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22일 뜸을 뜨는 데에 입시하였을 때 부제조 유상운(柳尙運)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경상도사로 있을 때에 통영(統營)을 왕래하였는데 통영은 고성현(固城縣)에서 40리나 먼 곳에 있습니다. 그 때에도 이미 성곽을 쌓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들으니 그 뒤에 영(營)을 둘러서 성을 쌓았다고 하니 대체로 허다한 군량, 병기와 몇백호의 백성이 영하(營下)에 있기 때문입니다. 또 성을 쌓을 뒤에 수성절목(守城節目)을 미리 강구해 두지 않으면 이 역시 허술하게 될 것입니다. 통영은 먼 해변에 있는데도 반드시 문관으로 지방관을 차출하여 보낸 것은 진압을 위해서 그런 것이었는데 사람 얻기가 쉽지 않아 지금은 피폐한 고을이 되었습니다. 지금이라도 각별히 가려 보내서 평상시에는 성곽을 관리 수리하게 하고 수군이 바다로 나간 뒤에는 성을 지키고 조운(漕運)을 책임지게 하면 혹 편리할 듯 합니다.“
(今正月二十二日受灸入侍時, 副提調柳尙運所啓, 臣曾爲慶尙都事時, 往來統營, 營距固城縣治四十里而遠, 其時已有築城之議聞其後環營築城云, 蓋以許多糧餉器械, 累百民戶在於營下故也, 築城之後, 守城節目, 如未及預謁, 則亦涉疏虞, 且統營在海邊遐遠之地, 必以文官, 差送地方官者, 爲其憚壓, 而得人未易, 今成弊邑, 今若各別擇送, 常時使之管治城隍舟師下海後, 使之守城, 齎以轉漕, 則或似便宜矣,)
국역비변사등록 38책, 숙종 10년 1684년 01월 23일 (음).
副提調 柳尙運 등이 입시하여 統營의 성을 지키는 일 등에 대해 논의함/萬科, 六卿 方伯, 兼牧
역사에서 인현왕후, 장희빈 등의 궁중암투 등으로 암군으로 보여지는 임금이 조선 숙종이다. 하지만 숙종은 장옥정에게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졌던 낭만가(로맨티스트)가의 면모도 있었고, 실제로는 조선후기 왕통에 있어 명성왕후에게서 난 유일한 적통으로 왕위의 위상이 높았음은 물론,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오랜 치세로 많은 업적을 쌓은 '대왕'이라고 불려도 손색 없는 임금이 숙종이다.
조선후기 최대의 세법 개혁으로 알려진 대동법이 김육의 건의로 삼남에 실시되어 100년, 황해도까지 실시 확립된 것이 숙종대이다. 그리고 성군 세종이 그토록 바랐던 화폐유통을 상평통보(엽전)를 발행하여 실행한 것도 숙종이다. 더욱이 부왕 현종 때 경신대기근을 당해 조선 전야가 초토화 해도 뚜렸한 방도 없이 청을 원수이자 오랑캐라 여기며 구원 요청을 뿌리쳤던 조야와 달리 또 다시 을병대기근을 당해 조선이 쑥대밭이 될 때, 사대부와 권신들의 반대도 불구하고 청나라 강희제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쌀을 들여온 군주, 숙종대왕이다. 국가와 백성의 안위에 명분에만 치우친 것이 아닌 실리였다.
더욱이 노론산림의 전횡되자 영수 송시열을 사사시켰고, 남인 정국이 무능과 혼란이 거듭되자 환국으로 끊어낸 임금, 피렌체 마키아벨리가 말한 여우같은 근대 군주의 전형이 숙종이다. 그의 탕평과 더불어 정치, 경제적 안정은 곧 영정조시기의 문예부흥의 토대를 이루었다. 이렇듯 그의 많은 업적 중 조선 관방정비도 그 시작과 같은 것이 바로 통영성 축조였다.
통영성(統營城)은 조선삼도수군병영성이다. 선조 37년(1604) 삼도수군통제영이 두룡포로 옮겨오고 숙종 4년(1678)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왜적으로부터 방어하고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통제사 윤천뢰(尹天賚, 57대)가 명을 받들어 쌓았다.
통영성 축조와 관련하여 숙종 3년 1677년 2월 20일(음) 비변사 계를 보면 거제 왜관 세 곳을 철거 후 그 재목으로 통영성을 수축하도록 하여 통영성 축조를 중단하고 왜관 이건 후 축성할 것과 동년 4월 5일(음) 비변사 계에서는 통제사에게 거제에 성 쌓는 것과 동시에 하기 어려우니 농한기를 기다려 공사를 하라고 명하는 등 민심을 살펴 유연하게 하였다. 이렇게 숙종대 주요 관방 정리인 북한산성, 탕춘대성, 강화돈대, 한양 도성까지 이루어진다.
통영성은 통제영 주위의 산과 평지의 지형을 활용하여 쌓은 성이다. 여황산(174m)을 등지고 강구(江口) 위로 북포루(북장대) 아래 서피랑(서포루, 서장대)에서 동피랑(동포루, 동장대)으로 이어져 있다. 그 규모는 대략 둘레 2.6km으로 석성으로 성곽 담장 높이는 4.5m, 폭 4m 정도이다. 다만 여황산 쪽 북포루로 이어지는 벼랑은 토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통영성은 수군통제영이 육군인 산성군을 보유하게된 것으로 이들 산성군을 지휘하기 위해 통영성 산성중군(山城中軍)을 설치하고 그 관아인 산성청(山城廳)을 통제영 정문 망일루(望日樓. 일명 종루)를 지나 바로 앞 좌청 옆에 나란히 두었다. 산성청은 숙종 44년(1718) 통제사 오중주(吳重周, 1654~1735, 83대,)가 건립하였다. 이후 통제영이 혁파되고 소실된 것을 문헌과 발굴조사 후 최근 복원하였다.

