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수원새빛포럼 애국지사 김세환 임면수 강연 박환 교수

달이선생 2025. 9. 13. 08:51

김세환을 알았지만 김세환을 몰랐다

임면수를 알았지만 임면수를 몰랐다

오늘 그분들을 알게 되었다.

‘순국 80주년 추모, 3.1운동 민족대표 48인 김세환’ 170회 수원새빛포럼(2025.9.11.)

수원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이야기한다면 많은 분들이 있다. 그중 종로교회에서 필동 임면수 선생에 영향을 받아 수원에서 근대 여성 나혜석, 3.1운동의 주역으로 수원의 유관순 이선경 지사와 김노적, 미주지역 안창호가 있다면 여성 지도자로 열성적으로 활동했던 차인재 지사를 키운 사람, 바로 김세환(1889~1945)이다.

올해가 해방 80년이자 김세환 지사가 순국한지 80년이다. 1945년 9월 26일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해방을 맞은 지 한 달 만에 타계한 것이다.

 

동방 김세환(東方 金世煥) 지사는 수원의 여러 애국지사들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수훈되는 건국훈장 중 3등위의 독립장이 수여된 인물이다.(1963) 이는 임시정부 대통령, 주석 등에게 수여된 1등장 대한국민장, 그다음 대통령장에 이은 높은 포장이다. 독립장 다음은 애국장, 마지막 5등장이 애족장이다.

이렇게 훈격이 높은 포장의 이유는 바로 1919년 당시 기독교계로서 3.1운동을 조직하고 펼치는데 서울을 포함한 경기도 총책으로 조직을 이끌었고, 더욱이 당일 태화관의 민족대표 33인과 함께하지 않고 파고다 공원에서 학생과 민중들과 함께 독립을 외치며 가두시위를 펼쳤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추구한 대표적인 민족운동가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요한 인물이지만 그간 김세환을 주제로 단 1편의 논문이나 서적이 간행된 적이 없었다. 이런 인물을 수원대를 정년 한 독립운동사 권위자 박환 교수가 2025년 그의 호 ‘동방’도 찾아 ‘동방 김세환 평전’을 간행하였다. 또한 수원문화원에서 진행되는 수원지역문화연구소 광복 8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9.17.)에 논문 발표까지 예정하고 있다.

 

이러한 박환 교수의 노력은 김세환이 수원의 여러 독립지사 중 격이 높은 독립장이 수여된 인물이지만 그간 연구물이 없어 안타까웠던 차에 별도의 연구비를 따로 지원받은 것은 아니지만 역사학자로서의 책무로 생각하고 ‘잊혀진 역사적 진실의 복원’이라는 사명으로 김세환 지사 평전을 집필하였다고 한다. 앞으로 수원에서 제2, 제3의 김세환이 복원되기를 희망한다고 집필 동기와 향후 바람을 밝혔다. 아울러 향후 개인적으로는 3.1운동 당시를 기록한 파라마운트의 영상(윤관백, 신천지, 1946)을 찾는데 매진하겠다고 다짐하였다. 박환 교수는 아버지, 자녀에 이은 3대를 잇는 역사가 집안이라고 한다.

2025년 9월 11일 오후 4시, 수원시청 대강당에서 제170회 수원새빛포럼 ‘순국 80주년 추모, 3.1운동 민족대표 48인 김세환’ 이라는 주제로 강연에 나선 박환 교수의 이야기다. 그간 미디어에서 보이던 모습과 달리 강연 내내 강단 있고 힘이 넘치는 열정적이었다.

20여 년 전 역사를 본격적으로 전공하면서 수원지역 독립운동사에 관심이 많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차에 호기롭게 박환 교수에게 수원대학교 연구실로 전화를 해서는

 

“우리 지역 삼괴의 3.1운동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사실을 밝히셨는데 내용이 차이가 나는데 그 근거가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다”

 

고 따져 물은 기억이 있다.

“그건 앞으로 선생님이 연구해서 밝혀주세요”

라고 말을 듣고 전화를 끊은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이지만 한낱 학부생 주제에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코웃음이 난다. 하여튼 이런 인연이 있어 늘 그분의 연구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노년에 이르러 더욱 그 연구가 만개하고 있는 모습에서 박수를 보낸다.

