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빛을 본다.' 남도기행 나주목 관아 및 객사 금성관

달이선생 2011. 12. 2. 00:15

  나주 구시내 나주목객사인 금성관 정문 망화루 앞에는 곰탕집들이 즐비하다. 그중에도 나주매일시장입구에 위치한 남평할매집이 제일 맛이 좋다. 남평할매집의 곰탕에 맛은 그 국물이 담백하고 구수했다. 또한 수육도 한 접시 시켜서 먹었는데 고기가 질기지 않고 부드러우며 잡내가 없이 깔끔했다. 이곳 나주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손색이 없다. 한우고기가 지역특색 음식이 되는 경우는 나주말고도 광주의 떡갈비, 수원의 갈비 등이 유명한데 이들 지역의 공통점은 모두가 교통의 요지이자 물류의 집산지였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변지역이 농업활동이 활발하여 과거 우시장이 크게 열렸던 특징이 있다. 나주 역시 영산강을 낀 기름진 나주평야에 위치해서 우리나라에 대표적 곡창지대다.

 

  나주목 관아 객사인 금성관의 그 규모가 상당한 것에 놀라웠다. 이곳 나주가 호남지역에서 꽤 위상이 높았던 큰 고을임을 알수 있다. 일찍이 나주는 서남해의 해상교통(무역)로의 중심에 위치하며 발전한 곳으로 고대 삼한시대에 주요한 마한의 국가들이 형성되어 있었고 백제 근초고왕이 이지역을 복속하기 전까지는 천안의 목지국에 이어 오랫동안 마한의 중심이었다. 그래서 반남고분군 등 이 지역만에 특색을 가지는 거대한 독무덤이 조성되었는데 봉분이 큰 고분들이다.  영산강 유역에 주로 분포하여 이들 세력이 과거에 서남해를 중심으로 성장하였던 해양세력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영산강은 수심이 얕고 폭이 줄었지만 당시에는 강폭도 넓어 나주 깊숙이 들어갔던 수운 교통로였다. 

  이밖에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같은 무덤들이 영산강에 인접하여 또한 분포하는데 이들 무덤의 부장품으로 왜계유물(하니와토기)들과 한식유물들이 다수 나와 당시에 왜와 중국 쪽의 사람들이 빈번하게 드나들며 교역과 교류를 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한국고고학계는 전방후원분이 토착지배층과(독무덤)는 거리가 있다고 본다. 일본의 고고학계는 이를 두고 왜의 한반도남방경영설을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발견으로 해석하여 향후 역사정립에 크나큰 어려운 문제가 되고 있다.) 

  서남해지역이 중국과 왜를 잇는 삼각무역이 가능하였기에 완도 청해진을 거점으로 성장한 장보고는 이 지역에 중심이었고 왕위다툼에 밀려 세력이 축소된 이후에도 그 후신들이 서남해를 중심으로 큰 세력을 형성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이 이곳 나주를 견훤으로부터 빼았아 세력을 키워 고려를 건국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나주는 금성이라고 불렸고 이곳의 유력한 호족은 오다련이었다. 그가 바로 이 서남해지역을 대표하는 장보고 세력의 후신으로 추정된다. 이 오다련 딸이 왕건의 둘째 부인이 되는 장화왕후 오씨(莊和王后吳氏)이다. 오씨의 소생으로 고려 2대 왕에 즉위하는 혜종(惠宗 이름 무武, 912-945, 재위 943-945)은 왕건이 나주에 와서 오씨와 잠자리하여 가진 아들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왕건이 나주에 와서 길을 가다 목이 말랐는데 우물에 있던 여인에게 물을 청하니 여인이 버들잎을 띄워 물을 건넸다. 바로 오씨다. 그런 오씨를 눈여겨 볼 사이 왕건의 인물됨이 범상치 않다고 생각한 오씨의 아버지 오다련이 그날로 왕건을 청해 오씨로 하여금 잠자리 수발을 들게 하였다.(고대부터 내려오는 전통으로 손님에게 딸이나 부인으로 잠자리 수발을 하였다.)

