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군은 남해도와 창선도의 두 개의 큰 섬과 작은 부속도서로 이루어진 곳이다. 특히 남해도는 제주도, 거제도, 진도, 강화에 이어 5번째로 큰 섬이다. 남해도는 행정구역상 남해군으로 참여정부 시절 이장 출신으로 남해군수를 역임하고 행정자치부장관이 되었던 스타 장관 김두관, 현 경남도지사의 고향이다.
남해도는 현재 연륙교(육지와 섬을 잇는 다리)가 세워져 섬 아닌 섬이다. 남해도를 들어가는 다리는 두 개로 남해 창선도와 동쪽 사천시가 맞닿아 있는 삼천포대교를 건너 창선도와 남해도를 잇는 창선대교를 건너는 길과 경남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와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를 연결한 남해대교가 있다.
삼천포대교가 위치한 삼천포는 일상에서 쓰는 관용구인 “삼천포로 빠지다”라는 말의 어원지이다. '이야기가 곁길로 흘러가거나 어떤 일을 하다가 엉뚱하게 그르치다'라고 흔히들 쓰는 표현이다. 이런 표현이 나오게 된 이야기 중에 하나를 소개하면, 옛날에 어떤 장사꾼이 장사가 잘 되는 진주로 가려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장사가 안 되는 삼천포로 가는 바람에 낭패를 당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야기야 어쨌든 삼천포는 지리적으로 이 지역의 물산이 최종적으로 모여 운송 되었던 거점, 즉 바다를 이용한 수운 교통의 중심이었기에 모든 것이 삼천포로 향했기에 삼천포로 빠진다라는 말이 나왔을 것으로 보인다. 마치 "모든 길은 로마에 통한다."라는 표현처럼.. 그러나 지금 이 말은 지역민들에게는 상당히 불쾌하다고 한다.
그리고 남해대교가 위치한 노량리는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 최후의 전투 노량해전지인 노량해협이다. 노량(露梁)이라는 이름은 파도가 칠 때 그 솟은 물방울이 마치 이슬다리와 같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노량해전(1598년)은 정유재란 마지막 전투로서 전쟁의 장본인인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가 사망하자 출병하였던 왜군들이 조선철수를 서둘렀다. 이 때 순천왜성에 있던 조선 제1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555-1600)는 퇴각을 위해 인근에 주둔한 사천왜성의 시마즈 요시히로, 고성왜성의 다치바나 요네시게, 남해왜성의 사위 소 요시토시(대마도주) 등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400여척이 넘는 연합군을 형성하여 구원에 나서게 된다. 이에 150여척으로 이루어진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과 명나라 진린의 조명연합수군이 구원군으로 나선 왜수군 막아 고니시와 만나는 것을 차단하였다. 바로 이 싸움이 노량해전이다.
노량에서 시작된 싸움이 근접전으로 이루어지며 남해도 서편 관음포 앞바다까지 학대되며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이순신 장군 뿐 아닌 명나라 장수 등자룡, 조선 장수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홍양현감 고득장 등 많은 장수가 희생되었다. 이때 손수 북채를 쥐고 전투를 독려하던 이순신 장군이 왜군의 유탄에 맞아 숨을 거두기 직전에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전방급신물언아사(戰方急愼勿言我死)"라고 유언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1598년 11월 18일 그의 나의 쉰넷이었다.
해전이 끝나자 관음포에 며칠동안 시신을 모셨다가. 이곳 노량 충절사 자리로 옮겼다. 지금도 가묘가 남아있는데 가묘라고 한 것은 이순신 장군의 시신을 운구하여 충청남도 아산의 현충사에 모시기 전 6개월 간 묘를 썼다가 무덤을 없애지 않고 보존하여 유지하였기 때문이다.(가묘는 시신이 없는 무덤을 말한다.) 이와 같은 연유에서 1632년 지역 유생들이 모여 노량해전과 이순신 장군을 기념하며 가묘 옆에 초사를 지었고 1658년(효종9년) 사당을 짓고1663년(현종 4년)에 충렬사라고 사액되었다. 통영의 충렬사와 같은 이름을 쓴다.
이처럼 남해도와 남해지역은 무엇보다도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유적과 이야기가 넘쳐난다. 아니 이순신을 빼고는 이야기가 안될 정도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고 지역과 지역민에게도 큰 자랑이다.
