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이야기

[배달학당] 내가 씨알이다.

달이선생 2011. 6. 27. 11:05

 

 

 

 

 

 

사단법인 제정구기념사업회 이병권이 녹취하여 옮기고 박재천이 정리, 박재순 박사가 감수했다. 

 

 

 

 

 

 

[ 배달학당 2기 3강 ]

 

 

 

내가 씨알이다

 

 

 

  이글은 가난공동체생명 제2기 배달학당「박재순 박사와 함께하는 씨알사상」제3회 학당 <내가 씨알이다>의 내용입니다. 2011년 5월 16일(월), 서울 종로구 이화동 제정구기념사업회 교육실에서 이현옥(성동우리생활협동조합 자원실무)외 10분이 참가했습니다. **가난공동체생명배달학당게시판**

 

 

 

  씨알은 몸소 하는 거다.

 

  ‘내가 씨알이다.’ 이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 ‘내가 씨알’이라는 것은 남보고 씨알노릇을 하라고 하기 이전에 내가 씨알노릇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씨알사상, 씨알정신, 씨알운동은 나를 위한 사상이고 나를 위한 정신이며 나를 위한 운동이다. 나의 사상, 나의 정신, 나의 운동이다. 삶은 스스로 사는 것이고 내가 사는 것이다. 남보고 대신 살아달라고 할 수 없다. 씨알살이, 씨알운동을 나는 하지 않고 남보고 하라는 것은 씨알정신과 생명정신에 어긋난다. 생명과 정신의 씨알맹이를 지닌 사람들은 남보고 하라고 하기 전에 ‘내’가 먼저 한다. 안창호, 이승훈, 유영모, 함석헌은 ‘내가 스스로 하는’ 이들이다. 이분들은 겨레의 스승, 인류의 스승으로 받들 수 있는 분들인데 이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스스로 내가 먼저 하는’ 거다.

 

  세상에 어떤 큰 사건이나 위대한 일도 남에게 떠넘겨서 되는 일이 없다. 남에게 일을 맡기더라도 내가 해보고 아는 일을 맡길 수 있다. 남에게 맡겨도 그 사람의 ‘나’가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 작은 일에서 큰일까지 다 ‘내’가 하는 일이지 남이 하는 일은 없다. 나의 나가 하고 너의 나가 하고 각자의 나가 하는 일이다. 물 한잔을 움직이는 일도 누군가의 ‘내’가 하지 남이 하는 게 아니다. 씨알은 스스로 싹이 튼다. 남이 대신 싹을 트게 할 수 없다. 꽃피고 열매 맺는 것을 누가 대신해 주나? 씨알은 몸소 하는 거다. 스스로 하는 거다. 이것이 생명과 정신의 가장 근본이 되는 원리다.

 

  7~80년대 민주화 운동의 대표적 지성인 가운데 한 분이었던 심원 안병무는 유명한 성서신학자이자 민중신학자였다. 그가 젊은 시절에 유영모, 함석헌 두 분과 가까이 지내면서 배웠다. 어느 날 유영모가 말했다. “예수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는데 그 ‘나’가 바로 나요.”

그러자 안병무가 말했다. “그게 어째서 선생님의 ‘나’입니까? 예수의 ‘나’지.” 유영모가 다시 말했다. “나는 성경을 읽을 때 남의 이야기로 읽지 않고, 내가 죽고 사는 이야기로 읽습니다.” 이 한 마디 말 속에 씨알사상과 정신의 핵심이 들어 있다. 모든 일은 ‘내’게서 시작된다. 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내’게서 길이 생겨난다. 내가 길을 내는 것이고 내가 감으로써 길이 생겨나는 것이다. 진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바로 진리이고, ‘내’게서 진리가 생성된다. 생명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바로 생명의 중심이고, 근원이다. ‘내’게서 생명이 나온다. 내가 살면 사는 거고 내가 죽으면 죽는 거다.

 

  둘째 ‘내가 씨알’이라는 말은 ‘내’가 생명과 정신의 ‘씨알맹이’라는 말이다. 생명과 정신의 씨알맹이가 뭐냐. ‘나’다. ‘나’라는 것, 그 자체가 내 존재의 씨알맹이, 내 생명과 정신의 씨알맹이다. 그 ‘나’라는 것이 없어지고 꺼져 버리면 생명이나 정신의 존재는 없다. 어떤 생명체에서 그 생명체의 주체가 되는 ‘나’가 없어지면 그것은 더 이상 생명체가 아니다. 정신이라 하든지 의식이라 하든지 영혼이라 하든지 얼이라 하든지 ‘나’라고 하는 그것이 그 인간 생명의 씨알맹이, 속알맹이다. ‘나’가 없으면 생명과 정신은 없는 거다. ‘내’가 바로 생명과 정신의 씨알이다.