  왕건은 오씨와 잠자릴 하였지만 이미 혼인을 한 터라 소생을 보고 싶지 않아 바닥에 사정을 하였다. 이를 안 오씨가 왕건 몰래 재빨리 바닥에 흘린 것를 찍어 국부에 넣어 수태를 하였는데 그렇게해서 낳은 아들이 고려 2대 왕 혜종이다. 혜종은 왕건이 바닥 자리에 흘려 그걸 찍어 낳았기 때문에 그 얼굴에는 그때 자리자국이 남아 사람들은 주름진 임금(접왕, 접주)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고려사에 전한다.

  재밌는 이야기나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다만 평소 사람들이 주름진 임금이라고 할 정도로 그에게 주름이 많았다는 것을 볼때 정치적으로 혜종이 처한 딱한 사정을 생각할 수 있다. 고려 초기의 권력의 형태는 호족연합정권이었다. 이 때 왕권이란 그 배후세력으로 호족이 누구냐에 따라 세가 결정되었는데 혜종은 외가가 나주의 오다련이라 상대적으로 중앙호족보다 세력이 미약하였다. 따라서 맏아들이지만 그가 태자로 옹립되는 것도 쉽지 않아 왕건은 개국공신이자 대광 박술희(朴述熙, ?-945)에게 혜종을 부탁하였다. 즉위 후에도 자신의 외손자 광주원군을 옹립하려는 왕규(王規, ?-945, 광주의 대호족)의 반란과 그의 이복동생들인 요(堯, 정종)과 소(昭, 광종)형제가 큰 걸림돌이었다. 이들 형제는 신명순성왕태후유씨(神明順成王太后劉氏)의 소생으로 그 아비 충주 유긍달의 지원을 받았는데 당시 유긍달은 대표적인 큰 호족이었다.

  뿐만 아니라 요는 서경(평양)의 왕식렴(王式廉, ?-949, 왕건의 조카)의 지원을 받아 왕규세력을 몰살하고 혜종의 측근인 대광 박술희를 강화 갑곶에 유배하였다 죽였다. 그렇게 해서 결국 혜종을 이어 왕권을 거머쥐었다. 그의 동생 소 역시 황주(황해도 패강진 지역)의 대목황후 황보씨와 결혼으로 황주의 대호족을 등에 업었으며 아울러 전왕이자 이복형인 혜종의 딸 경화궁부인 임씨를 부인으로 맞아 강력한 세를 이뤘다.  

  이렇듯 혜종이 주름진 임금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의 왕위를 노리는 자들이 많아 늘 근심걱정이었고 그래서 그런 그의 딱한 당시 처지를 빗대어 나온 표현이 아닌가 한다. 혜종은 결국 재위 2년만에 정종일파에 손에 죽게 되었고 정종과 광종이 차례로 왕위에 올랐다.

 

  호남지역의 곡창과 서남해의 무역의 거점이 되는 이 중요한 나주는 고려와 조선에서 목(牧)을 설치했다. 목은 고려와 조선의 지방행정단위로 부목군현 중에 큰 고을에 속하며 대개 지방의 거점에 설치되었다. 유수관은 종2품, 도호부와 목관은 정3품, 도호부는 종3품, 지군사는 종4품, 판관과 현령은 종5품, 현감은 종6품으로  따라서 이곳에 부임하는 관리는 정3품의 외관직 고위관료였다.  

  금성관은 나주목의 객사로 객사는 왕의 전패(궐패)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관리와 유림이 모여 망궐례 행하던 전각과 거기에 딸린 건물에서 외부로부터 오는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된 관아다. 

  기록에 따르면 금성관에서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천일이 의병을 모아 출정식을 가졌고 구한말 을미사변(1895년) 때 중전 민씨의 관을 모셨던 충절의 역사가 관계된 곳이다.

