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통영 충렬사

달이선생 2026. 8. 4. 14:01

남쪽 바다를 헤아리건대 請量南溟

천자의 은혜가 가득하니 帝恩盈盈

작은 티끌도 움직이지 않고 纖塵不動

전함이 절로 종횡하였네 戰艦自橫

누가 천위에 의지하여 孰仗天威

길이 동토를 안정되게 하였던가 永奠東土

시기에 응하여 나온 이로 膺期而出

충무공이 있었다네 曰有忠武

옛날 왜적이 돌연히 침범함에 昔者豕突

여러 군읍이 와해되자 列郡解瓦

눈물을 뿌리고 노를 쳤으니 灑涕擊楫

경은 당시의 사아였네 卿時士雅

한 번 북을 울려 적장을 쓰러뜨림에 一鼓殲酋

하례하는 술을 장차 거르려 했는데 賀酒將釃

단거가 와서 대신하니 單車來代

경은 당시의 망저군(望諸君)이었네 卿時望諸

불탄 나머지를 수습하고 상처를 싸매고 拾燼裹創

다시 회절을 어루만져 再按淮浙

성벽에 광채가 더해지니 壁壘增彩

경은 당시의 이광필이었네 卿時光弼

종거가 바뀌지 않았기에 鐘簴不改

남녀 백성들이 서로 경하하여 士女相慶

하늘이 사직을 위하여 낳았다고 하니 天生爲社

경은 당시의 이성이었네 卿時李晟

명 나라 원병과 더불어 偕我王師

왜적의 소굴을 치려고 했는데 夬擣巢穴

차마 오장원(五丈原)을 말할 것인가 忍說五丈

제갈량(諸葛亮)의 죽음이 슬프도다 嗚呼諸葛

아산(牙山)의 언덕에 維牙之阡

묘소의 추백이 푸르디 푸른데 楸柏靑靑

공적이 비석에 새겨지고 태상(太常)에 기록되니 篆首紀常

아아 무공으로 나라를 편안케 하였네 吁嗟武寧

경이 하사받은 바가 있어 卿有所受

만력 연간 명 나라 천자께서 萬曆天子

기장과 새서(璽書)를 내려 주셨으니 旗章璽票

남쪽 변방을 진압한 때문이었네 鎭伏南紀

도독은 옛적의 두터운 은총이고 都督舊渥

영의정에 추증됨은 새 영광이니 上相新榮

습령의 생각에 隰苓之思

또한 경에게 잔을 드리네 亦酹於卿

홍재전서 제23권 제문(祭文) 5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치제문. 홍재전서 제23권 제문(祭文) 5

1793(정조17)년 정조가 충무공의 충절을 기려 영의정으로 증직하고 통제사 신대현(146대)에게 명하여 통영 충렬사에 제사를 지내라고 내린 어제 치제문이다.

정조가 내린 영의정 증직 교지(1793년 정조 17, 7월). 충무공이순신기념관.

 

10여년 전에 처음 통영을 찾았을 때 충렬사를 찾지 못했다. 이번에 새벽을 달려 통영에 내려갔다. 어린 아해들과 함께 숨막히는 더위에도 불구하고 통제영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충렬사에 걸어서 갔다. 강구안 충무김밥거리에서 끼니를 때우고 올라와 통제영 주차장앞 동네까페서 가성비 좋은 음료, 그 앞집에서 꿀빵도 사먹었다. 값비싼 강구안 시장통의 번잡함을 벗어나니 호사였다.

강구안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선지 쓰레기며 담배 꽁초, 깨진 술병까지 방치되고 있어 제대로 관리가 되고 있지 않다. 수도권에서는 보기 힘든 담배를 피고 그냥 꽁초를 버리기까지하니 참 기가찬다. 손주와 놀러온 말끔한 할애비의 행동이라 뭐라하려다 말았다.

그리고 주변 주차장이 턱없이 부족한데 그마저 있는 통제영 주차장은 주차간격이 좁고 좁은 통행로에 일방이 아닌 양방통행으로 잦은 체증과 사고 위험으로 속히 개선이 필요하다. 공공화장실도 평일인데도 관리 않고 더럽고 실내지만 냉방도 안되어 관광인프라면에서는 이곳이 관광지가 맞나싶다. 충렬사 등 문화유산과 역사의 자취로 잠시나 들릴까 오래 머물고 시간을 보낼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2026.7.30.

서피랑에서 본 강구안이다. 이곳에서의 모습을 피란 온 이중섭이 그림 '선착장을 내려다 본 풍경'을 남기기도 하였다.

 

항남동의 강구안길은 옛 통제영의 기함인 천자제1호좌선(天字第一號座船)을 비롯한 통영거북선(統龜船) 등 통제영8전선(統制營八戰船)이 항시 정박하던 항구인 강구(江口) 해안의 안쪽 골목길을 칭한다. 원래 강구는 강어귀를 뜻하는데, 통영항의 육지 깊숙이 쑥 들어온 천혜의 작은 항구라 하여 ‘강구’라 속칭했다. 예전에는 매년 봄가을로 조선수군들의 군사점호와 해상훈련이 거행되었으며, 해안 병선마당(船所)의 수항루(受降樓)에서는 통제영 별무사(別武士)가 왜적 장수로 분장한 가왜장을 결박하여 무릎을 꿇리고 항복받는 의식을 거행하며 극일혼을 키운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 후 일제강점초기에 매립되기 시작하여 수산물어시장이 들어서고, 다시 부산과 여수를 잇는 남해안의 중간 거점항구로 크게 붐볐다. 당시 여객선터미널이 있던 이 해안거리를 ‘윤선머리’, ‘뱃머리’, ‘개문’, ‘부두’ 등으로 속칭했다. 이를 최근에 다시 일부 매립하여 각종 문화행사가 열리는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조성하면서부터 ‘문화마당’이라 칭하고 있다.