 

  ‘나’는 주체다. 생명과 환경, 역사와 일, 정신과 물질의 주체다. 주체는 스스로 저 자신이 되는 거다. 남의 부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남을 부리는 것이요 남의 종살이를 하지 않고 스스로 주인이 되는 존재다. 다른 말로 하면 물질적인 인과(因果)관계나 인과법칙에 매이지 않는 거다. 물질세계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 자기의 바깥에 원인이 있다. 앞에 놓인 컵을 움직이려면 바깥에서 힘을 주어야 한다. 컵이 스스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자동차(自動車)는 스스로 움직이는 차라는 말이지만 실제로는 바깥에서 힘(기름)이 주어져야만 움직인다. 움직이는 원인인 힘이 밖에 있다. 자연과학은 자연 만물의 인과관계를 밝히는 것인데 존재와 활동의 원인과 까닭을 밖에서 찾는다. 존재와 활동의 원인과 까닭이 밖에 있는 것, 이것이 물질이고 기계고 대상이다.

 

  생명이나 정신의 ‘나’라고 하는 주체는 존재와 활동의 원인과 까닭이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거다. 자기를 움직이는 힘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 존재하거나 활동하는 힘과 근거가 자기 자신 안에 있다. 그것이 ‘나’라고 하는 거다. 내가 나의 까닭이요 제가 저의 까닭이다. 따라서 ‘나’는 물질이나 기계가 아니다. 나의 존재와 움직이는 동력이 나 자신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나 자신이 되는 거다.

 

  그렇다면 그런 ‘나’가 어디 있는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내 마음 속에는 타율적인 동인들이 많다. 남의 눈치를 보면서 움직이기도 한다. 내 속에 음식을 먹고 싶다든지 돈을 갖고 싶다든지 하는 욕망도 있고, 분노와 미움의 감정도 있고, 어리석은 편견과 집착도 있다. 사실 이런 것들은 자기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바깥의 물질적 자극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것은 나의 자유로운 생각과 감정이 아니라 밖의 물질과 그 물질에 대한 욕망이 지배하는 것이다.

 

  그런 바깥의 자극에 지배되는 ‘나’는 스스로 하는 ‘나’가 아니다. 그것은 ‘거짓 나’다. ‘거짓 나’는 어떤 물질적인 외적인 힘이나 유혹에 의해서 움직이고 지배를 받는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물질이 주인이다. 물질의 종노릇하는 ‘나’는 ‘참 나’가 아니다. 심리학은 심리의 인과관계를 분석한다. 내 심리의 움직임이 어디서 나왔느냐. 본능적 충동, 물질적 욕망이나 성적인 동기에서 왔다면 ‘내 마음’은 외부의 물질적인 동인(動因)으로 움직인 것이다. 융 같은 심리학자는 마음의 심층을 사랑이나 정신으로 말하지만, 마음의 심층을 본능적 충동이나 물질적 욕망으로 보는 심리학은 ‘나’를 물질적인 존재로 본다. 거기에 진정한 ‘나’는 없다.

 

  ‘참 나’는 내가 나로 되는 것이다. 내가 ‘나’가 되는 것이 사람 되는 것이다. 함석헌은 1970년에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고 군사독재에 맞서 싸우며 힘든 시절을 보냈다. 70대 중반의 노인으로서 함석헌은 돈 없이 홀로 월간잡지를 펴내며, 거대한 권력에 맞섰다. 답답하고 지칠 때가 얼마나 많았겠는가! 함 선생도 때로는 지쳐서 힘이 빠질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 때마다 “내가 이러면 안 되지. 사람 되어야지.”하면서 함석헌 선생님은 벌떡 일어났다고 한다. 내가 나로 되고 내가 사람이 되는 데는 길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비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나로 깨어나고 내가 나로서 일어나는 것밖에 없다.

 

 

  스스로 할 수 없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

 

  오늘이 516인데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켜 18년 동안 나라를 통치했다. 이 나라에 그의 공과가 있다고 얘

한다. 이 사람이 한 일이 뭔가. 첫째로 군사적인 힘을 가지고 권력을 장악하고, 이 나라를 지배했다. 군사력은 대표적인 물리적 힘이다. 이 물리적이고 강압적인 힘을 가지고 산업경제의 힘을 획기적으로 증강시켰다. 1963년에 1억불 수출했는데 1977년에 100억불 수출했다. 지금은 4,600억불이 넘는다. 지난 30년 동안 산업의 힘을 증대시켰는데 경제성장이라는 면에서는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

 

