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진천, 천안 답사(이상설 생가)

달이선생 2018. 7. 13. 11:00

충청북도 진천과 충청남도 천안을 2018년 7월 13일 금요일 답사를 나섰다.

  처음 간 곳은 충청북도 진천의 이상설 생가이다. 그리고 진천읍에서 조명희 문학관을 들렀다. 이어 충청남도 천안의 목천으로 이동하여 이동녕 생가 및 기념관을 찾았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항일운동과 관계된 위인과 발자취를 찾은 길이었다.


  이상설 선생은 경주이씨의 집성촌인 산직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아버지 이행우는 선비였고 집안은 넉넉하지 않았다. 집안의 동부승지 이용우가 산직마을을 찾아 가서 이상설을 인물됨을 보고 양자로 들여 이때부터 한양에서 살면서 신학문 등을 두루 섭력하게되었다. 특히 수리에 능했다고 한다.


"이상설씨는 원래 대한학문학의 제일류이니 재성(才性)이 절륜하고 조예가 깊어 동서양학문을 모두 밝게 깨닫고 정밀히 연구하였다. 성리문장과 정치, 법률, 산술 등 학이그 모두 부(富)라"-대한매일신보 1905.11.24


  이상설의 신학문에 대한 탐독은 그가 연구저술한 신학문 연구서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화학계몽초', 물리연구인 '백승호초', '법학만초', '국가편', 특히 1886에서 89년까지 연구하여 펴낸 수학연구서인 '수리'가 유명하다.(1900년에는 '산술신서(算術新書)를 펴냄)  현재 이상설의 유품인 신학문 연구서적은 막내딸 이가희(이남규 손자 이승복 동생 민복과 결혼, 이상설 유언)시집인 예산 이남규가(수당 고택, 한산이씨)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남규는 성호 학문을 이은 기호유림 성재 허전을 사사한 구한말의 대신이자 의병운동에 나선 독립운동가이다. 

  이상설은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연해주 솔빈강(라즈돌로에, 수이푼강)에 화장되어 뿌려질 때까지 이상설 선생의 희생은 권력자로서 양반 기득권을 가진 상층부로서의 삶이 어때야 하는지 그 책임을 제대로 보여주고 실천하였던 몇 안되는 민족지도자이다.

  그의 산직말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초가가 재현되어 있고 부인과 합장인 초혼묘와 선생을 추모하는 사당인 숭렬사, 유허비, 기념관이 남아있다.  기념관 뒷켠엔 현재 유명무실한 기념관을 대체할 신축부지라고 한다.

 

  이상설 선생의 독립운동은 망명거점을 중심으로 세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최초 망명지인 간도 용정, 연해주 블라디보스톡 신한촌, 서거에 이르는 연해주 우수리스크이다.

  먼저 간도 용정에서의 그의 홛동은 용정 3.13 기념사업회장 이광평은 "문화의 뿌리가 교육으로 이상설은 만주에서 민족 교육을 뿌리내린 사람이다"라고 한다. 이상설은 망명하여 전재산을 들여 서전서숙을 세우고 숙장이 되었다. 현재 용정실험소학교 자리로 일제는 간도파출소(영사관)에서 이상설의 행보를 주시하였고 독립운동의 학습공간인 서전서숙을 폐교시키기까지 한다. 당시 해조신문(75호 1908.5.26. '북간도 서전학교 와산실록')은 서전서숙의 폐교의 원통함을 피력하는 한편, "이제 일인은 교육의 원수오 학교의 도적이로다"라고 주장하며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의 근간이었던 서전서숙의 폐교를 비통해했다. 이러한 서전서숙의 교사와 학생들은 폐교후 명동서숙으로 이어지고 확대된 명동학교(현재 명동학교 기념관으로 보전)는 1천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하며, 민족독립운동의 중심으로 역할을 한다. 이러한 민족교육은 창동학교, 정동학교, 이어 신흥강습소까지 이어진다.

  이상설의 민족독립을 위한 교육운동의 자취가 현재 용정 대성중학교내 윤동주 기념관 옆 이상설 역사전람관을 통해 알리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윤동주 기념관까지는 알아서 찾아보지만 이상설 역사전람관은 잘 몰라 관람객이 드문 실정이다.

  망명 2기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은 헤이크특사 당시 블라디보스톡역에서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로 출발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한인 최초의 거주지인 신한촌이 건설된 곳으로 당시에 1만명 정도가 살았다.  개척리 혹은 고려인 거리(카레이스카야)로 불린 곳으로 포그라니치나야 거리 일대이다. 현재 그 자취를 느낄만한 것은 남아있지 않고 역사적 사실을 기념한 '신한촌 기념비'가 서있다.

  이상설은 이곳에서 헤이크특사 좌설 후 1910년 7월 유인석, 이범윤 등과 13도 의군과 성명회를 창설하였다. 또한 연해주 지역에 블라디보스톡만이 아닌 우수리스크, 스파스크, 하바로스크 등에 지사를 가진 한인회원 1914년 당시 8,579명의 권업회에도 참여하는데 1911년 12월 6일 당시 임원으로 초대회장 최재형, 총재 이범윤, 선전부장 신채호, 초대 부회장 홍범도(1920년대 독립전쟁 당시 봉오동 전투의 영웅으로 "나는 홍범도 뛰는 홍범도'로 불렸다. 외손녀 김알라가 그의 유품인 나무 총집과 지도주머니를 보관하고 있다.)


2018. 10. 21.(일) 경기천년 팟캐스트에 게스트로 홍범도 장군의 외손녀 김알라 씨가 출연하고 있다.(오른쪽 두 번째)




등 내노라하는 독립운동가들과 의사부 의장 이상설로 이름을 올린다. 이 당시 이상설은 교육 운동도 펼쳐 하바로브스카야에 한민학교를 설립하고 남녀노유에 애국가를 가르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썼다.

  1914년 마침내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최초의 망명정부를 건설하는데 '대한광복군정부'가 바로 그것이다. 이상설은 정통령에 선임되었다. 당시 연해주는 한인독립기지로 3만에 이르는 병력을 있었다.  대한광복군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러시아와 일본이 동맹을 맺어 일본이 요구한 한인의 정치 활동을 막아 해체되고 권업회도 러시아로 인해 해산되었다. 이처럼 연해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이 힘들어지자 이상설은 1915년 상하이로 가서 박은식(朴殷植)·신규식(申圭植)·조성환(曺成煥) 등과 신한혁명당을 조직하여 본부장에 선임되었다. 

  불꽃이되어 산화한 이상설의 마지막은 우스리스크 라즈돌로에 강변 한어 수이푼강, 우리말 솔빈강에서 화장과 함께 재가 되어 뿌려진다. 이곳에는 이상설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현재 고려인들이 매년 8월 추념식을 가지고 있다. 우스리스크는 노비출신으로 연해주 한인의 대부이자 동지인 최재형이 1919년 이사와서 일본에 의해 순국할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저택 : 우스리스크 보로다르스크 38, 삼남 최발렌틴의 아들 최발렌틴 후손) 우스리스크는 한반도와 가장 인접한 곳이자 연해주에서 한인이 가장 많이 이주한 곳이다. 땅이 기름지고 물이 풍부하여 논농사 등 한인개척이 가장 활발한 곳이었다.

 이상설은 1917년 3월 2일 망명지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상설은 임종을 지킨 이동휘, 이회영, 이동녕, 백순, 조완구, 이민복 등의 동지들에게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이상설 유언

 

참고 : KBS 2017.8.14 방영 [서거 100주년 특집다큐 '이상설의 길을 걷다'(진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