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금신전선상유십이 今臣戰船尙有十二).”
이순신 장군은 원균이 이끈 수군이 왜군의 유인작전에 말려들어 칠천량에서 몰살당하고 다시금 수군통제사에 임명되자 조정에 올린 장계에서 한 말이다. 이 장계는 명량대첩 직전에 올린 것이다.
명량(鳴梁)은 전라남도 해남군의 화원반도와 진도 사이의 해협으로 물살(조류)이 빠르고 소리가 요란하여 바닷목이 우는 것 같다고 하여 ‘울돌목’이라 불렸다. 명량은 그 한자식 표현이다. 현재 울독목에는 진도대교를 놓아 배가 아닌 다리로 건널 수 있다. 이곳 울돌목에 서면 정말 물살이 휘돌아 나가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이렇게 험난한 지형을 이용해서 싸움을 했던 것이 바로 명량대첩이다. 명량해전에서는 조선 수군 120명, 12척의 배와 백성들이 가져온 배 한척 총 13척으로 적선 133척을 격파하였다. 이처럼 우리가 이긴 싸움이지만 이 해전은 처음부터 무모한 싸움이었다.
그 당시의 상황을 잘 알려주는 경상우수사 배설의 이야기를 보면 당시 상황이 얼마나 다급했는지 알 수 있다. 배설은 칠천량에서 패한뒤 전세를 돌릴 수 없기에 원균을 떠나 자신이 지휘하던 12척의 배를 이끌고 달아났다. 원균도 육지로 달아났다가 죽었다. 바로 배설과 함께 도망한 이 수군과 전함이 명량에서 승리하고 조선을 위기에서 구한 역전의 용사들이 되었다. 패배자이자 도망자였던 그들이 말이다. 역사는 이럴 땐 정말 드라마틱하다.
그런데 당시 배설은 12척의 배를 들어 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 장군 휘하에 들어갔지만 이미 전세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라 판단하고 있었다. 고작 열두척으로 그 수십, 수백의 적을 상대한다는 것은 목을 내밀고 죽여달라고 하는 것밖에는 생각이 안되었다. 이는 배설 뿐만 아니라 이들 수군 및 백성들.. 그리고 조정의 판단도 그랬다. 따라서 조정은 이미 손쓸 수도 없이 망가진 수군을 패하여 모두 육전으로 합류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제 아무리 이순신이라 할지라도 무슨 수나 있을 수 있나하는 판단이었다. 수군을 파해 육전에 합류시키려던 생각은 당시 그런대로 육전에서는 관군에 재정비되고 의병들과 명군이 왜군을 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은 서해와 남해바다에 대한 제해권을 가지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는 전략이었다.
만약 지금처럼 바다가 수군에 의해 통제가 되지 않고 왜군이 바다를 통해 북진하여 군량미와 병력이 원활히 조달된다면 전세는 금방 역전시킬 수 있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였다. 이 점이 바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정유재란을 일으킨 노림수였다.
이런 위기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던 배설은 신병을 핑계로 휴가를 내고 그날로 도망쳤다. 이미 칠천량에서 원균에게서 달아난 그였다. 이처럼 당시 상황은 아무도 조선수군이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던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이순신 본인도 명량으로 출천하는 전날 쓴 "필사즉생 필생즉사('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必死卽生 必生卽死) 글씨에서 결연한 의지를 피력하였고 싸움이 끝나고 쓴 일기에서 "천행이었다."라고 밝히고 있어 이순신 본인도 얼마나 어려운 처지에서 싸움을 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위기를 타계하고 도요토미의 야욕을 막아 일본의 북진을 멈추게 했던 것이 바로 명량대첩(9월 16일)이었다. 명량에서의 승전 이후 경기와 충청도로 진군했던 왜군은 서둘러 후퇴하였다.
이렇듯 칠천량에서의 패전은 경악할 사건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전세를 역전시키며 경상도 지역으로 왜군을 몰아 넣으면서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희망이 꽃필 때, 다시금 정유재란을 일어난 것은 청천벽력이었다. 따라서 왜군들이 일본에서 건너와 다시 부산으로 집결하자 조정에서는 이 참에 아주 부산에서 완전히 차단하여 확전을 막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 이는 임진왜란의 참담한 공포를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던 바람에서였다.(특히 선조는 끝까지 한양을 지킨다고 말했으나 한양을 버리고 야반도주하여 의주까지 갔다. 그래서 백성들은 한양 궁궐 대부분을 방화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마치 한강철교를 끊고 달아났던 이승만과 같다.) 따라서 유능한 이순신이 부산을 쳐서 일본의 북진을 막을 것을 명령하였다.