통영시 도로명 지명유래 강구안길

통영 강구(항)안에 정박 중인 조선의 군선(모조 : 고증을 통한 복원과는 거리가 있다.)들이다. 이곳 강구는 통영 8전선으로 대장선, 귀선 포함 8척의 대선과 여타 수송선의 정박지였다.

 

강구안 동쪽 동피랑. 피랑은 이곳말로 벼랑이고 동포루가 섰다.
동피랑(동쪽벼랑) 동포루
현지가격으로는 비싼 충무김밥 맛은 좋다.
아래 통제영(세병관)과 뒤 북포루다.
통제영과 세병관 입구

통제영의 서쪽 오르막을 지나 서문고개를 넘어서면 충렬사가 있다.

 
통영문화원
통영성 서문고개 성곽. 성곽 위로 소설가 박경리의 생가가 있고 그 위로 서포루 서피랑이 이어진다.
충렬사 동쪽 담장
충렬사 입구 홍살문.
 

충렬사

 

조선에서 ‘충렬(忠烈)’은 성리학적 근본 이념에 대표되기 때문에 충신정려의 사당은 으레 충렬사이다. 그러한 충신사당 충렬사에 만고의 충신으로 불세출의 영웅 이순신만을 모신 대표 사당이 있는데 바로 통영의 충렬사이다. 1606년 선조 임금의 명으로 충무공 휘하 장수였던 이운룡이 통제사로 부임하여서 건립하였고, 1663(현종4)년에 사액되었다. 그리고 1681(숙종7)에 통제사충무공(統制使忠武公) 충렬묘비(忠烈廟碑)를 세웠다. 아울러 고인이 된 신하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호칭인 선정(先正)으로 불러 최고의 지위로 격상하였다.

다만 충무공 이순신을 대표하는 사당하면 으레 아산 현충사를 든다. 이는 아산 현충사가 있는 곳이 이순신가 고택과 충무공이 무예를 익힌 마당, 활터, 왜군으로부터 가족을 지키다 순절한 이순신 막내 아들 이면의 묘와 여러 후손들의 묘, 특별히 이 마을이 있게 한 아산의 대부호이자 충무공의 장인인 보성군수 방진과 남양홍씨 묘(충무공가에서 제사 모심) 등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근현대에 이르러 13대 종손 이종옥이 일제강점기에 가산을 돌보지 않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마침내 아산 고택과 유택, 위토(제수 비용 마련 토지) 모두를 빚으로 경매에 넘어가는 불행을 겪게된다. 이때 정인보, 송진우, 김병로 등이 나선가. 바로 ‘이충무공유적보존회’를 창립(1931.5.23.)하여 동아일보와 대대적인 민족(충무공추모)성금운동을 벌여 성금(2만여 명 참여)을 모아 빚을 갚고 남은 금액으로 1932년 현충사를 다시 건립(6.5. 음력 5.2.)하여 낙성(6.7.)하였다.(이충무공유적보존운동) 또한 박정희 대통령이 대대적인 성역화를 하는데 이 때문에 현충사는 이순신을 대표하는 민족의 현충사, 충절의 대표 사당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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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사

충청도 아산의 충무공 이순신의 사우에 ‘현충(顯忠)’이란 호(號)를 내리다 (賜忠淸道 牙山 忠武公 李舜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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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충렬사는 남해(착량, 노량)과 함께 이순신 단독 배향 사우이고 통제영의 수장이자 조선 수군 총사령인 역대 통제사들이 제향을 주관하는 대표적인 충무공 사당이었다. 따라서 사당의 규모모 크고 아울러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1871)에서도 살아남은 ‘신미존치 47서원’의 사당이다. 다만 일반명칭으로 통영은 행정단위가 아닌 수군군영을 말하므로 행정적으로 고성현에 속해 예부터 ‘고성 충렬사’로도 불렸다. 지금은 병영인 통영이 혁파(1895)되고 이곳이 행정적으로 용남군이 설치된이래 통영군을 거쳐 충무시와 합해 통영시가 되었으므로 통영 충렬사가 되었다.

이 사당과 더불어 남해 충렬사도 ‘충렬’이 함께 사액되고 이순신 시신을 제일 먼저 모신 곳으로 가묘가 세워져 있는 유일한 이순신 사당이다. 특히 이곳에 이순신의 최초 시호인 ‘충민’을 알리는 충민공비(忠愍公碑)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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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기념관

육십오 번째, 우리 조선시대 명신으로서 시호를 가지고서 널리 행세할 수 있는 이는 세 분을 들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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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문 세도가 김병학 영세불망비.(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김공휘병학영세불망비) 오른쪽 명문 가승을 오래 이어 공경되고 家昇敬梓 오년동안 국정을 다스리며 五載調鼎 이기고 도와 조정의 그릇이네 克賛廟筽 나라를 위하는 교목이니 國衛喬木 팔도에 복이 비추네 八州照福 나라를 이끄는 깊은 샘이네 先軫海眼 감동 염지형 監董 廉之衡 색리 김지민 色吏 金志旼 숭정기원 후 사 문지 사월 일 崇貞紀元 後 四 戊辰 四 月 日 교리군민 립 校吏軍民等 立 민소공원 이상옥 民所公員 李祥沃