 

‘수원새빛포럼은 사회 각 분야 저명한 명사를 초청해 깊이 있는 통찰과 시대적 흐름을 공유하는 고품격 강연 프로그램이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별도 신청 없이 포럼 당일 수원시청 별관 대강당을 찾으면 된다.’고 수원시는 밝히고 있다.

그러나 강당에서 나 이외 시민들이 있었는지 의문이다. 동원된 공무원들이 대규모로 몰려와 열을 지어 출석 체크를 하고 강연이 끝나기도 무섭게 퇴실 체크를 한다. 시민강연 행사라고 하면서 이렇게 공무원을 동원한 관제동원 행사를 하고 있는 수원시에 화가 난다. 아니나 다를까 동원된 공무원들 대다수는 자리에 앉아 스마트폰에 열중이다. 내 앞 공무원은 머리 숙여 애니를 보기 시작해 장장 1시간 반을 그러고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차라리 시민이 열 명, 아니 한 명이 오더라도 시민 중심의 강연이라는 의미를 살리는데 초점을 맞춰야 되지 않나 그저 자리 채우기로 행사를 빛내면 되지 않냐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면 왜 시민포럼을 하는가 차라리 공무원 연수 프로그램으로 하면서 시민 개방 행사로 하던지 의미만 거창한 ‘빛 좋은 개살구’가 된 수원새빛포럼과 이를 주관하는 수원시의 모습에 아쉬움이 크다.

그래도 오늘 이 자리에는 김세환 지사 외손자 고방 윤창혁(막내딸 김정주[1925~2002] 아들, 양평 거주), 독립운동가김세환선생기념사업회 조성진 대표, 임면수 지사 외손자 황윤식, 변기재 지사(1904~ 미상) 아들 변순용 옹(82세) 등 유족이 참석한 뜻깊은 자리였다. 특히 변기재 지사는 김세환 지사와 더불어 1930년대 지금의 오산시 당시 성호면 지역에서 수원청년동맹과 오산노동야학원을 세워 한글을 가르치며 계몽운동에 앞장섰으며 1932년 공산주의자로 몰려 옥고를 치렀고, 이후 사회주의 활동과 해방 후 아들 둘과 월북하여 공훈 되지 못했다.

박환 교수는 참석 유족 한 분 한 분을 소개하고 김세환 지사 특별기획전을 준비하고 한창 전시 중인 수원박물관 이동근 학예팀장에게도 감사를 전했다.

수원시청
박환 교수
김세환 지사 외손자 윤창혁이 인사하고 있다.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의 연락책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수원종로교회의 임응순. 그리고 서울의 박희도, 경기도 남양의 동석기, 이창회 충남 홍성의 김치주의 해석철 목사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기독교 목사 또는 교인들이었는 점이다. 김세환은 수원 지역의 만세운동뿐만 아니라. 3·1운동의 지도부의 한사람으로서 3·1운동을 전국적으로 기획·조직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3·1운동의 중심인물들 가운데 일부는 식민지 치하에서 변절의 길을 걷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세한 은 끝까지 조국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였다. 김세환은 민립대학설운동. 신간회운동 등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그는 진보 세력과 적절한 타협을 통해 신간회에 참여하였고 일정 기간 수원지회장으로도 일하였다.

한편 김세환은 1939년 수원 삼일학교가 새롭게 구성되지 않으면 안 될 위기에 앞장서 수원 갑부인 최상희 씨를 움직여 1만 원을 희사하도록 설득하여 폐교 직전의 학교를 구하였다. 아울러 1941년에는 홍사훈을 설득하여 수원상업학교(현 수원 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해방되기까지 교육에 힘쓰다가 해방된 직후인 1945년 9월 26일에 생을 마감하였다.

