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부여 만수산 무량사 설잠선사 김시습 사리탑

달이선생 2025. 9. 17. 20:08

그는 저자에서 미친놈들과 어울려 재미있게 놀고 혹은 취해서 길에 쓰러져 어리석게 웃기도 했다

남효온,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황원갑, 2010, 고승과 명찰, 도서출판 바움


설잠(雪岑)은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1435~1493)의 법명이다.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사육신과 더불어 세조에게 반기를 들고 단종, 그 위의 문종과 세종에 충성을 다한 선비이다. 그런 그가 속가의 허울을 벗어 던지고 평생을 승려로 살다 그 마지막이 된 곳이 무량사이다. 생육신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이 남긴 생전 설잠의 모습이다.

 

무량사는 신라 범일국사가 창건했다고 하지만 신라 유산은 남아있지 않고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의 것이다. 그래도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당간지주, 오층석탑, 석등이 있다. 1636년 건립된 극락보전이 대표적인 건축물이며, 안에 아미타불과 좌우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시고 있다.

극락전

무량사 중심 법당인 극락전으로 편액이 설잠의 친필이라는 설이 있다.

설잠 김시습의 영정으로 무량사 산신각에 모셔져 있다. 극락보전 뒤편 야트막한 산기슭에 설잠의 마지막이 되었다는 승방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그의 자화상이라고 하고 자찬이 다음과 같다.

이하(李賀)를 굽어보니 해동에 빼어났도다

이름을 드날리니 그대는 누구를 만날 것인가

그대 모습 지극히 묘하고 그대 말은 크고도 호탕하니

의당 그대를 산중에 두어야 하리

황원갑, 2010, 고승과 명찰, 도서출판 바움, 297쪽

'설잠선사 김시습과 만수산 무량사

이하(李賀, 790~816)는 중국 당나라 때 천재로 27세에 옥황상제의 초청을 받아 승천했다는 전설의 주인공으로 김시습은 이하와 같음을 말하고 있다.

1435년 강릉김씨 일성과 선사 장씨 사이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3세 때 외할아버지에게 시를 배워 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복사꽃 붉고 버들잎 푸르러 삼월은 저물어가누나

桃紅柳綠三月暮(도홍류록삼월모)

푸른 바늘에 꿰인 구슬은 솔잎에 맺힌 이슬이라네

珠貫靑針松葉露(주관청침송엽로)

299쪽

조선 천재로 주목받던 그에게 1453년 계유정난은 큰 충격이었다. 바로 삼각산 중흥사에 들어간다. 이어 단종이 폐위되자 사흘 동안 대성통곡하더니 읽던 책을 모두 불태우고 사라졌다. 이때부터 머리를 깎고 설잠이란 법명으로 행각승이 되었다.

내 어려서부터 마음이 질탕하여 명리를 즐기지 않으며 생업을 돌보지 아니하고 오직 청빈으로써 뜻을 지킴을 본분으로 삼아 방랑하고자 작정하였느니라

302쪽

김시습은 능지처참당한 사육신의 시신을 노들강변에서 거둬 노량진 기슭에 묻었다.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는 경주 남산(금오산) 용장골 용장사에서 이후 집필한 것이고 그렇게 떠돌다 부여군 외산면 만수산 무량사 승방에서 1491년 쓰러진다.

봄비 들이치는 이삼월에

중병 겨우 견뎌 선방(禪房)에 일어

삶을 향해 서래의(西來意)를 묻노니

아서라 다른 중들 나설까 두렵구나

307쪽

이렇게 2년 뒤 끝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입적한다. 59세였다. 유언에 따라 화장하지 않고 묻었는데 3년 뒤 관을 열어보니 그의 안색이 생시와 같아 성불했다고 여기고 다비하여 부도를 세웠다.

무량사 매월당부도이다. 가운데 가장 높은 사리탑이다. 사리 1과는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모시고 있다. 무량사 부도전에 있다.

 

 

2014년 2월 8~9일 경상남도 고성 척정리 제정구 선생 묘 참배와 부여 답사를 하였다.

제정구 선생 묘 참배
제말장군을 모신 운곡서원
운곡서원과 제정구 선생 선산 전경
제정구 선생 할머니 기실비(유인전주최씨기실비)와 아버지 제병근 효자 기행비(효자칠원제병근기행비)

척정리 자실마을은 칠원제씨 집성촌으로 50여 가구가 넘게 마을을 이루기도 하였다. 특히 제정구 선생 할머니 최씨 부인이 가산을 크게 일구어 집안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