  특히 의병장 김천일(金千鎰, 1537-1593) 은 나주가 배출한 걸출한 위인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인 김천일은  이항(李恒)의 제자이다. 이항은 당대 학자 백인걸이 "학식이 조식과 같다."라고 칭송할 정도로 명망높은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김천일은 여느 의병장들의 이력과 달리 1573년(선조 6) 학행(學行)으로 발탁되어 처음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를 시작으로 관직을 하고 하급관리를 전전하면서도 당대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강직하게 사회부조리를 정확하고도 날카롭게 비판했다. 특히  지평(持平) 때에 소를 올려 시폐를 적극 논하다가 임실현감으로 좌천되는 어려움도 당했으나 그 뒤 담양부사·한성부서윤·수원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수원부사시절의 경험은 그가 이끈 의병들이 수원지역의 지리적 요충지인 독산성에서 활약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마챔내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국왕이 몽진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고경명, 박광옥, 최경희 등에게 의병을 일으키라고 독려하는 한편, 바로 이곳 금성관에서 송제민, 양산숙, 박환 등, 의병 300여명을 모아 거병하여 북상하였다. 호남지역에서 제일 먼저 일어난 의병이다. 북상하면서 수원으로 가는 길에 스스로 의병에 참가한 자가 많았고 특히 호서 방면에서 모집한 숫자가 크게 늘어나 군세가 높았다.

  이를 바탕으로 수원의 독산성(禿山城=권율장군이 물이 부족한 줄 아는 왜적에게 쌀로 말을 씼게 하여 포위를 풀게 하였다는 기지로 유명한 세마대)을 거점으로 유격전을 전개하여 전과를 올렸다.  특히, 금령전투(金嶺戰鬪)에서는 일시에 적 15명을 참살하고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8월 전라병사에 최원(崔遠)의 관군과 함께 강화도로 진을 옮겼다. 이 무렵 조정으로부터 창의사(倡義使)라는 군호(軍號)를 받고 장례원판결사(掌禮院判決事)에 임명되었다.

  강화도에 진을 옮긴 뒤 강화부사·전라병사와 협력해 연안에 방책(防柵)을 쌓고 병선을 수리해 전투 태세를 재정비하였다. 강화도는 당시 조정의 명령을 호남·호서에 전달할 수 있는 전략상의 요충지였다.

9월에는 통천(通川)·양천(陽川) 지구의 의병까지 지휘했고 매일같이 강화 연안의 적군을 공격했으며, 양천·김포 등지의 왜군을 패주시켰다.

  한편, 전라병사·경기수사·충청병사, 추의병장(秋義兵將) 우성전(禹性傳) 등의 관군 및 의병과 합세해 양화도전투(楊花渡戰鬪)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또한, 일본군의 원릉(圓陵) 도굴 행위도 막았다.

  다음해인 1593년 정월 명나라 군대가 평양을 수복, 개성으로 진격할 때 이들의 작전을 도왔으며, 명·일간에 강화가 제기되자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서울이 수복되어 굶주리는 자가 속출하자 배로 쌀 1,000석을 공급해 구휼하였다.

  특히 2월에 권율(權慄)의 행주산성 전투에 강화도로부터 출진해 참가하였다. 이처럼 행주대첩에서는 민관군이 함께하여 이룬 빛나는 승전이었고 나주에서 일어난 의병이었지만 김천일이 이끄는 의병은 최전방에서 왜군에 맞서 싸운 의병이었다.

  의병장 김천일의 이런 행적들로 볼 때 그는 문신관료였고 초야의 선비이자 의병장이었지만 그의 지리적 식견과 전략, 전술에도 밝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개전 초기 수원과 강화도에서 활동한 전력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특히 "진주가 없으면 호남도 없다. 진주를 지켜야 한다"며 진주를 지키기 위해 남하했던 그의 행적은 당시의 전황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1593년 4월 왜군이 서울에서 철수하자 이를 추격, 상주를 거쳐 함안에 이르렀다. 이 때 명·일강화가 추진 중인데도 불구하고 남하한 적군의 주력은 경상도 밀양 부근에 집결, 동래·김해 등지의 군사와 합세해 1차 진주싸움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한 진주성 공격을 서두르고 있었다.