하지만 이순신은 생각이 달랐다. 현재 부산은 육지와 인근 섬들이 이미 왜군들에 의해 장악되어 요새화가 되어있었고 거기에 엄청난 수의 왜수군이 건너와 방비는 물론이고 그 세가 대단하였다. 이런 이곳을 수군 단독으로 공격한다면 호랑이굴에 스스로 들어가는 꼴이었다. 따라서 그나마 육지와 바다에서 함께 공격하는 수륙양면작전으로 협공하지 않으면 어렵다고 생각하였다. 이것도 굳이 공격해야 한다면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래서 여러차례 불가하다는 장계를 올렸다. 하지만 조정은 이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선조는 오히려 이순신 장군이 다른 뜻을 품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였다. 이런 때에 원균의 상소는 선조를 격노하게 하였고 따라서 조정은 조정을 기만하고 임금을 무시한 죄(무군지죄無君之罪), 적을 토벌하지 않고 나라를 저버린 죄, 다른 사람의 공을 빼앗고 모함한 죄, 방자하여 꺼려함이 없는 죄 등을 들어 이순신을 파직하고 서울로 압송한다.
이때 권율과 이순신의 능력을 알아보고 발탁했던 유성룡은 “통제사의 적임자는 이순신밖에 없으며, 만일 한산도를 잃는 날이면 호남지방 또한 지킬 수 없습니다.”라고 불가하다 적극 간하였고 당시 영남지방을 순시하다. 소식을 들은 도체찰사 이원익은 “왜군이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수군인데, 이순신을 바꾸고 원균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는 치계(馳啓)를 올렸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서울로 압송된 장군은 갖은 고문과 함께 죽음을 당하기 직전이었다. 이 때 우의정 정탁은 이순신을 살리고자 간절하게 상소를 올렸고 다행히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원균은 이순신이 거부했던 부산진 공격의 명을 받아 부산을 치러갔다. 부산에 이른 그는 바다와 육지에서 방비하고 있던 왜군의 기세에 부산진은 그야말로 사지(死地)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고 결국 후퇴를 거듭하던 끝에 칠천량에서 모두 몰살 당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정유재란을 통해 다시금 침략한 왜군은 승리를 확신하였고 반대로 조선과 명은 긴박한 위기에 내몰렸다.
이 때 조정은 긴급히 비변사 회의에서 열었지만 어찌할바 모르고 허둥됐는데 경림군 김명원과 병조판서 이항복 만이 이순신을 통제사로 다시 기용하자고 주청하였다. 이렇게 다시금 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장계를 올려 굳은 결전의 의지를 밝힌다. 그것이 바로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금신전선상유십이 今臣戰船尙有十二).”이다.
이순신 장군은 희대의 명장이다. 1592년 5월 7일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23전 23승 불패의 신화를 만들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아는 사실이다.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발틱함대를 이순신의 학익진을 써서 대승을 거둔 일본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는 승리 후 기자회견에서 넬슨과 비교되자 자기가 더 낳다고 생각한다고 하고 이순신 장군에 비하면 하사관에 불과하다며 이순신 장군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 후 일본해군은 진해기지에서 이순신 사당을 지어 매년 제를 올렸다고 한다.
이렇듯 적국의 장수조차도 탄복하게 하였던 이순신 장군의 빛나는 영광의 이면에는 백성을 보호하고(保民) 나라를 보호한다.(保國)라는 굳은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가 전투에서 패하면 백성이 죽고 나라가 망한다. 이 무거운 책임감.. 이건 두려움이었다.. 때문에 질 수 없는 싸움을 했던 것이고 그 엄청난 중압감은 수시로 복통을 호소하며 그를 며칠이고 병상에 눕게 만들었다.
