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영은 처음에는 한산도에 있었는데 곧 오른쪽에 치우쳐 있어서 왼쪽에서는 멀었다. 중간에 고성으로 옮겼더니 곧 배를 모아두기에는 마땅하였지만 갑작스러운 변에 대처하기에는 불편하였다.
뒤이어 통제사로 오는 이들이 옛것을 따르는 데에만 익숙하여 능히 고쳐서 옮기지 못하였는데, 공(이경준)이 통제사가 되면서 개연히 통제영을 옮기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여기고 지형을 살피고 헤아려서 통제영을 두룡으로 옮겼다. 서쪽으로는 굴포에 기대고, 동쪽으로는 견내량이 버티며, 남쪽으로는 큰 바다와 통하고, 북쪽으로는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깊긴 하지만 구석지지 않고 얕긴 하지만 드러나지 않으니 참으로 수륙을 겸한 지형이며 관방의 요해처이다. 동쪽과 남쪽, 서쪽의 적들이 이곳을 지나지 못하여 횡행하지 않으니 바다다 잠잠해져 놀라지 않은 것이 거의 장차 수십 년이 되어간다. 예전에 조적이 초성에 영문을 옮기니 후조에서 가까이 오지 못하고, 유익이 면구로 옮겨 다스리자 북쪽 오랑캐가 감히 엿보지 못하였다. 지리의 험난함은 비록 하늘이 베풀어주는 것이지만, 반드시 사람을 기다린 후에야 그 마땅함을 얻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그 경우는 한결같다. 이제 대저 두룡이 그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 적에는 한낱 바닷가의 어촌으로서 개펄 지역이며 거친 덤불로 여우와 토끼가 뛰놀던 폐허에 불과한 채 몇 천만 년을 내려오고 몇 천, 몇 백 명을 겪어 오다가 비로소 공의 손에서 이루어졌으니, 하늘이 이러한 요새를 마련해 놓고 때를 기다리고 또 사람을 기다린 것이 어찌 우연이라 하겠느냐.
앞에서는 충무공(이순신)이 적을 무찔러 중흥의 업적을 거두고, 뒤에서는 공이 영문을 설치하여 만세의 이익이 되게 하였으니, 앞뒤로 두 이씨가 나타난 것은 비록 때에 응하였다고 하여도 옳을 것이다.
(其營始在閑山卽偏於右 而遠於左中移固城卽宜於藏船而不便於應卒相繼爲帥者狃於姑息莫能改 置及公爲帥慨然以爲已任相度地形移鎭 于頭龍 西依掘浦東控見梁南通大洋北連平陸深而不奧淺而不露眞水陸之形 便關防之要害自東而南而西之賊不得 過此而橫行海波不驚者殆將數十年矣昔祖逖移鎭譙城而後趙不敢近庾翼徒 治沔口而北虜不敢窺地利之險雖天所 設必待人而後得所焉自古及今其揆一也今夫頭龍未得其人卽 一海港瀉鹵之地荒榛狐免之墟而已歷幾千 萬年閱幾千 百人而始成之於公之手天之設是險以待時又待人豈偶然哉 忠武克敵於前以收中興之績公設鎭於後 以爲萬世之利前後二李之出雖謂之應時可也)
『통영 두룡포 기사비(統營 頭龍浦 記事碑)』 국가유산 지식이음
십여년 전에 통영을 찾았을 때는 삼도수군통제영지의 주차장 앞에 돌장승 벅수가 맞이했는데 건너편으로 벅수가 옮겨진 곳에 우물(동락동새미)이 복원되고 역사관이 들어섰다. ‘통제사이하개하마비'를 대하고 들어서는 통제영은 우측으로 따로 조영된 중영청(우후 관아)을 지나 정문 망일루에 올라서면 높은 계단 위 삼문(‘지과문’) 뒤로 객사 세병관 지붕이 넓게 드리운다.
당대 이곳이 충무공과는 인연이 없었으나 충무공의 업적을 자취로 삼아 후대 통제사들이 꾸린 조선수군대병영 통제영을 톺아본다.




수군도독(水軍都督) 조선국(朝鮮國) 증(贈)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 공신(效忠杖義迪毅協力宣武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 덕풍부원군(德豐府院君) 행 정헌대부(行正憲大夫)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제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兼三道統制使) 시(諡)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정조, 『어제 이순신 신도비』 비제
경상남도 통영(統營)은 충무공 이순신이 최초 삼도수군통제사(전라좌수사로 겸임)로 있었던 한산도 ‘통제영(統制營)’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통영의 또 다른 이름인 충무는 이순신의 시호 ‘충무(忠武)’에서 따온 것이다. 충무공의 직책은 만력제가 봉한 수군도독이자 증 영의정, 봉호(군호)는 덕풍부원군이다.
통영은 임진왜란 당시 그 앞바다가 와키자카의 왜 수군을 막은 학익진으로 유명한 한산도대첩의 현장이다. 작은 어촌인 이곳으로1604년 삼도수군통제영이 옮겨온 후 군사요충지로 발전하였다. 제6대 삼도수군통제사 이경준은 1603년 작은 포구인 두룡포에서 터를 닦고 1605년 세병관(洗兵館)을 지으면서 통영이 갖춰지기 시작됐다.














통영시의 '삼도수군통제영 역사관'에 역대 삼도수군통제사 명단은 사실 판단에 오류가 있다. 이러한 역대 통제사는 여러 시기 편찬된 통제사선생안(統制使先生安)을 통해 그 대략의 전말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분명한 연유가 있지만 그 사실을 알 수 없이 몇몇 인물들이 누락되고 있다. 그러한 사실을 검증 없이 통영시가 그냥 따르고 있는 것을 확인한다.
