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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국의 실체(드라마 자명고)

달이선생 2009. 11. 1. 20:43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대무신왕 편>에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사랑이야기가 나온다. 그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려진 대표적 설화이다.


  “최리(崔理)가 다스리던 낙랑국(樂浪國)에는 적의 군사가 침입하면 저절로 울리는 고각(鼓角, 북과 나팔 혹은 피리)이 있어 적의 침략에 미리 대비하고 물리쳐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


  고구려 대무신왕(이름은 무휼이고 유리왕의 장남이다. 형제로는 이복동생이 있는데 고구려를 남하하여 백제를 세운 비류와 온조이다. 고구려 3대왕) 15년(서기 32년) 여름 4월에 호동(好童)왕자가 옥저(沃沮)에 놀러 갔었는데 그 때 마침 낙랑국의 왕인 최리가 그 곳에 왔다가 호동을 보고 보통 사람이 아닌 비상한 사람이며 북국신왕(北國神王, 고구려)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본국으로 데리고 가 자신의 공주를 호동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후에 호동은 고구려에 귀국하여 몰래 사람을 보내 낙랑공주에게 “만약 나라의 무기고에 들어가서 고각을 찢고 부수면 내가 예로써 아내로 맞이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거절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낙랑공주가 몰래 무기고에 들어가 예리한 칼로 고각을 찢고 부수고는 호동에게 알리니 호동은 대무신왕에게 낙랑국을 공격할 것을 권유하였다.

  낙랑왕 최리는 고각이 울리지 않아 고구려의 군사가 쳐들어 온 줄도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성 밑에 다다른 고구려 군사를 보고 난 후에야 고각이 모두 부서진 것을 알고 공주를 죽이고 나와서 항복하였다.” 라고 이야기가 끝을 맺는다. 낙랑국은 대무신왕 20년(서기 37년)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이 이야기로부터 5년 뒤에 낙랑국이 완전히 고구려에 망한다.

  드라마 <자명고>는 이 이야기를 모티브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자명고(自鳴鼓)는 글자 그대로 ‘스스로 울리는 북’이다. 사극에서는 현실성을 주고자 자명고를 상징적으로 한 고대의 방어시스템, 일종의 사람을 동원한 레이더 시스템으로 설정하고 있어 그 상상적 해석은 주목 받을 만 하다. 다만 드라마 자명고에는 검증되지 않은 역사적 왜곡 역시 적지 않다. 물론 사극이란 장르에 역사에 정확한 고증만을 잣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이미 헐리웃에서 성공한 사극영화인 ‘브레이브하트’등 대작 등도 그 역사적 왜곡이 많은 학자들에게 비판되었었다. 그러나 세계사에 대한 이해가 없는 일반인이 볼 때 그 문제점과 역사의 진실에 대한 고민은 어쩌면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극이 역사를 바탕했다는 진실만으로도 그 진실성에 대한 역사적 접근을 추구하는 것은 바람직할 것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몇 가지 자명고와 관련된 당 시대의 역사적 쟁점을 이야기하겠다.

  먼저 자명고와 나팔 혹은 피리가 있던 최리의 낙랑국은 어떤 나라인가?

  드라마 자명고는 고대국가에 대한 학계의 여러 학설 중에 한 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이 최리에 의해 태수 유헌을 죽이고 낙랑국으로 되었다. 라는 가설을 채용했다.

  현재 우리나라 학계는 이와 같은 낙랑군대체설은 부정한다. 이 설은 북한학계와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학설로 주류 학계는 다산 정약용의 <낙랑별고>에 따라 '춘천맥국설'등을 따라 고조선이 무너지고 설치된 한 사군 중 하나인 낙랑군과 최리의 낙랑국을 이중으로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당시 대무신왕과 낙랑국이 대립할 때 낙랑군에서는 조선의 유민이자 토호(토착지배층)인 왕조가 낙랑군 태수 유헌을 죽이고 6년 동안 지배하는 정치적 변동이 발생한다. 이 때 후한 광무제는 다시금 한인 왕준을 태수로 하여 낙랑군을 재점령하여 토호였던 왕조의 반란은 실패로 끝난다. 이후로 고구려 미천왕이 313년 낙랑군을 멸하여 복속하기까지 3백여 년을 지속하였다. 이러한 한조의 기록으로 볼 때 낙랑국의 왕 최리는 별개가 된다.