  그렇지만 함석헌 선생은 민중의 입장에서 타협하지 않고 줄기차게 박정희 정부와 싸웠다. 그렇게 싸운 정신의 원리가 뭔가. 박정희가 군사력에 바탕을 두고 경제의 힘을 획기적으로 증진시켰더라도 ‘나’라고 하는 것이 없으면 그것은 다 허깨비다. ‘나’를 잃고 물질의 힘만 커졌다면, 오히려 그것이 사람을 가두는 감옥이 된다고 했다. 통제 되지 못한 군사력이 얼마나 위험한 건가. 사람을 짐승으로 만드는 거다. 정의롭지 못한 경제, 자유와 평등을 희생시킨 경제성장이 어떤 사회를 만들겠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나’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나’가 살아 있어야 자유롭고 평등하고,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가 된다. 아무리 경제가 성장하고, 과학기술이 발달해도 사람의 영혼, 알맹이인 ‘나’가 시들고 말라버리면 쓸 데 없다. 민중 한 사람 한 사람을 짓밟고 민중의 삶을 업신여기면서 어떻게 정의롭고 평등하고 평화로운 사회가 되겠는가. 삶의 씨알맹이를 잃은 경제, 겨레의 정신과 혼을 저버린 사회는 발전할수록, 잘못된 세상이 되고 만다. 이것을 끊임없이 일깨워주신 것이 함석헌 선생의 씨알정신이다.

 

  씨알정신으로 사는 사람은 반드시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가난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물질적 풍요가 죄는 아니다. 5~60년대 한국 사회는 너무 가난했다. 함 선생도 60년대 초에는 가난에서 벗어나 국민의 경제생활이 튼실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처럼 합리적이면서 넉넉한 살림을 살기를 바랐다. 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함 선생은 한 사람 한 사람의 혼, 겨레의 정신력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줄기차게 강조하셨다. 영혼이 없는 물질적인 풍요는 사람을 짐승으로 만든다. 80년대 이르러 한국의 경제와 산업이 상당한 정도로 발전했을 때 함 선생은 사치와 쾌락의 문명을 비판하면서 멸망해가는 문명을 건지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을 역설했다. 병든 문명을 치유하기 위해서 단순하고 검소하게 사는 삶을 강조했다. 단순한 삶, 검소한 삶, 다시 말해 영적인 삶이 문명병을 치유하는 길이고 새 문명을 여는 길이다.

 

  내가 씨알이다. 그래서 석가는 ‘하늘 위 하늘 아래 나 홀로 존귀하다’(天上天下唯我獨尊)고 외쳤다. 예수도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다. ‘나’, ‘영혼’이라고 하는 게 뭔가. 만약 그게 물질이나 기계라고 하면 사람은 우주의 지극히 작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가 우주보다 소중하다고 하겠는가. ‘나’(영혼)에게 우주로서는 측량할 수 없는 어떤 요소가 있으니까, 바깥 우주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차원이 있으니까, 내가 온 천하보다 존귀하다. 사람에게는 물질적인 인과관계에서 자유로운 ‘내’가 있다는 거다.

 

  물질적 인과관계에서 자유로운 것이 뭔가. 사랑이다. 지난 강의에서 씨알사상을 복숭아 씨앗에 비유했다. 복숭아 씨앗(桃仁)이 어질 인(仁), 사랑을 나타낸다고 했다. 달콤한 사랑이 아니라 복숭아 씨앗처럼 딱딱하고 쓴 사랑이 영원한 생명의 씨앗이고 ‘나’의 실체다. 석가로 말하면 탐진치를 멸하고 얻은 자비, 예수로 말하면 십자가 죽음으로 드러낸 사랑이다. 그 사랑만이 생명과 정신을 영원히 살린다. 그 사랑만이 스스로 하는 거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스스로 할 수 있고, 스스로 하는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다.

 

예수와 석가모니

 

  흔히 ‘내 몸은 내꺼’라고 생각한다. ‘내 몸은 내꺼다. 나는 내꺼다.’ 하는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드물다. 그러나 이 주장은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내 몸이 내꺼’ 라면 내 몸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내가 내 마음대로 하는데 누가 시비를 걸면 안 된다. 돈이 없으면 피를 뽑아 팔고, 콩팥을 떼어 판다. 심지어 내 몸을 가지고 성매매를 해서 먹고 살겠다는 사람도 있다. 내 몸이 내 거라면, 내가 내 몸 가지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데 왜 시비냐는 거다.

 

  이것은 소유의식, 소유권, 소유개념을 내 몸에까지 확장시킨 거다. 내 몸으로 내가 힘써서 내가 번 돈, 그것은 내 것이다. 소유권을 강조하는 사람은 내 소유에 손을 대는 국가, 기관, 타인은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소유권은 절대로 보장돼야 하고 소유권을 확장시켜서 내 몸을 내가 소유한다는 거다. 내 몸뿐 아니라 나 자신도 내게 속한 것이고, 내가 소유하는 것이라고 한다. 국가와 타인이 내 소유, 내 몸, 나 자신에 대해서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아무런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참 나’, ‘나다운 나’는 물질이 아니다. ‘나’를 내가 소유한다는 말은 성립할 수 없다. 물질이 아닌데 어떻게 소유할 수 있을까? 시간과 공간 속에서 제한된 물질세계에서만 무엇인가를 소유할 수 있다. 소유한다는 것은 제한된 장소에 두고 마음대로 쓰고 처분할 수 있는 것을 뜻한다. 물질적인 인과관계를 뛰어넘는 것은 소유할 수 없다. ‘하느님’이나 ‘영혼’이나 ‘나’라고 하는 것은 소유할 수 없다. 사랑도 생명도 정신도 소유할 수 없다. 물질이 아니므로 어느 곳에 둘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을 금고에 잠거 둘 수 없고 생명을 은행에 맡겨 둘 수 없고 정신을 지갑 속에 넣어 둘 수 없다. 어디다 둘 수 없는 것은 소유할 수 없다.

