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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팔달산에 위치한 지석묘(고인돌)군, 팔달산 숙지산 화성 채석장

달이선생 2009. 11. 1. 20:32

 

  수원향교에서 바라 보면 수원시중앙도서관이 정중앙에 위치하고 그 산이 팔달산이다. 수원시 가운데 우뚝 솟은 팔달산에는 화성성곽만 위치한 것이 아니다. 그 남쪽 능선에는 우리 나라 청동기시대의 유적 고인돌이 있다. 그리고 그 고인돌 3,4호 바로 위에 수원화성 팔달산 채석장이 위치한다. 수원화성 용도 끝 서남각루 아래이다. 채석장은 1794년 2월에 시작된 화성축성에 쓰인 석재를 채취하던 장소로 수원에는 팔달산을 비롯하여 인근 숙지산(영복여자고등학교 뒤), 여기산(국립농업박물관 뒤) 권동 채석장이 유명하다.

 

  고인돌은 지석묘(支石墓)라고 부르며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무덤유적이다. 흔히 고인돌하면 선사시대의 원시인을 떠올리기도 한다.(고인돌이 다수 분포된 고창에서 고인돌 축제를 하는데 원시인을 모델로 한다.) 하지만 이는 아주 잘못된 생각으로 원시인이 살던 시대는 사람들 사이가 평등했기 때문에 고인돌과 같은 돌로 만든 큰무덤이 나오지 않는다.

  이처럼 고인돌을 만드는 것은 계급이 존재하고 특정 지배층이 자신의 무덤을 크게 만들어 권위를 상징하는 정치적, 경제적 우월성을 대변한다.

 

 

  이와 같은 고인돌은 그 형식에 따라 덮개돌을 양쪽 굄돌(고임돌)이 떠받치고 있는 탁자형(북방식이라고도 함-사진1)과 양쪽 굄돌 없이 작은 굄돌을 하고 커다란 덮개돌을 덮어 그 아래 돌널무덤(석관-사진4)을 만든 바둑판형(남방식이라고도 함-사진2)이 있다. 또한 덮개돌을 얹은 개석식(뚜껑식-사진3)이 있다.

  탁자형 고인돌은 규모가 큰 것들이 중부 이북에 주로 나타나며 소량이다.(강화도고인돌이 대표적) 반면에 바둑판형은 주로 한반도 중부 이남에  나오며 그 수가 많고 무리를 이루는 특징(군집-사진5)을 가진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북방식과 남방식으로 구분하는 것이 지역과의 관계성이 상당히 떨어지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특히 탁자식 고인돌이 남부지역에 다수 발견되고 있고 그 규모도 꼭 크고 거대하지만은 않다.(광명시 가학동 지석묘군의 고인돌은 탁자식이며 그 크기 1m남짓 한 것이 대부분이고 강화에서 발견되는 고인돌도 이러한 특징을 가진 고인돌 군집이 다수 확인되고 있다.) 또한 남방식을 대표하던 바둑판식도 경기도 오산 삼미동 지석묘군에서 확인되듯 대부분이 바둑판식과 개석식이다. 따라서 그 형태상 구분에서 탁자식과 바둑판식, 개석식으로 분류하고 지역에 따른 분포인 북방식과 남방식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고인돌에는 어떤 것을 묻었을까? 무덤이기 때문에 당연히 시신을 매장하였다. 이밖에 무덤의 주인공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껴묻거리(부장품)은 청동검, 거울, 방울 등의 청동제 위세품과 토기 등을 함께 넣었다. 고인돌의 형태상 시신 매장 방식도 차이가 있는데 탁자식 고인돌은 굄돌과 굄돌 사이가 시신과 부장품을 안치하는 무덤방으로 지면에 위치한다. 그래서 유물 등은 대개 도굴되거나 유실되었고 4면에 위치했을 굄돌은 대개 양쪽 두 개 정도만 남아 지금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반면에 바둑판식 고인돌은 굄돌이 아주 작아서 무덤방을 따로 그 아래 흙은 파고 넓은 판석으로 무덤방(돌널무덤)을 만들어 시신과 껴묻거리를 묻었다. 

