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네 체질이 비록 미물이나
또한 하늘이 낳은 것이고
소리가 비록 울음 네게서 나오지만
하늘이 실은 너를 빌려 욺이니
너의 소리가 아니라
곧 하늘의 정(情)이다
(然而爾質雖微, 亦天之生. 聲雖在爾, 天實假鳴, 非爾之音, 卽天之情)
벌레소리를 읊은 부(蟲聲賦)
: 이옥 저,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역주, 2001, 『역주 이옥전집』 1권, 소명출판, 53쪽
자유를 입에 담는 순간 자유롭지 못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유를 꿈꾼다. 항간에 인기 있는 방송 ‘자연인’은 이러한 사람들의 생각을 잘 파고든 TV프로그램이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자유를 외쳤지만 자유롭지도 못했고 더군다나 대한민국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고자 비상계엄을 획책하여 파면된 윤석열 대통령도 있다.(2025.4.4.11:22)
진정한 자유인으로 회자되고 있는 그리스의 대문호 니코스 카잔차키스(Νίκος Καζαντζάκης,1883-1957)는 생전에 자신의 묘비명을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Δεν ελπίζω τίποτε. Δεν φοβʊμαι τίποτε. Είμαι λεύτερος)”
라고 남긴 자유인으로 기억된다.
우리에겐 이옥(李鈺, 1760 ~ 1815)이 자유인이었다.
보통 자유는 물리적 구속에 대한 자유를 생각하지만 보여지는 것보다 생각의 자유에 대한 갈망과 추구는 심오하다. 더욱이 전근대사회에서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런 자유로운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글로 쓰고 실천한 사람이 이옥이다. 동시대 박지원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옥 선생은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11세손 무반 출신 서족이다. 자는 기상(其相)이고 호는 문무자(文無子), 경금자(絅錦子), 매화외사. 매암, 매계자, 매화탕치농, 청화외사. 화서외사, 도화류수관주인, 화석자, 석호주인, 문양산인, 죽리자, 매화산초, 매화초자 등 많다. 조부는 동윤(東胤), 부친은 진사 상오(常五)이고 형제로 남양 홍씨 부인(홍이원) 이복형 영, 박, 동복으로 남양 홍씨 부인(홍이석, 홍이원과 사촌) 동생 집이 있다. 고조 이기축은 사촌형 완풍부원군 이서와 함께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녹훈된 인물이다. 특기할 것은 아버지 이경유의 서자로 승적된 인물이다. 승적은 서자에게 가계를 승계하는 것을 말한다. 관찰사를 거쳐 예조의 승인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친족 적자 계승인 입후와 달리 서손에 대한 차별적이어서 양반 신분보장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들의 혼맥은 서손인 남반들과 이루어진다. 이러한 고조부 이기축에 대한 재밌는 기록이 있는데
“이기축은 점사의 고노로 힘만 세고 우둔한 인물이었는데, 선견지명이 있는 처의 덕으로 반정에 함께 하여 출세할 수 있었다.”(야담집 계서잡록)
다만 이기축은 반정공신으로 승적을 통해 양반 신분이 되었다. 다만 본인을 포함하여 이후 모든 후손들은 서손혼맥으로 이루어지는 차이가 있다. 보통 이 경우 남반이라고 한다. 문과 급제를 못하고 고위 관료가 된 출신자도 남반이다. 중인으로 고위 관료를 한 이들도 남반에 해당한다. 서손이라고는 하나 이옥 선대와 본인에 이르기까지의 서손인맥들은 당대 문무로 명성이 자자한 집안이었다. 외할아버지 홍이석은 무과로 이성현감을 지낸 사람이고 특기할 것은 맏사위가 유춘으로 『발해고(渤海考)』를 쓴 유득공 선생의 아버지다. 따라서 이옥 선생과는 이종사촌이다. 그리고 부인은 해주 정경조의 딸이다. 소북 명가 정효준의 후손으로 정경조는 문과 급제 후 병조참판을 지낸 인물이다. 부인 역시 서녀로 '해주정씨대동보'에는 올라있지 않다. 이는 서손에게는 족보에 올리지 않기 때문이다.