통영성 축조로 산성군인 육군까지 포함한 명실상부 삼남지방의 대표되는 대병영이 완성됐다. 더욱이 12공방을 더불어 무기와 화약은 물론, 통영갓, 자개, 소반 등 특산품의 생산 조달 등은 통영을 군사, 생산, 유통, 소비가 이루어지는 명실공히 조선의 대표적 지방도시(2․7일 5일장의 ‘통영장시[統營場市, 통영장터, 통영장]’, 일제강점기 ‘부도정[敷島町]시장’이라 개칭되고, 해방 후 새 동리명인 중앙동[中央洞]이 되면서 지금의 ‘중앙시장’이 됨)로 탈바꿈시켰고 이곳을 관장하는 통제사는 당대 관찰사를 능가할 정도로 위상이 높아졌다. 이렇듯 무반직 외관 중 최고 영예가 통제사였다. 참고로 문반 외관 최고는 평양감사(의주부윤도 좋은 자리)이다.

통영성은 4개의 대문이 있었다. 그중 통영성의 정문은 통영시 문화동의 ‘청마거리’와 교차되는 4거리에 있었던 남문(南門)이다. 통영성 4대문 중에 규모가 가장 컸다. 홍예문(虹霓門) 위의 2층 문루는 청남루(淸南樓)라고 하였다. 통제영 판옥전선과 거북선들이 정박하는 강구의 선소(船所. 병선마당. 현 문화마당)에서 통제영 본영으로 들어가는 통영성의 정문었기에 통제사가 새로 부임할 때 이곳 남문으로 입성하여 세병관에 올랐다. 따라서 남문은 4대문과 함께 통영성을 방비하는 산성중군(山城中軍)의 수문장(守門將)이 늘 지켰고, 통제영 망일루(望日樓. 일명 종루)에서 울리는 인정과 파루의 종소리에 맞추어 성문을 여닫았다. 현재 지역의 바람은 통제영 복원사업이 완료되면 통영성의 상징인 남문 또한 복원되기를 소망한다. 4대문과 더불어 적이 알 수 없도록 꾸민 2개의 암문(暗門)이 있었다.
그리고 통영성 산마루 동서북 산꼭대기에는 장수들이 병사를 지휘하던 3개의 포루(鋪樓)가 있었는데, 북쪽, 동쪽, 서쪽에 있는 장수의 지휘소라는 뜻으로 각각 북장대, 동장대, 서장대로 불렀다. 이들 포루는 1993년에 북포루를 복원하고 이어 서포루와 동포루는 2012년과 2013년에 각각 복원하였다. 이들 포루를 올랐다. 그리고 통영성 안에는 충렬사 앞 명정을 비롯한 9개의 공동 우물과 3개의 큰 못이 있었다.
통영성은 고종 32년(1895)에 통제영이 폐하여지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다. 또 주변 곳곳에 민가가 들어서고 도로가 개설되면서 지금은 성이 있었던 흔적만 일부 남아 있다. 1991년 통영성의 지표조사(북포루)가 이루어졌다.