 

  몸은 물질과 생명과 영의 세 차원을 가지고 있다. 몸을 물질과 육체의 차원에서 보면 내 몸은 내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몸을 유기체적 생명, 정신과 신령이 깃든 거룩한 집으로 본다면 내 몸을 내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남이 내 몸을 가지고 소유권을 행사한다면 당연히 거부해야 한다. 나도 내 몸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아무도 내 몸을 소유할 수 없다.

 

 

  나는 내가 되는 것이요 내가 나답게 되는 것이다.

 

 

  생명, 사랑, 정신이나 영혼, 하느님이나 나는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오늘날 대학의 저명한 주류 철학 교수들 가운데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드물다.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가「정의란 무엇인가?」를 써서 한국 사람들도 많이 읽었다. 이 책에는 현실의 온갖 문제들을 담은 생생한 얘기나 새로운 정보와 통계숫자가 넘쳐난다. 나에 대한 소유권, 몸에 대한 소유권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지만 ‘나’에 대한 진지한 물음도 답도 나오지 않는다. 이른 바 주류 철학자들이 ‘나’에 대한 이런 논의를 하지 않는 것은 유물론에 사로 잡혔거나 유물론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것은 물질뿐이라는 생각이 현대인의 정신을 지배한다. 그래서 ‘나’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피하고 있다. 나의 몸은 해부의 대상이 되고 나의 맘과 정신은 분석의 대상이 될 뿐이다.

 

마이클 샌델 (Michael J. Sandel 1953 - .)

하버드대 교수, 미국. 

 

  ‘나’는 해부의 대상만도 아니고 분석의 대상만도 아니다. 아무리 나를 해부하고 분석해도 ‘나’를 다 드러낼 수 없고 ‘나’의 깊이를 헤아릴 수도 없다. ‘나’는 한없이 깊은 것이다. ‘나’의 속의 속을 파고 들어가면 물질적인 몸에 속한 나만이 아니라 또 마음에 속한 나만이 아니라 얼의 ‘나’, 신령한 ‘나’가 있다. 나의 속의 속으로 들어가면 물질적인 지평을 뛰어넘어 하늘, 하느님에 닿는다. ‘나’의 뿌리를 파고 들어가면 하늘에 닿는다. 사람뿐 아니라 모든 생명이 다 하늘에 닿아 있다. 그래서 생명은 신령한 거다. 생명과 정신을 파고 들어가면 하늘, 하느님, 얼, 정신에 닿는다. 하늘을 누가 소유하겠는가? 하늘의 허공에서만 나는 나다운 나가 된다.

 

  유영모, 함석헌 선생이 구약성경에서 주목하고 강조한 대목이 있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는 백성을 해방시키라는 사명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어려우니까 모세가 하느님께 대들었다. “나는 힘없는 사람인데 왜 나보고 가라느냐. 가라고 하는 하느님 당신 이름이 뭐냐?” 당돌하게 하느님의 이름을 물었다. 그러니까 하느님이 “왜 이름을 묻느냐?” 하면서 “나는 나다(I am Who I am)" 했다. 히브리어 원어를 줄이면 ‘야훼’다. 사람들이 ‘여호와’라고 부르며 읽고 있지만 본래 발음은 ‘야훼’다. 성경에는 ‘I am Who I am’을 ‘난 스스로 있는 자다’ 로 번역했는데 실제 히브리어 말뜻은 ‘나는 나다’, ‘나는 나대로 있는 이다’ 이다. 후대에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여호와(야훼)는 배타적인 민족 신으로 나오지만 본래는 ‘나는 나’라는 신의 자기 선언이다. 이것은 모든 민족 모든 민중을 위한 해방선언이다. ‘나는 나’라고 선언할 때 종살이에서 해방이 시작된다.