자녀로는 아들 우태(友泰, 전주 유만양의 딸과 혼인 아들 명달[明達])와 네 딸을 두어 파평 윤수, 연일 정권채, 남양 홍희환, 파평 윤덕채에 출가하였다.
이옥 선생의 집안은 운림도정 복부터 남양 송산(양주)에 선산을 쓰고 특히 조부 동윤부터 남양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부친 상오는 한양에서 거주(경교장 근처 추정)하다 1781년부터 남양과 오가며 살았고 상오가 죽자 1797년에 이옥 선생은 한양 집을 정리하고 남양으로 낙향한다.
이옥 선생은 1790년 원자(훗날 순조) 정호를 기린 증광사마시에서 생원 2등에 급제하였다. 한양에 살면서 1792년에 성균관에 들어갔다. 성균관 유생으로 김려, 강이천, 유정양, 서유진, 민사응, 박상좌, 김약검, 최구서, 이상중 등 친구들과 교유하였다. 이밖에도 인연이 닿은 만송 유당, 남양의 조춘일, 서대문 참판 홍주만, 안의현감 박지원 등이 있다. 특히 김려와 강이천은 평생을 함께한 친우였다. 특기한 것은 김려는 노론이었지만 당색에 구애받지 않고 교우한 인물이며, 강이천을 비롯한 대부분의 친구는 소북이었다. 특별히 박지원과의 인연은 삼가현으로 유배와 같았던 충군(직역으로 군역을 지게 함)가던 길에 만난 것이다. 이밖에 성균관 유생으로 수발을 받던 총명한 아이 양운득을 총애하였다.
정조의 문체 반정(文體反正)으로 화를 당하다
문체 반정은 정조가 조선 후기 유행한 감정에 호소하는 소설풍의 한문 문체를 금지하고 순정 고문으로 환원시키려던 정책으로 열하일기와 양반전 등 여러 한문 소설로 큰 인기를 끌던 박지원의 자유로운 패관 문장을 금지한 것이다. 이러한 소설 문체는 보통의 고문인 논어, 맹자, 시경과 같은 경구를 통한 글쓰기가 아닌 희로애락의 인간 감정을 드러내고 농담 등을 곁들인 자유로운 표현이 들어간 문장이다. 이에 대한 박지원의 대답은 걸작이다.
"문장에 고문과 금문의 구별이 있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글을 쓰는 것이다.
(문체 혁신으로 불숨을 터트린 천재들(김용심), 다-다- 사)경기민예총 연간지 6호, 2024, 279쪽)"
동지 정사 박종악(朴宗岳)과 대사성 김방행(金方行)을 불러들여 접견하였다. 상이 종악에게 전교하기를,
"어제 책문의 제목 하나를 내어서 위서(僞書)의 폐단에 관해 설문을 해보았다. 근래 선비들의 추향이 점점 저하되어 문풍(文風)도 날로 비속해지고 있다. 과문(科文)을 놓고 보더라도 패관 소품(稗官小品)의 문체를 사람들이 모두 모방하여 경전 가운데 늘상 접하여 빠뜨릴 수 없는 의미들은 소용없는 것으로 전락하였다. 내용이 빈약하고 기교만 부려 전연 옛사람의 체취는 없고 조급하고 경박하여 평온한 세상의 문장 같지 않다. 세도와 유관한 것이어서 실로 작은 걱정이 아니다. 내가 그것을 바로잡아 보려고 고심 끝에 책문의 제목으로까지 내었던 것인데 만일 그 폐단만을 말하고 실효를 거두지 못하면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이러한 폐단의 근원을 아주 뽑아서 없애버리려면 애당초 잡서(雜書)들을 중국에서 사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제일이다. 그리하여 앞서의 사행 때도 물론 누누이 당부해 왔었지만 이번 사행에는 더욱더 엄히 단속하여 패관 소기(稗官小記)는 말할 것도 없고 경서(經書)나 사기(史記)라도 당판(唐板)인 경우 절대로 가지고 오지 말도록 하고,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을 건널 때 하나하나 조사해서 군관이나 역관 무리라도 만일 가지고 오는 자가 있으면 바로 교서관에서 압수하여 널리 유포되는 폐단이 없게 하라.