아해와 안해, 불볕 더위지만 걸어서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는 충렬사를 찾았다. 서문고개 옆으로 지척으로 서피랑이 보여 쉽게 생각하고 서피랑을 올랐다. 박경리의 옛 가옥을 지나 오르니 더운 바람이 시원하게 분다. 북쪽 높이 북포루가 보이고 동으로 동포루가 보인다. 여기까지만 해도 사실 동피랑, 북포루를 오르자는 생각은 없었다. 다음날 한산대첩이 이루어진 한산도 앞바다가 보이는 미륵산 아래 수륙해수욕장에서 오전을 보내고 다시 통제영을 둘러보자고 나섰다. 점심을 위해 동피랑 근처 옛 중식당에 들러 계란후라이를 얹은 짜장면과 고기 튀김인 탕수육을 맛나게 먹었다. 볶음밥도 시켰더니 맑은 계란국을 준다. 그 옛날 그대로다. 지금이야 짬뽕 국물이 대세나 제대로된 중식당은 계란국이다.
점심을 먹고 나오니 동피랑 벽화골목 표시다. 계획없이 그냥 올랐다. 상당히 가파른 달동네다 보니 거리는 멀지 않아 금방 올랐다. 땀이 흠뻑 젖어 내려보니 강구안이 다 보인다. 풍광은 서피랑보다 못하다. 고개 들어 북포루를 본다.
"이 더위에 저긴 무리지 우리 어린 아해와 더욱이 묵묵히 길을 따르는 안해까지..."
다음날 충렬사를 지나 통영시립박물관을 들르자는 안해의 말에
"그럼 북포루가 중간이니 충렬사에 주차하고 오를까?"
그렇게 계획도 없이 폭염경보를 아랑곳 않고 충렬사에서 북포루를 올랐다. 동백오솔길을 지나 대숲이 장관인 깎아지는 산비탈을 오르니 금방 통영성 최고 장대 북포루다. 북포루에서 내려다보니 멀리 임진년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왜군선단이 내려온 견내량이 보이고 충무공이 학익진을 펼친 한산도가 들어온다.
"오르길 잘 했다. 이 더위에 통영성을 다 돌은 것은 우리 가족 뿐이리~~"
그렇게 흡족한 마음을 안고 통영성 순성을 마쳤다.
2026.7.30.~8.1.




‘서피랑’은 통영성의 동쪽 벼랑인 ‘동피랑’과 함께 서쪽 벼랑지대를 일컫는 토박이지명이다. 즉 ‘피랑’은 벼랑의 통영사투리인 ‘비렁’ 및 ‘비랑’에서 변음된 지명이다.
통영성(統營城) 걷기 ⑥ '남문(南門) 복원하여 통영성의 위용을 되살렸으면' 艅齋 金 一龍. &한산신문& 2012.12. 8. 연재
















항남동의 강구안길은 옛 통제영의 기함인 천자제1호좌선(天字第一號座船)을 비롯한 통영거북선(統龜船) 등 통제영8전선(統制營八戰船)이 항시 정박하던 항구인 강구(江口) 해안의 안쪽 골목길을 칭한다. 원래 강구는 강어귀를 뜻하는데, 통영항의 육지 깊숙이 쑥 들어온 천혜의 작은 항구라 하여 ‘강구’라 속칭했다. 예전에는 매년 봄가을로 조선수군들의 군사점호와 해상훈련이 거행되었으며, 해안 병선마당(船所)의 수항루(受降樓)에서는 통제영 별무사(別武士)가 왜적 장수로 분장한 가왜장을 결박하여 무릎을 꿇리고 항복받는 의식을 거행하며 극일혼을 키운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 후 일제강점초기에 매립되기 시작하여 수산물어시장이 들어서고, 다시 부산과 여수를 잇는 남해안의 중간 거점항구로 크게 붐볐다. 당시 여객선터미널이 있던 이 해안거리를 ‘윤선머리’, ‘뱃머리’, ‘개문’, ‘부두’ 등으로 속칭했다. 이를 최근에 다시 일부 매립하여 각종 문화행사가 열리는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조성하면서부터 ‘문화마당’이라 칭하고 있다.
통영시 도로명 지명유래 강구안길





때마침 통영에 머무는데 보름이다.
충무공 이순신이 읊은 시가 떠오른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閑山島月明夜上戍樓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撫大刀深愁時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何處一聲羌笛更添愁
이순신, '한산도가', 한산도 통제영(제승당), 1595년 8월 15일(음력)


한산대첩지 수륙해수욕장
사실 한산대첩이 이루어진 바다는 통영시내와 강구안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 강구안 두룡포가 한산도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영이 설 수 있었던 천혜 요지라는 점이다. 그래서 거길 벗어나야 학익진을 펼친 전장인 조선의 바다 남해가 보인다. 그 여러 곳 중 수륙해수욕장이 정확히 한산대첩지를 조망할 수 있다.