먼저 확인한 사실은 아래 134대 통제사 이창운의 차남 이유경(李儒敬, 1747~1804) 통제사의 사실이고 다음은 통제사 변사기(邊士紀)이다. 이유경이 역대 통제사 명단에 들지 못한 이유는 추론이 어렵지만(다만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해서인 것으로 보이나 정확하지 않다. 위 내용은 아래 역대 통제사 초상화 글에서 확인) 변사기는 분명하다. 그가 김자점의 역모와 관련되어 삭제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봉건시대 그 공과에 따라 특히 역모자는 국가는 물론 가문의 기록에서도 지워지는 것은 다반사였다. 영화 '광해'로 인기리에 조명된 ‘허균’이 대표적인 위인이다. 따라서 통영시는 역대 통제사를 단순히 기리는 것에 멈추지 말고 역대 통제사에 대한 정확한 조사를 통해 명단 등 사실을 정확히 하는 연구가 필요하다.
아래는 통제사 변사기의 기록이다.
과거에 중국배가 통영(統營) 앞바다를 지나가는 것을 통제사(統制使) 변사기(邊士紀)가 병선(兵船)을 보내어 잡아왔는데 배에 타고 있는 장사치들이 대부분 산서(山西)·하남(河南)·형주(荊州)·양양(襄陽) 사람들이었다. 배에 실린 재화(財貨)와 약재(藥材)의 값어치가 여러 천금(千金)이었는데 조정에서 상인(商人)과 재화를 우리 나라에 온 청사(淸使)에게 주어 북경(北京)으로 보내게 하였었다. 이때에 와서 한인(漢人)이 또 배를 타고 일본으로 장사하러 가는 길에 도서(島嶼)에 배를 대고 나무와 물을 보충하려 하다가 갑자기 우리 나라 배를 만나자 남만 홍모적(南蠻紅毛賊)으로 오인하고서 와서 싸우므로 우리 나라 사람이 마침내 그들을 다 잡았다.(先是, 漢船過統營前洋, 統制使邊士紀發兵船追獲之, 船中商賈, 多山西、河南、荊、襄之人。 財貨與藥材價直累千金, 朝廷以商人及財貨, 皆畀淸使之到我國者, 送于北京。 至是, 漢人又乘船販貨於日本, 將泊島嶼, 就便柴、水, 卒遇我國船, 疑我爲南蠻紅毛賊來鬪, 我人遂皆執之。)
효종실록1권, 효종 즉위년(1649) 7월 16일 계유
중국 배가 통영 앞바다를 지나가 잡아서 북경으로 보내다
상이 인정문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숭선군을 지금 잘 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러 역적들이 모두 승복하였으나 다시 추대하였다는 말이 없다. 이것은 반드시 김식이 스스로 임금이 되고 싶었으나 감히 말하지 못하고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하였다. 좌의정 김육이 아뢰기를,
"숭선군이 비록 나이가 어리나 역적 조씨의 아들입니다. 그가 어른이 되면 혹 간사한 자들이 핑계를 댈 걱정이 없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럴 리는 없을 듯하다. 그러나 경들의 말이 이와 같으니 내가 조용히 생각해 보겠다. 또한 자전께 여쭈어서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변사기가 형신을 받고는 즉시 승복하였는데, 그 공사에,
"지난해 겨울에 자점이 저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미 이에 이르렀으니 네가 전남 병사(全南兵使)가 되면 우익을 삼을 수 있겠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네가 수원 군사를 거느리고 있고 기진흥이 광주 군사를 거느리고 있으니, 날짜를 정하여 거사하면 너를 대장으로 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후에 이효성(李孝性) 형제와 안철이 와서는 ‘숭선군을 추대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8월에 군사를 일으키기로 약속하였는데 마침 저희들이 모두 외관(外官)이 되었으므로 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다시 동당(同黨)을 물으라고 명하였다. 사기가 말하기를,
"이미 사실대로 실토하였는데, 어찌해서 즉시 나를 죽이지 않고 다시 다른 일을 묻습니까."
하니, 상이 노하여 낙형(烙刑)을 실시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사기가 비로소 김시성(金是聲)·김일(金逸)·심지명(沈之溟) 등이 같이 모의하였다고 하였다. 상이 이들 모두를 잡아다 국문하라고 명하였는데, 김일은 이미 북병영(北兵營)의 임소(任所)에서 죽었다.(上御仁政門親鞫。 領議政鄭太和曰: "崇善君不可不及今善處也。" 上曰: "諸賊皆服, 而更無推戴之言, 此必逆鉽欲自爲之, 而不敢出諸口, 有此云云也。" 左議政金堉曰: "崇善雖幼少, 逆趙之子也。 及其長也, 或不無奸人藉口之患矣。" 上曰: "似無是理, 而卿等之言如此, 予當從容思量, 亦當稟于慈殿處之耳。" 士紀受刑卽服, 其供辭曰: "上年冬, 自點言於俺曰: ‘吾已至此, 汝若爲全南兵使, 可作羽翼。’ 又曰: ‘汝領水原兵, 震興領廣州兵, 約日擧事, 當以汝爲大將。’ 厥後李孝性兄弟及安澈來言: ‘崇善君可以推戴。 初以八月爲師期, 而適俺等皆爲外官, 故不果。’ 云。" 命更問同黨, 士紀曰: "旣已吐實, 何不速斬我, 而復問他事?" 上怒命施烙刑, 士紀始言與金是聲、金逸、沈之溟等同謀云。 命竝拿問, 逸已死於北兵營任所矣。)
효종실록7권, 효종 2년(1651)) 12월 18일 신유
숭선군의 처리 문제를 논하고, 변사기의 자백을 듣다
통제사를 역임한 변사기는 수원부사로 있으면서 김자점의 역모에 가담하여 군사를 몰아 숭선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국문을 받고 죽었다. 따라서 그의 명예로운 기록은 조정과 가문에서 지워졌다. 일종의 기록말살형이다. 그리고 죄를 받은 사대부는 그 직이 삭직되는 것은 정확한 형벌이었다.