경사(經史)는 잡서와는 다르므로 이렇게 엄금한다면 다소 지나친 것 같으나 우리 나라에 있는 것만도 빠진 것 없이 다 갖추어져 있어 그것만 외우고 읽어도 무슨 일인들 참고하지 못하겠으며 어떤 문장인들 짓지 못하겠는가. 더구나 우리 나라 서책은 종이가 질겨 오랫동안 두고 볼 수 있으며 글자가 커서 늘 보기에도 편리한데 하필 종이도 얇고 글씨도 자잘한 당판을 멀리서 구하려 하는 것인가. 그런데 이것을 꼭 찾는 이유는 누워서 보기에 편리해서인 것이다. 이른바 누워서 본다는 것이 어찌 성인의 말씀을 존숭하는 도리이겠는가."
하니, 종악이 아뢰기를,
"지금 성교를 받자오니 문교(文敎)를 숭상하고 바른 학문을 부양하여 만세를 두고 영원한 장래를 염려하시는 위대한 전하의 말씀임을 알고 이루 말할 수 없이 흠앙스럽습니다. 신도 당연히 엄히 금하여 만에 하나라도 그 뜻을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대사성 김방행에게 이르기를,
"성균관 시험의 시험지 중에 만일 조금이라도 패관 잡기에 관련되는 답이 있으면 비록 전편이 주옥 같을지라도 하고(下考)로 처리하고 이어 그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여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하여 조금도 용서가 없어야 할 것이다. 내일 승보시(陞補試)를 보일 때 여러 선비들을 모아두고 직접 이 뜻을 일러주어 실효가 있게 하라. 엊그제 유생 이옥(李鈺)의 응제(應製) 글귀들은 순전히 소설체를 사용하고 있었으니 선비들의 습성에 매우 놀랐다. 지금 현재 동지성균관사로 하여금 일과(日課)로 사륙문(四六文)만 50수를 짓게 하여 낡은 문체를 완전히 고친 뒤에야 과거에 응시하게 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일개 유생에 불과하여 관계되는 바가 크지 않지만 띠를 두르고 홀을 들고 문연(文淵)에 출입하는 사람들도 이런 문체를 모방하는 자들이 많으니 어찌 크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일전에 남공철(南公轍)의 대책(對策) 중에도 소품(小品)을 인용한 몇 구절이 있었다. 그가 누구의 아들인가. 나도 문청(文淸)121) 에게서 배웠지만 지성으로 가르치고 인도해 주었기에 비로소 글을 짓는 방법을 알았다. 그의 문체는 고상하고 전중(典重)하여 요사이의 문체에 비할 바 아니었으므로 나도 그 문체를 매우 좋아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의 아들로서 그러한 문체를 본받는다면 되겠는가. 오늘 이 하교가 있었음을 듣고서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올바른 길로 가기 전에는 그가 비록 대궐에 들더라도 감히 경연에 오르지는 못할 것이며 집에 있으면서도 무슨 낯으로 가묘(家廟)를 배알하겠는가. 공철의 지제교 직함을 우선 떼도록 하라. 그 밖에 문신들 중에서도 너무 좋아하는 자들이 상당히 있으나 일부러 한 사람 한 사람 지명하고 싶지 않다. 정관(政官)으로 하여금 문신 중에서 그런 문체를 쓰는 자들을 자세히 살펴 다시는 교수(敎授)의 후보자로 추천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甲申/召見冬至正使朴宗岳、大司成金方行。 上敎宗岳曰: "昨日出一策題, 設問僞書之弊, 而近來士趨漸下, 文風日卑。 雖以功令文字觀之, 稗官小品之體, 人皆倣用經傳, 菽粟之味, 便歸弁髦。 浮淺奇刻, 全無古人之體, 噍殺輕薄, 不似治世之聲, 有關世道, 實非細憂。 以予矯捄之苦心至意, 至有發策之擧, 而若徒說其弊, 而未責實效, 則亦何益哉? 