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숲 너머 바람은 귀를 맑게 하고
시냇가 밝은 달은 마음을 비추네.
깊은 숲은 시원한 기운을 전하고
높은 나무에선 엷은 그늘 드리우네.
술자리 익어 가볍게 취기 오르고
시가 되니 짧게 노래 하네.
한 밤중에 간간이 들려오는 소리
피눈물 자아내는 소쩍새 아닌가!
竹外風淸耳
溪邊月照心
深林傳爽氣
喬木散輕陰
酒熟乘微醉
詩成費短吟
數聲聞半夜
啼血有山禽
소쇄정에서 즉흥으로 읊다(瀟灑亭卽事)
김인후(金麟厚), 『하서선생전집(河西先生全集)』, 권8(卷之八), 오언율시(五言律詩, 1528년)
친우 양산보를 찾아 소쇄정에 오른 김인후의 즉석시다. 이 장소가 담양 소쇄원이다. 흔히 정암 조광조와 기묘사림 양산보의 이야기는 몰라도 대나무숲과 시원 차게 떨어지는 계곡 물사위, 그리고 작은 정자들이 어우러진 풍광이 세속에 쪄든 우리에게 너무도 유명하다.소쇄정에 서면 자연이 주는 평안함과 쉼, 그리고 사색으로 빠져든다. 물이 많고 물소리 좋은 소쇄원에서 계곡 물소리를 담았다.
'맑고 깨끗하다(瀟灑)'
'소쇄(瀟灑)'는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 1493~1583) 지어준 이름이다.
수혈(樹穴)에서 고리 찾은 사람은 따로 있소
선주(仙舟)라 어느 날에 웃음얘기 친히 하리.
소쇄원(梁園瀟灑) 그 이름은 내가 짖지 않았으니
벽에 붙은 신평의 글월을 보오소서.
*이의 자주에 「소쇄원이란 이름은 하서가 처음 지은 것이다」했으므로 그것이 송신평(송순)에게서 나온 것임을 밝히는 바다.
樹穴探環自有人。
仙舟何日笑談親。
梁園瀟灑名非我。
且見新平壁上珍。
*李自註。瀟灑園之名。創自河西云。故明其出於宋新平
김인후(金麟厚), 『하서선생전집(河西先生全集)』 권6(卷之六), 칠언절구(七言絶句)
이처럼 ‘소쇄’는 김인후를 통해 송순이 지은 것임을 밝히고 있다. ‘소쇄’는 ‘북산이문(北山移文)’에 나오는 고사로 송나라 주옹이 친구 공치규와 북산(北山)에 은거하였는데 주옹이 관직을 받고 나가자 그의 변절을 공치규가 나무란 글이다. 북산은 남경(南京)에 있는 산으로 처사들의 대표 은거지로 공덕장은 주옹의 변절을 나무라면서, 두 번 다시 북산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북산 신령의 이름을 빌려 이문을 썼다. 이처럼 ‘소쇄’는 주옹처럼 변절하지 않고 맑고 깨끗한 자연을 벗 삼고 살겠다는 공덕장의 의지가 담겨 있는 말이다. 따라서 송순은 이종사촌 양산보의 은거를 보고 공덕장과 같다는 뜻으로 예우하여 ‘소쇄’라 이름 붙였다.
송순은 가사문학의 대가로 양산보와는 이종사촌이다.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수초(遂初) 또는 성지(誠之), 호는 기촌(企村) 또는 면앙정(俛仰亭). 담양 출신으로 증 이조판서 송태(宋泰)의 아들이다.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를 시작으로 관로에 나갔으나 1533년(중종 28) 김안로(金安老)가 권세로 귀향하여 면앙정(俛仰亭)을 짓고 시를 읊으며 지냈다. 1550년(명종 5) 대사헌·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진복창(陳福昌)과 이기(李芑) 등에 의하여 사론(邪論)을 편다고 탄핵받아 충청도 서천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에 풀려나 1552년(명종 7) 선산 도호부사가 되고, 이 해에 면앙정을 증축하였다.
전주부윤과 나주목사를 거쳐 1562년(명종 17) 70세의 나이로 기로소(耆老所)에 들고, 1568년(선조 1)한성부좌윤이 되어, 『명종실록』을 편찬에 참여하였다. 의정부우참찬이 된 뒤, 벼슬을 물러나니 50년 만의 은퇴였다.
송순은 성격이 너그럽고 후하였으며, 특히 음률에 밝아 가야금을 잘 탔고, 풍류를 아는 호기로운 재상이었다. 일찍이 박상(朴祥)과 송세림(宋世琳)을 사사하였고, 교우로는 신광한(申光漢)·성수침(成守琛)·나세찬(羅世纘)·이황(李滉)·박우(朴祐)·정만종(鄭萬鍾)·송세형(宋世珩)·홍섬(洪暹)·임억령 등이 있다. 문하 인사로는 김인후·임형수(林亨秀)·노진·박순·기대승·고경명·정철(鄭澈)·임제 등이 있다.