김병학은 안동김문이지만 김조순의 직계는 아니다. 단순 장동김문 세도가는 아니다. 특히 그는 세도정치를 끝낸 흥선대원군을 도와 고종을 왕위로 올리는데 협력하여 권력에서 밀려나지 않았으며, 흥선대원군과도 막역하였다. 더욱이 흥선대원군의 왕권강화책의 하나였던 신미년 서원철폐령을 따라 서원정리를 주도한 인물이라는 것이 특기하다. 여기 불망비는 확실한 것은 모르나 '신미존치 47서원'에 여기 충렬사가 포함될 수 있어서 유림들이 그 감사함을 표한 것은 아닌가 추정된다. 그것 말고는 충렬사와는 관계가 없고 흔하디 흔한 것은 어디 서있던 불망비를 그냥 존치를 위해 옮겨온 것밖에는 안되지만 확실한 것은 모른다. 다만 1870(고종7)년 삼정과 지방관 인사고과의 문제 등을 통영에서 이루어지도록 정리한 사실이 있는데 이 공덕을 칭송한 것일 수도 있다. 세금과 인사가 다른 관아를 통하는 것은 상당한 불리한 조처이니 이를 그대로 통영에서 계속하게 하는 것은 통영관민에게는 대단한 시혜이기 때문이다.

김병학이 아뢰기를,

 

"고성(固城)을 부(府)로 승격시킨 다음에 삼정(三政)은 통영(統營)에서 살펴 순영(巡營)에 공문을 보내어 마감하는 일을 지난번 연석에서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그 문부(文簿)를 구별할 때에 허다한 일에서 구애되는 단서가 있을 것이니 이는 그 사세가 필연적인 것입니다. 일체 사도(四都)의 규례대로 시행하되, 모두 통영에 획부(劃付)하여 구관(句管)하게 하고, 전최(殿最)도 통영에서 마감하도록 하는 것을 분명하게 영원한 정식으로 삼으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 炳學曰: "固城陞府後, 三政自統營照檢, 文移巡營, 以爲磨勘事, 向有所筵奏。 而第其文簿區別之際, 許多擧行, 不無窒礙之端, 此其事勢之所必然矣。 一依四都例施行, 竝劃付統營, 俾爲句管。 至於殿最, 亦自統營磨勘之意, 請著爲永式。" 允之。)

고종실록7권, 고종 7년(1870) 윤10월 10일 임신 조선 개국(開國) 479년

크기 높이 220.0cm, 너비 100.0cm, 두께 46.0cm . 소재지 경상남도 통영시 명정동 213 출토지 경상남도 통영시 명정동 213. 서체 해서(楷書) . 찬자/각자/서자 이항복(李恒福) / 미상 / 본문 : 송시열(宋時烈), 제액 : 김수항(金壽恒)

충무(忠武)의 충렬사(忠烈祠, 사적)는 선조(宣祖) 39년(1606)에 충무공(忠武公)의 막장(幕將)이었던 이운용(李雲龍)이 통제사(統制使)가 되었을 때 왕명에 의해 창건하였다. 그 후 숙종(肅宗) 7년(1681년)에 통제사충무공(統制使忠武公)의 충렬묘비(忠烈廟碑)가 세워졌다. 비문에 의하면, 이 비는 이미 67년 전에 좌의정 이항복이 비문을 지어 세웠던 여수좌수영 대첩비의 원문을 그대로 옮겨와, 잊혀져 가는 이충무공의 충절을 기리고 이를 후세에 전하고자 제60대 통제사 민섬(閔暹)이 건립했다고 한다. 비의 머리 부분의 전액(篆額)이 ‘통제사충무이공충렬묘비명(統制使忠武李公忠烈廟碑銘)’이라고 되어 있음으로 보아 원래 충렬사의 이충무공의 사당에 모셔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비의 전액은 김수항(金壽恒)이 쓰고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썼다. 현재는 충렬사 외삼문 곁 비각에 다른 비들과 함께 보존되고 있다.

국가유산 지식이음

통제사충무공(統制使忠武公) 충렬묘비(忠烈廟碑) 1681(숙종7)에 세웠다.

통제사(統制使) 충무(忠武) 이공(李公) 충렬묘비명(忠烈廟碑銘) <篆題>

통제사(統制使) 충무(忠武) 이공(李公) 충렬묘비명(忠烈廟碑銘) 병서(幷序)

추충분의평난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호성공신(推忠奮義平難忠勤貞亮竭誠效節協策扈聖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 겸영경연사(兼領經筵事) 감춘추관사(監春秋舘事) 세자부(世子傅)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 지음.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겸 영경연사(兼 領經筵事) 송시열(宋時烈) 씀.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 겸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兼領經筵·弘文舘·藝文館·春秋舘·觀象監事) 김수항(金壽恒)이 전액(篆額)을 씀.