 

  유영모와 함석헌 두 분은 이 문구를 굉장히 중요하게 받아들였다. 이 문구에 씨알사상의 핵심이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구약성경의 하느님은 역사의 하느님이기 때문에 이런 말이 나왔을 거다. 역사에서는 주체가 중요하다.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나’를 잃어버렸으니까 종살이하는 거다. 역사는 잃은 나를 찾자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나는 나’라고 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과 하느님 앞에 간다는 것은 ‘내’가 나로 되는 것이요 내가 ‘나답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께 다가가면 갈수록 나는 내가 된다. 하느님은 초월자이고 전능자이며 전체 하나의 생명을 뜻한다. 초월자이고 전능자인 하느님이, 전체를 아우르는 전체 하나인 하느님이 ‘나는 나다.’ 라고 했으니까 ‘내가 나답게 되는 것’이 ‘전체 하나(하나님)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생명체는 스스로 하는 주체와 통일된 전체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생명체는 나다운 내가 있으면서 유기체적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주체성과 통일성이 결합된 것이 생명체다. 사람은 몸, 맘, 얼의 세 차원에서 참다운 ‘나’가 되면서 ‘전체 하나’로 되자는 거다. 그것이 생명진화의 목적이고 사람의 사명이다. 예수의 하느님나라, 석가의 열반이 다른 것이 아니다. 사람마다 스스로 저다운 저가 되는 거고 전체가 하나로 되는 것이 열반이고, 하늘나라다.

 

 

  내가 나를 파고들면 들수록 나는 나다운 내가 된다.

 

  씨알은 스스로 싹트고, 스스로 자라고, 스스로 꽃피고, 스스로 열매 맺는다. 스스로 하려면 안에서 힘이 나와야 한다. 안에서 힘이 나오려면 자기가 자기를 불태워서 힘을 내야 한다. 밖의 힘, 물질의 힘은 남(물질)을 태워서 희생시켜서 나오고, 안의 힘, 정신의 힘은 자기를 태우고 희생시켜서 나온다. 사람도 남의 목숨인 밥을 먹고 불태워서 나오는 힘으로 산다. 사람이 밥 먹고 숨 쉬어 소화 · 흡수 · 배설하는 것은 밥을 불태워 힘을 얻는 것이다. 밥 먹고 숨 쉬는 몸의 차원에서는 남의 목숨을 먹고 불태우지만 맘과 얼의 차원에서는 내가 나를 불태워 힘을 얻는다. 내 안에서 나를 불태워야 스스로 하는 생명이 된다.

 

  생명체는 기계와 다르다. 자동차는 휘발유를 넣고 불을 때야 간다. 그러나 사람은 몸으로는 밥을 먹어야 되지만 숨을 쉬어서, 숨을 불태워서 힘을 낸다. 내 생각과 마음을 불태울 때 내 속에서 사랑이 피어난다. 사랑은 나를 움직이는 힘이다. 자기를 불태우는 것은 자기를 제사 지내는 것이다. 이것이 희생(犧牲)이다. 희생의 원리는 자기를 죽이고 태움으로써 새 힘을 얻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움직이려면 내가 나를 불태워야 한다. 유영모 선생은 “네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라.”(로마 12,1)는 말씀을 따라 살려고 평생 애썼다. 선생은 정말 자기를 제물로 드렸다. 자기를 불태워 제사를 지낼 때 비로소 자기 속에서 스스로 하는 사랑의 힘이 나온다. 씨알이 깨지고 죽음으로써 눈부신 생명활동을 펼치듯이, 사람도 깨지고 죽음으로써, 새 삶으로 들어간다. 사람은 자기를 불태워 죽임으로써 죽지 않는 생명의 힘을 얻는다.

 

  숨도 내가 나를 불태우는 거다. 생각하는 것도 내가 나를 불태우는 거다. 유영모 선생에 따르면 생각은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사랑으로 내가 불타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상사병(相思病)이라는 말이 있다. 서로 그리움에 사무쳐 생각하는 병이다. 진실한 생각은 그리움에서 나온다. 바른 생각을 하면 자기 속에 있는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불태워지고, 내 마음 속에 지저분한 것들이 정화된다. 그래서 생각은 내가 나를 불태우는 거다. ‘나’라고 하는 것은 물건처럼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스스로를 불태워서 속에서 새로 태어나는 거다. ‘나’라는 것이 바깥에 대상적으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나’라는 것이 있다면 영원한 ‘나’로서, 영원한 ‘얼’로서 있는 거다. 내 몸과 내 마음 속에서 그런 ‘나’가 살아 있으려면 끊임없이 내 몸과 마음에서 새로 태어나야 한다.

 

  유영모 선생은 “생각이 불탐으로서 내가 나를 낳는다.”고 했다. 내가 나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인데 어떻게 내가 나를 소유할 수 있나. 끊임없이 내가 나를 낳을 뿐이다. 하느님과 만난다는 것은 내가 참되고 큰 나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끊임없이 하느님 계신 하늘로 솟아올라 나가는 거다. 그래서 유영모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생각한다는 것은 뭐냐?, 내가 나를 파는 거다.” 내가 나를 파면 팔수록 나다운 나가 나온다. 개성이 뚜렷해져서 제소리, 제색깔이 나와서 저다운 성격이 나온다. 나다운 나를 깊이 파고 들어가면 하늘에 닿는다. 상대적인 물질세계를 초월한 하늘은 두루 통하고 전체가 하나인 것이다. 하늘은 전체성, 보편성, 초월성을 나타낸다. 내가 나를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나는 나다운 나가 되는데 그 ‘나’의 뿌리와 바탕은 하늘에 가 닿는다.