이처럼 김세환은 수원 지역뿐만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기독교 민족주의 계열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세환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본고에서는 김세환의 순국 80주년을 맞이하여 새로운 자료의 발굴에 매진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김세환의 제적부, 토지대장, 선교본부의 기록, 대한제국관보, 조선총독부관보, 후손들과의 대화 등을 통하여 김세환의 민족운동을 좀 더 심도 있게 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에 이들 자료 들을 참조하여 김세환의 민족운동을 3·1운동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박환, 「3·1운동 민족대표 48인, 김세환」, 「제11회 수원지역문화연구소 광복 8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 수원문화원 광복 80주년, 수원을 재조명하다, 2025. 9. 17. 수원문화원·수원지역문화연구소. 8쪽.

유복한 가족사진인데 사진 속 인물의 정확한 규명을 못하고 있다. 김세환 지사로 인해 가세가 몰락한 이유 가족이 모두 뿔뿔이 흩어졌었기 때문이다.

 

수원의 상인 집안에서 출생

1876년 조선이 개된 이후 일본 등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 속에서 조선이 자주적 근대화를 주 구하던 불확실성의 시대인 1889년 11월 18일 김세환은 수원군 수원면 남수리 242번지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김동우(金東宇), 어머니는 절강 편씨로, 2남 2녀 중 장남이었다. 김세환의 여동생은 간난. 소간난 등이고, 남동생은 김우석(金右石)이다. 김세환의 아버지 김동우의 제적부에 따르면, 김동우의 둘째 부인 장씨(張氏)에게서도 여러 자녀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3녀 화열, 3남 건환, 4남 성환, 4녀 인숙, 5남 인환, 5녀 화숙, 6남 광환 등이 그들이다.

후손들에 따르면(김세환의 김정주의 아들 윤창혁[1947년생] 등의 증언.) 김세환의 아버지 김동우는 수원에서 큰 목재상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를 통하여 볼 때, 김세환의 집안은 수원에서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가진 상인 집안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수원시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수원시사』 등 1930~40년대 수원상공회의소 명감 등 관련 자료에서 김동우란 이름을 찾기는 쉽지 않다. 다만 김세환이 1920년 출옥 후 목재상을 한 것은 아버지 김동우의 일을 도운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아울러 김세환이 1910년 3월 관립한성외국학교를 졸업한 이후 같은 해 수원상공회의소의 수원상업강습소에서 근무한 점 역시 김동우의 집안이 상업에 종사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김동우의 재산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 김세환이 서울에 있는 관립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경제학과를 중퇴하였고(『김세환의 약사』, 1974년 작성), 여동생인 작은 간난이의 경우도 이화여고를 다닌 것을 보면 재산이 어느 정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세환이 출생한 남수리 242번지는 토지대장에 따르면 136평으로 되어 있다. 한편 대한제국관보 대정4년(1915년) 2월 20일자 <포상> 목배하사(木杯下賜), 즉 조선총독부에서 목배를 하사받은 자 명단에서 김세환의 아버지인 김동우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김동우는 1914년 2월 경상남도 함양, 거창간 도로 소재 교량가설 비로 땅을 기부하고 있다. 즉 <수원군 수원면 김동우, 전(田) 400평>이 언급되고 있다. 당시 수원면 사람으로는 박순태(朴順泰)가 전(田) 300평을 기부하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김동우는 수원면의 상당한 재력가가 아닌가 추정된다. 그러나 김세환이 31운동으로 투옥된 이후 가세가 기울어 1920 년 김동우 소유의 집은 수원의 한성은행으로 등기 이전되었다.( 김세환의 집터 토지대장[2025년 발행])

박환, 「3·1운동 민족대표 48인, 김세환」, 「제11회 수원지역문화연구소 광복 8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 수원문화원 광복 80주년, 수원을 재조명하다, 2025. 9. 17. 수원문화원·수원지역문화연구소. 8~9쪽.

 

 

김세환의 가계는 수원 성안 상인 집안으로 유복하였다.

