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빛을 본다.' 남해기행 해남(땅끝마을, 달마산, 미황사)

달이선생 2011. 12. 2. 00:06

 

 

 

  해남 달마산(489m) 자락에 위치한 전 서울민족예술총연합 사무처장 심상구 선생(56)의 집,  늦은 밤 찾아들어 그 경관을 확인할 수 없었는데 이른 아침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둘러본 집과 주위 풍경은 한폭의 산수화가 따로 없다.

  심상구 선생은 우리 제정구기념사업회와 인연이 매우 깊다. 우리의 자매단체인 천주교도시빈민회에서 활동도 하고 제정구 선생을 도와 문화로 주민운동을 하였다. 현재는 이곳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달마산 자락에 정착하여 자연친화경 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있다. 집안에 갖가지 담근 술과 솔잎 등 다양한 효소를 담그며 건강한 먹거리를 만들려는 열정이 대단하다.

  

 

  전라남도 해남하면 늘 우리가 떠올리는 생각은 "땅끝"이다. 끝, 시작, 처음, 마지막, 최초 등 우리 삶 속에 무수히 의미를 붙여가면 쓰고 있는 말이다. 해남군 송지면 갈두리는 바로 끝~ 땅끝마을이다. 뭍으로는 우리 한반도 빛의 끝자락..

  땅끝마을은 현재 관광지로 개발이 되어 땅끝마을 정상인 사자봉에 모노레일을 설치하여 몸이 불편한 분들도 쉬이 올라갈 수 있도록 하였다.  

  사자봉 정상에는 그 주변을 잘 볼 수 있도록 땅끝전망대가 있어 360' 주변 경관을 둘러볼 수 있다. 동쪽으로는 멀리 완도와 가까이 동화도, 백일도가 보이고 서로는 가까이 마치 커피전문점의 허니브레드와 닮은 꽃섬과 저멀리 진도가 보인다.  

  모노레일은 일반 왕복 4,000원, 전망대는 1,000원이다. 모노레일은 민자유치로 개발한 것이라서 할인이 없다. 다만 전망대는 전라남도 주민이면 신분증을 제시해서 면제 받을 수 있다.

 

  시원한 바람과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땅끝마을의 멋진 경관을 둘러볼 수 있는 오늘, 이 여유가 감사하다.

가까이 흑일도와 백일도가 눈에 들어오고 저멀리 완도가 보인다.

 

 

땅끝전망대 밑의 작은 계단길..

 

맨 위 사진은 허니브레드를 닮은 꽃섬이고 그 멀리 진도가 보인다. 갈두산 봉수대는 전망대 입구에 위치한다. 맨 아래 사진은 갈두여객터미널 서측 풍광이다.

 

 

 

  땅끝에서 만나는 아름다운 예술품의 극치.. 자연이 만든 최고는 달마산이고 인간이 만든 최고는 여기 달마산 중턱의 미황사가 아닐까

  달마산과 산중턱의 아름다운 절, 미황사에 대해 달마선사의 설화가 전한다.

  달마는 인도 불교 28대 조사이자 중국 선종을 만든 사람으로 인도 파사국에서 태어나 반야다라존자에게 배우고 그의 권유로 470년 중국으로 들어와 소림사(소림사는 중국 무림의 본산 중 하나다.)에서 9년간 벽을 보며 좌선수행을 한 승려이다. 그때 혜가가 달마의 가르침을 받고자 눈 속에서 팔을 자르며 법을 받아 수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이런 달마가 죽은 뒤에 달마는 죽은 것이 아니라 부처의 몸이 되어 짚신 한 짝을 지팡이에 꿰어 차고 서천(인도)로 갔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인데

  『동국여지승람』고외스님의 이야기편에  따르면 1264년 고려 때 중국 남송으로부터 큰 배가 달마산 동쪽 바다에 들어와  "내가 듣기로 이 나라에 달마산이 있다고 하는데 그 산이 이 산인가?" 고관이 묻자 주민들이 "그렇다."고 했다. 그러자 "우리나라에서는 다만 이름만 듣고 멀리 공경할 뿐인데 그대들은 이곳에서 나고 자랐으니 부럽다. 이 산은 참으로 달마대사가 상주할 땅이다.. "하고 산을 향해 절을 하고 산을 그려갔다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달마가 서천으로 간 것이 아니라 해남으로 왔고 미황사를 달마대사의 법신이 계시는 곳이고 이 산은 달마산이되었다라는 이야기다.

  

 

 

   단청이 없고 세월에 씼긴 듯 엷은 하얀 빛이 감도는 대웅보전은 달마산 산봉우리와 함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어 단연 으뜸으로 치는 풍광이다. 아마도 해남 땅끝에서 만나는 빛은 이 미황사가 아닐까

 

  미황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말사이다. 1692년(숙종 18)에 세운 사적비에 따르면 749년(경덕왕 8)에 의조화상(義照和尙)이 창건했다고 한다.

  창건설화에 의하면 돌로 된 배가 사자(獅子) 포구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이 다가가면 멀어지고 물러나면 가까이 다가오는 일이 계속되었다. 그러자 의조가 제자들과 함께 목욕재계하고 맞이하니 비로소 배가 포구에 도착했다. 배에 올라보니 금의인(金衣人)이 노를 잡고 있고 큰 상자 안에 경전·비로자나불상·문수보살상·보현보살상·40성중·53선지식(五十三善知識)·16나한·불화(佛畵) 등이 꽉 차 있고, 배 안에 있던 바위를 깨니 검은 황소 1마리가 나왔다.

 그날 밤 의조의 꿈에 금의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인도 국왕으로 금강산에 봉안하고자 경전과 불상을 싣고 왔으나 금강산에 절이 가득해 새 절터가 없어 돌아가던 중인데 이곳의 지형이 금강산과 비슷하므로 소 등에 불상과 경전을 싣고 가다가 소가 머무는 곳에 절을 지으라"고 했다. 이에 다음날 소 등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길을 떠났는데 한 곳에 이르러 소가 한 번 크게 울고 드러눕자 그곳에 통교사(通敎寺)라는 절을 짓고, 소가 다시 일어나 가다가 마지막으로 머문 곳에 지은 절이 바로 이 미황사인데 소의 울음소리가 아름답고 금의인이 황금으로 번쩍거리던 것을 기리기 위해 미황사라 이름했다고 한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약탈과 방화로 큰 피해를 입었고 1601년(선조 34), 1660년 중창하고 1752년 금고(金鼓)를 만들고, 1754년 대웅전과 나한전을 중건하는 등 대대적인 공사를 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남 땅끝에 금강산이라 불리는 달마산은 명산 중에 명산이다. 기감이 좋은 분들은 그 기가 매우 세서 오래 있을 수 없다는 말을 할 정도로 경이로운 매력을 가진 산임에는 분명하다. 서울까지 가려면 시간이 많이 걸려서 아쉽게도 달마산에는 오를 수 없었지만 달마산을 오면 달마산 제일봉인 도솔봉에 올라서 미황사의 여러 암자 중에 하나인 도솔암을 찾아야 한다.

  도솔암에서 바라보는 서해의 풍광이 해남의 제일경치로 꼽으며 특히 해질녁 낙조가 그만인데 창건자였던 의조화상도 이곳 도솔암에서 낙조를 즐겼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미황사에 동행했던 해남 농부 심상구 선생과 강북평화의집 실무자 김영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