이렇게 뛰어난 인재이자 장군을 누구보다 시기하고 두려워했던 사람은 당시 임금인 선조였다는 것을 기록을 통해 볼 수 있다. 『선조실록』에 보면 선조는 좌의정 이덕형이 "왜적이 대패하여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다."고 보고를 받고 “대첩을 거두었다는 설은 과장인 듯하다.”라고 애써 공을 깎으려 했으며 또한 휘하에 있던 원균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이를 우려한 치계에서 이순신의 잘못을 강조하고 있으며 서울로 압송되었을 때는 무군지죄(無君之罪)를 비롯해 네 가지 죄를 지었다면서 "이렇게 많은 죄가 있으면 마땅히 율에 따라 죽여야 한다(『선조실록』 30년 3월 13일)"며 적극적으로 이순신을 제거하려고 했다.
결국 이 영웅은 영화와 같이 마지막 전투 노량에서 숨을 거두었다.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건너는 이 바다가 이순신이 울었고 왜군들이 울부짖으며 죽어간 바다이다.
숱한 이야기와 사연이 깃든 사람의 땅이다. 먼저 찾아간 곳은 조선 후기 산수화의 대가 소치 허련(小痴 許鍊,1809-1892)이 살았던 운림산방이다. 운림산방을 찾으면 정면으로 잘 꾸며진 우리나라 전통연못을 만나는데 허련의 후손들이 만들었다. 그 멋스러움 때문에 영화 '스캔들'이 촬영되기도 했다.
연못 뒤로 초가로 이루어진 소치의 생가가 잘 보존되어있다. 검정색 어두운 돌들로 만든 낮은 담장과 짚을 엮어 올린 아담하고 소박한 초가 지붕, 대문을 지나 들어서면 행랑과 안채가 두루 갖춰져 있다. 일반사람들은 이런 초가를 보면 평범한 살림살이로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집들은 초가였고 이도 여의치 않으면 반움집 같은 곳에서 살았다. 옛날 사진이나 문화유적을 발굴하다보면 이런 사실을 곧잘 확인한다.
이렇게 초가를 짓고 살려면 자신이 경작하는 땅이 일정 이상 소유하지 않는 이상, 초가지붕을 유지 할 수 없어 보통 이상의 집이다.
흔히 청빈을 빗대어 초가 삼칸이란 말을 많이 쓰는데 당시 고위관료가 초가삼칸을 짓고 산 것은 대단한 검소였고 청백리라해도 손색없다. 이는 마치 수조에 달하는 자산가인 삼성 이건희 회장이 일반 아파트에 사는 것과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파트에 사는 걸 가난하다고 말할 수 없지 않나
소치 허련은 헌종 때 시서화 삼정이라고 불리던 화공이다. 그 빼어난 미적 재능은 남종화풍의 산수화를 통해 빛을 발했다. 소치는 남종화의 새바람을 일으켰던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의 제자였기 때문이다. 이 남종화는 북종화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명(明) 말기의 동기창(董其昌)과 막시룡(莫是龍) 등이 당나라 선종(禪宗)이 남북분파(南北分派)를 이루는 것을 착안하여 그 개념을 중국 산수화에 도입하여 그 출신성분과 화풍에 따라 남북화풍으로 구분하였다.
남종화는 우리나라에서는 남파(南派)라고도 하며 그 특징은 양반사대부들이 즐겨 그렸기 때문에 남종문인화라고 한다. 학문과 교양을 갖춘 문인들이 직업이 아닌 여가나 수양 측면에서 수묵과 옅은 담채를 써서 작가 내면세계를 표현하고, 시정적(詩情的)으로 그림에 뜻과 생각을 담아 그린 그림으로 품격 높은 그림이다. 우리나라는 17세기 전반경에 유입되어 이영윤(李英胤)·조속(趙涑) 등의 일부 문인화가들에 의해 소개되다가 1700년경 윤두서(尹斗緖)·정선(鄭敾)·조영석(趙榮祏)에 의해 본격적으로 유행하였다. 그리고 다음 세대인 심사정(沈師正)·강세황(姜世晃)·이인상(李鱗祥)을 중심으로 정착되면서 조선 후기 화단의 주도적인 화풍이 되었다.
때문에 그림의 내면보다는 그림 자체의 화려함과 세밀함에 치중하고 기교적이고 장식적인 공필화(工筆畵) 계통의 북종화풍을 따르던 직업화가들도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남종화법을 구사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남종화풍은 간략하면서도 거칠고 강렬한 토착적인 경향을 심화시키면서 점차 형식화되기에 이르는데 이 형식화 현상에 대해 반대하며 남종화 본래의 문인화적 이념과 정신을 회복할 것을 강조하는 새바람을 일으킨 사람이 소치의 스승 추사 김정희다.