수원군 수원면 남수리 242번지 출생하였다. 경주 김씨로 조부는 김민재, 조모는 이씨 부인이다. 아버지는 목재상 김동우(金東宇, 1868~1946), 어머니는 절강 편씨이다. 2남 2녀 중 장남이고 부인으로 이화순(1888~1932), 심경자(1916~ )와 사이에서 딸 주희, 주경, 주옥, 정주, 아들 주흔을 두었다. 목재상 아버지 김동우의 뒷바라지로 유복하였지만 그가 3.1운동 경기도 총책으로 일제에 피체되어 투옥되면서 막대한 변호사 비용으로 몰락하여 팔달문 밖으로 이사하였다.(산루리 208번지)

박환, 2025, 『동방 김세환 평전』, 선인, 21쪽.

 

빨간점으로 표시된 곳이 아닌 가운데 높은 건물 좌측 바로 옆이 남수리 집터로 추정된다.

 

팔달문 쪽에서 장안문(長安門) 쪽을 바라고 사내들이 셋이 앞뒤로 서서 빠른 걸음으로 길을 따라 올라간다. 길가에 늘어선 수백 채 묵은 초가들이 처마들을 맞대고 들쭉날쭉 기다랗게 잇대어 있다. 성안에서는 가장 크고 번잡한 길이건만, 여러 해에 걸쳐 길가 집들이 넓던 길을 야금야금 갉아먹어 지금은 그 큰길이 하늘만 겨우 보일 정도다. 집들이 이렇게 길을 메우듯 붙어 있으니 걸핏하면 장안에 큰불이 날 수밖에 없다. 한 집에 불이 나면 그 불이 곧장 이웃으로 옮겨붙어 불만 한번 났다하면 수십 채의 집들이 한꺼번에 타는 것이다.(중략)

세 사내가 걸음을 재촉하여 장작 짐을 비켜 종로 네거리를 바라고 올라간다. 네거리 한참 위쪽에는 수원성 북문인 장안문이 있고, 왼쪽으로 휘어져 한바탕 거리만 들어가면 수원 고을 관아 정문인 삼문(三門)이 나타난다. 세 사내가 지금 찾아가는 곳은 수원 관아를 마주보는 길의 바른쪽 초입에 있는 고을 관아 옥사(獄舍)인 것이다.(중략)

종로 네거리 모퉁이가 저만치 눈에 들어온다. 길가에 늘어선 큰 집채들은 옛날 정조(正祖)대왕이 화성(華城 : 수원성)을 쌓으면서 조선 팔도의 큰 부자 한 집씩을 수원에 불러들여 살게한 때 생긴 집들이다. 비명에 죽은 부왕 장조(莊祖 : 思悼世子)를 못내 그리워한 정조대왕은 부왕의 능을 수원 화산(華山)으로 옮긴 후 수원에 성을 쌓아 능행(陵行)도 자주 했고 애끊는 효심(孝心)도 달래었다. 그러나 성까지 새로 축조하여 수원을 서울에 버금가는 큰 고을로 키우려 했으나 백성들이 그 뜻에 따르지 않아 정조는 못내 가슴이 아팠다. 생각다 못한 정조대왕은 조선 팔도의 큰 부자 한 집씩을 불러들여 그들의 힘을 빌어 수원 고을을 크게 키울 생각을 했다. 결국 그 생각은 실행에 옮겨졌고, 죄 없는 팔도 부자들은 나랏님의 명을 받아 강제로 일가 영거하여 고향을 등지고 수원에 올라와 살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임금이라 해도 순리를 거역해서는 일이 옳게 될 리 없다. 세울이 흘러 정조대왕이 죽게 되자 죄 없이 붙잡혀온 팔도 부자들은 각기 다시 짐을 싸들고 제 고향으로 뿔뿔이 내려갔다. 이렇게 해서 수원 고을 종로 네거리는 팔부자거리라는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이다.

수원 종로 풍경.

홍성원, 『먼동』(문학과지성사, 1993) 1권, 54~56쪽

옛 종로거리 사진과 같은 방향에서 찍은 모습이다. 2025.9.24.
당시 김동우 가의 토지대장을 보면 성안 마을에서도 그 평수가 대단함을 알 수 있다. 이로인해 집안형평이 상당히 부유했음을 알 수 있다.
현 본초카페가빈갤러리(경기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792 1층[팔달로2가 18-3]) 자리가 김세환 지사의 생가지다. 여기 대표가 김세환지사기념사업회 조성진 대표이다.
본초카페가빈갤러리 앞 김세환 지사 등 안내판.
수원백병원과 그 앞 남창교 표석 맞은편이다.
김세환 지사 생가지 맞은편
남창교 표석에서 본 생가지(왼쪽 표지판 빨간점)와 본초카페가빈갤러리. 2025.9.24.
1931년 북수동(보시동) 종로교회 기념사진에 윗줄 임면수 지사와 나란히 함께한 김세환 지사 첫줄 검은옷 가운데 밀러 교장이다.