여기의 옛 ‘남문거리’와 ‘세병로’ 및 ‘청마거리’가 교차되는 도로변의 넓은 주차장이 옛 봉래극장(蓬萊劇場) 자리다. 원래 봉래좌(蓬萊座)로 불리었으며, 1914년 일본인들의 전통극인 가부키공연장으로 2층 380석 규모로 지어진 근세 통영 최초의 극장이었다.
그 후 통영청년단(統營靑年團)의 시민계몽을 위한 각종 ‘강연회’를 비롯하여 ‘김기정사건 진상보고회’ 및 ‘신간회통영지회 창립대회’ 등 일제에 항거하는 시민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그리고 광복 후에는 영화관 및 연극, 음악, 학예발표 등의 다목적 공연장으로써 근세 통영 문화예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가장 대표적인 문화공간이었다. 그 사적을 새긴 작은 표석 하나 세워도 좋으련만...
옛 봉래극장 앞을 지나 중앙시장으로 곧게 이어진 이 길이 통영성 남문에서 동암문(東暗門. 씨거문)으로 이어졌던 성곽 자리이다. 이곳 남문 밖 강구해안에는 2․7일 5일장의 ‘통영장시(統營場市)’가 섰다. 하동, 남해, 사천, 거제, 고성 등지의 수많은 ‘장삿배’와 ‘섬배’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던 해안 저잣거리에는 실로 영호남의 온갖 문물이 모여들었다. 남해안 최대 규모의 성시를 이룬 ‘통영장터’였다. 결국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성곽을 헐고 일본식 동리명을 따서 ‘부도정(敷島町)시장’이라 칭했으며, 광복 후 새 동리명인 중앙동(中央洞) 지명을 따서 지금의 ‘중앙시장’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여기 중앙시장 입구의 충무데파트 자리에 그 악명 높았던 일제의 통영경찰서(統營警察署)가 있었다. 그리고 기미년(1919년) 3월부터 4월까지 4차례에 걸친 통영 3․1운동의 만세시위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운집하는 통영장날을 택하여 통영경찰서 뒤편의 이곳 저잣거리에서 거사되었다.
통영성(統營城) 걷기 ⑥ '남문(南門) 복원하여 통영성의 위용을 되살렸으면' 艅齋 金 一龍. &한산신문& 2012.12. 8. 연재


생각건대, 우리나라에 설치한 여러 진 가운데 이 영(營)이 가장 큰 진영이라고 일컬어진다. 바다의 경계를 한정하여 일만 척의 큰 배를 거느리고, 세 도를 통제하여 일천 부대의 군병을 통솔하는데, 진보(鎭堡)가 바다의 통로에 죽 설치되어 백 리가 서로 연결되고, 파도가 일본까지 곧장 통하여 한 척의 돛단배로 건널 수 있도다.
(중략)
왜적의 출몰은 예측하기 어려우니 어찌 철저히 감시하는 일을 늦출 수 있겠는가. 변방 백성의 고생이 한창 심하니 힘써 안정시키는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한산도(閑山島)는 지형적 이점이 뛰어나니 아직도 이 충무공(李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전공이 전해 오고, 세병관(洗兵館)은 군율이 엄격하니 그 누가 구 능천군(具綾川君 구인후[具仁垕, 통영 두룡포 기사비 건립])의 위엄을 능가하겠는가.
승정원일기 영조 1년 을사(1725) 5월 27일(갑자) 아침에는 흐리고 저녁에는 맑음. 묘시에 햇무리가 짐.
삼도 통제사(三道統制使) 이재항(李載恒)에게 내린 교서
이처럼 충무공 이순신이 처음 설치한 한산도 통제영에 이어 자리잡은 통제영은 조선군 전체 병영 중에 으뜸이었고 특히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의 빛나는 전공이 살아있고 그 업적 이래 숙적 일본을 막아서는 최전방이었다.
삼도 통제사(三道統制使) 이재항(李載恒)에게 내린 교서에, - 교리 지제교 홍현보(洪鉉輔)가 지어 올리고, 우승지 이정주(李挺周)가 입계하였다. -
“왕은 이르노라. 국가가 변방의 요새를 중시하여 변경을 튼튼히 하고, 조정이 보위할 만한 인재를 뽑아 병권을 주는데, 내 뜻은 앞서 정해졌고 모든 사람도 똑같이 천거하였도다. 오직 경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먼 후손으로서 옛 명장의 풍도가 있었다. 거위와 맞바꾼 왕 우군(王右軍)의 솜씨를 갖추어 문장과 글씨로 명성을 떨쳤고, 호랑이를 쏘아 맞힌 이 북평(李北平)의 풍도를 사모하여 무공을 펼칠 뜻을 품었다. 북쪽 고을의 수령을 누차 맡았는데 잘 다스린다는 소문이 이미 자자하였고, 남쪽 지방의 곤수(閫帥)로 나갔다가 곧장 돌아와 버리자 백성들의 원망이 두려울 정도였다. 내가 왕위를 계승하여 처음 정사를 펼칠 때에 이르러서는 승자(陞資)해 준 남다른 은혜마저 사치스럽게 여겼도다. 세상의 화란 속에서도 지조를 변치 않았으니 누군들 감탄하며 숭상하지 않겠는가. 이에 숙위하는 자리에 장신(將臣)으로 특별히 제수하여 더욱 품계를 올려주었도다. 오직 내가 관심을 깊게 기울였던 것은 두루 시험하는 효과를 얻고자 해서였다.
