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빛을 본다.' 남해기행 고성 자실마을 제정구 선생 묘와 생가

달이선생 2011. 12. 1. 23:50

  '나라의 빛을 본다.'(관국지광觀國之光)..

  관광(觀光)은 '빛을 본다.'라는 말로 주역 관국지광에서 유래되었다.  2011년 11월 19일(토). 2박 3일동안 고성 제정구 선생 묘소와 남해의 빛을 찾아봤다.

 

 

 

  경상남도 고성군 대가면 척정리. 이곳은 故(고) 제정구 선생의 고향이자 1999년 폐암으로 달리한 후 자리하게 된 곳이다. 높고 낮은 산들이 둘러치고 남사면에 위치한 제정구 선생의 묘소는 햇볕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이었다. 묘소 앞에는 남도지방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굵고 긴 대나무숲이 마치 방문 앞의 발을 치듯 심어져 자라고 있다.

  무덤의 형식은 이채로운데 제씨가의 특성인지 이곳 고성의 풍습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요즘에는 잘 쓰지 않는 혼유석을 놓았는데 그 형태가 상석과 같은 높이로 갖추고 있다. 또한 나중에 제정구 선생 부인인 신명자 여사를 같이 자리하기 위해 묘 옆으로 작은 봉분으로 가묘를 만들고 있어 그 모습이 이채롭다. 대개 무덤자리를 비워두거나 원무덤을 크게 조성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마도 지역내지 집안의 전통으로 보인다.

 

 

   제정구 선생은 1944년 3월 1일 아버지 제병근과 어머니 박수연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억척스런 할머니와 어머니의 뒷바라지와 기대로 자랐다. 진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4수를 하며 서울대에 들어갔고 학생운동에 투신하여 19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全國民主靑年學生總聯盟事件), 줄여서 민청학련(民靑學聯) 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했다. 이 시기 청계천 활빈교회에 들어가 살면서 일생일대의 도반 정일우 신부(미국인 예수회)를 만나 청계천 판자촌 빈민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이후 청계천 판자촌이 철거로 양평동으로 옮겼으나 이곳 역시 철거를 피할 수 없었고 마침내 김수환 추기경의 도움과 철거민들이 힘을 합쳐 시흥시 신천동에 복음자리 마을을 만들어 빈민운동의 전기를 마련한다. 14, 15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고 정일우 신부와 함께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였다.  

 

  제정구 선생은 짧지만 불같이 살다간 사람이다. 그의 생애를 무엇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늘 '사람이 되는 길'을 갈구한 그의 신념을 통해 제정구 선생의 꿈과 살다간 자리를 생각 해 볼 뿐이다. 그는 지고 없으나 그가 세우고 함께한 사람들이 제정구를 대신하여 사회 여러곳에서 사람이 되는 길을 걸어가는 것에서 우리 사회가 제정구에게 받은 큰 빛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이곳 척정리, 자실마을(척골)은 씨알재단 박재순 박사님의 말처럼 "제정구는 높고 낮은 산이 빽빽하게 둘러진 곳에서 오로지 머리 위의 하늘을 바라보고 살면서 하늘의 척도를 생각했을 것이다."라고 평한 것처럼 자실마을은 산들이 촘촘히 둘러선 분지였다. 산등성이와 골짜기 마다 삼삼오오 집들이 모여 있고 층층히 마치 계단처럼 논과 밭이 어우러져 있는 작은 시골마을..

  그 마을 한켠에 제정구 선생의 생가가 있다. 현재 생가는 4칸짜리 안채만이 남아있다. 그 형태는 부엌 한 칸에 방이 좌우로 한 칸 그 가운데 한 칸짜리 마루 겸 광이 위치하고 있고 우진각지붕의 一자형 구조다. 남도지역 전통가옥은 집 가운데 넓고 큰 대청을 두는 것이 일반적인데 비해 여기 고성 등 남해 지역의 집들에서 보여지는 좁은 마루형식의 광은 이 지역 만의 특색인거 같다. 이는 무더운 여름을 대비하여 너른 개방적인 대청마루를 한 남도지역 가옥과  달리 좁으면서도 문을 달아 여닫는 구조를 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경우에 따라 곡식 등 물건을 놔둘 수 있는 수납적 공간 기능을 겸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 남해지역이 태풍 등 강한 돌풍이 자주 부는 날씨 영향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와 함께 집 왼편으로 대나무들이 병풍처럼 둘러 있어 남해지역만의 특색이 엿보인다. 

 

  이곳 고성 척정리마을의 중심된 씨족은 칠원제씨(漆原諸氏) 부원군후(府院君后) 고봉파(高峯派)이다. 제정구 선생의 일가이다.