 

  씨알사상에서는 개성이 발휘되는 것과 보편적인 하늘에 이르는 것이 일치한다. 이런 생각은 현대 서구철학의 경향과는 다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하나 된다는 것을 획일성이나 동일성으로 보고 ‘하나’라는 말을 싫어한다. ‘하나로 된다.’는 말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감이 있다. 하나로 된다는 것은 획일적으로 되는 거고 개성이 없어지는 것이다. ‘하나 된다.’는 생각은 촌스럽고 유치한 낡은 것이고 개성과 자유를 말살하는 폭력적인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차이를 강조한다. 차이만 강조해서는 생명과 정신을 이해할 수 없고 서로 다른 것만 내세우면 어떻게 더불어 살 수 있는가. 서로 통하는 것이 있어야 함께 살 수 있다. 생명과 정신의 깊이를 파고 들어가면 갈수록, 모두 저마다 저답게 되면서 모두 하나로 끌어안은 전체 하나에 이를 수 있다. 생명과 정신의 씨알맹이가 싹 트고 자랄수록 저다우면서 서로 하나로 통하는 전체 생명을 드러낸다. 작은 들꽃 하나가 저답게 피어 있으면서 생명의 참되고 착하고 고움을 얼마나 잘 드러내던가!

 

  유영모는 물체도 물질의 주체라고 했다. 물질의 세계도 겉에서 보면 인과관계에 매여 있지만 속에서 깊이에서 보면 한없이 깊고 신비하다. 만물도 존재의 깊이를 지니고 있다. 만물도 존재의 깊이에서는 우주 전체와 이어져 있고 하늘의 신령한 세계와 닿아 있다. 물질도 물성과 이치에 따라 파고 들어가면 그 속에서 한없이 풍부하고 깊은 존재의 차원이 열린다. 물질도 무궁무진한 값과 풍성한 존재의 세계를 품고 있다. 물질이 있는 그대로, 주체로서 드러나고 실현되고 완성되게 하는 것이 사람이 할 일이다.

 

  유영모에 따르면 사람이 물질에 대한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 하늘의 빈탕한데(虛空)서 자유로운 ‘나’가 될 때, 비로소 나는 나대로(맘대로) 자유롭고 물질은 물질대로 물성과 이치에 따라 실현되고 완성될 수 있다. 물질에 대한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 참 나가 될 때 비로소 물질을 소유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주체로 볼 수 있고 물질적 존재의 깊이가 드러나고 실현되고 완성되게 할 수 있다. 서구철학에서는 인간 이외의 자연 생명세계와 만물은 인식되는 대상으로서 분석되고 해부되고 실험되고 지배되고 정복될 뿐이다. 그러나 씨알철학에서는 자연 생명세계와 만물이 인식의 대상에 머물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는 주체로서 인식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사람과 만물이 서로 만나 드러내고 사귀고 실현하고 완성하는 삶의 과정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사람은 자연만물과 생명세계를 착취하고 파괴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연만물과 생명세계를 주체와 주체로서 사귀고 서로 주체를 실현하고 완성하도록 이끄는 존재다.

 

 

  깊이 생각해야 주체가 된다.

 

  함석헌 선생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했다. 이 말은 역사 속에서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역사 속에서 주체를 잃으면 종살이를 하게 된다. 종살이 하면 결국 망하고 죽는 거다. 역사 속에서 주체를 잃지 않으려면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깊이 생각해야 주체가 되고 주체가 되어야 살 수 있다.

 

  생명진화와 인류역사의 목적은 사람이 물질(돈), 기계, 힘의 종이 아니라 주인이 되는 것이다. 속의 힘, 정신력, 얼 힘이 겉 힘, 물질과 기계의 힘을 부리는 것이다. 6~70년대 미국에서 히피운동이 활발했다. 마리화나는 중독성도 약하고 몸에 해롭지도 않다면서 마리화나를 하는 것이 유행했다. 마리화나를 하면 곧 마음의 평정과 기쁨을 얻는다고 했다. 종교인들이 수십 년 수행하고 명상해서 겨우 도달하는 마음의 경지를 마리화나만 하면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인이 와서 함 선생께 이 이야기를 하면서 누구나 쉽게 마리화나를 통해서 마음의 평정과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후에 함 선생은 몇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하면서 말을 했다.

 

  인간의 목적이 기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주인 노릇을 하자는 것인데 약물에 의지한다면 결국 다시 기계의 종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약은 물질이고 물질은 기계의 바탕이다. 힘든 일을 기계가 대신 해 주는 것처럼, 마음의 평화를 약물이 가져다준다면, 마음은 약물의 종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함 선생은 정말 내가 스스로 하는 것이 무엇일까 물었다. 밥 먹고 소화 흡수 배설하는 것도 숨 쉬는 것도 몸이 본능적으로 하는 것이다. 지식과 정보도 밖에서 온 것이고 감정과 의식도 밖의 자극에 영향을 받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 이 순간 내가 하는 것은 ‘생각하는 것’뿐이라고 했다. 생각하는 것만은 남이 대신할 수 없는 것이고 지금 내가 스스로 하는 것이라고 했다. 생각하는 것만이 스스로 하는 주체적인 것이고 생각함으로써만 주체가 깊고 커진다.