생각건대, 우리나라에 설치한 여러 진 가운데 이 영(營)이 가장 큰 진영이라고 일컬어진다. 바다의 경계를 한정하여 일만 척의 큰 배를 거느리고, 세 도를 통제하여 일천 부대의 군병을 통솔하는데, 진보(鎭堡)가 바다의 통로에 죽 설치되어 백 리가 서로 연결되고, 파도가 일본까지 곧장 통하여 한 척의 돛단배로 건널 수 있도다. 다만 지휘하는 일이 다른 지방과는 구별되는 만큼 반드시 중망을 얻은 자를 위임해야 하는데, 근래에 장수를 제대로 선발하지 못하여 오로지 탐욕만을 일삼았으므로, 이 때문에 군정이 걱정거리가 많아 점점 피폐해지기에 이르렀다. 비축한 군량이 이미 바닥난 상태이니 다른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군사 방비는 정말 빈틈없는 태세가 시급하므로 내가 유독 깊이 염려하였다. 모름지기 재주와 슬기를 겸비한 사람이어야 지키고 방어하는 적임자가 될 수 있도다.
이에 경을 삼도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三道統制使兼慶尙右道水軍節度使)에 제수하니, 경은 내가 위임한 관직을 깊이 헤아려 경이 계획한 훌륭한 계책을 모두 펼치라. 말망(末望)으로 의망된 그대를 포도대장에 제수했던 것은 중앙의 요직에 두려는 의도였고, 조정의 의논으로 인하여 곤수의 자리를 그대로 맡긴 것은 외방의 일이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왜적의 출몰은 예측하기 어려우니 어찌 철저히 감시하는 일을 늦출 수 있겠는가. 변방 백성의 고생이 한창 심하니 힘써 안정시키는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한산도(閑山島)는 지형적 이점이 뛰어나니 아직도 이 충무공(李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전공이 전해 오고, 세병관(洗兵館)은 군율이 엄격하니 그 누가 구 능천군(具綾川君 구인후(具仁垕))의 위엄을 능가하겠는가. 오직 앞사람이 남긴 모범을 그대로 따를 것을 생각하고, 임명하여 보내는 나의 부푼 마음을 저버리지 말라. 그대를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은 한(漢)나라 때 잠팽(岑彭)에게 형문(荊門)의 일을 일임했던 것과 비견되니, 그대는 조충국(趙充國)이 금성(金城)의 그림을 올리고자 했던 것처럼 방략을 잘 마련하라.
아, 공무의 근본을 따져 보면 청렴하고 부지런하며 자신을 면려하는 데서 벗어나지 않고, 군사들이 즐거이 복종하는 요점은 오직 위엄과 은혜를 함께 시행하는 데 있다. 몸소 장성 같은 방어막이 되어 산을 지키는 호랑이와 표범처럼 든든한 기세를 이루고, 우리 변방을 튼튼히 잘 지켜서 난폭한 고래처럼 바다를 침범하는 왜적에 대한 걱정을 말끔히 제거하라.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는 것이니, 잘 알았으리라 생각한다.”
하였다.
(敎三道統制使李載恒書。校理知製敎洪鉉輔製進 , 右承旨李挺周入啓。王若曰, 國家重關防之地, 思鞏邊封, 朝廷選屛翰之才, 庸授戎節。予志先定, 僉擧亦諧。惟卿, 以大院君雲仍, 有古名將風。成右軍換鵝之癖, 闡翰墨名, 慕北平射虎之風, 抱弧矢志。北邑之麟符屢佩, 治聲已彰, 南閫之豹節旋還, 人言可畏。逮玆嗣服之初政, 爰侈陞秩之殊恩。志守不變於世禍之中, 孰不歎尙? 將權特授於宿衛之地, 乃加庸進。惟其眷注者深, 欲觀歷試之效。念我國建置諸鎭, 伊玆營最稱雄藩。界限重溟, 領龍驤之萬軸, 控制三路, 統犀甲之千群。鎭堡列置於海門, 百里相接, 波濤直通於日域, 一颿可杭。顧節制有別於他方, 肆委任必待其重望。近者督帥之不檡, 專事貪饕, 是以戎政之多虞, 漸致疲弊。軍儲已至於蕩竭, 他尙何言, 兵備政急於綢繆, 予獨深慮。須是才智之兼備, 方見守禦之得宜。玆授卿以三道統制使兼慶尙右道水軍節度使, 卿其體予委寄之寵章, 殫卿區劃之長策。以末擬而授治盜之將, 意在內廷, 因廷議而仍制閫之權, 事或外重。島夷之出沒叵測, 寧緩瞭察之機, 邊民之凋瘵方深, 勉盡撫綏之道。閑山島地利之勝, 尙傳李忠武之戰功, 洗兵館帥律[師律]之嚴, 孰如具綾川之威蹟? 惟思比軌於前躅, 毋負推轂之盛心。倚毗比漢岑彭一委荊門之事, 方略如趙充國須上金城之圖。於戲, 究官事之本根, 不出廉勤自勉, 要軍情之悅服, 惟在威惠竝行。身作長城, 同虎豹在山之勢, 用固吾圉, 絶鯨鯢跨海之憂。故玆敎示, 想宜知悉)
승정원일기 영조 1년 을사(1725) 5월 27일(갑자)
삼도 통제사(三道統制使) 이재항(李載恒)에게 내린 교서




이 가운데 수원과 화성 출신으로 주목되는 인물이 바로 봉담읍 분천리의 함평이씨 함성군 종가 통제사 이창운(1713~1791)이다. 더불어 우정읍 화산리의 해풍김씨 남양쌍부파 통제사 김영(金煐, 1772~1850)도 있다. 모두 무반 명가로 충무공가와 통혼 관계에 있던 명망 높은 무반가이다.