   제씨(諸氏)는 본래 제갈(諸葛)씨에서 갈려나온 성씨로서, 그 연원은 중국 주(周)나라 때 우림장군(羽林將軍)을 지낸 제갈영(諸葛嬰)이 원조(遠祖)이다. 우리나라에서 본관은 문헌에 칠원(漆原)과 의성(義城) 2본(本)이 전하지만 의성제씨는 현존 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칠원제씨세보(漆原諸氏世譜)』에 의하면, 제갈량(諸葛亮)의 증손 제갈충(諸葛忠)이 나이 13세가 되던 해 아버지와 형제들(父兄)이 모두 죽자 신라 미추왕(味鄒王 : 262~283) 때 우리나라에 들어와 지리산(智異山) 밑에서 밭을 갈고 글을 읽으며 살았다 한다. 그후 후손 한(漢)은 고려 현종(顯宗)이 예로서 맞이하여 벼슬을 주었으나 사양하니 왕이 어질게 여기고 그의 큰 아들 홍(泓)을 제씨(諸氏)로 하여 남양군(南陽君)에 봉하고, 둘째 아들 형(瀅)을 갈씨(葛氏)로 하여 낭야군(瑯琊君))에 봉하여 각각 분성(分姓)하게 하였다.  득성조(得姓祖) 남양군 홍(泓)의 9세손 휘(諱) 문유(文儒)는 고려 충숙왕(忠肅王)이 원(元)나라에서 토번(吐蕃)으로 귀양갈 때 호종(扈從)한 공으로 벽상공신(壁上功臣) 1등으로 평장사(平章事)에 오르고 옥대(玉帶)와 궤장(几杖)을 하사받아 구산부원군(龜山府院君 : 구산은 칠원(漆原)의 옛 이름)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칠원(漆原)으로 하고 부원군 문유(文儒)를 중조(中祖) 1세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특히 이곳 고성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중조 6세손인 철손(哲孫)이 중종(中宗) 14년(1519)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落鄕)하여 고성(固城)에서 은둔(隱遯)하였고 고성지역의 큰 선비로서 그 위패를 운곡서원(雲谷書院)에 봉안하였다. 이곳 척정리의 입성조가 된다.   이후 후손 제말(沫)장군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낙(洛)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웅천(熊川), 김해(金海), 정암(鼎巖) 등지에서 대승하여 그 공이 홍의 장군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조정에 알려져 성주목사(星州牧使)에 임명되고 높이 되었으나 이후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생전 비장군(飛將軍)이라 불렸으며 선무공신에 이르고 정조(正祖) 때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어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성주 충절사(星州忠節祠)와 이곳 척정리 운곡서원(雲谷書院)에 제향(祭享) 되었으며,  묘는 마산시 진동읍에 있다.

  입향조와 운곡서원의 내력에서 척정리 제씨일가는 형편을 살펴보면 이들 제씨가는 제철손의 후손들로서 조선 전기에 훈구파와 대립 속에서 밀려났던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1482-1519)를 위시한 사림파(기묘사림)로 고성으로 들어와 향촌사회를 성리학에 따라 일군 것으로 보인다. 이후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당해서는 그 후손 제말장군 형제가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워 가문을 중흥시킨다. 이들 제씨형제들의 학맥은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남명학파와 가까울 것으로 보인다. 경상좌도(경상도 동부=안동)가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퇴계학파가 성하였다면 경상우도 지역은 합천을 중심으로 문무를 겸비하여 의(義)를 실천(실천궁행實踐躬行실천궁행=실천을 몸소 행한다.)하는 것을 중시하였던 남명학파가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의 후학들은 조식의 학풍과 가르침에 따라 임진왜란에 당해 선비지만 칼을 들고 일어나 싸웠다. 그래서 그의 문하에 많은 걸출한 의병장을 배출하였는데 곽재우가 대표적이다. 따라서 지리적으로나 당시 정황상으로 볼 때 제말 장군 역시 남명의 문하나 그와 관련이 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남명학파는 임진왜란에서 많은 의병장을 배출하고 그의 문하였던 정인홍 등이 조정에 출사하여 붕당 북인을 형성하여 광해군 조에 정권을 잡았으나 인조반정과 함께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정권에 밀려났다. 고성의 제정구 선생의 일가인 제씨가도 이와 같은 불운은 피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제말장군 이후 사적이 뚜렸한 행적을 나타내는 인물이 없는 것이 이와 같은 연유로 생각된다. 정치적으로는 중앙에서 밀렸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성의 향촌사회는 여기 운곡서원을 중심으로 고성 유림의 축이 되어 향촌사회의 정신적 구도자로 지역 유학의 정통성을 지키고 이끌었던 모습들이 척정리 곳곳에 비석 등의 사적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제씨가문의 역사와 전통이 훗날 제정구 선생의 활동에 있어서 그 정신적 기반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특히 그의 선조인 제철손과 제말장군 등의 실천적 삶과 이지역에 파다했던 남명학풍의 정신적 유산은 훗날 제정구 선생이 감상적 활동가가 아닌 보다 실천적이고 실제적 삶을 살았던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한 인물의 성장과 그 이면에는 가문의 내력과 그 유산 역시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