 

  뇌 과학자들 가운데는 생각도 뇌가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뇌 신경세포와 화학물질의 상호작용과 과정으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것은 잘못된 설명이고 거꾸로 된 주장이다. 내가 생각하면 뇌에서 신경세포와 화학물질의 작용이 일어나는 것이지 나는 가만히 있는데 뇌의 신경세포들과 화학물질이 스스로 생각해서 움직이는 게 아니다. 물질이 정신을 따르는 것이지 정신이 물질을 따르는 게 아니다. 생각함으로써 정신이 깊어지고 정신이 깊어지면 물질도 존재의 신비한 깊이를 드러내고 섬세하고 정교해지는 것이다.

 

  함석헌 선생님의「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보면 원래 우리 민족은 성품이 착하고 온유하다. 그리고 한반도와 만주라는 삶의 터도 좋았다. 만주, 한반도라는 좋은 터에서 좋은 성품을 가진 한민족은 큰 나라와 위대한 문명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런데 한민족은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고난의 역사에 빠졌다. 결국 나라를 잃고 종살이를 하게 됐다. 왜 그렇게 되었느냐. 우리 민족이 기운과 성품은 온화하고 착한데 깊은 생각이 없고 깊은 철학 깊은 종교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깊이 생각해야 지혜와 힘이 나와서 외적환경과 외세에 맞서 이길 수 있고, 민족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문제와 갈등과 도전을 극복할 수 있는데 한민족은 깊은 생각을 하지 못했다. 왜 한민족은 깊은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우리 민족이 착하기는 한데, 너무 낙관적이고 감성적이어서 깊고 철저한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역사적인 기록인「삼국지위지동이전(三國志魏志東夷傳)」을 보면 부여, 고구려, 삼한 등 우리 선조들은 큰 축제를 벌일 때면 날마다 밤마다 술 마시며 춤추고 노래하였다고 한다. 한겨레는 노래하고 춤추고 감정을 표현하는데 재능이 있다. 그러니까 교회도 감정을 움직이는 설교를 해야지 사람들이 모여든다. 조금 어렵고 딱딱한 소리를 하면 다 도망가고 만다. 우리 민족은 노래하고 춤추는 거를 좋아하고 낙관적이고 감정적이다. 깊이 생각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니까 깊은 종교가 없다. 이렇게 깊은 생각, 깊은 철학, 깊은 종교가 없으니까 외세의 도전과 침입, 민족사회의 심각한 분규와 갈등을 이겨내지 못한다. 그래서 고난의 역사가 이어졌다는 거다.

 

  생각하는 철학, 생각하는 종교가 돼야 한다. 생각하는 종교는 다른 것이 아니라 직접 체험하는 종교다. 사변적인, 관념적인 종교, 말만 하는 종교가 아니다. 하느님도 누가 가르쳐준 하느님만 듣고 믿는 것이 아니라 그 하느님을 정말 생각해서 체험적으로 만나고 이해하고 깨달아야 한다. 자기가 체험하고 깨달은 것만이 자기 신앙이고 자기 종교다. 스스로 신을 만나는 종교 그것이 큰 종교다. 중개인들이 전해준 거만 받고 그것만 따르는 신앙은 자기 신앙이 아니다. 깊은 생의 체험, 깊은 정신의 깨달음이 없으면, 진정한 문화가 나올 수 없다. 직접 생각하고 직접 체험해야 위대한 문학도, 예술도, 종교도 나오는데 우리 민족은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이다.

 

  평생 깊은 철학, 깊은 종교를 추구했던 함석헌은 생각하는 민족, 철학하는 민족이 될 것을 역설했다. “생각하는 씨알(백성)이라야 산다.”는 말은 함석헌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제대로 살 수 있고, 철학을 가진 민족이라야 힘차게 살 수 있다. 씨알사상은 씨알이 생각하고 철학하는 주체가 되자는 사상이다. 스스로 생각함으로써 스스로 살 길을 여는 민생(民生)철학이다.