지난 임진(壬辰)년에 남쪽 오랑캐들이 스스로 헤아리지 않고 뱃머리를 연하여 바다를 건너와서 경상도를 거쳐 호남지방으로 향하였다. 이때에 그들을 방비한 곳이 한산도(閑山島)이고, 그들과 경계를 지은 곳이 노량(露梁)이고, 그들을 가로 막은 곳이 명량(鳴梁)이었다. 만약 한산도를 잃어버렸다면 노량을 지킬 수 없었을 것이고, 곧바로 명향으로 짓쳐들어와 기내(畿內)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을 것이다. 능히 능력을 발휘하여 이 세 곳을 막아낸 것은 바로 원후(元侯)와 같은 통제사(統制使) 이(李)공이시다. 하늘같은 임금께서 심부름을 시키시려 나에게 명령하여 군대를 시찰하게 하였다. 떠나려 할 대에 명하여 말씀하시기를 “돌아가신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은 왕실을 보위하고 우리 남쪽 울타리를 막아 지켜내었으되 그에 걸맞는 큰 녹봉을 받지 못하고 죽으니 내가 오로지 근심하고 애석해하는 바이다. 묘우(廟宇)를 세우지 못한다면 어찌 후대에 그 충성심을 본받게 할 수 있겠는가? 너는 가서 그것을 잘 살피도록 하여라.”고 하셨다. 신이 명을 받들고 물러나와 두루 제사에 관한 법전들을 살펴보니, 죽음으로써 왕을 섬긴 자는 제사지내고, 능히 큰 환란을 막은 이도 제사지낸다고 하였으니, 바로 여기에 들어맞지 않는가! 옛 고을에 기록이 남아 있음에 돌이켜 생각해보니 전란의 초기에 공의 직무는 호남(湖南)을 지키는 것으로 그 지키는 범위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나라에 해가 됨을 심히 부끄러워하고 이웃 고을에 미친 재앙을 마치 자신에게 미친 것처럼 걱정하여, 남해를 넘어 도적들의 소굴로 쳐들어갔다. 옥포(玉浦)전투·노량(露梁)전투·당포(唐浦)전투·율포(栗浦)전투·한산(閑山)전투와 안골(安骨)전투에서 적선(賊船) 220여 척을 불태우고 적군 590여 명을 목 베었는데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에 넣지 않았다. 적들은 죽을 지경이 되어 감히 공의 요새 근처에도 가까이 오지 못하니, 이에 한산도에 진을 쳐서 적의 요충지를 가로 막았다. 정유(丁酉; 1597)년에 이르러 충성스런 신하를 바꾸니 한산도가 패몰(敗沒)하였다. 이때에 수군의 패장(敗將)과 달아난 군졸들 및 남쪽 지방의 백성들이 모두 탄식하며 한결같이 말하기를 “만약 이통제사가 있었더라면 어찌 적들로 하여금 호남 땅을 한 발자국이라도 엿보게 하였겠는가?”하니, 조정에서 급히 공을 찾아 이전의 관직을 다시 제수하였던 것이다. 공이 단기(單騎)로 군사들을 거두고 소집하여, 나아가 명량(鳴梁)에 진을 쳤다. 갑자기 야습(夜襲)을 당하여 적은 군사로 목숨을 내 놓고 싸워 새로 모은 13척의 배로 바다를 가득 덮은 수만의 적과 싸워 30여 척을 깨뜨리고 용감히 앞으로 나아가니 적이 드디어 물러나 도망갔다. 무술(戊戌; 1598)년에 명나라에서 크게 군사를 보내어 구원할 때에 명나라 수군제독(水軍提督) 진린(陣璘)이 공과 함께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는데, 공을 특별히 존중하여 반드시 이야(李爺)라고 부를 뿐 그 이름은 부르지 않았다. 그 해 겨울에 적군이 세력을 합하여 크게 공격하여 와서 노량(露梁)에 이르렀다. 공이 스스로 날랜 군사를 이끌고 먼저 나아가 그 선봉과 맞닥뜨렸는데, 명나라 군대가 와서 함께 앞뒤에서 공격하게 되었다. 이날 닭이 울 무렵에 물의 신이 길을 안내하고 바람의 신이 그 위세를 부드럽게 하니, 사방이 모두 날아오르는 듯하니 진성(軫星)이 새벽에 정남쪽에 있을 때였다. 두 나라의 군대가 나란히 진군하니 천개의 돛이 바람에 춤을 추는데, 공이 먼저 뛰어들어 날카롭게 쳐들어가니 적이 무너졌다. 적은 마치 개미처럼 흩어져 오직 목숨을 구하기에 겨를이 없었고, 북소리 아직 쇠하지 않았는데 장군의 별은 그 광채를 잃었구나. 공이 새벽녘에 총탄에 맞아 쓰러졌으나, 오히려 여러 사람들에게 죽음을 알리지 말라며 “우리 군사들이 기운이 꺾일까 두렵다.”고 하였다. 제독이 이 소식을 듣고 배에 몸을 던지기를 세 차례나 하며 말하기를 “가히 더불어 할 만한 이를 잃었구나.”고 하였다. 명나라 군사들도 또한 고기를 물리치고 먹지 않았으며, 남쪽의 백성들은 뛰어다니면서도 길에서 울고 글을 지어 제사지내며, 늙은이와 어린이가 길을 막고 통곡하는 것은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였다. 아아, 공과 같은 이는 가히 죽음으로써 임무를 다하여 커다란 환란을 막아내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마땅히 그 공훈(功勳)은 으뜸이 되고, 작위(爵位)는 재상의 우두머리가 되며, 모토(茅土)를 나누어주고, 그 초상화를 인합(麟閤)에 그리며, 식읍(食邑)의 보상은 한없이 주어야 할 것이다. 