김세환 지사가 민족운동에 나선 계기는 기독교의 수용과 종로교회를 통한 민족의식의 성장에 있었다. 특히 권사였던 필동 임면수와의 만남은 그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김세환 지사는 보성학교를 나왔다고 하지만 서울의 보성학교는 아니고 정확히 규명되지는 않았다. 아마도 개화기를 거치며 민족계몽운동 일환으로 각지에 세워졌다 없어져간 수많은 근대학교 중 하나였을 곳이다. 어쨌든 이렇게 개화교육을 받은 김세환은 관림한성외국어학교 중국어과를 나왔다. 지금의 서울대 중국어과를 나온 수재였던 것이다. 이후 와세다대학 경제학과로 유학하지만 1910년 우리나라가 식민지가 되면서 중퇴하였다.

당시 많은 이들이 계속 공부하여 식민지 관료로 승승장구했던 것을 생각하면 김세환의 이 결기는 대단한 일이었다.

이렇게 망국의 슬픔과 함께 새로운 길을 찾는데 그게 바로 수원에서였고 교육이었다. 수원상공회의소 부설로 직조공장에 야학인 수원상업강습소(수원중고등학교 전신)에서 학감을 맡았다. 게다가 여성교육의 중함을 알고 삼일여학교에 학감을 하였다. 이러한 선택에 바로 수원 여성교육을 일군 선교사 밀러의 영향이 컸다. 교장이었던 밀러는 여성들을 제대로 잘 교육하고자 뛰어난 교사를 원했는데 여기에 김세환이 적임자였던 것이다.

박환 교수는 말한다.

“수원이 이제는 이러한 외국인 공훈자를 찾아 기념하고 이들을 통해 세계와 소통해야 된다.”

고 따라서 김세환 지사는 수원유지 최상희를 움직여 삼일학교에 1만원을 희사(1933)하게 하였고 1939년 삼일학원 재단, 화성학원(현 수원중고등학교, 1941) 재단 설립지원을 하였으며, 수원상업전수학교의 설립지원에 나섰다.

 

민족의식의 형성-종로교회와 임면수

김세환은 기독교 민족주의자였다. 김세환의 어린 시절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그는 수원종로 교회가 시작할 무렵부터 교회에 출석하며 일생을 기독교 인사들과 교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교회에 출석하는 착실한 교인으로 살았는데, 장년이 되어서도 술과 담배를 전혀 하지 않을 정도로 신앙적 절제력이 강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세환이 꿈을 키워나갈 시기인 구한말에 그가 출생한 남수동의 이웃 마을 보시동(북수동)에 수원교회가 세워져 선교하며 교육과 구국활동에 힘쓰고 있었다. 김세환은 수원교회에 출석하는 이들 지역인사들의 지도를 받으며 기독교인으로 성장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임면수가 아닐까 추정해 본다. 김세환은 지역 기독교 지도자들의 영향으로 교육가, 독립운동가로서 꿈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이런 영향 속에서 그는 일찍부터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고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신학문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서울로 올라가 관립한성외국어학교에 진학하였다.(홍석창, 『수원지방 31운동사』. 왕도출판사 1978. 128-129쪽.)