  1차에서 김시민과 진주성민의 분전으로 약이 바짝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당시 막강한 다이묘였던 다테 마사무네를 출정시키며 진주에서의 설욕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이런 위기의 진주성으로 6월 14일 3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입성하자 여기에 다시 관군과 의병이 모여들었다. 합세한 관군·의병의 주장인 도절제(都節制)가 되어 항전 태세를 갖추었다.

  10만에 가까운 적의 대군이 6월 21일부터 29일까지 대공세로 나왔고 민관군이 분전하였으나 끝끝내 왜군을 막을 수 없고 함락되었다. 이 때 김천일 장군은 아들 상건(象乾)과 함께 촉석루에서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진주성이 끝내는 함락되었지만 이때 막대한 손실을 입었기에 당초 목표였던 진주성을 함락하고 호남으로 들어가려던 왜군은 더이상 진군할 수 없었다. 

  때문에 조선의 곡창지대 호남을 지켰고 그 결과 임진왜란을 막아낼 수 있었던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의 배후지를 안전하게 하였던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그 공로로  1603년(선조 36) 좌찬성에 추증되고, 이어 1618년(광해군 10)에 영의정이 더 내려졌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며 나주의 정렬사(旌烈祠), 진주의 창렬사(彰烈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 태인의 남고서원(南皐書院), 임실의 학정서원(鶴亭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건재집≫이 있다.

 

                       객사 금성관 정문인 망화루다. 삼문구조에 팔작지붕을 한 이층 누각으로 되어있다.

 

                  맞배지붕의 중삼문과 어도

 

                  망화루 뒷편

 

                  금성관 정면 가운데 도툼한 길이 어도, 좌우 문무반 신하들이 사용한 길이다.(궁궐의 예와 같다.). 좌우로 객사의 숙소인 동익헌과 서익헌이 있다. 좌측의 동익헌이 규모가 큰 것은 당상관 이상이 머물렀던 곳이며 문관예우의 전통에 따른 것이다. 

 

                  금성관 편액(현판)

 

                  금성관 내부로 이곳에 왕의 위패를 모셨다. 궁궐 전각에 버금간다. 왕의 위패 역시 살아있는 군왕을 상징하기에 때문에 그 위패가 모셔진 곳은 궁궐전각과 다름없는 위용과 권위가 있다. 흡사 궁궐의 전각과 닮아있다. 이곳에 위패를 모시고 망궐례를 하였다.

 

                  나주를 찾은 관리들이 묵는 숙소인 우측 서익헌으로 당하관(서반=무반)이 사용했다.

 

                  동익헌 좌측 당상관(문반) 사용

 

                  가까이 사각형의 단은 망궐례에서 예를 올리던 곳이고 그 뒤의 공간은 내삼문 터이다. 그리고 이어진 가운데 어도와 중삼문이 보인다.

 

                      나주곰탕(남평할매집) 나주매일시장 입구에 있다.

 

  나주목 관아 정문인 정수루. 나주 객사 금성관의 정문인 망화루의 서쪽 직선방향으로 있으며 과거에는 문루 밑으로 차량도 다녔다고 한다. 현재 나주목 관아는 복원되지 않았고 다만 나주목사가 기거했던 요즘으로 치면 관사에 해당하는 내아가 남아있다. 금성관 정문인 망해루와 같은 2층 누각 구조이며 2층에 놓은 북은 관아에서 시각을 측정하고 북으로 시간을 알리던 것이다. 이 북소리를 듣고 종루에서 종을 쳐서 시간을 알렸고 나주읍성의 문을 열고 닫았다. 이는 서울 도성이나 다른 지방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