  팔달산 아래 수원시립중앙도서관 왼편 산등성이에 위치한 고인돌(맨 위의 사진)은 현재 보존 상태로는 훼손이 심해 형태상 정확한 형태를 단정 짓기 어려우며 덮개돌의 형태상 바둑판식과 개석식의 특징을 보이고 그 아래 는 돌널무덤을 하였다. 또한 바둑판식의 특징 중 하나인 군집의 특성을 가져 몇 기의 고인돌이 밀집해 있다. 다만 그 수가 적은데 이는 수원이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살면서 그 고인돌을 집을 짓거나 담 따위의 석재로 사용되어 많이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이곳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침을 수호하는 화성을 쌓을때(1794.1 – 1796.9) 채석장이 위치한다. 바로 위 완만한 산세로 바로 이어지고 화성성곽이 축조 되었으니 고인돌의 수난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에 앞서 꾀꼬리봉에서 석재(石材)를 채취하도록 명하였는데, 석공(石工) 무리들이 힘이 드는 것을 꺼려 함부로 말하기를,

"돌의 결이 거칠어서 쓰기에 적합하지 않고 돌덩이가 작아서 석물(石物)을 만들기에 적당하지 않다."

하니, 조정의 의논도 어지러워서 부득이 강도(江都)로 옮겨 채석장(採石場)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특별히 석공들에게 명하여 다시 꾀꼬리봉으로 가서 돌을 찾아 보게 하면서 면대해 타이르기를,

"돌을 얻는 것은 하늘의 뜻인데 돌을 얻지 못하는 것은 나의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해서이다."

하고, 이어 장용영에 명하여 세 사람이 쓰는 가래와 괭이·삽 등의 기구를 많이 만들어서 그 용도에 쓰도록 공급하게 하였다. 석공들이 각각 힘을 다해 겨우 한 층을 파자 한 돌맥을 만나서 30여 길을 파들어가니 마치 달걀의 노른자 같은 무리[暈]가 있고 광택이 나고 단단하고 결이 고운 돌이 나왔는데, 강도에서 나는 쑥돌[艾石]에 비교하면 돌과 옥의 차이 정도뿐이 아니었다. 이리하여 각종 석물을 모두 꾀꼬리봉의 돌을 가져다가 만들고 강화에서 돌을 뜨는 일은 철폐하였다.(壬子/先是, 命取石於鶯峰, 石工輩憚於用力, 輒曰: "理麄而不適用也, 體小而不當物也。" 廷議亦紛然, 不得已移設於沁都。 特命石工等, 復往鶯峰求石, 面諭曰: "得石天也, 不得石卽予誠意之未格也。" 仍命壯勇營, 多造三人鍬钁鍤等器械, 以給其用。 石工輩各盡氣力, 纔掘一層, 得一石脈, 掘至三十餘丈, 石之有暈如鷄子包黃, 瑩潤堅細, 比沁都艾石, 不啻璞玉之間。 於是各樣石物, 幷取之鶯峰, 撤江華浮石之役)

정조실록27권, 정조 13년 7월 28일 임자 1번째기사 1789년

화성 채석장은 아니나 정조와 관련된 채석 기록이다. 당시에도 채석은 고된 일이다. 재밌는 것은 채석을 돌을 캔다 혹은 뜬다라는 표현이다. 이렇게 화성축성에 쓰인 성돌 대부분은 숙지산에서 조달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성돌 총 18만7600여 덩어리로 팔달산 돌이 약 1만3900, 여기산 약 6만2400여, 권동 약 3만200여 덩어리로 숙지산 에서만 8만1,100여 덩어리를 떠내 전체의 약 43%이다. 그래서인 숙지산 채석장만 수원시 향토유적 제15호로 지정되었다. 팔달산과 마찬가지로 바위 군데군데에 돌을 자르기 위해 쐐기를 박았던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정을 사용해 돌에 구멍을 판 뒤 그 속에 물푸레나무나 밤나무 등을 박고 물을 부어 팽창하는 힘으로 돌을 잘라냈다.

이러한 성돌의 특징은 숙지산 돌은 강하면서도 결이 가늘고 여기산 돌은 부드러우면서도 결이 거칠었다고 한다. 권동의 돌은 여기산과 같았으나 결이 조금 더 가늘었고 팔달산의 돌은 숙지산에 비해 더 강하고 여기산 보다는 더 거칠었다고 한다.

https://news.suwon.go.kr/?p=40&viewMode=view&reqIdx=202002270725036264

 

수원시 향토유적 제15호 숙지산 화성 채석장 방치 안타까워

수원시 향토유적 제15호 숙지산에 있는 수원화성 돌 뜨던 흔적다산도서관을 품고 있는 숙지산은 수원화성 축성 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다산도서관 앞 숙지공원과 뒤 숙지산에 숙지산 화성 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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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한서 동이전 한조에 따르면 삼한시대 이전 수원은 한강 이남의 토착세력인 진국(辰國BC400년경)의 독자적인 지배권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후 삼한시대(원삼국시대로 기원전후에서 BC300년경까지) 마한이 54국, 진한과 변한이 각각 12국씩 모두 78국으로 구성되고 그 중 마한세력이 경기도의 중심부에 위치하였다. 이때 수원지역과 역사적으로 직접 관련이 닿는 곳은 원양국(爰襄國), 상외국(桑外國), 모수국(牟水國) 3국이며 원양국은 재양현 지역이고,  상외국은 화성시의 장안·우정읍 일대로 추측된다.