또 길이 영웅들로 하여금 눈물을 짓게하니 장부로 세상에 태어나 천고에 부족함이 없다고 할 만하다. 하물며 나는 왕명을 받들어 남쪽의 일을 맡았으니 어찌 좋은 계획을 마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때에 통제사(統制使) 이시언(李時言)이 이 말을 듣고는 감격하여 실제로 모든 일을 주관하였는데, 모든 군중의 장교(將校)와 병사들로 공의 덕을 본 사람들이 왕의 은혜에 감격하여 춤을 추며 좋아하고, 공의 죽음을 비분강개(悲憤慷慨)히 여겼다. 일천 무리의 사람들이 참새가 날뛰듯이 몰려와 만개의 도끼가 번개처럼 번뜩이니, 불과 열흘도 지나지 않아 사당(祠堂)의 공사가 끝나게 되었다. 그로부터 15년 뒤인 갑인(甲寅)년에 해서절도사(海西節度使) 유형(柳珩)이 급히 글을 올려 말하기를 노량(露梁)에서 있었던 일을 돌에 새겨 영원히 전하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공의 덕(德)은 남쪽 백성들에게 있으니 그들의 입이 비석(碑石)이 되어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요, 공의 공(功)은 사직에 있으니 역사를 기록하는 태사(太史)가 대쪽에 기록하여 전할 것이니 어찌 비를 세울 필요가 있겠는가? 다만 집에 있을 때에 홀로된 조카를 마치 친자식처럼 보살펴 주었으니, 이것은 집안에서의 순박한 행동이라 할 것이다. 군에 있는 수년 동안 크게 소금을 굽고 고기잡이를 하며 둔전(屯田)을 넓혀서 군대에 물자가 모자라지 않게 하였으며, 전투에서 상으로 받은 것은 모두 남김없이 아랫사람에게 나누어주니 이것은 바깥에서의 행실이 갖추어진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온화하고 대범한 덕과, 과단성있게 판단하는 재주와, 상과 형벌을 공평하게 집행하는 용기는 보통 사람이라면 족히 백세(百世)의 모범이 될 만한 것이겠지만, 공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하찮은 일일 것이니 생략해도 좋을 것이다. 명(銘)에 이르기를 지난 임진(壬辰)년에 미친 도적들이 역심을 품고 이웃 나라를 침범해 왔다네. 여러 고을들이 궤멸되고 수많은 적들은 마치 무인지경을 밟듯이 하네. 이때에 오직 이공만이 그 기세를 더욱 떨쳐 바닷가를 지키셨네. 천자가 무위(武威)를 떨쳐 많은 군대를 보내고 진린(陣璘)을 장군에 임명하셨네. 번개가 깃발을 흔들고 바다의 신은 시각을 맡아 도우니 적들이 곤궁하여 벙어리 신세가 되었네. 좁은 항구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그 벼랑 끝에서 큰 싸움을 벌리니 화살은 뱀에게 집중되네. 죽은 뱀이 꼬리를 흔들어 공의 몸에 독을 뿌리는데 신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였네. 노량(露梁)은 어슴푸레 흐릿하고 물은 오직 깊은데 여기에 비석을 세우노라. 후세에도 없어지지 않고 공의 이름 우뚝하여 영원토록 으뜸가는 제사를 받으소서. 만력(萬曆) 43년(광해군 7, 1615년) 5월 <추기(追記)> 선조대왕이 위로 황제의 위엄에 기대고 아래로 공의(公義)에 의지하여, 그 중흥(中興)한 위대한 업적을 고금(古今)에 떨치고 빛나게 하니, (공에 비한다면) 진(晉) 나라 원제(元帝)와 송(宋) 나라 고종(高宗)도 칭송받기에 부족할 것이다. 공이 죽으매 임금이 문충(文忠) 이공(李公; =이항복)에게 명하여 묘우(廟宇)를 건립하게 하니, 이공이 만력(萬曆) 갑인(甲寅; 1614)년에 비문을 지었는데, 지금 통제사 민섬(閔暹)이 비로소 돌에 글을 새기고 이수(螭首)와 귀부(龜趺)를 갖추었다. 지난 갑인(甲寅)년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67년 만이다. 그 사이에 통제사가 몇 번이나 바뀌고 이제서야 그 일을 마치니, 그 늦고 빠름은 운수가 있는 것이지만, 아마도 민후(閔候: 민섬)가 절의(節義)를 사모하는 것이 무궁하지 않았다면 어찌 능히 이에 이를 것인가? 특별히 높여 칭찬할 만한 일이다. 생각컨대 진(晉) 나라의 원제(元帝)와 송(宋)나라의 고종(高宗)은 저 조예주(祖豫州; 진나라 명장 조적)와 악무목(岳武穆; 송나라 명장 岳飛)을 쓰지 못하여 마침내 천고의 한이 되었지만, 우리의 성조(聖祖) 선조대왕께서는 능히 공(公)을 써서 마침내 공으로 하여금 탁월한 공로를 세우게 하였으니, 공도 불우(不遇)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문충공(文忠公)이 없었더라면 누가 능히 이렇게 찬양하고 드러낼 수 있었겠는가? 민후(閔侯) 역시 크게 베풀었다 할 만하다. 숭정(崇禎) 신유(辛酉; 1681) 입추일(立秋日)에 송시열(宋時烈) 적음.