7월 6일에 순신이 억기와 노량에서 회합하였는데, 원균은 파선(破船) 7척을 수리하느라 먼저 와 정박하고 있었다. 적선 70여 척이 영등포(永登浦)에서 견내량(見乃粱)으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8일에 수군이 바다 가운데 이르니, 왜적들이 아군이 강성한 것을 보고 노를 재촉하여 돌아가자 모든 군사가 추격하여 가보니, 적선 70여 척이 내양(內洋)에 벌여 진을 치고 있는데 지세(地勢)가 협착한 데다가 험악한 섬들도 많아 배를 운행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아군이 진격하기도 하고 퇴각하기도 하면서 그들을 유인하니, 왜적들이 과연 총출동하여 추격하기에 한산(閑山) 앞바다로 끌어냈다.
아군이 죽 벌여서 학익진(鶴翼陣)을 쳐 기(旗)를 휘두르고 북을 치며 떠들면서 일시에 나란히 진격하여,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연속적으로 쏘아대어 먼저 적선 3척을 쳐부수니 왜적들이 사기가 꺾이어 조금 퇴각하니, 여러 장수와 군졸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발을 구르고 뛰었다. 예기(銳氣)를 이용하여 왜적들을 무찌르고 화살과 탄환을 번갈아 발사하여 적선 63척을 불살라버리니, 잔여 왜적 4백여 명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다.
(七月初六日, 舜臣與億祺會于露梁, 元均修緝破船七艘, 先來留泊。 聞賊船七十餘艘, 自永登浦, 移泊於見乃梁。 初八日, 舟師至中洋, 賊見我軍盛, 促櫓而歸, 諸軍追至, 則賊船七十餘艘, 列陣於內洋, 地勢狹窄, 且多險嶼, 難以行船。 我軍進退誘引, 賊果悉衆追之, 引出于閑山前洋。 我軍擺列爲鶴翼陣, 揮旗鼓譟, 一時齊進, 連放大小銃筒, 先破賊船三艘, 賊氣挫少却, 諸將軍吏, (勸)〔歡〕 呼踴躍。 乘銳崩之, 箭丸交發, 焚賊船六十三艘, 餘賊四百餘名, 棄船登陸而走。)
선조실록27권, 선조 25(1592)년 6월 21일 기유
원균과 이순신이 한산도·당포에서 승전한 일에 대한 기록
전사에 길이 남을 대해전 '한산도대첩'이다. 영화 '한산'이 보여주듯 바다위 성채를 만들어 왜선단을 한꺼번에 몰살시킨 대전장이었다. 거제와의 수로 견내량을 빠져 나온 와키자카의 왜선이 이 바다에서 조선 수군 화포의 매운 맛을 보았다. 그날 울린 화포와 조총소리가 엄청난 장관이었을 것이 상상이된다. 지켜보던 조선인들, 우리 조상들의 가슴이 얼마나 벅찼을지 상상이 안된다.




통영성 동피랑

강구안에서 본 동피랑




가파른 계단 길(동피랑2길)을 따라 언덕 위로 오르면 '버거싶다 몽마르다'라는 까페이름이 인상적인 ‘동피랑 벽화마을’이다. 일설에 ‘동피랑’은 6․25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이 거주하여 붙여진 지명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원래 ‘동피랑’은 통영성의 서쪽 벼랑인 ‘서피랑’과 함께 동쪽 벼랑지대를 일컫는 여기 방언이다. 즉
‘피랑’은 벼랑의 통영사투리인 ‘비렁’ 및 ‘비랑’
에서 변음된 것이다. 이곳 동피랑 먼당(산마루)에는 통영성을 지키던 장대인 동포루(東鋪樓)가 있었으며, 최근 그 유적의 발굴조사를 끝내고 복원되었다.
동피랑 벽화마을은 원래 철거 예정이었던 고지대 달동네인데 지역 환경단체와 40여 가구의 주민들이 합심하여 낡은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고 주변을 예쁘게 단장하는 등 주거환경을 개선하여 관광객이 붐비는 명소가 된 것이다.
동피랑은 예부터 많은 시인묵객이 ‘동포루’에 올라 통영 강구를 내려 보며 아름다운 풍광을 노래하였다.
'... 동피랑 가난의 벽 위엔
별에서 온 노란머리 어린왕자와
불러 주어서 비로소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꽃이 있고
하늘을 나는 날개가 있어
착한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천사가 될 수 있는 곳
사랑하고 싶은 이가 생기면
동피랑마을 그 곳에 가세요
함께 동화의 나라 거니는 추억과
꿈같은 사랑 이룰 수 있는 곳.....'
문향 ‘동피랑 그 곳에 가면.....’ 중
통영성(統營城) 걷기 ⑥ '남문(南門) 복원하여 통영성의 위용을 되살렸으면' 艅齋 金 一龍. &한산신문& 2012.12. 8. 연재













통영 가족여행 마지막날 충렬사 주차장에 차를 놓고 여황산 북포루 산길을 재촉하였다.





가파른 서문고개 달동네 끝에 담장으로 쓰이는 통영성 성곽이 보이고 그 사이로 대숲으로 이루어진 비탈진 북포루 길이다.










가파른 여항산 서쪽 능선 끝에 나타난 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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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성 북포루 동서피랑 한산도대첩지
이달 22일 뜸을 뜨는 데에 입시하였을 때 부제조 유상운(柳尙運)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경상도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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