여 오늘의 일본을 만들 수 있었다. 근초고왕에서 무령왕, 백제 멸망까지 백제의 흥망성쇠는 일본이라는 완전한 국가의 발돋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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