(龍南 南海 李舜臣忠烈廟碑 統制使忠武李公忠烈廟碑銘(篆 題)

統制使忠武李公忠烈庿碑銘幷 序

推忠奮義平難忠勤貞亮竭誠效節協策扈 聖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 經筵事監春秋舘事 世子傅鼇城府院君李恒福撰 大匡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事兼領 經筵事宋時烈書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舘藝文館春秋舘觀象監事金壽恒篆

在昔壬辰南寇匪茹連艫泛海由▨而湖者其蔽曰閑山其界曰露梁其阸曰鳴梁若失閑山露梁不守」 直蹙鳴梁畿輔搖心矣疇克有庸式遏三險越乃元侯統制李公日 君乏使 命余視師臨發有 敎」 曰故統制使李舜臣其勤王家捍衞我南藩無祿大命隕墜予惟寵嘉之庿宇不立無以勸忠汝往欽哉」 臣受 命而退稽諸祀典以死勤事則祀之能捍大患則祀之茲惟貞哉載在故府追惟亂初公職在湖」 南官守有限以國害爲深羞鄰灾爲己憂踰南海蹈寇地玉浦之戰露梁之戰唐浦之戰栗浦之戰閑山」 之戰安骨之戰焚燒賊舡二百二十餘艘斬首五百九十餘級溺水死者又不記其數賊死咋不敢近公」 寨下因陣閑山以遏賊衝至于丙申代斵血指閑山敗沒於是舟師敗將犇卒及南土之民擧咨嗟一口」 齊聲曰李統制若在豈使此賊窺湖南一步地朝廷急而求公再莅前職公單騎召收進陣鳴梁猝遇夜」 襲用少致死以十三新集之艦當大萬蔽海之寇破舡三十賈勇以前賊遂退遁戊戌 天朝大發兵來」 援水軍提督陣璘與公合陣奇公之爲必稱李爺而不名其年冬賊合勢大來進至露梁公自領銳師先」 甞其鋒 天兵夾進與公掎角是日雞鳴馮夷啓道蜚廉戢威四維褰擧軫乃曉中兩軍齊作千帆飛舞」 公先躍入乘銳崩之賊乃蟻潰救死不暇皷音未衰將星沈彩公於黎明中丸而 顚猶戒衆諱言死曰▨我師熸也提督聞之以身投於舡者三曰無可與有爲矣 天兵亦却肉不食南民奔走巷哭操文以祭」 之老幼遮道而哭者所在如一嗚呼若公者可謂以死勤事能捍大患者非耶宜其勳爲元臣爵爲上相」 錫之茅土形圖麟閣食報無窮又使英雄永&A5820;危淚丈夫生世良足千古況余受 命職當南事敢不良」 圖時李統制時言聞言感激實主張是凡軍中將校卒伍飮公之德者蹈舞 上恩慷慨公死千羣雀躍」 萬斧電翻不十日而工「吿訖功後十五季甲寅海西柳節度珩走書來顧以露梁之事載烈垂永余曰公」之德在南民者口碑不朽公之功在 社稷者太史有錄何事於碑唯其處家愛恤孤姪恩若己出內行」 之淳也在軍數年大開魚鹽廣設屯田軍無乏絶所得戰賞施下無餘外行之備也至於和易之德果辦」 之才刑賞必當之勇作人如斯足爲百世聞人而在公則爲踈節也可畧也己銘曰在壬辰歲狂寇不臣虐始於鄰 列郡瓦裂迎敵津津若蹈無人 時維李公其氣益振抗拊海▨」 皇耆其武出師甡甡命虎臣璘 列缺掉幟玄冥司辰賊窘而嚚 師于阸港大戰其垠矢集脩鱗 斃」 狺掉尾毒于公身不佑于神 露梁殷殷維水淵淪樹此貞珉 後天不墜公名嶙峋維永宗禋

(追記) 宣祖大王上憑 皇威下仗公義其中興偉績振耀今古晋元宋高不足稱也公沒 上命文忠李公建立庿宇李公仍作牲」 繫文文成在萬曆甲寅今統使閔侯暹始刻文於石螭首龜趺具矣夫自甲寅至今甲子一周而又七年矣其間更幾統▨」 而乃今卒其事雖其遲速有數而倘非侯慕義無窮烏能及此殊可尙也竊惟晋元宋高不能用祖豫州岳武穆遂爲千古」 恨我 聖祖能用公卒使卓然有成公於是抑不可謂不遇矣然若不有文忠公其孰能對揚揮發如此哉閔侯亦可謂」張其軍矣 峕崇禎重光作噩立秋日宋時烈識)

국가유산 지식이음. 통영충렬묘비(이우태)

이항복이 지은 대표적 충렬묘비 외 수많은 비가 비림을 이루지만 하늘이 낸 영웅에 기대 자취에 지나지 않다. 충무공 사후 그 가계에서 현달한 이는 없었다. 조상의 후광으로 조정의 융숭함은 이어졌으나 말이다.

근기에 살면서도 이렇게 잘 갖춰진 사우가 거의 못보는데 옛 모양으로 격조있게 세워진 충무공 사당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올해 처음으로 아산 현충사를 찾아서 녹기와를 올려 장대한 모습을 대하였지만 별 감흥이 없었다. 그러나 넢은 계 위 삼문을 지나 경사지에 기단과 기단으로 나뉜 공간에서 저마다 낡았으나 검박한 목조 건축들과 꾸밈에서 드러나는 고졸미, 특히 충렬사 중심 정당은 사당이라는 강요된 엄숙함이 아니라 고즈넉함이 주는 고요함이 마치 산사에서 받는 느낌이다.

얼마전 대전 창주 김익희 선생묘를 찾았을 때 느꼈던 감흥을 여기 통영에서 다시 느낀다. 눈이 개이고 가슴 동한 곳, 충렬사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사배를 하였다.

또다른 이순신 영정(통영시립박물관)으로 정인보 등 아산 현충사 건립 후 봉안 한 영정(위)과 이곳을 방문했던 엘리자베스 비숍이 그린 영정 모본(아래)이다.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치제문(致祭文)을 친히 지은 뒤 통제사(統制使) 이득제(李得濟)에게 명하여 통영(統營)의 충렬사(忠烈祠)에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壬午/親製忠武公 李舜臣致祭文, 命統制使李得濟, 致祭于統營 忠烈祠。)

정조실록43권, 정조 19(1795)년 12월 5일 임오

정조실록43권,충무공 이순신의 치제문을 친히 짓고, 통영의 충렬사에 제사를 올리게 하다

이는 정조가 이순신의 사적을 모아 규장각 검거관 유득공( 『발해고(渤海考)』를 쓴 학자)을 책임자로 하여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펴내고 1질을 통영 충렬사에 봉안하게 하면서 어제 치제문을 내려 통제사 이득제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한 것이다. 이렇듯 충렬사를 참배하며 연신 감탄하며 선조 이후 군왕, 특히 정조가 충무공에게 갖는 경외와 추숭을 얘기하니

“죽고나서 융숭함이야 살았을 적에 잘했어야지”

라고 안해가 말한다.

“맞다“

그러나 돌아간 다음에라도 그 공을 알고 기릴 수만 있어도 족하다. 세상사 그렇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니 말이다.