 

  씨알사상이 말하는 종교는 남의 얘기를 믿고 따르는 종교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생각해서 깨닫는 종교다. 종교라기보다 철학이다. 씨알사상은 사람마다 자신의 씨알맹이를 깨닫고 싹틔우고 실천하는 씨알철학이다. 각자 나름대로 철학을 해야 한다. 각자가 스스로 깨닫고 실천하는 종교가 돼야 한다. 예수 석가 공자 노자 소크라테스, 예언자 같은 성현들이 전해준 가르침을 받아들여서 믿고 따르기만 하는 종교는 낡은 종교다. 옛날에는 그렇게 했다. 옛날에는 군왕이 다스리고 미신이 지배하고 작은 지역에 갇혀 살다가 죽었다. 신분계급이 지배하던 시대는 사람 위에 사람이 있으니까 자유로울 수 없어서 남의 말을 듣고 따르면 됐다. 미신이 지배하던 때니까, 지식이 부족하고 스스로 생각하는 훈련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남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좁은 지역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 살아야 하니까 전해 준 가르침 속에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민주시대요, 과학시대고 세계가 하나로 통하는 시대다. 민주시대에는 사람위에 사람이 없다. 내가 주체로 살아야 한다. 과학시대는 진리시대다. 내가 스스로 생각하고 이해하고 깨달아야 한다. 세계 시대는 나의 믿음과 생각이 세계와 통해야 한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철학이나 종교가 중요하면 내가 해야지 남이 한 것을 믿고 따라서는 안 된다. 낡은 종교생활에 빠진 사람은 민주시대, 과학시대, 세계시대의 시민이 될 수 없다. 지금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온 인류와 소통할 수 있고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모든 정보를 접할 수 있다. 몰라서 깨닫지 못했다는 말은 할 수 없다. 누구든지 알 수 있다. 지금은 씨알철학, 씨알종교의 시대다. 씨알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실천해 가는 시대다. 그래야 진정한 민주시대도 오는 거다. 그게 없으면 자유롭고 평등한 참된 민주시대는 올 수 없고 정의와 평화는 이루어질 수 없다.

 

  누가 나선다고 세상문제가 갑자기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2천년, 2천 5백 년 전에 석가, 예수가 나왔어도 세상이 갑자기 평화롭게 되지는 않았다. 2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나왔어도 이상세계는 오지 않았다. 지식인이건 성현이건 남이 해주길 기대하면 안 된다. 누가 와서 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백말 타고 오는 메시아는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속에서 깨닫고 저마다 저다운 저가 돼야 한다. 각자 속에서 생명의 꽃과 열매를 맺어야 한다. 밖에서 누가 뭐라고 해도 야훼 하느님이 ‘나는 나다’ 한 것처럼 민중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는 나다. 내가 씨알이다.’ 하고 선언해야 한다. 그럴 때 민주화가 되고 정의와 평화가 넘실대는 세상이 오는 거다.

 

 

정일우 신부(왼쪽 끝)와 제정구 선생(맨 오른쪽) 1986년 지역사회지도부문 필리핀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고 일본에 들린 사진

 

  제정구 정일우 두 사람이 빈민 속에서 갸륵한 일을 했다. 이런 사람들이 있어야 그나마 우리가 지금 사는 이 정도의 세상이 되는 거다. 갈 길이 아득한 것 같지만 아무리 아득해 보여도 길은 생명과 정신의 씨알맹이, ‘내’ 속에 있다. 우리가 사는 여기까지 예수 석가를 비롯해서 제정구 정일우 같은 이들이 있어서 앞에 빛이 보이고 속에서 용기가 나고 앞으로 나갈 수 있다. 그마저 없다면 지금 우리 세상이 얼마나 캄캄하겠는가. 인도에는 2억 가까운 불가촉천민이 있다. 3천 5백 년 동안 비참하게 살았다. 1997년에 가서 보니까 풀 한 포기 없는 토굴에서 비참하게 살고 있다. 다른 계급들이 부인이나 딸을 겁탈해도 책임지는 사람도 없고 나무라는 사람도 없다. 그것을 보고 정신이 번쩍 나면서 우리가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뭔가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20세기인데도 UN은 뭐하고 지식인들은 뭐하는가 생각하며 마음이 아팠다. 석가 예수 유영모 함석헌 제정구 정일우 같은 분이 인도에 많이 있었으면 그렇게 되었겠는가. **가난공동체생명 제2기 배달학당**

 

 

* 이 글은 사단법인 제정구기념사업회 홈페이지 배달학당게시판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박재순 박사

「씨알사상」지은이 박재순은 1950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였으며, 한신대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신학연구소 번역실장,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연구실장, 한신대 연구교수, 성공회대 겸임교수, 씨알사상연구회 회장을 지냈다. 현재 씨알재단 상임이사, 씨알사상연구소 소장, 다석학회 이사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에「예수운동과 밥상공동체」,「민중신학과 씨알사상」,「열린사회를 위한 민중신학 」,「한국생명신학의 모색」,「다석 유영모」등이 있다.

 

 참고하시면 좋은 책   

*「씨알사상」박재순 나녹

*「하루를 일생처럼」정양모 외 두레  

*「다석 유영모」박재순 현암사

*「다석 유영모 - 가난공동체생명으로 배우다」박재순 제정구기념사업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함석헌저작집 5 한길사

*「예수회신부 정일우 이야기」정일우 제정구기념사업회

*「가난뱅이 하느님 - 제정구, 예수를 읽다」제정구 제정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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