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근현대 농업의 산실 수원(권업모범장, 농촌진흥청) 1

달이선생 2019. 3. 3. 10:30

근현대 농업의 산실 수원

2019. 3. 3, 3. 9(2일 3차례 답사)

 

  전근대 수원은 화성시, 오산시까지 아우르는 큰 고을이었다. 수원(水原)이라는 한자 명을 보더라도 물이 풍부한 것을 알 수 있는데, 현재 수원시와 화성시 등에는 많은 저수지들이 즐비하다. 삼한시대 모수국(牟水國) '벌물'의 뜻으로 '수원'의 뜻인 '물벌'과 같다.  '모수'도 물을 뜻하고 고구려의 '매홀(買忽)'도 물을 뜻하는 것처럼 고려 때  '수성(水城)', '수주(水州)'에서 현재의 수원으로 변천한 명실공히 물의 도시가 수원이다.

  이런 수원이 근현대 농업에서 중요한 변화를 맞는다. 조선후기 정조가 화성행행을 하며, 화산에 아버지 묘를 천봉하고, 이어 행궁과 화성을 연이어 축조하고 수원이 명실공히 대도회지로 자족적인 신도시가 되도록 당시 농업의 근간이 되는 저수지를 축조하여 농업을 장려하였다.

  특히 화성 서쪽에 서호인 '축만제(祝萬堤)'를 축조(1799))하고 너른 농경지인 서둔을 경영하였다. 그래서 현재도 이곳은 서둔동이다. 서쪽의 둔전이란 뜻의 서둔은 병농일치의 전근대 사회에서 국가가 영농을 장려하는 한편, 직영으로 운영한 국가의 농장이다. 축만제임을 보여주는  표석이 서호 동쪽에 위치하고  화성팔경 중 서호낙조로 유명한 항미정이 복원되어 위치한다.

  이러한 역사성에 따라 서둔이 위치한 이곳을 일제가 주목한다. 통감부는 1906년 권업모범장을 수원에 세운다. 이후 권업모범장은 농업시험장(1929)으로 바뀐다. 일제가 수원을 주목한 사실을 다음을 통해 알 수 있다.   

 

1910년 조선에 이주하여 수원에 정착한 일본 니가타현 태생의 사카이 마사노스케(酒井政之助)는  

“수원은 땅과 기후가 순화한데다 지질까지 매우 좋고, 조선 특유의 큰 강의 범람과 재해도 없으며, 발길 닿는 데마다 작은 하천이 있어서 관개가 편하고, 오곡이 풍성한 반도 중앙부의 대보고(大寶庫)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 같은 하늘이 내려준 이로움을 가진 농민은 권업모범장 설치로 인해 얻은 새로운 지식을 응용하게 되면서 농사가 놀랄 만큼 발달한 것은 모름지기 전도(全道)에서 으뜸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척식박람회, 기타의 유수한 공진회 품평회 등에서 수상자의 과반수를 수원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수원시사』5, 「수원의 토지 소유구조와 농업경영」, 300쪽.

 

  이처럼 수원의 자연조건은 농업경영에 아주 유리한 곳이었다.

  농업시험장은 해방 후 미군정청 중앙농사시험장(1946), 1947년 농사개량원, 1949년 농업기술원, 1957년 농사원으로 변하여 마침내 1962년 농사원, 농림부 지역사회국, 농림부 훈련원을 통합하여 농촌진흥청으로 발족하였다. 지금의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250번지로 현재는 농업과학원과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농생명로 300으로 이전하였다. 수도권 집중을 막고 지방의 균형발전을 도모한 정책이지만 많은 부분 아쉬움이 남는다. 현재 권업모범장이 위치하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자료는 옛 농촌진흥청(현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 중부작물부)의 정문 옆 오솔길에 농촌진흥청이 1990년대 공사를 하면서 '권업모범장' 표석 3기가 발굴된 것을 보존 전시하고 있다. 그리고 농촌진흥청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자료는 인근 탑동과 구운동의 경계로인 수인로의 삼거리가 '농진청삼거리'라는 지명이 남아 푯말로 서있다. 과거의 농촌진흥청에 이르는 입구는 그 아래래(수인로 수원역 방향) 농어촌공사 입구와 그 바로 아래 정문이 서호천 일대에 펼쳐진 농촌진흥청 시설에 이를 수 있다. 그리고 정문의 수인로 좌우로 과거 농촌진흥청의 산하기관들이 즐비하였는데, 현재는 대다수 기관들이 전라도 나주로 이전하면서 곳곳이 폐허로 남아있다. 이중 일부는 진흥청과 농어촌공사에서 사용하고 수원시 역사 더함파크라고 해서 수원시 산하기관들이 입주하고 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지방균형발전이란 명분으로 수원에 집중되어 있던 수 많은 농업관계 기관들을 일괄 옮기게 되어 이들 중요한 공간이 공동화가 되었다. 폐허처럼 남은 것도 문제지만 이 훌륭한 시설이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개탄스럽다. 더욱이 이들 기관이 있으면서 수 많은 추억과 기록은 한국농업사의 소중한 역사인데, 이 모든 것이 한순간에 없어지고 사라지고 있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다. 누구를 탓해야 하는 것인가 이곳에 대한 기억과 기록을 남겨 후세에 전할 수 있는 방법이 농촌진흥청과 수원시에서 꼭 마련하길 바란다. 한순간에 사라지기엔 그 역사와 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너무나 아깝다.