어제사제문(御祭賜祭文). 1795년 정조 19년(乙卯)12월에 정조대왕이 내리신 제문(祭文)을 경상도관찰사 이태영(李泰永)이 해서로 쓴 것을 목판에 오목 새김 한 것이다. 가로1m10cm, 세로45cm의 나무판에 너비5cm의 테를 두르고 연화당초문을(蓮花唐草紋) 그려 단청을 하였다. (충렬사 유물전시관)

 

만력(萬曆) 기원인 계유년(1573, 선조6) 후 222년 11월 정축일에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를 인쇄하여 반포하고 한 본을 통영(統營)의 충렬사(忠烈祠)에 보관하였다. 12월 임인일에 통제사 이득제(李得濟)에게 명하여 현황제(顯皇帝)가 하사한 도독구첩전(都督九疊篆), 동관방(銅關防) 및 영패(令牌), 귀도(鬼刀), 참도(斬刀), 독전기(督戰旗), 홍령기(紅令旗), 남령기(藍令旗), 곡나팔(曲喇叭)을 진설하고, 또 정독(旌纛), 총통(銃筒), 가고(笳鼓) 등속을 사당의 내외에 진설하고 각기 토양에 맞는 음식과 한 말의 술과 한 마리 돼지를 위패 앞의 갑옷에 드려서 유명(有明) 수군도독 조선국 증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 공신(效忠杖義迪毅協力宣武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덕풍부원군 행 정헌대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제사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에게 제사드리고 고하게 하노라.

경을 알고자 한다면 / 欲聞卿者

이 전서를 볼지니 / 視此全書

혁혁하고 빛나는 글이 / 奕奕焜焜

열네 편 남짓하다네 / 十四篇餘

전쟁의 공적을 이루고 / 戰爭之績

합변의 형세를 알았으며 / 合變之勢

거북선을 만들었으니 / 伏龜之舫

기러기 소리 들리는 물가였네 / 聽鴈之澨

도독 진린(陳璘) 총병 등자룡(鄧子龍)과 합세하여 / 曰陳曰鄧

호남과 영남을 연결하여 지켰으니 / 湖嶺連營

바다에 서약하고 산에 맹세하니 / 誓海盟山

초목도 이름을 알았었네 / 草木知名

책으로 어찌 공의 경중을 논하랴만 / 書豈輕重

책을 보면 곧 드러나기에 / 賴書乃顯

내탕고(內帑庫)의 재물을 덜어 인쇄에 부치니 / 捐帑付劂

비로소 광전을 닦은 것이라네 / 肇修曠典

이 책을 보관하는 곳이 / 于以藏之

바로 충렬사(忠烈祠)이니 / 忠烈之祠

이에 통제사에게 명하여 / 爰命統帥

경건히 잔을 드리게 하노라 / 虔奠泂巵

(萬曆癸酉紀元後二百二十二年十一月丁丑 忠武全書印頒 以一本藏于統營忠烈祠 時維十二月壬寅 命統制使李得濟 陳顯皇帝欽賜都督九疊篆 銅關防及令牌 鬼刀 斬刀 督戰旗 紅令藍令旗 曲喇叭 次陳旌纛銃筒笳鼓之屬於祠之內外 各隨地宜 斗酒彘牲 入奠於版前鎧甲 以侑於有明水軍都督朝鮮國贈効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德豐府院君 行正憲大夫全羅左道水軍節度使兼三道統制使 忠武公李舜臣 若曰

欲聞卿者 視此全書 奕奕焜焜 十四篇餘 戰爭之績 合變之勢 伏龜之舫 聽鴈之澨 曰陳曰鄧 湖嶺連營

誓海盟山 草木知名 書豈輕重 賴書乃顯 捐帑付劂 肇修曠典 于以藏之 忠烈之祠 爰命統帥 虔奠泂巵)

통영(統營) 충렬사(忠烈祠) 치제문, 홍재전서(弘齋全書) 제23권 제문(祭文) 5

 

이충무전서(李忠武全書) 14권 간본 [을묘년(1795, 정조19) 편찬]

 

국가에 충성한 공을 높이 숭상하고 보답하며 무공(武功)을 세운 이를 드러내어 표창하는 것은 옛 선왕들이 세상을 격려하고 다스리는 도구이며 내가 언제나 힘쓰는 일이다.

내가 왕위에 오른 이후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일을 찾아내고 드러내어 빛내어 포상하고 총애하는 증직(贈職)을 내린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렇지만 큰 공이나 충절을 사람들이 모두 환히 알고 있어서 그러한 이름을 얻어서 부끄럽지 않고 그러한 포상을 시행하여도 과장된 말이 아닌 이를 논한다면 바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과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이 가장 드러난 이들일 것이다. 나는 충민에 대하여 이미 묘비의 명(銘)을 짓고 다시 그의 유문(遺文)과 유사(遺事)를 모아 인쇄하여 온 나라에 반포하였다.

임자년(1792, 정조16) 가을에 대보단(大報壇)에 참배하여 우리나라를 다시 세우도록 도와준 중국 황제의 은혜를 생각하고 이어 우리나라의 충신까지 기리어, 중국 조정으로부터 도독(都督) 인장을 받은 충무공의 후손에게 벼슬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계축년(1793, 정조17)에는 의정부 영의정을 증직하고, 갑인년(1794, 정조18)에는 또 무령왕(武寧王) 서달(徐達)의 비 머리에 전서로 새긴 전례를 본떠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돌을 새겨 묘도(墓道)에 세웠는데 머리에 ‘상충정무지비(尙忠旌武之碑)’라고 전서로 새기고 명(銘)과 서문(序文) 1189자를 친히 크고 깊게 새겨 왕후(王侯)의 명(銘)에 대신하였다.