1931년에 촬영된 <1931년 수원종로 교회직원일동>에서도 김세환은 수원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임면수, 그리고 삼일여학교 교장 여선교사 밀러 등과 함께 보이고 있다. 밀러는 1901년 내한하여 인천과 황해도 해주 선교에서 활동하다가 1908년 수원지방으로 옮긴 후 1909년에는 삼일여학교(현 매향중학교, 매향여자정보 고등학교) 교장으로 시무하였으며, 1926년에는 수원지방 전도부인의 기숙사를 세웠다. 1929년에는 안산 샘골에 학교를 세워 최용신의 일터를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1931년 제1회 기독교 조선감리회 연합연회에서 한국 최초로 여성목사안수를 받았으며, 이후에도 쉬지 않고(중략)

박환, 「3·1운동 민족대표 48인, 김세환」, 「제11회 수원지역문화연구소 광복 8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 수원문화원 광복 80주년, 수원을 재조명하다, 2025. 9. 17. 수원문화원·수원지역문화연구소. 9쪽.

 

수원 종로사거리 종루(여민각)와 수원종로교회. 2025.9.24.
삼일여학교 나혜석 등과 단체사진(1916.8.24.). 맨 앞 김세환 오른쪽 나이든 부인이 김사라(김몌례의 모), 그 오른쪽 김몌례, 바로 위 나혜석, 나혜석 왼쪽 박충애, 그 바로 옆 차인재 지사
가운데 위쪽의 나혜석, 왼쪽 박충애, 박충애 아래 김몌례 모 김사라, 가운데 김몌례.
수원인민일동 고서거 추모깃발 서울에서 만세운동 전개와 체포, 현장의 지도자 김세환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 참여 파고다 공원 만세선언 덕수궁 광장까지 시민과 함께 만세운동 주도 스코필드 사진촬영, Paramount-영상찰영(윤관백, 신천지, 1946) 3월 12일 서울서 체포 투옥

수원인민일동 봉도기(奉悼[애도를 표함]旗). 보통 망자의 상여를 앞서 이끄는 기를 만장기라고 한다. 봉도기는 상여 뒤를 따르는 추모객들이 표시로 내걸은 것이다. 동방 김세환 평전 : 네이버 블로그

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독립의 열망이 들끓을 때, 김세환은 3.1운동 순회위원이 되어 경기도와 충청도 만세운동의 핵심지역을 맡는다. 특히 경기도의 수원과 안성은 3.1운동 대표적인 항쟁지였는데 이러한 역할에 김세환이 있었다. 김세환은 북감리교 박희도와 연계하여 세브란스 병원(서울역 인근) 회의 참여(1919.2.22.) 후 순회위원으로 파견되어 충남 해미 김병제 목사, 공주 황칠석 목사, 경기도 이천 이강우(이강백) 목사, 수원 임응순, 남양 동석기, 이창회 목사와 주도적으로 접촉하였다.

 

일명 3.1운동 계보도. 『서울과 평양의 3·1운동』 도록 208~209쪽(서울역사박물관, 2019. 2.) 1919년 3월 22일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작성, 일본 외무성 자료실 외교사료관 보관 조선총독부가 만든 이른바 ‘3.1운동 계보도’를 KBS 탐사보도부(역사학자 김광만 공동)가 일본 현지에서 최초 발굴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3.1절 [특집 KBS 뉴스9]에서, 단독 발굴한 '3.1운동 계보도' 보도.
계보도 상세 '김세환 부분'

 

마침내 1919년 3월 1일 기차를 타고 상경하여 파고다공원에서 기미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수원인민일동 만장기 아래 궐기였다.

김세환의 이러한 노력은 1920년 7월 20일 동화일보 전면에 민족대표 48인으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게 된다.

그런 그의 활동으로 꽃 핀 것이 바로 수원 구국민단 활동(비밀결사 1920. 6.)이었고 여기에 삼일여학교가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수원지역의 여러 애국지사를 길러내는데 김노적, 차인재(삼일여학교 교사, 미주 대한인국민회), 최문순(삼일, 이화학당), 이선경(신풍, 경성여자), 박선태(휘문)가 대표적이다.

동아일보 1920년 7월 12일 기사(PPT 오기)

3.1운동으로 피체되었다가 출옥한 김세한 지사는 수원지역 민족운동가로의 새로운 시작을 하였다. 조선기독교 광문사 설립과 활동, 민립대학 설립운동, 수원지역 사회운동가로서 신간회 수원지회 부회장을 맡았고 수원체육회 초대 회장을 하였다.