면앙정은 그가 41세 되던 해인 1533년(중종 28) 담양의 제월봉 아래에 세운 정자로서 호남 제일의 가단(歌壇)이였다. 이종사촌 양산보 등, 임제·김인후·고경명·임억령·박순·이황·소세양(蘇世讓)·윤두수(尹斗壽)·노진 등 많은 인사들이 출입하며 시 짓기를 즐겼다. 특히 자연예찬을 주제로 한 작품들로 강호가도의 「면앙정삼언가」·「면앙정제영(俛仰亭題詠)」 등 수많은 한시(총 505수, 부1편)와 국문시가인 「면앙정가」 9수, 「자상특사황국옥당가(自上特賜黃菊玉堂歌)」·「오륜가」 등 단가(시조) 20여 수를 지었다. 문집으로는 『면앙집(俛仰集)』이 있다.
담양 구산사(龜山祠)에 배향하였다. 구산사는 서원으로 1704년(숙종 30)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송순(宋純)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다. 신미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1868년)으로 혁파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서월철례령 이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전하며, 현재 그 자리에는 <구산사유허비(龜山祠遺墟碑)>있다. 계축년(1913년) 11월에 건립했으며 높이 202cm, 너비 85cm, 두께 34cm이다.
송순을 주향으로 배향하고 이어 1710년에 송정순(宋庭筍)과 김언욱)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1713년에 송희경(宋希璟)·김응회(金應會)·이안눌(李安訥)·송징(宋徵)·김대기(金大器), 1717년에 나무춘(羅茂春), 1765년에 임광필(林光弼)을 추가 배향하였다. 또 유허비 후면에 ‘문간공 눌재 박상선생 상 충주인’, ‘시은 윤선생 원호 남원인’ 이라는 음기가 더 있어 구산사에 총 12인을 배향하고 있었다.
“어느 언덕이나 골짜기를 막론하고 나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이 동산을 남에게 팔거나 양도하지 말고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주지 말 것이며, 후손 어느 한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라”
이처럼 선생이 소쇄원을 절대 팔지 말고 어리석은 후손에게도 물려주지 말라고 당부한 것이 오늘에 이르게 된 이유이다. 소쇄원의 정확한 조영 시기는 1530년대에 시작하여 자식과 손자 대에 이르러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양산보 선생이 가꾼 별서 소쇄원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선생의 유지를 받든 후손들(현재 15대)에 의해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소쇄원은 조선을 대표하는 사족 정원이다. 따라서 소쇄원은 조선 선비의 멋과 풍류를 느낄 수 있는 우리나라 정원의 대표적인 유산이다.



담양 소쇄원은 자연과 인공을 조화시킨 조선 중기 정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다.
양산보(梁山甫, 1503∼1557)는 스승인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가 유배되자 세상의 뜻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정원을 지었는데,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 1493~1583)이 ‘맑고 깨끗하다’는 뜻의 ‘소쇄(瀟灑)’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정원은 계곡을 중심으로 하는 사다리꼴 형태로 되어 있다. 4,060㎡의 면적에 기능과 공간의 특성에 따라 애양단구역, 오곡문구역, 제월당구역, 광풍각구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정원 내에는 대나무, 소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들로 된 숲이 있다. 주위에는 흙과 돌로 쌓은 자연스러운 담이 있는데 ‘애양단’, ‘오곡문’, ‘소쇄처사양공지려’의 석판과 목판글씨가 담벽에 박혀있다. 소쇄원 안에는 영조 31년(1755) 당시 소쇄원의 모습을 목판에 새긴 그림이 남아 있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가 엿보이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조선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정원이다.
국가유산청


야트막한 산지, 산지 사이로 내달리다 멈춘 곳에서 황량한 주차장이 덩그런하다. 고개 들어보니 울창한 대나무숲이 짙게 깔려있는데. 이 작은 산 사이에 그 유명한 소쇄원이 있나 싶지만.. 다듬지 않은 ‘제주양씨지소쇄원’이라는 돌비를 지나 대숲 사이로 나아가니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아~ 이곳이 소쇄원이구나'
비경(秘境)에 감탄이 절로 나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청량한 계곡수의 소리와 힘찬 물줄기를 보노라니 신선 사는 곳이 따로 없겠구나 싶다. 대숲 바깥과 너무도 다른 절경(絶景)이 너무도 놀라운 경험이다. 유적지 여기저기를 다녀 보지만 그저 넋 놓고 마냥 시간 지나는 곳은 여기가 처음인가 싶다.