이밖에 노량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관음포에 이순신장군전몰유허(李忠武公戰歿遺墟)가 있다. 노량에서 시작된 전투에서 전사한 이순신 장군이 이곳 관음포에서 처음 뭍으로 옮겨진 곳이다. 그래서 이순신장군전몰유허지라고 한다. 따라서 이곳 바다를 이락파, 관음포에 바다로 돌출된 곶을 이락산, 거기에 사당을 지어 이락사(李落祠)라고 하였다. 이락사라는 뜻은 이순신 장군의 성 이(李), 죽음을 의미하는 떨어질 락(落)을 써서 이락사라고 한 것이다. 이곳에 사당과 유허비를 세운 것은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한 이순신 장군의 8대손인 이항권이 1832년(순조 32년) 충무공이 돌아가신지 243년 후 정작 돌아가신 자리에는 비와 사당이 없음을 알고 순조에게 상소하여 건립하였다.
한편 남해도는 예부터 '한점 신선이 사는 섬(일점선도一點仙島)'라 불리며 그 자연경관이 신선이 살정도로 신비롭고 빼어나서 현재는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경상도 지역의 바다와 섬을 한려해상국립공원, 전라도 지역의 바다와 섬을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이다.) 따라서 해안도로와 섬과 섬사이의 풍경 등이 아름답다.
특히 삼천포대교가 지나는 삼천포 앞바다와 창선대교(창선대교를 넘어 우측 해안도로 빠지면 지족리 어촌체험 마을이 있고 그곳에 죽방렴과 석방렴을 체험하고 관람할 수 있게 시설을 하였다.)가 지나는 바다에는 우리 전통 어로방식인 죽방렴(竹防簾)이 설치되어 지역 특산품인 멸치 등 다양한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그 원리는 일반 개울에 설치한 통발과 같은 방식으로 물고기들이 들어와서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방식이다. 죽방렴은 이 통발을 바다로 옮겨 온 것으로 부채꼴 모양으로 나무를 박아 물고기가 피하지 못하게 하고 그 가운데에 대나무 등을 엮어 만든 발로 물고기를 가두어 잡는 전통 어로이다. 죽방렴 말고도 그 재료에 따라 돌로 만든 석방렴(石防簾)도 있다.
이 죽방렴에서는 주로 멸치가 많이 잡히고 한 상자에 20만원을 호가하는 고급 특산품이라고 한다.
창선대교를 넘어 좌측 해안도로로 가다보면 그 해안가 풍경이 절경을 이룬다. 구불구불한 해안도로를 지나면서 크고 작은 어촌마을이 위치하고 그 중에 물건리 마을의 풍경이 특히 빼어나다. 물건리 해수욕장 산등성이에 위치한 마을이 독일마을이다. 이 마을은 KBS의 유명 오락예능방송인 1박2일에도 소개가 되었다.
독일마을은 남해군이 2001년부터 총 30억을 출자해 1960년대 파독 광부, 간호사로 나갔던 독일교포들의 한국정착을 지원하기 위해 건축부지를 제공한 것이다. 그래서 교포들이 들어와 독일재 건축자재를 일부 들여와 독일풍의 가옥을 지어 이국적 분위기를 내는 마을이다.
동해나 서해의 바닷가를 가면 으례 만나게 되는 방풍림(해풍림).. 대개 소나무를 심어 호젓한 해안가의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러한 방풍림은 가끔, 또는 처음 찾는 여행자들에게 시원한 그늘과 쉴 곳을 주는 정말 반가운 곳이다.
이곳 남해 물건리의 방풍림은 소나무가 아닌 잎이 넓은 활엽수종인 느티나무, 상수리, 푸조, 팽, 보리수, 동백나무 등으로 심어져 있다.
가을의 끝자락에 찾았기에 잎은 다 떨어져 마치 머리가 숭숭 빠진 중년의 머리처럼 나무와 나뭇사이로 바닷가가 훤히 들여다 보인다. 해송(海松)이 아닌 활엽수로 이루어진 방품림이 여름에 찾았다면 그 풍경이 가히 볼 만 했을 것으로 보인다. 넓은 나뭇잎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며 시원스레 떨리는 그 소리.. 한여름에 시원함이 대단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 활엽수들은 주민들이 오랫동안 보호하여 나무 하나 하나가 수십년에서 백년 이상 자란 것으로 그 가치가 매우 크다.