금일이 대공판(조선민족대표 48인의 초상) 동아일보 1920. 7. 12.). 사진 기사 바로 위 인물 중 왼쪽에서 네 번째로 김세환 지사 위치.
동아일보에 실린 김세환 지사 초상
금일이 대공판(손병희 포함 조선민족대표 48인) 동아일보 1920. 7. 12.만인의 시선이 모히는 곳에 당국의 처치는 엇더할지작년 삼월 일일에 탑골공원에서 ‘만세’ 소래가 이러나며 명월관지덤데 일호실에서는 조선민족대표자 삼십삼인이 모히어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독립을 선언한 후로 손병희외 사십칠인은 서대문감옥돌벽 늘구들에서 답답한 더위와 아푼치위를 근격지 열여섯 달과 열이틀 만에 오날 오전 팔시에야 감옥에 매인 그네의 운명을 결단하는데 일막이 열니게되얏다 이에 세상사람의 시선은 모다 이네의 재판이 엇지나될가하는데로 모하엇고 또한 조선이 생긴 후로 처음 열니는 공판이오 더욱히 사건이 중대함으로 당국자의 주의도 크려니와 장차 하회가 엇지될는지 우리는 매우 주목치 아니치 못하겠스며 오날 덩동털도부 아래층의 법뎡에서는 다음표와 가튼 순서로 사십팔인을 안게 한다더라 한병익~최린, 김세환, 송진우~이종훈.​대공판과 엄중한경계손병희는 결석 신병으로인하야(중략) 동아일보 1920년 07월 12일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김세환 지사의 제자 김노적 지사는 수원상업강습소 2회 졸업생으로 보조교사 박선태 지사, 이선경 지사 등과 수원구국민단 활동을 하였다. 박환, 2025, 『동방 김세환 평전』, 선인, 39쪽.

3.1운동 주모자로 출옥 후 김세환 지사는 조선기독교 광문사 설립과 아울러 수원지역 사회운동에 중심에 서서 활동하였다. 자주적 고등교육을 꿈으로 임면수 지사와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좌우합작의 결과로 창립된 민족운동 단체인 신간회에 참여하여 수원지부를 결성하고 활동하였다.

 

신간 수원지회 각 구역반 조직

신간회 수원지회에서는 정기대회를 경과한 후, 회무를 일층 민첩히 하기 위하야 좌기(左記)와 여히 각 구역을 분(分)하여 반(班)을 설치하게 되엇다는데 조직일자와 장소는 다음과 갓다더라(수원)

양감반 구역 양감면 전원 일자 12월 30일 장소 양감면 사창리

오산반 구역 성호면 남부 일자 1월 1일 장소 성호면 오산리

세교반 구역 태장면, 성호면 북부, 정남면 일자 1월 2일 장소 성호면 세교리 광성학원

장안반 구역 장안면 우정면 전원 일자 1월 10일 장소 장안면 어은리(기타는 아직 미정)

조선일보 1928년 12월 30일. 동방 김세환 평전, 174쪽.

 

아울러 수원체육회 설립과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이명으로 ‘동방’이 적혀있다. 그간 호는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박환 교수가 평전을 써서 알리고 있다.

 

강연이 끝나고 김세환 외손자께서 꽃다발을 증정하였다.
공훈전자사료관 김세환https://e-gonghun.mpva.go.kr/diquest/Search.do#

이와같이 김세환 지사의 수훈에는 막내딸 김정주(1925~2002) 여사의 노력이 있었다. 한국전쟁 중 남편과 사별하고 어려운 형편 속에서 아버지 김세환 지사의 자료를 모아 ‘김세환 의사 약사(略史)’를 간직하여 이 공적으로 마침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 국립묘지에 안장할 수 있었다. 이후 보훈 지원은 남동생에게 돌아갔지만, 198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가면서 보훈자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실질적인 유족으로서 역할을 다하였고 지금은 아들 고봉 윤창혁이 잇고 있다.

필동 임면수 지사 동상

수원시청 맞은편 수원올림픽공원에 위치한 필동 임면수 지사 동

 

 

제11회 수원지역문화연구소 광복 8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

수원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