如欲拔本而塞源, 則莫如雜書之初不購來。 前此使行, 固已屢飭, 而今行則益加嚴飭, 稗官小記姑無論, 雖經書、史記, 凡係唐板者, 切勿持來。 還渡江時, 一一搜驗, 雖軍官譯員輩, 如有帶來者, 使卽屬公于校館, 俾無廣布之弊。 經史則異於雜書, 如是嚴禁, 雖似過矣, 而我國所存, 咸備無闕, 誦此讀此, 何事不稽, 何文不爲? 況我國書冊, 紙韌而可以久閱, 字大而便於常目, 何必遠求薄小纖細之唐板乎? 此不過便於臥看, 必取於此, 而所謂臥看, 亦豈尊聖言之義乎?" 宗岳曰: "今承聖敎, 右文敎扶正學, 爲萬世長遠之慮, 大哉王言, 不勝欽仰。 臣當嚴禁, 對揚萬一矣。" 上謂大司成金方行曰: "泮試試券, 若有一涉於稗官雜記者, 雖滿篇珠玉, 黜置下考, 仍坼其名而停擧, 無所容貸。 明日設陞補, 會多士而面諭此意, 俾有實效。 日昨儒生李鈺之應製句語, 純用小說, 士習極爲駭然。 方令同成均, 日課四六滿五十首, 頓革舊體, 然後許令赴科, 而此不過一儒生所關不大, 而至於垂紳正笏, 出入文淵之人, 亦多有依倣此體者, 寧不大可悶哉? 日前南公轍之對策中, 有數句引用小品處, 是誰之子? 予亦學於文淸, 至誠訓導, 始知爲文之方。 蓋其馴雅典重, 非比近日文體, 故予亦甚好之。 是父之子, 而效此文體, 其可乎? 今日聞此下敎, 革心歸正之前, 渠雖入闕, 而不敢登筵席, 在家而何顔拜家廟乎? 公轍知製敎之銜, 爲先減下。 此外文臣亦多有酷好者, 而姑不欲一一指名, 令政官詳察諸文臣中爲此體者, 勿復檢擬於敎授望)
『정조실록』 36권, 정조 16년(1792) 10월 19일 갑신 1번째기사
1792년 유생 이옥은 10월 19일 정조로부터 응제문의 문체가 ‘순용소설체’라고 책함을 받고 벌과로 날마다 사륙문 50수를 짓게 하였다. 그리고 응제문의 문체를 고쳐야만 과거 응시를 허하였다. 특히 정조는 더욱 분이 풀리지 않아 10월 24일
승정원이 서학 교수(西學敎授) 이상황(李相璜)의 함답(緘答)에 관해 아뢰자, 전교하기를,
"일전에 보니 초계 문신 남공철의 대책문은 패관 문자(稗官文字)를 인용하고 있었고, 상재생(上齋生) 이옥(李鈺)이 지은 표문(表文)은 순전히 소품(小品)의 체재를 본받고 있었다. 이옥이야 한미한 일개 유생이므로 그렇게 심하게 꾸짖을 것까지야 없겠지만 그래도 반장(泮長)을 특별히 단속하여 승보 시험의 시부(詩賦)에도 그렇게 불경(不經)스런 문체는 엄히 금하도록 아울러 명했었다. 명색이 각신이고 또 문청공(文淸公)의 아들이라는 자가 가훈을 어기고 임금의 명령도 저버리고 그렇게 금령을 범하는 일을 하다니 어찌 몹시 놀랍지 않겠는가. 옛날 유자(儒者)들도 이단(異端)의 글들을 인용하는 일이 많았으니 참으로 이른바 ‘주인을 꼭 물어 무엇하리’인 것이다. 이단은 물론이고 비록 패관체의 글이라도 그 글이 혹 이치에 가깝다거나 그 말이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고 그것이 구미에 맞아 모방한 것이 아니라 별 생각 없이 그냥 써 본 것이라면 이는 공적인 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공철이 대책문 중에 인용한 골동[古董] 등의 말은 그것이 비록 그를 배척하는 뜻으로 쓴 것이기는 하지만 만일 그 학문을 즐기지 않았다면야 그 책을 볼 리가 있었겠는가. 더구나 그 출처를 따져보면 이치에 어긋나고 사람에게 해를 주는 것으로 음란한 음악이나 사특한 여색 정도가 아닌 경우이겠는가. 특별히 초계 문신을 불러 더욱 엄하게 신칙하고 이어 공철로 하여금 마음을 바꾸어 바른 길로 돌아오기 전에는 대궐에 들어오더라도 감히 경연에 오르지 못하게 하고 대궐을 나가서도 감히 집안 사당에 절을 드리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이것이 어찌 다만 공철 한 사람의 문체 때문에 그랬겠는가.