이와같은 회화의 전통이 남종화를 일제강점기와 8·15해방 후에도 꾸준히 사랑받게 하였고 주로 호남지방 화단을 중심으로 이어졌다. 그 중심에 소치 일가가 있고 그의 손자 남농 허건이 대표적이다. 남농의 등단과 활동이 일제강점기에 두드러졌다는 점에서 친일행적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가 있다.
소치가문이 남종화로 회화의 일가를 이뤄 현재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고 있다. 특히 진품명품이라는 문화재 감정프로그램에도 자주 소개 될 정도로 유명하다. 때문에 위작도 많다.
참고로 남종화와 대비되는 북종화의 대표적 작품은 안견의 몽유도원도(1447년 세종 29년 안평대군의 꿈을 그림 일본 덴리대天理大 소장)가 대표적이다.
소치의 이력에 등장하고 그 평생 거목이 된 인연.. 바로 스승들 초의선사(艸衣禪師, 1786-1866)와 추사 김정희다. 이들의 남다른 인연을 소개한다. 유홍준의『완당평전』에 따르면 조선후기 추사체라는 우리 고유의 서체인 추사체를 만든 추사 김정희와 초의, 소치의 각별한 인연이 소개되고 있다. 노론 벽파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와 같은 경주 김씨가문에서 태어난 김정희는 어려서부터 총명함에 사랑과 주목을 받으며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가문이 김조순의 안동 김씨와 세를 다투다. 1830년 아버지 노경이 윤상노 옥사에 연루되어 고금도에 유배되었다. 이후 순조의 배려로 풀렸났다가 다시 윤상노 옥사로 인해 나이 55세에 제주도로 9년간의 유배를 떠난다.
초의선사는 추사의 동갑내기 친구이자 서로 생각이 통하여 평생지기가 된 사람이고 소치 허련을 추사에게 소개한 사람이다. 이 때부터 소치는 추사문하에서 서화를 배우게 되었고 추사가 평생을 아낀 제자가 되었다. 초의선사와 소치의 각별한 우정은 추사의 제주 유배시절 그를 찾아가 몇 달씩이나 같이 보낸다. 특히 소치는 추사가 귀양 온 지 넉 달 만에 추사를 찾아왔으며 귀양살이 중에 세 번이나 찾아와서 뒷바라지를 해줬다. 그 때 추사 곁에서 생활하며 소치가 그린 초상화가 ‘완당 선생 해천일립상(海天一笠像)’ 이다. 그리고 초의는 귀양 온지 2년이 되는 해에 서울에 있는 아내가 죽어 상심한 추사를 찾아와 반년을 함께했다. 유배지에서나 떨어져서 함께했던 초의는 유배지에서 회한에 젖어 있는 벗, 김정희를 위해 자신이 직접 기르고 덕은 차를 멀리 제주까지 소치를 통해 전해주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 답례로 차향이 은은하게 나는 방에 걸라고 일로향실(一爐香室 ‘차를 끓이는 다로茶爐의 향이 향기롭다.')’이라는 글씨를 써서 소치에게 주어 초의에게 전했다. 초의는 자신이 머물던 대둔사 일지암(一枝庵 ‘다만 한 개의 나뭇가지로 지은 암자’)에 걸었두고 친구의 마음 씀을 고마워했다.
이렇듯 초의와 추사의 사이에는 그들의 믿음직한 소치가 있었다.
차에 대한 일가를 이룬 초의는 맥이 끊어져가던 조선 차(茶)문화를 일으킨 다인(茶人)이다. 특히 다산 정약용은 강진으로 귀양와서 초의와 사귀며 차 맛을 익혔고 추사는 초의에게 차를 배워 초의에게 차를 자주 요구하고 즐겼던 애호가였다.
말년에 소치는 헌종 부름까지 받았던 남종화의 대가였지만 스승 추사가 세상을 뜬 다음에는 고향 진도로 내려와 조용하게 살면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소치의 글씨는 추사체를 따랐다.) 그때 남긴 것이 몽연록(夢緣綠 '꿈속에서 만난 인연' 후에 소치실록이라 바꿈)인데 마치 지난날 스승 추사와 초의와 보냈던 추억을 마치 일장춘몽으로 생각하며 지은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봄꿈이 덧없음이 아닌 옛날 기분 좋은 추억이 한순간의 기분 좋은 꿈처럼 느껴진 노년의 소치에 마음이지 않았을까?