함춘군 이창운은 영조 때 선전관을 시작으로 정조가 즉위하면서 통제사에 올랐다. 왕명에 통영의 조세 폐단을 정리한 유능한 목민관이자 장수였다.
지금 임금(정조) 정유년(정조 1, 1777년)에는 통제사에 천수되었는데 공은 문부를 조사하고 비축을 열람한 다음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러고서 어떻게 3도의 치안을 맡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겠는가?”하고는 관방을 튼튼히 하고 군민을 소생시킬 수 있는 방책을 마련하여 급히 조정에 올렸다. 그러나 정부에서 반대하여 행하여지지 못했으나 우선 일만전의 돈을 풀어 급한 것만 보충하였다.(今上丁酉薦授統制使公按簿閱儲嘆曰此何以控三道而備陰雨耶遂指畫壯關防蘇軍民之榮馳驛以 聞廟堂格不行遂出萬緍錢紓其急)
이창운묘갈(李昌運墓碣). 국가유산 지식이음
또 이창운의 차남 이유경(李儒敬, 1747~1804)도 정조 20년(1796) 7월 6일 통제사로 임명되어 부자 통제사가되었는데, 그러나 12월 3일 황해병사로 임명된 윤득규와 곧바로 직이 맞바꾸어졌다. 앞서 이유경은 1793년 12월 8일 설치된 화성성역소(수원)의 낭관 우두머리인 도청(都廳)에 임명되었다. 도청의 역할은 화성 축성의 작업관리와 사무관리 전반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화성성역에 총괄인 총리대신 채제공, 그 다음 화성유수 겸 감동당상 조심태 다음이었다. 이유경이 1791년 종2품 금위 중군으로 한강 주교(舟橋)를 건설을 맡아 한강에 배다리 놓는 실무를 담당하여 무난하게 처리하였던 것이 도청이 되는데 바탕이 되었다.
화성(華城)의 축성 공사를 감독한 신하들에게 상을 내렸다.
총리사(摠理使)인 우의정 채제공(蔡濟恭)에게 호피(虎皮)를 하사하고, 감독한 신하로서 당상관인 수원 유수(水原留守) 조심태(趙心泰)는 가자(加資)해 주고, 도청(都廳) 이유경(李儒敬)에게는 안에서 갑주(甲胄)를 하사하고, 책응한 도청인 수원 판관(水原判官) 정동협(鄭東恊)에게는 준직(準職)을 제수하고, 특별히 감독한 독성 중군(禿城中軍) 김후(金㷞)는 곤수로 의망(擬望)케 하고, 부사(府使) 이방운(李邦運) 등에게 차등있게 시상하였다.(施賞華城城役蕫工諸臣。 摠理使右議政蔡濟恭賜虎皮, 監蕫堂上水原留守趙心泰加資, 都廳李儒敬內賜甲冑, 策應都廳水原判官鄭東協準職除授, 別監蕫禿城中軍金㷞閫帥差擬, 府使李邦運等施賞有差)
정조실록42권, 정조 19년(1795) 윤2월 13일 을미
화성의 축성공사를 감독한 신하들에게 상을 내리다
따라서 화성성역을 성공적으로 끝마치자 이 공으로 처음 우포도대장이 제수되고 이어 삼도수군절도사가 제수된 것이다.
이유경(李儒敬)을 우포도 대장(右捕盜大將)으로 특별히 임명하였다.(特除李儒敬爲右捕盜大將。)
정조실록42권, 정조 19년(1795) 3월 4일 을묘
이유경을 우포도 대장으로 특별히 임명하다
이유경(李儒敬)을 삼도 수군 통제사로 삼았다.(己酉/以李儒敬爲三道水軍統制使。)
정조실록45권, 정조 20년(1796) 7월 6일 기유
이유경을 삼도 수군 통제사로 삼다
정민시(鄭民始)를 의정부 좌참찬으로 임명하였고, 윤득규(尹得逵)를 황해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가 곧바로 통제사 이유경(李儒敬)과 맞바꾸게 하였다.(以鄭民始爲議政府左參贊, 尹得逵爲黃海道兵馬節度使, 旋以統制使李儒敬相換。)
정조실록45권, 정조 20년 12월 3일 갑술
정민시를 의정부 좌참찬으로, 윤득규·이유경을 황해도 병마 절도사로 삼다
이밖에 이유경은 1787년(정조 11) 만들어진 군사훈련지침서 『병학지남』(兵學指南)의 범례를 쓴 이론가인 유능한 장수였다.