  또한 최리의 낙랑국은 낙랑군과 달리 대무신왕에게 망한 후 자취를 감춘다. 이는 낙랑군이 주변 토호들을 지배하기 위해 각기 그들 정권을 관작(황제 대리로 책봉)과 의책(한나라 관리 복식)을 통해 그들 지배력을 인정해 주고 낙랑군에 복속되도록 취한 정책의 산물로 최리 역시 낙랑군에 영향을 받아서 자신의 정권을 유지한 여러 토호 중에 하나였을 것으로 생각되며 당시 고구려 대무신왕이 정벌한 곳 역시 최리의 낙랑국으로 본다. 이는 당시 전한이 망하고 왕망의 신이 생기는 정치적 격변기에 왕조의 반란 등 한왕조의 지배력이 약화되자 이 핵심 군현이었던 낙랑의 영향력 역시 약해지므로 그 주변의 토호들이 각기 왕을 칭하며 곳곳에서 독립하는데 그러한 시기에 최리의 낙랑국 역시 나타난 나라가 아닌가 파악하기도 한다.(한서와 후한서에서 보면 한의 지배력이 약해지자 주변세력이 각기 왕을 칭하며 독립하자 그들을 관작과 의책을 주어 지배권을 인정해주었다. -왕망은 흉노를 정벌하고자 고구려를 동원하였는데 고구려가 이에 응하지 않고 오히려 한을 공격하자 고구려를 하구려로 왕에서 후로 강등하였다-고고학적 유물로는 예군남려라는 도장이 발견되었다.)

  이와 같은 주장은 낙랑군을 지금의 평양지역의 정치체로 파악하는 것으로 실제로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낙랑의 중원계 유물이 다량 출토되며 미천왕이 313년 복속하는 시기까지 고르게 나타난다. 이밖에 낙랑의 위치를 현재 평양이 아닌 요동지방으로 파악하는 설도 있으나 고고학적 유물이 뒷받침을 못하고 있다.

  그래서 자명고에 나타난 낙랑군=낙랑국이라는 주장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러나 자명고에서 시도되고 있는 자명고가 일종의 방어시스템이라는 설정과 대무신왕의 파격적 변신은 충분한 역사적 상상력이라고 본다. 감독 역시 기존의 조선시대 왕들과 차별하였다고 했는데 이는 당연하며 특히 초기 고구려의 역사적 특성상 왕들의 이미지는 무사, 장수의 이미지이다. 이는 고구려가 활발한 약탈전쟁을 통해 자국의 부족한 산물을 취하였다는 초기 역사기록(모본왕, 태조왕 때 더욱 활발)이 이를 말해주며 이와 같은 국가적 특성상 고구려의 왕 역시 위에 군림하는 도덕적 초월자가 아닌 백성을 군사로 통솔하여 자국의 물산을 확보하였던 북방유목민족 왕들의 모습에 가까웠을 것이다.

  또한 설화에서 보이는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사랑 역시 낙랑국을 복속하고자했던 고구려의 야욕에 따른 정치적 산물로 설정한 것 역시 타당성이 있다. 다만 여러 가지 이야기들의 전개 시 등장하는 인물, 예로 자명공주, 최리의 둘째 부인 왕자실 등, 여러 에피소드 등은 기존의 역사적 기록이 없는 허구로 작가의 상상력에 따른 창작이라는 사실을 주목하여 역사적 실제와 동일시하는 잘못이 빚어지지 않도록 주의가 필요하겠다.

  

#비류국-주몽 이전 고구려의 주체로 소노부, 연노부라고도 하며 주몽과 활쏘기 대결을 했던 송양왕의 나라이다. 이 소노부에는 왕족인 계루부와 마찬가지로 자체 관리와 사직 등이 있어 초기 고대국가의 연맹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소노부의 장은 고추가라는 존호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