  옛 농촌진흥청 청사는 농업기술역사관이라는 푯말이 서있는데 내부를 들어가서 확인하진 못했다. 과거의 영광이 고스란히 있어선지 본관 앞 화단에는 각종 기념식수가 위치하는데 그 중 1993331일 김영삼 대통령의 기념식수가 눈에 띈다. 표석에는 '신농운동점화 대통령 김영삼'으로 되어있고 식수는 금송이다.

  본관 뒤편으로는 운동장이 붙어서 있고 길가 서쪽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휘호로 '녹색혁명성취'라고 쓰인 기념탑이 서있다. 1978년에 장덕진 농수산부장관과 김인환 농촌진흥청장이 농촌진흥청이 그간에 이룬 업적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그 뒤로 농어촌공사와 여기산, 서호(축만제)가 위치한다.

  특히 농촌진흥청이 위치했던 서호 서쪽 구릉은 여기산으로 이곳은 청동기 원삼국기의 대단위 생활유적(집터, 부뚜막) 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이곳에는 한국 농업사의 큰 스승인 우장춘 박사와 농업진흥청 초대 청장 정남규 박사, 그리고 배고픔에서 해방시킨 벼의 혁명 '통일벼'의 아버지 김인환 박사의 묘가 있다. 입산이 통제되는 곳이라 쉽게 찾을 수는 없는 곳으로 초입에 우장춘 박사와 김인환 박사 묘를 지나 정상부에 정남규 박사의 묘가 자리한다.

  이러한 국가기관인 농촌진흥청과 함께 농업기술과 학문의 발전을 이끈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1992)이 위치하기도 하였다. 전신인 농상공학교가 1904년 서울에서 개교하여 농림학교로 분리되어 1907년 수원으로 옮겼다. 수원농림전문학교 등 교명이 바뀌다 해방후 1946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으로 정식 설치되면서 바야흐로 수원 농대의 역사를 열었던 학문의 전당이다. 그러나 20039월 수원의 캠퍼스를 떠나 서울의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농업대학이 가지는 위상과 의미가 퇴색하였다. 옮겨간 이후도 농업생명과학대학으로 실질적인 연구가 필요하여 여전히 캠퍼스 맞은편 서호천 건너에 시험농장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서울 농대 캠퍼스는 상당기간 방치되다. 경기도에서 청년 예술가들과 함께하는 '경기도 상상캠퍼스'로 일부 운영하고 있고 서울대에서도 농업대학의 실질적인 공간 활용을 이어가고자 창업지원센터를 새로이 열었다.

  서호에서 남북으로는 경기학연구센터에서 주관한 삼남길 제5길 중복들길이 서호천변으로 길게 조성되어 길걷기가 좋다. 서울 농대 옆 서호중학교에서 서호천으로 건너 맞은편으로 한국전쟁 당시 터키 파병 보병여단이 주둔하면서 운영하였던 고아원터를 기념하는 앙카라공원이 자그마하게 만들어져 있다. 최근 터키에서 개봉해서 화제가 된 영화 '아일라'의 주무대로 현재의 모습은 주민들과 수원시의 무관심으로 방치되는 모습이다.

 

 

 

 

답사경로(이 글의 장소 굵은 글씨)

옛 농촌진흥청(국립식량과학원 중부작물부) - 정문 - 권업모범장 표석 - 본관 - 김영삼 대통령 기념식수 - 녹색혁명성취기념탑 - 여기산 우장춘 박사묘, 김인환 박사묘(중턱), 정남규 박사묘(정상부) - 서호 - 축만제 표석 - 항미정 - 서호 남쪽 서호천길(삼남길) - 앙카라공원 - 서울 농대   

 

 

 

 

 

 

 

 

 

 

 

 

 

 

 

 

 

 

 

 

 

 

일제강점기 권업모범장. 출처 : 수원시사 16권(이곳에 가면 수원의 역사가 보인다.), 2014, 328쪽

 

여자잠업강습소 잠업시험소

 

 

 

 

신농운동점화 대통령 김영삼 기념식수 1993. 3.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