그리고 내각에 하교하기를 “충민은 이미 실기(實記)를 인쇄하여 반포하였거니와 충무만은 아직 없다. 충무와 같은 공과 명성이 있는데도 그의 평소 저술과 다른 이들이 그에 대해 기록한 글들을 모은 책이 아직껏 없으니 어찌 아쉬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고 마침내 각신(閣臣) 윤행임(尹行恁)에게 명하여 공사 간의 기록을 널리 모아 충무전서(忠武全書)로 꾸미고 첫머리에 전교(傳敎), 하유(下諭), 사제문(賜祭文), 도설(圖說), 세보(世譜), 연표(年表)를 싣고 그다음에 시문(詩文), 그다음에 장계(狀啓), 그다음에 난중일기(亂中日記)를 싣고 다시 비장(碑狀), 사기(祠記) 및 후인들의 기술(紀述) 등을 부록으로 6권을 만들어 뒤에 붙여서 을묘년(1795, 정조19)에 비로소 완성하였다. 이어 내탕전(內帑錢)을 비용으로 대어 정유자(丁酉字)로 인쇄하여 혼령을 모신 여러 곳에 소장하게 하고 친히 제문을 지어 통영(統營)의 충렬사(忠烈祠)에 치제(致祭)하고, 통수(統帥)에게 명하여 명 나라 조정에서 내린 전서로 새긴 도독(都督) 구첩(九疊) 동인(銅印)과 관방령패(關防令牌), 귀도(鬼刀), 참도(斬刀), 독전기(督戰旗), 홍령기(紅令旗), 남령기(藍令旗), 곡나팔(曲喇叭) 등을 진열하고 큰 술잔에 술 올려 일을 마치도록 하유하였다.

(李忠武全書十四卷 刊本

尙忠敉功。旌武彰烈。昔先王所以勵世磨礱之具。而予之夙宵孶孶者也。自夫御極以來。表微而剔幽。光褒而寵贈者。蓋亦指不勝僂。而若論勳業忠節之照耀人耳目。得之無愧色。施之無溢辭。則忠武公李舜臣,忠愍公林慶業。其最著者也。予於忠愍。旣銘麗牲之石。復輯其遺文遺事。印頒中外。壬子秋。將拜大報壇。永惟再造之皇恩。推及我朝之 忠臣。以忠武之曾受皇朝都督印。命其後裔參班。癸丑。加贈議政府領議政。甲寅。又倣武寧王徐達碑篆首之例。命有司斲石峙于墓道。篆其首曰尙忠旌武之碑。親綴銘幷序一千一百八十九言。大書深刻。以代旂常之銘。旣而敎內閣曰。忠愍旣有實紀之印行。而忠武獨闕焉。夫以忠武之勳烈聲名。而其平日咳唾之餘。諸家紀述之作。尙無一部會通之輯。豈非缺典欠事乎。遂命閣臣尹行恁博采公私記籍。裒爲忠武全書。首揭敎諭賜祭文圖說世譜年表。次詩文。次狀啓。次亂中日記。復以碑 狀祠記及後人紀述之篇章。爲附錄六卷。系之於下。至乙卯書始成。乃捐內帑錢。用丁酉字摹印。分藏于妥靈諸所。親綴文致酹于統營忠烈祠。命統帥陳皇朝欽賜都督九疊篆銅,關防令牌,鬼刀,斬刀,督戰旗,紅令藍令旗,曲喇叭。酌以大斗。鎧甲而致侑。諭之以成事也。)

홍재전서 제184권. 군서표기(羣書標記) 6 명찬(命撰) 2

충렬사 홍살문 앞에는 충무공시향에 쓰던 명정 우물이 있고 그래서 명정골이다. 명정골에 백석의 마음을 훔친 난(박경련) 아가씨가 살았고 그 란을 찾았다 허탕친 백석이 충렬사 돌계단에 앉아 ‘통영2‘란 시를 남긴다.

舊馬山의 선창에선 조아하는 사람이 울며 날이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갓 갓기도 하다

 

바람 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북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조코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조코

 

새벽녁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ㅅ것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십흔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 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사 령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漁場主한테 시집을 가고 십허 한다는 곳

 

山 넘어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錦이라든 이 갓고

내가 들은 馬山 客主집의 어린 딸은 蘭이라는 이 갓고

 

蘭(난)이라는 이는 明井(명정)골에 산다든데

明井골은 山을 넘어 柊栢나무 푸르른 甘露 가튼 물이 솟는 明井 샘이 잇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깃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조아하는 그이가 잇슬 것만 갓고

내가 조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 붉게 柊栢꼿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가튼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언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女人은 平安道서 오신 듯한데 冬柏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

 

녯 장수 모신 날근 사당의 돌층게에 주저안저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閑山島 바다에 뱃사공이 되여 가며

녕 나즌 집 담 나즌 집 마당만 노픈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찟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백석, 시 '통영(統營)'

충렬사 앞 계단 아래 홍살문 왼쪽 도로 건너 맞은편으로 작은 공원을 꾸렸고 이곳에 시비를 세웠다.

시인 백석, 서피랑 주민 소설가 박경리, 피난민 화가 이중섭, 시인 유치환, 김춘수의 고향, 여기가 통영이다. 김해일이 부른 ‘돌아와요 충무항에‘ 가왕 조용필의 히트곡에 원곡이다.

통영 충렬사 홍살문

 

 

충렬사 경남 통영시 여황로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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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

남쪽 바다를 헤아리건대 請量南溟 천자의 은혜가 가득하니 帝恩盈盈 작은 티끌도 움직이지 않고 纖塵不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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