  현재의 수원시는 삼한시대 마한의 모수국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팔달산 고인돌은 이 모수국의 지배층에 무덤이다.

 

팔달산 고인돌과 고인돌이 위치한 팔달산 남측 산등성이

 

팔달산 고인돌 (위) 덮개돌이 없어진 석관 돌출부와 (아래) 덮개돌과 석관 파편돌  

  

 

 

 
#용어정리#

*청동기시대-선사시대인 석기시대(돌을 사용한 도구) 이후 돌이 아닌 금속도구인 청동기를

              사용하면서 인류의 문화와 기술이 발달하고 계급과 최초의 국가가 등장하는 시대이다.

               우리나라는 BC2000년 혹은 BC1000년경 전후에 시작되었다.

*후한(後漢)서 동이전 한조-중국 후한의 역사책으로 그 안에 우리 조상인 동이족을 적은 동이전 책의

               한(韓)의 이야기 이 책은 위진남북조시대 남조 송나라의 범엽이 지었다. 

 

 

 

수원화성 팔달산 채석장

팔달산 지석묘 3,4호 바로 위쪽에 위치한다. 그 바로 위는 수원화성 서남각루이다.

 

수원화성 팔달산 채석장에서 쓰인 성돌이 바로 위 화성의 서남암문과 용도 서남각루(화양루) 성곽에 쓰인 것을 확인하였다. 성돌 군데군데 쐐기흔이 여럿 보인다.

서남각루
용도
서남각루 이름 화양루
쐐기흔
서남암문
건축가 코르뷔지에(Corbusier)라고 쓴 걸까? 서남암문 서측벽 중간에서 만난 각자이다. 한국전쟁 때 연합군의 흔적이 아닐런지

 

숙지산 화성 채석장

 

임금이 화성부로부터 신하들을 대동하고 환궁할 때에 임금이 탄 수레가 대유평을 지나 만석거에 이르자 전교를 내렸다.

“관개의 이익은 역시 많다고들 한다. 당초 이 연못을 팔 때 어떻게 그 해의 수확이 이미 천 여 가마니라는 많은 수가 될것을 알았겠는가. 또수문水門의 석각은 하늘이 이루어 놓은 것이니 어찌 사람의 힘이 이렇게 만들 수 있겠는가. 하늘로부터 도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도다. 면面 이름을 ‘공석空石’이라 하고 산의 칭호를 ‘숙지孰知’라 했으니, 이른바 옛부터 돌이 없는 땅이라 일컬어졌는데, 오늘날 갑자기 셀 수 없이 단단한 돌을 내어 성쌓는 용도로 됨으로써 ‘돌이 비게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암묵 중에 미리 정함이 있었으니 기이하지 아니한가!

병진년(1796) 정월(1월) 24일. 부, 연설, 『화성성역의궤』

정조가 당시 숙지산이 위치한 곳인 공석면 지명의 의미를 화성성역에서 숙지산에서 돌을 떠내어 자재로 삼은 것이 우연찮고 기이하다고 놀라워 한 이야기이다.

숙지산 화성 채석장에 대한 흔적은 화서다산도서관이 있는 숙지공원 중앙부에 '돌 뜨던 터(부석소)" 표석과 안내판이 있다. 그 뒤편 좌우로 숙지산 능선이다. 숙지공원을 중심으로 움푹 들어간 지형을 확인할 수 있고 우측 능선을 따라 숙지산 정상에 이르는 길은 팔달산과 달리 바위 하나 보기 어렵다. 당시 얼마나 많은 돌들이 채석되었는지 알 수 있다. 당시 채석의 흔적은 정상부 1곳(숙지약수터 부근) 나머지 4곳은 숙지공원 좌측 구릉지역에 몰려있다.

숙지약수터 부근 쐐기흔 바위
숙지산 정상부에서 본 팔달산 서포루 부근
화서역 스타필드 방향 숙지산 채석장 올라가는 입구
북쪽 정상부
채석 암반
위 암반에서 이어진 쐐기흔
내려오면 만나는 다산도서관
숙지산 아래(벽산아파트 부근)에서 본 팔달산 서포루 부근
서일치와 서포루 사이 화성 팔달산 둘레길 입구
서일치와 서포루 사이 화성 팔달산 둘레길 입구에서 본 숙지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