김영은 통영에 더 특별한 일화가 전한다.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1829)하였을 때 통영에 큰불이 나 4개동의 민가 수백호가 불타버리자 남망산(南望山)의 소나무를 베어다 집을 짓게 하여 주민을 구휼(救恤)한 것이다. 그러나 금송(禁松)을 남벌(濫伐)하였다는 국법으로 파직(罷職)을 당하니 이듬해에 통영의 주민들이 김영의 은덕을 기리는 비문을 뜬 바위에 세웠다. 이 바위는 김영이 올라가 수일동안 진화작업을 지휘하였던 바위이며 통영군지(統營郡誌) 인편에 실려 있다. <통제사 김영 각암비문(統制使 金煐 刻巖碑文)>에는
「화재(火災)의 고난(苦難)을 겪은 백성(百姓)들이
공이 안전(安全)하게 조치해주신 덕택으로
걱정근심을 덜어 버리니 춥고 배고픔 막아주시니
은혜(恩惠)크고,
많은 집들을 전과 같이 다시 짓게 해 주시니
재난은 이미 지난일 되었고 옛 과 같이 살게 되었도다
焦爛 殘氓 賴公尊安 憂殷減撤 惠周飢寒
千間大庇 一時肯搆 已經劫燼 按堵如舊
순조 29년 기축년(1829)에 공이 통제사가 되었으나 송정동민의 실수로 불이나 해송정, 항복, 와동의 인가 수백호가 초토화 되었다. 공이 남쪽과 북쪽의 산에 소나무 벌채를 허락, 집을 새로 짓게 해주었다.
하지만 이 소나무를 남벌한 일 때문에 직지사가 임금님께 아뢰어 파직을 당했다. 이에 4개동의 백성들이 공의 은덕을 암석에 새겼다. 이 암석은 서정과 정량리의 경계 바닷가에 있었다. 이 바위는 공이 칼을 집고 그 위에 서서 군민을 지휘하여 여러 날 화재를 진화하던 바위다. 다음해인 경인년(1930)에 새겼다.
(純祖二十九年己丑公爲統制使松亭洞民失火延燒海送亭抗北瓦洞人家數百戶盡成焦土公許給南北山之松新造家屋矣以松木濫伐事直指使啓請罷職四洞之民刻公之功德於巖石在曙町貞梁里之界海濱也此巖卽公之杖劍立於其上指揮軍民而屢日鎭火之巖也翌年庚寅刻)」
라고 기록(記錄)되어 있다. 1970년대 동문고개 도로개설공사로 인해 통영의 덤바우가 파괴되고 비문 역시 사라졌으나 2019년 해풍김씨종가와 시민들이 뜻을 모아 복원하였다.







경상남도 통영시 문화동(慶尙南道 統營市 文化洞) 62번지에 위치한 세병관(洗兵館) 광장에 있는 두룡포기사비(頭龍浦記事碑)이다. 1625년(인조 3)에 세워진 이 비는 원래 통제영(統制營) 남문 밖 바닷가 큰 길에 서 있었는데, 1904년(고종 8)에 현재 위치로 옮긴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귀부(龜趺)가 없어진 듯하며, 비신(碑身)이 오랫동안 땅에 묻혀 있어 완전한 판독이 어려웠었다. 1996년에 받침돌을 새로 만들고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이수(螭首)에는 구름과 두 마리의 용이 하나의 여의주를 받치고 있는 모습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이 두룡포기사비는 선조 때 제6대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였던 이경준(李慶濬)이 수군 본영을 이곳에 건설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일종의 사적비이다. 비문의 주된 내용은 비를 세우게 된 경위와 이경준 통제사의 세계(世系)와 관력(官歷), 통제영을 두룡포로 옮기게 된 이유, 그리고 이경준의 인간됨과 업적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찬자(撰者)와 서자(書者)의 성명은 판독되지 않고 직명(職名)인 통훈대부 창원대도호부사(通訓大夫昌原大都護府使)와 어모장군행훈(禦侮將軍行訓) 등만 판독될 뿐 그 이하는 마모되어 알 수 없는 상태이다.
『통영 두룡포 기사비(統營 頭龍浦 記事碑)』 국가유산 지식이음



두룡포에 영문을 설치한 것은 오래되지 않았으나 만력 연간에 옛 통제사 이경준이 세운 것이다. 공은 일찍이 혜택을 베풀어 남에게 입혔고, 또 요해처에 영문을 설치하여 만세의 이로움이 되게 하니, 사람들이 그 이로움을 편히 여기고 그의 덕을 사모하여 모두 돌을 세워 그의 사적을 기록하여 길이 전하고자 하였다. 현재 통제사 구공에게 하소연하였더니 구공은 공에게 일찍 보좌관이 되어 지우를 받음이 가장 깊었기 때문에 역시 그 은택을 사모하여 기꺼이 듣고는 그 아름다움을 이루고자 나로 하여금 비문을 작성토록 하니, 나도 글을 잘 못한다고 사양할 수 없어서 그 줄거리를 아래와 같이 적어둔다. 공은 고 정승 증의 아들이요 한산 목은공의 후예이다. 가문의 흥성함과 세덕의 아름다움은 나라의 역사책에 실려 있고, 묘도에 명문으로 기록되어 있어 곧 이 비문에서는 이것은 생략한다.공의 형제 네 분이 쌍벽을 이루며 나란히 드러났으니 그 하나는 곧 현재 지사 경함으로 쌓은 덕과 높은 명망이 당대의 으뜸이다. 그 하나는 돌아가신 좌랑 경류로 임진년의 난리 때에 국가의 일로 죽어서 그 재주를 능히 펼치지 못하였다. 