하루 종일 있어도 물리지 않는 곳.
발을 떼고 엉덩이를 들어 나오기가 너무 어려웠던 곳.
이곳이 소쇄이다.
다음 일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떠나오지만 발길 떨어지지 않은 이곳이 빼어난 산수에 정화되는 이 기쁨이 너무나 좋은 곳이다.

양산보(梁山甫, 1503~1557) 선생은 전라남도 담양(潭陽)에 있는 소쇄원(瀟灑園)의 창건자로,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언진(彦鎭), 호는 소쇄옹(瀟灑翁)이다. 조부는 부사직(副司直) 양윤신(梁允信)이고, 부친은 창암(蒼巖) 양사원(梁泗源)이다. 모친은 신평 송씨(新平宋氏)이다. 정랑(正郞) 김후(金珝)의 딸인 광산 김씨(光山金氏)와 슬하 3남 1녀를 두었다.
어려서 당숙 양팽손의 추천으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학문을 하였으며(15세),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1519년(중종 14) 중종이 친히 주관한 시험에서 17세의 나이로 합격하였으나, 대간(臺諫)들의 반대로 취소되고 이를 애석히 여긴 중종이 물품을 내려 위로하였다. 그 해 기묘사화(1519년)로 스승 조광조가 사사(賜死)되자 입신양명을 접고 전라남도 담양(潭陽)으로 내려와 소쇄원(瀟灑園)을 짓고, 은둔하여 자호를 소쇄옹(瀟灑翁)이라 하고 처사(處士)로 살았다.
평소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송순 및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과 교유하였다. 조광조 사후 하서 김인후와 함께 사림(士林)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1557년(명종 12) 3월 20일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5세였다.
둘째아들 양자징(梁子澂)은 해동18현 김인후(金麟厚)를 사사하고 그의 사위가 된 사림의 중심된 인물이다.
전라도의 진사(進士) 이경집(李敬緝) 등의 상언에,
“고(故) 현감 양자징(梁子澂)은 기묘년(1519, 중종14)의 명현(名賢) 양산보(梁山甫)의 아들입니다. 선정신(先正臣) 김인후(金麟厚)에게서 학문을 배웠는데 김인후가 그를 매우 기특하게 여겨 사위로 삼았습니다. 그가 드디어 학문에 전념하여 조예가 날로 깊어져 선정신인 이황(李滉), 이이(李珥), 성혼(成渾) 등 여러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고, 고향 사람들이 그의 효행을 조정에 아뢰어 거창 현감(居昌縣監)과 석성 현감(石城縣監)에 제수하였습니다. 그 뒤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이 그의 행장(行狀)을 지어 칭송하였는데도 아직까지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 주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김인후의 사당에 이 사람을 배향(配享)한다면 고정(考亭 주희(朱熹))의 사당에 면재(勉齋 주희의 제자 황간(黃榦))를 배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였는데, 예조에 하달하였다. 예조에서 말하기를,
"지난 숙종정축년023) 에 호남의 선비들이 양자징을 필암 서원(筆巖書院)에 배향할 것을 청하였으나, 지금까지 시행하지 않았으니, 이것만도 선비들의 억울한 일입니다. 성상께서 재량해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그가 선정의 사위로 선정의 학문의 정통을 이어받았고 또 여러 선정들의 문하에 출입하였으니, 배향하더라도 의리상 안될 것이 없다. 더구나 선정의 집안에 이제 막 직접 제문(祭文)을 지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고 또 그의 후손을 채용하라고 명하였으니, 이때에 이 일은 우연한 것이 아니므로 허락한다."
하였다. (全羅道進士李敬緝等上言: "故縣監梁子澂, 卽己卯名賢山甫之子。 受業於先正臣金麟厚, 麟厚大奇之, 以女妻之。 遂專意學問, 造詣日深, 爲先正臣李滉、李珥、成渾諸人所推許, 而鄕人以孝聞于朝, 拜居昌、石城兩邑宰。 其後先正臣宋時烈, 撰狀稱揚, 而尙闕俎豆之享。 若於麟厚之祠, 以此配食, 何異考亭之勉齋乎?" 下禮曹, 禮曹言: "粤自肅朝丁丑, 湖南章甫, 請以子澂, 配食於筆巖書院, 而迄今未施者, 已是士林之抑鬱。 請上裁。" 敎曰: "以先正之女壻, 接先正之嫡傳, 又出入諸先正之門, 許令配食, 義無不可。 況於先正家, 纔親撰祭文賜祭, 又命錄後。 此時此擧, 事不偶然。 許之。)
정조실록21권, 정조 10년(1786) 2월 26일 庚子 5/5 기사
고 현감 양자징을 배향하고 정희등, 김저 등에게 시호를 내리다
김인후(1510~1560)는 전라남도 장성 출신으로 본관은 울산(蔚山),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 · 담재(湛齋)이다. 아버지는 참봉 김령(金齡)이며, 어머니는 옥천 조씨(玉川趙氏)이다.