이들의 인연을 잘 설명해주는 『내일』, '추사와 초의 그리고 소치'라는 김세곤의 글을 소개하며 운림산방에서의 여운을 담는다. "운림산방에서 돌아오는 길에 ‘인연(人緣)’, ‘만남’이라는 단어를 되새긴다. 추사와 초의의 만남. 초의와 소치의 만남. 추사와 소치의 만남. 좋은 만남. 평생을 같이하는 인연. ‘일십백’이라는 말도 생각난다. 세상을 살면서 한 사람의 스승과 열 사람의 친구와 백 권의 책을 가진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소치는 행복한 사람이다. 추사, 초의 같은 스승을 둘이나 두었으니. 추사는 행복하다. 초의 같은 친구, 소치 같은 제자가 있어서. 초의도 행복한 사람이다. 추사, 소치 같은 사람과 인연을 같이 했으니까."
진도 운림산방은 빼어난 경관으로도 유명하다. 운림산방을 둘러싼 첨찰산(485m)은 마치 한폭의 병풍처럼 울긋불긋한 단풍이 들어 그 모습의 한폭의 산수화를 연상시킨다. 때문에 이 경치를 즐기고자 산행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따라서 이곳 운림산방이 진도의 대표적 문화유산으로 자리하고 있고 찾는 이들도 많아서 진도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진도역사관도 그 옆에 위치하고 있다.
진도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큰 섬이다. 일찍이 그 역사도 깊고 오래되어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 하지만 지금의 진도는 오래되고 낡은 낙후된 이미지를 지울 수 없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은 적고 아이들과 젊은이의 모습을 찾기 힘들다.
이밖에 진도의 역사가 말해주듯 진도는 가까이 강화, 제주와 아주 많이 닮아있다. 뭍에 살지 않고 섬에 살기에 그 억척스러움이 남달랐고 따라서 이들 섬지역 여자들이 출가하면 집안을 잘 건사하고 잘 산다고 한다.
진도가 우리 역사에서 주목되는 것은 삼별초(三別抄)의 역사와 이순신 장군의 빛나는 승전인 명량대첩이다. 명량대첩은 이미 앞서 이야기를 했다. 이밖에 진도지역 향토사가들이 밝혀낸 고려 태조 왕건이 나주를 공략할 때 그 배후지로서의 중요성과 아울러 조선 태조 이성계가 아지발도라는 왜구를 소탕하였던 황산대첩(지리산 부근)의 전적지(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가 남도 지역을 휩쓸 때 그 안정 배후가 진도였다라는 것)로 그 의미를 높이고 있는데 그러나 직접적인 것보다는 그 상황적 환경에 따른 역사적 접근이라서 이를 두고 진도지역의 빛나는 역사로 중심되게 말을 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래도 고려와 조선 건국에 밑바탕이 되었다고 하는 자부심만은 대단하다.(진도 전 문화원장 강연에서)
그래도 진도를 대표하는 것은 배중손(裵仲孫, ?-1271)이 이끄는 삼별초의 새 고려의 꿈일 것이다. 배중손은 잘 알듯 고려 무신정권을 마지막까지 수호한 인물이다. 당시 국왕 원종은 원나라 세조(쿠빌라이 칸)를 찾아가서 항복하고 강화에서 개경으로 다시 환도 하는데 이를 반대하고 승화후 온을 추대하여 새 고려를 건국(진도정부)한 인물이다.
당시 고려는 1232년 몽골과의 첫 싸움이후 고려의 전국토가 몽골군의 발굽에 유린되었다. 우리가 잘아는 황룡사 9층탑이 불탔고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이 만들어졌다. 이렇듯 몽골과의 항전은 개경에서 강화로 천도를 하여 끈질기게 싸웠고 고려에게는 너무도 힘겨운 나날이었다.