또 이상황 등에게도 연전에 역시 엄히 경계한 일이 있었다. 마음으로 생각하기에 아직 옛 버릇을 완전히 고치지 못한 때문이라고 여겨서 먼저 그가 맡고 있던 상임(庠任)을 해임시키도록 명하였었다. 그런데 오늘 마침 물어서 아뢰게 하였더니 그 대답이 그러한데 설마 입으로만 그렇게 하고 마음은 그렇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악을 버리고 선으로 향하는 정성이 말 이외로 나타나고 있으니 매우 가상한 일이다. 그야말로 사람이 누가 허물이 없겠는가. 문제는 허물을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
직급이 낮은 최필공(崔必恭)에게도 칭찬을 해 주었는데 하물며 경악을 출입하던 신하이겠는가. 전 교수 이상황에게 전직을 그대로 맡기고 대신 임명하려던 후보자 추천은 그만두도록 하라. 다시 생각해 보니 공철 역시 애매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을 것 같다. 내각으로 하여금 공함(公緘)을 보내 공초를 받아 올리게 하라."
하였다. 앞서 정미년에 상황과 김조순(金祖淳)이 예문관에서 함께 숙직하면서 당(唐)·송(宋) 시대의 각종 소설과 《평산냉연(平山冷燕)》 등의 서적들을 가져다 보면서 한가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상이 우연히 입시해 있던 주서(注書)로 하여금 상황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보게 하였던 바 상황이 때마침 그러한 책들을 읽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가져다 불태워버리도록 명하고서는 두 사람을 경계하여 경전에 전력하고 잡서들은 보지 말도록 하였었다. 상황 등이 그때부터 감히 다시는 패관 소설을 보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남공철이 대책(對策)에 소품의 어투를 인용한 것을 인하여 마침내 공함을 보내 그의 답을 아뢰도록 명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들이 나이 젊고 재주가 있었으므로 그들로 하여금 실학에 힘쓰도록 하여 그들의 뜻과 취향을 보려 함이었다.(承政院以西學敎授李相璜緘答啓, 敎曰: "日前見抄啓文臣南公轍對策, 引用稗官文字, 上齋生李鈺表作, 純倣小品體裁。 鈺則一寒微儒生, 雖不足深責, 猶且另飭泮長, 幷與陞庠詩賦嚴禁。 如許不經之體, 則名以閣臣, 又名以文淸之子, 悖家訓負君命, 爲此犯禁之事, 寧不痛駭乎? 古之儒者, 亦多引異端之書, 眞所謂何須問主人也? 異端無論, 雖稗官, 其文或近理, 其言或益人, 亦非嗜而模象, 而偶然下筆者, 則不過是公罪也。 彼公轍策中所引古董等語, 雖出詆斥之意, 若不嗜其學, 豈有見其書之理乎? 況究其出處, 背於理害於人, 不翅若淫聲邪色, 特召抄啓文臣, 嚴加申飭, 仍使公轍, 革心歸正之前, 入不敢登筵席, 出不敢拜家廟。 此豈特爲一公轍之文體, 而若是哉? 且以李相璜等之年前亦有嚴飭之擧, 意謂尙不快悛舊習, 先命減下所帶庠任, 而今日適令問啓, 其對若此, 寧或口然而心不然也? 祛惡向善之誠, 發於言外, 極爲可尙。 此正人孰無過, 改之爲貴之謂也。 卑秩之崔必恭猶施嘉奬, 況出入經幄之臣乎? 前敎授李相璜仍任前職, 出代望筒勿施。 更思, 公轍亦不可置之䵝昧之中, 令內閣發緘取招以聞。" 先是丁未年間, 相璜與金祖淳伴直翰苑, 取唐、宋百家小說及《平山冷燕》等書以遣閑, 上偶使入侍注書, 視相璜所事, 相璜方閱是書, 命取入焚之, 戒兩人專力經傳, 勿看雜書。 相璜等自是, 不敢復看稗官小說。 至是, 因南公轍對策, 用小品語, 遂命發緘以聞, 蓋以諸人年少有才, 欲其懋實學, 而視其志趣也。)
『정조실록』 36권, 정조 16년(1792) 10월 24일 기축 3번째기사
벌과와 수군 충군 등의 엄포를 놓아 이옥을 옥죄던 정조는 마침내 1795년 8월 상재생으로 영란제에 응시하였는데 문체가 괴이하다는 정조의 문책으로 과거를 그치게 하고 충청도 정산현(청양)으로 충군하였다. 유생으로 군역에 충군되는 것은 수치 중에 큰 수치였다. 이후 성균관을 떠나 멀리 삼가현(합천)으로 충군되는 유배길을 떠난다. 이옥은 말한다.