이와 같은 방풍림은 해안이나 강가 등에 조성하여 바람에 이한 풍해를 막기도 하고 해일과 홍수에 물이 넘어오거나 두둑의 흙이나 모래등이 침식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자연 보호방벽이다. 이렇게 숲을 조성한 자연유산은 우리 조상들이 자연친화적으로 나무를 심어 재해를 막았던 지혜를 보여주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이밖에 해안가에 푸른 숲을 조성하면 물고기가 푸른색을 좋아하는 특성에 따라 연안에 물고기가 몰려든다고 생각하여 숲을 조성했다고도 전한다.
물건리 해수욕장은 해안가를 따라 둘러진 활엽수와 몽글몽글 굴러다니는 몽돌이 해안을 이루며 아름다운 풍광을 이룬다.
물건리를 나와 해안도로를 따라 미조항으로 이동하는 길에 곳곳에 마주치는 남해도의 자연풍광은 뭍에서 보던 모습과는 색다른 것이 많았다. 제주도에 갔을 때 바람이 심하고 흙이 적어 돌을 이용해 가옥의 지붕을 방비하고 집벽과 담, 심지어 무덤까지도 돌로 두르고 있는 모습이 눈길을 끌었었는데 여기 남해도 역시 태풍의 길목이고 외해와 맞닿아 바람이 심해서인지 무덤에 돌을 두르고 지붕과 담벼락 등에 돌을 이용한 생활모습이 등이 제주에서 보던 풍광과 매우 닮아있었다. 낮은 돌담들도..
해안도로를 따라 고개를 넘어가며 멀리서 바라본 미조항의 모습은 마치 유럽의 미항 나폴리가 연상되듯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그럼에도 다랭이 논과 밭이 층층이 수놓은 산마루의 모습은 어느 누구도 닮지 않은 우리 만의 삶의 유산이자 멋스런 모습이다.
임진왜란 때 노량해전에서 패한 왜장 소 요시토시가 이곳에서 패잔병을 규합하여 퇴각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구불구불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바다가 오른쪽에 있다가 왼쪽에서 나타났다가 다시 오른쪽에 나타나는 마치 도깨비에 홀린듯이 재밌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남해군 이동면 석평리로 가깝게 남해도의 명산 호구산(627m)이 바라다 보이는 당산 자락의 작은 마을이다. 이 집의 주인은 씨알재단 회원으로 마치 주인없는 주막처럼 저렴한 돈을 내고 자유롭게 숙소의 여러 시설과 물건을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 하루 관리비 조차도 안될 숙박비와 숙소 사용에 대해서 주인처럼 쓰시고 주인처럼 아껴주시길 당부하는 주인장의 마음 씀이 각박한 요즘, 보기 드물게 넉넉한 인심과 자유로운 체험을 할 수 있다.
가옥의 형태는 남해지역에서 쉬이 볼 수 있는 가옥이며 고성의 제정구 선생 생가와 같은 구조이다.
석평리 마을은 집집마다 귤닮은 노오란 열매가 달린 유자나무가 자라고 있고 여유가 된다 싶은 짜투리 땅에는 어김없이 마늘들이 심어져 있다. 남해도가 유자와 마늘로 유명한 고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해는 정말 아름답고 빼어난 절경을 가진 소중한 보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남해는 빼어난 절경과 함께 둘러볼 곳이 많다. 다랭이논과 밭이 절경을 이루고 수미륵과 암미륵, 서낭당을 통해 민간신앙을 찾아볼 수 있는 가천마을.. 남해의 소금강산을 불리는 금산과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백일지성을 드려 왕이 되었다고 전해지는 해수관음보살상을 모신 보리암(강원도 양양 낙산사, 강화도 보문사의 관음보살상과 함께 3대 해수관음보살상으로 손 꼽힌다.)은 영험하기로 소문난 기도처이다. 또한 서포 김만중이 유배되었던 노도, 진시황의 영생불멸의 설화가 담긴 상주리 석각(서불이 이곳을 지나다"라는 의미의 "서불과차西市過此라는 그림문자, 서불은 진 시황제의 명을 받아 불로초를 구하러 떠난 도교의 방사), 그밖에 크고 작은 많은 항과 해수욕장은 남해의 뛰어난 자연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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