이러한 대몽항전 시기 승장 김윤후가 몽골장수 살례타이를 사살한 처인성 전투 등 혁혁한 전공도 있지만 개경을 버리고 강화로 들어간 당시 최씨 무신정권(최우)은 뭍에 있는 수많은 고려의 백성에 안전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고 방치 되었다. 오히려 몽골이 침략할 때는(몽골은 유목민족으로 전투 시 침략과 약탈 후 강화를 맺고 철수 하는 식의 전술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평시에 항상 몽골군이 주둔 한 것은 아니다.) 나몰라라 하고 몽골군이 철수하면 강화도의 임시 조정에 막대한 유지 비용 때문에 전국에 걸친 조세수탈이 극에 달해 백성의 삶은 말이 아니었다.
이렇듯 최씨 무신정권은 백성의 인망도 잃고 아울러 왕권을 농락하며 갖은 사치를 다 부렸기에 점차 대몽항쟁의 기운을 잃고 있었다.
결국 당시 국왕이었던 원종은 문신들과 함께 최씨 정권을 무너뜨렸고 아울러 무신정권 자체를 붕괴시키고 고려 왕권을 강화하고자 원나라에 항복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따라서 무신정권에 주요 군사력이었던 삼별초는 조정에 반기를 들고 강화를 떠나 새로운 은거지 진도로 내려왔던 것이다. 이때 진도 동편에 용장산성을 쌓고 그 안에 궁궐을 조성하였다. 진도역사관에 전시된 여러 기와들이 당시 고려의 건축물에 쓰였던 것들이다.
삼별초는 최씨 무신 정권 시절에 당시 집정자 최우(崔瑀, ? -1249)가 전국에 민중봉기(고려사에 도둑이라 기록)가 끊이질 않자 이들을 잡아들이고 진압할 목적으로 만든 야별초다. 점차 그 규모가 커지자 좌우별초를 나누고 거기에 몽골에 잡혀갔다 돌아온 사람으로 만든 신의군(神義軍)을 합쳐 삼별초라고 했다. 이러한 삼별초의 목적은 최씨정권의 권력를 위한 치안유지였다.
이렇게 진도에 들어온 삼별초는 승화후 온(承化侯溫, ?- 1271 고려의 왕족으로 현종의 후손, 원으로 귀화한 남향 홍다구에게 피살됨, 무덤이 현재 진도에 남아있다.)을 추대하여 진도에 고려 정부를 세워 야심차게 대몽항쟁을 전개하지만 이미 전운은 기울어져 있었다. 진도라는 넓은 섬을 기반으로 지역민들의 적극적인 호응과 주변 도서 및 전라도 일부를 경유하며 위세를 떨쳤지만 어디까지나 삼별초는 반쪽 정부였다. 또한 삼별초를 도와 참가한 지역민들 역시 몽골에 적극적으로 대항하고자 했던 생각보다는 현 조정의 갖은 수탈이 지역민의 이반을 부추긴 것이기 때문에 그 항쟁은 오래 갈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1271년 5월 전라도토역사 김방경과 몽골장수 흔도의 연합군이 진도에 들어가 배중손과 승화후 온을 죽이며 진도정부는 끝나게 되었다. 하지만 김통정이 이끄는 삼별초가 탐라(제주)로 옮겨가 2년 반의 항쟁을 이어가지만 끝내는 실패하고 말았다.(이로 인해 탐라는 몽골 직속하의 목마장으로 복속되었다.)
삼별초가 보여준 기나긴 항쟁은 실패로 끝났지만 당시 최고의 군대를 자랑했던 몽골에 고려 자존의 의지를 확실하게 보여준 역사였고 바다 건너 왜와 연결을 시도하면서 북방세력을 견제하고자했던 역사기도 했다.
이렇듯 진도의 역사 속에는 지리적 위치로 인해 고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남해라는 해상교통의 요지로서 큰 혜택을 누리기도 하였지만 반면에 삼별초와 임진왜란 등의 어려움에 한복판이 되면서 바람잘날 없는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이것이 오늘의 억척스럽고 강인한 진도 사람의 정신과 삶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바로 진도문화의 민초적 기질, 민중적 성격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옥주서당(마지막 사진)에 훈장을 맡고 있는 장의균 선생(61 맨 위 사진)의 '우리말 한자이야기' 특강.
장의균 선생은 제정구기념사업회와 각별한 인연이 있다. 일찍이 제정구 선생님이 청계천 판자촌에서 시작한 배달학당의 마지막을 지켰다.