그 하나는 곧 현재 소윤 경황이니 비록 과거를 통하여 진출하지는 않았으나 성실하게 직무를 다루어서 여러 번 내직, 외직으로 천전하면서 능력이 있다는 평을 받았다. 공은 비록 무예로 출세하였지만 경서와 역사에 박식하고 더욱 시경과 예경에 돈독하였으며, 아름다운 용모는 옛 선비 장수의 기풍이 있었다. 그리하여 간 곳마다 번번이 성적이 있었다. 두 번의 평안절도사와 두 번의 황해절도사, 한 번의 충청병사 등을 역임하였는데 군사와 백성이 부모같이 공경하고 신명같이 두려워하여 강역이 편안히 무사하였다. 대개 그의 인자로움과 위엄과 군사를 다루는 방략은 남보다 크게 뛰어남이 있었기 때문에 이로써 조정에서 중용하여 쇄약(궁궐 수비)으로 위촉하였다. 두 번 통제사가 되었는데, 통제사의 직책은 경상, 충청, 전라 삼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그 지역과 바다를 지켜주는 것이니 지위는 높고 임무는 막중하여 관외의 벼슬(외관직)로서는 그보다 높은 자리가 없기 때문에 당대의 가장 잘난 이가 아니면 능히 이 직책을 맡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통제사의 설치 또한 오래되지 않았으니, 임진년에 이순신이 해상의 치우친 장수로서 능히 대적을 물리쳐 수륙으로 아울러 진격하지 못하게 하여 중흥 일등공신이 되었다. 조정은 벼슬로서 상줄 만한 것이 없고, 또 무거운 권한을 주지 않으면 여러 장수들을 통솔하여 동남 지역을 막을 수가 없으므로 특별히 통제사라는 벼슬을 마련하여 제수한 것이다. 통제영은 처음에는 한산도에 있었는데 곧 오른쪽에 치우쳐 있어서 왼쪽에서는 멀었다. 중간에 고성으로 옮겼더니 곧 배를 모아두기에는 마땅하였지만 갑작스러운 변에 대처하기에는 불편하였다. 뒤이어 통제사로 오는 이들이 옛것을 따르는 데에만 익숙하여 능히 고쳐서 옮기지 못하였는데, 공이 통제사가 되면서 개연히 통제영을 옮기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여기고 지형을 살피고 헤아려서 통제영을 두룡으로 옮겼다. 서쪽으로는 굴포에 기대고, 동쪽으로는 견내량이 버티며, 남쪽으로는 큰 바다와 통하고, 북쪽으로는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깊긴 하지만 구석지지 않고 얕긴 하지만 드러나지 않으니 참으로 수륙을 겸한 지형이며 관방의 요해처이다. 동쪽과 남쪽, 서쪽의 적들이 이곳을 지나지 못하여 횡행하지 않으니 바다다 잠잠해져 놀라지 않은 것이 거의 장차 수십 년이 되어간다. 예전에 조적이 초성에 영문을 옮기니 후조에서 가까이 오지 못하고, 유익이 면구로 옮겨 다스리자 북쪽 오랑캐가 감히 엿보지 못하였다. 지리의 험난함은 비록 하늘이 베풀어주는 것이지만, 반드시 사람을 기다린 후에야 그 마땅함을 얻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그 경우는 한결같다. 이제 대저 두룡이 그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 적에는 한낱 바닷가의 어촌으로서 개펄 지역이며 거친 덤불로 여우와 토끼가 뛰놀던 폐허에 불과한 채 몇 천만 년을 내려오고 몇 천, 몇 백 명을 겪어 오다가 비로소 공의 손에서 이루어졌으니, 하늘이 이러한 요새를 마련해 놓고 때를 기다리고 또 사람을 기다린 것이 어찌 우연이라 하겠느냐. 앞에서는 충무공이 적을 무찔러 중흥의 업적을 거두고, 뒤에서는 공이 영문을 설치하여 만세의 이익이 되게 하였으니, 앞뒤로 두 이씨가 나타난 것은 비록 때에 응하였다고 하여도 옳을 것이다. 그런데 홀로 공의 행적이 거의 없어져서 전해지지 않는데, 이 어찌 어진 자손이 능히 그 가업을 잇는 이가 없어서였겠는가? 아! 두룡포의 험준함은 공을 만나 관방의 요새가 되었고, 공의 공과 덕은 또한 구공(현임 통제사)을 만나서 비석에 새겨 밝히 전해지게 되었으니, 오직 땅만이 사람을 기다릴 뿐 아니라 사람도 또한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 어찌 그 우연하다고 하겠는가. 외척 중신으로 와서 이곳 영문을 맡게 되고, 그의 공명과 사적을 공이 바야흐로 통제사로 있으면서 또 이 일을 주관하기 때문에 감히 찬사를 드리지 않기로 하고 뒷사람을 기다리노라. 통훈대부 창원대도호부사 박홍미, 어모장군 행훈(직명과 성명은 결락) 천계 5년(1625년) 3월 일 고종 갑진년(1904년) 본군 사람 이학재, 이승주가 포구 옆에서 세병관 광장으로 옮겨 세웠다. 이 비석은 인조 3년(1625년)에 세워진 것이니 350여 년의 비바람을 맞으면서 이곳 통제영을 지켜 왔던 것이다. 아깝게도 비석의 밑 부분이 뭉개져서 10여자씩은 알아볼 수 없고 또한 글 지은이와 글씨 쓴 이의 기록조차 없이 관직만 적혀있고 이름이 뭉개져 알 길이 막연하던 중 수소문 끝에 그 원문을 찾아 후일을 위해 기록해 둔다.