1519년(중종 14) 김안국(金安國)을 사사하고 1531년 사마시에 합격, 성균관에 입학하여 퇴계 이황(李滉)과 친구가 되었다. 154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고, 이듬 해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특히 기묘사화 때 죽임을 당한 제현(諸賢)의 원한을 개진하였다.
을사사화를 당하자 병을 이유로 고향인 장성에 돌아가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천문 · 지리 · 의약 · 산수 · 율력(律曆)에도 정통하였다. 제자로는 정철(鄭澈) · 변성온(卞成溫) · 기효간(奇孝諫) · 조희문(趙希文) · 오건(吳健) 등이 있다.
시문에 능했으며, 저서로는 『하서집(河西集)』 ·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 · 『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 · 『백련초해(百聯抄解)』 등이 있다.
김인후는 당시 이항(李恒)과 기대승(奇大升) 사이에 태극음양설(太極陰陽說)에 대하여, 이기(理氣)는 혼합되어 있으므로 태극이 음양을 떠나서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도(道)와 기(器)의 구분은 분명하므로 태극과 음양은 일물(一物)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이항의 태극음양일물설(太極陰陽一物說)을 반대한 기대승에 동조하였다. 또한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은 모두 그 동처(動處)를 두고 이른 말임을 주장함으로써, 후일 기대승의 주정설(主情說)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수양론에 있어서는 성경(誠敬)을 주된 목표로 마음이 일신을 주재하지만 기(氣)가 섞여서 마음을 밖으로 잃게 되면 주재자를 잃게 되므로, 경(敬)으로써 이를 바르게 해야 다시금 마음이 일신을 주재할 수 있게 된다는 주경설(主敬說)을 주장하였다.
1796년(정조 20) 문묘에 배향되었고,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과 옥과의 영귀서원(詠歸書院)에 제향되었으며,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2023.8.31.
조광조에게 양산보를 천거한 당숙 학포 양팽손(學圃梁彭孫, 1488~1545)은 제주양씨로 조광조 선생과 경오 식년시(1510년 중종 5) 생원 장원을 한 동기이자 기묘명현이다. 서인 노론 대표 서원인 용인 심곡서원에 함께 배향(1958년 추향) 되었다.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유배된 능성(전라남도 화순 능주)에 살았다. 서슬 퍼런 조정의 눈치도 안 보고 유배 온 조광조와 어울렸고 어린 당질 양산보를 사사시킨 장본인이다.
조광조 선생 신도비의 기록에 따르면 양팽손은 조광조 선생의 유언인
“조상을 모신 선산(용인현 심곡리) 아래 써달라”
라는 부탁으로 지금의 묘에서 서쪽 수백 보 떨어진 곳에 초장을 하였다. 훈구파의 서슬퍼런 정국에서 아랑곳없이 의를 행한 것이다. 이후 1541년 11월 25일 부인 한산 이씨가 졸하자 현재의 위치로 합장하여 묘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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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선생 묘 및 신도비
무릇 선생께서 크게 임금에게 인정을 받을 즈음에는 여러 현인들이 모두 조정에 진출하여 온 세상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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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한양조씨 선산(세장지, 응봉산 236m)으로 증조부 조육에서 아들 조용에 이르기까지 묘가 쓰인 곳이다. 입향조는 조광조 선생의 증조부 조육 선생이다. 세종대 전라감사를 역임한 용인(구성)이씨 이백지(재지거족)의 사위가 되면서 처가 입향하였다. 특히 이곳은 조광조 선생이 아버지 조원강을 19세(1500, 연산군6)에 여의고 아래 여막에서 3년 상을 모신 곳, 이심곡리로 조광조 선생이 실제 살았던 곳이다. 이런 곳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당당히 친우 조광조의 유택을 마련한 사람, 선비 양팽손이다.
양팽손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정암을 기리기 위해 초장한 이듬해 자신이 살고 있는 전라도 화순 능주의 중조산(中條山) 기슭에 최초로 사우(추모당)를 건립하였다. 이 사우는 후에 사계 김장생의 주도로 정암을 배향한 최초의 죽수서원(1570)으로 사액 확대되었다. 정암 선생을 기리는 배향서원이 무려 15곳에 이르는데 그 시초가 양팽손이었고 그의 당질로 정암을 이은 인물이 양산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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