현재 장의균 선생이 하는 옥주서당은 옛날 진도 지명인 옥주(沃州, 땅이 기름져서 붙여진 것으로 고려 현종 9년에 진도로 개칭)라는 것에 따와 붙여진 이름이다. 서강대를 나와 빈민운동을 하였던 장의균 선생은 지난 1987년 7월 '간첩 혐의'로 체포돼 징역 8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는데 일본 유학 시절, 진도 출신 지인과 만나 재일 조선인(북한 출신)들과 친분을 나눈 일들이 국가보안법에 걸려 간첩 활동으로 누명을 쓴 것이다. 같이 간첩 혐의를 받았던 진도 출신 지인은 2000년 재조사를 받고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장의균 선생은 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는 이유로 정부가 재심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아 누명을 못 벗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1995년 8월 만기 출소한 장의균 선생은 늘 간첩이라는 딱지가 붙어 취업 등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기 어려웠고 7년 전 고향인 서울을 떠나 진도로 내려왔다.
진도에 정착한 선생은 진도의 산야와 바다를 벗삼아 진도에서 새로이 만난 소중한 인연들과 힘을 합쳐 옥주서당을 열었다. 그래서 현재 옥주서당은 인근 초·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무료로 한자 기초와 중국어와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이밖에 평소 독학으로 한자 발음을 우리말로 해석하는 연구를 하며 '우리말 한자 1800자(상용한자)'를 저술하고 있다. 현재 1천400자가 해독된 최초 한자인 갑골문(甲骨文)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몇몇 후원자의 도움을 받아 A4 600페이지 분량의 원고를 책 3권으로 나눠 곧 출간할 계획이라고 한다.
진도문화원의 대강당에서 '우리말 한자이야기'라는 주제로 특강을 들었다. 갑골문인 상형문자를 풀이하며 그 음과 뜻이 우리말로 표현되어 온 것이 중국과 일본보다 원형에 가깝다는 해석을 하는데 퍽이나 흥미롭고 관심이 간다. 특히 우리말을 통한 한자의 재해석은 어떻게 보면 새로운 시도로 비춰질 수 있으나 한자의 기원이 단순히 중국이라는 한정된 문화 특수성에서 완성된 것이 아닌 동아시아문명 속에서 형성되고 발전되어 오늘에 이르렀다는 역사성을 생각하면 초기 한자의 우리말 풀이는 매우 타당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고어에 대한 연구로서 우리말이 일본에 전해져 일본어의 시원이 되고 현대 일본어로 발전하였던 그 뿌리를 찾는 연구로도 큰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진도문화원 진도실버민속예술단 공연
특강에 이어 진도실버민속예술단의 공연을 보게 되었다. 처음 이 공연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특강이 끝나고 바로 이어진 공연을 보며 연세가 많은 어르신들이 우리 문화를 지키고자 많이 애를 쓰시는구나라고만 생각했는데 단체를 만들고 공식적인 활동들을 왕성하게 하고 있음을 알고 난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단체에서 활동하는 어른신 중에 80이 훌쩍 넘은 할머니도 계셨다.
진도의 인간문화재 소리꾼 조오환 단장은 "우리 공연이 100회 때는 이명박 대통령이 참관하실 것이다라고 예술단을 독려하면서 공연했는데 그렇게 했더니 대통령은 안왔지만 그래도 군수도 오고 시의원도 오고 우리에게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200회 공연에는 김정일이 올 겁니다. 북에서 김정일이 오면 우리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겠어요"라며 소개를 했는데 그의 진도실버민속예술단에 대한 깊은 애정과 자부심을 엿볼 수 있었다.
공연은 경쾌한 진도북놀이춤을 시작으로 성주풀이, 남도민요의 대표곡 진도아리랑 등 진도의 멋과 흥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즐거운 자리였다. 그리고 공연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우리 이순신 장군을 도와 왜군을 물리쳤던 역사적 배경을 가진 흥겨운 놀이, 강강술레를 예술단과 관람자들이 모두 어울려 한판 돌아가며 놀고 마무리 했다.
진도에 오기 전까지 맛과 멋이 있었다면 이곳에서 만난 흥이 넘치는 어른신들을 뵙고 흥이 더해져 남해기행은 멋과 맛, 그리고 흥이 더해진 최고의 나들이다.
매주 일요일 오후 3시에 진도읍 진도문화원에 가면 남도가락을 흥청하게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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