頭龍浦記事碑文 「頭龍浦之設鎭非古也 萬曆中故統制使李慶濬之所建公旣有惠澤在於人 又設鎭要害爲萬世之利人安其利思其 德咸欲石以記其蹟以壽其傳訴於今統制具公於公曾爲幕佐受知最深 亦思其澤樂聞而成其美命余爲之記嚴 不敢以不文辭紀其梗槪如左公故宰相某之子 韓山牧隱公之後也氏族之盛 世德之茂載在國乘銘在墓道卽於是碑 斯可洛矣公兄弟四人聯璧共顯其一卽今知事慶涵宿德重望爲當今第一 其一故佐郎慶流壬辰之亂死於國事不克展 其才蘊其一卽今少尹慶滉雖不由科第以進而醇謹奉職累遷中外官有能名 公雖以武藝發身愽通書史敦&A5647;詩禮雍容 有古儒將風故所至輒有聲再鎭關西再鎭海西一帥湖右兵民愛之若父母畏之 如神明封疆帖然無事盖其仁威方略有 大過人者是以朝廷重焉委以鎻鑰再爲統制統制之職兼領三道控扼嶺海 位尊任重關外之寄無出其右故非當世極 選不能居是職焉然統制之設亦非古也粵在壬辰李公舜臣以海上偏師 克摧大敵使不得水陸並進爲中興第一功 朝廷無官以賞之且不卑重權無以憚壓群帥捍禦東南故特置統制以官之 其營始在閑山卽偏於右 而遠於左中移固城卽宜於藏船而不便於應卒相繼爲帥者狃於姑息莫能改 置及公爲帥慨然以爲已任相度地形移鎭 于頭龍 西依掘浦東控見梁南通大洋北連平陸深而不奧淺而不露眞水陸之形 便關防之要害自東而南而西之賊不得 過此而橫行海波不驚者殆將數十年矣昔祖逖移鎭譙城而後趙不敢近庾翼徒 治沔口而北虜不敢窺地利之險雖天所 設必待人而後得所焉自古及今其揆一也今夫頭龍未得其人卽 一海港瀉鹵之地荒榛狐免之墟而已歷幾千 萬年閱幾千 百人而始成之於公之手天之設是險以待時又待人豈偶然哉 忠武克敵於前以收中興之績公設鎭於後 以爲萬世之利前後二李之出雖謂之應時可也而獨公之迹幾乎泯沒而無傳 豈無賢子孫能業其家者歟噫頭龍之險得 公而爲關防之地公之功與德又得具公而有山晃之傳則不惟地之待人人亦待 人亦豈偶然哉戚重臣 來守是鎭而其功名事蹟 公方在鎭 又幹是事故 不敢有所稱頌以候來者云 通訓大夫昌原大都護府使 朴弘美 禦侮將軍行訓(職與姓名缺)天啓五年三月 日(1625年)高宗甲辰(1904年)本郡人 李鶴在 李承周自浦邊 移立於洗兵舘廣場。
『통영 두룡포 기사비(統營 頭龍浦 記事碑)』(김은미). 국가유산 지식이음











세병관(洗兵館)
경상남도 통영시(세병로 27)에 있는 조선 시대의 목조 건축으로 삼도수군통제영의 객사이다. 정식명칭은 통영세병관이다.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설치했던 중심 건물로 임금을 상징하는 궐패(闕牌)를 모시고 출전하는 군사들이 출사(出師) 의식을 행하던 곳이다.
국보로 본래 1604년에 이순신의 전공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졌으며, 후일 삼도수군통제사영(三道水軍統制使營)의 건물로 사용되었다. 세병관은 정면 9칸, 옆면 5칸의 단층 팔작지붕 건물로, 장방형 평면으로 모든 칸에는 창호나 벽체를 만들지 않고, 통간(通間)으로 개방하였다. 다만, 우물 마루로 된 평면 바닥의 중앙 일부를 한 단 올림으로써 위계성(位階性)을 주고 있다. 여수의 진남관(鎭南館)과 함께 남아있는 군사용 건물 가운데 면적이 넓은 건물 중 하나이다. 현판은 통제사 서유대의 글씨이다.


































통영에 군사도시가 생기면서 살림을 도와주는 12공방도 함께 들어왔다. 여기서 나전칠기를 생산하여 400년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기에 통영은 나전칠기의 본 고장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통제영은 이경준 통제사부터 208대 홍남주 통제사까지 300년 가까이 존재했다.
통영의 이런 역사는 우리나라의 해상문화의 역사와도 그 맥을 같이 한다. 임진왜란 당시 그 유명한 한산대첩의 현장이기도 한 통영은 삼도의 중심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 결과 수군의 각종 병선과 세곡을 실어 나르던 조운선, 화물을 싣고 다니던 화물선과 장배들의 출입이 빈번한 도시이다.
현대의 통영은 조선시대 대도회로 발달하여 일제강점기에 풍부한 물산을 바탕으로 음식문화 발달하는데, 바로 다찌집이다. 통영 앞바다에서 갓잡은 해산물로 차려진 진미가 술안주상으로 한상이다. 또한 전국 휴게소 어딜가나 있는 충무김밥은 선상 허기를 달래주기 위해 먹던 별미 중에 별미고 든든하다. 김밥집만으로 포구가 다 들어 차 어느 집을 가나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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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수군통제영
통제영은 처음에는 한산도에 있었는데 곧 오른쪽에 치우쳐 있어서 왼쪽에서는 멀었다. 중간에 고성으로 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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