기상의 말에
'나는 요즘 세상의 사람이다. 내 스스로 나의 시, 나의 문장을 짓는데
선진양한에 무슨 관계가 있으며, 위진삼당에 무어 얽매일 필요가 있는가'
하였다.(其相之言曰 吾今世人也, 吾自爲吾詩吾文, 下關乎先秦兩漢, 何繫乎魏晉三唐)
이옥 저,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역주, 2001, 『역주 이옥전집』 3권, 소명출판, 261쪽
친우 김려가 '묵토향초본의 뒤에'에 붙인 제후에서 이옥의 말을 듣고 남긴 것이다. 이 유배길에 중요한 만난이 이루어진다. 바로 안의현감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을 만난 것이다. 그리고 이옥은 너무도 담담하게 문체 반정의 원조가 되는 박지원을 다음과 같이 일렀다.
박후가 말하였다.
"내가 집을 지으니, 사람들이 이를 듣고 말하길, '중국식으로 지으면 비방이 클 것이다’
라고 하였다.(侯曰 我作室家, 人聞之者曰 ‘華之制, 其嗔大)"
이옥, 이옥전집 1, 옥변, 『남정십편』 267쪽
연암 박지원이 중국 제도를 본받아 벽돌로 건물을 지은 사실을 남긴 것이다. 허나 집을 빗대어 자유로운 문체로 살아가는 박지원을 말했고 자신을 밝힌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이옥은 종종 박지원의 글을 언급하기도 하지만 이날의 만남과 이후에도 박지원은 이옥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었다. 이에 대해서는 노론 명망가인 연암과 한미한 소북인 이옥의 현실적인 처지와 서로의 기질 차이로 소원했다고 말하기도 한다.(한국학중앙연구원 신익철) 하지만
사실 이 문제는 생과 사의 문제였다. 문체 반정은 정조의 집요한 보수 회귀를 통한 정치 권력의 중심을 잡았던 일종의 공안정치였다. 이러한 사태는 이미 그 이전 영조 때 불었던 피바람에 기인한다. 바로 ‘명기집략(태조 이성계의 선계 오류)’으로 일어난 옥사로 영조의 편집증적인 대응으로 문인과 책 거간꾼들이 대규모로 화를 당한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책 거간꾼을 잡아들이게 해 책자(冊子)를 사고 판 곳을 추문(推問)하도록 하여 김이복(金履復)·심항지(沈恒之) 등을 차례로 정죄(定罪)하였다. 그리고 또 이희천(李羲天)을 심문하니 이희천이 공초(供招)하기를,
"비록 《명기집략(明紀輯略)》을 사서 두기는 하였습니다만 실제로 일찍이 상고해 보지는 못하였으며, 박필순(朴弼淳)의 상소 내용을 대략 들은 뒤에 그대로 즉시 불태웠습니다."
하니, 마침내 하교하기를,
"아! 지금 진주(陳奏)하려고 하는 때에 우리 나라에 사가지고 온 자를 만약 정법(定法)하지 않는다면 무너져 내리는 마음의 아픔과 박절함을 어떻게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차례대로 자세히 묻도록 하라."
하였는데, 과연 이희천 및 책 거간꾼 배경도(裵景度) 등을 찾아내었으니, 그것이 만약 《봉주강감(鳳洲綱鑑)》에 서로 뒤섞였다면 미처 보지 못했다는 것 또한 이상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망측(罔測)한 책을 서로 사고 판 것이니, 듣고서 마음은 섬뜩하고 뼈가 멍이 든 것같아 전례를 따라 처리할 수가 없다. 그러니 이희천 및 책 거간꾼 배경도는 장전(帳殿)에서 세 차례 회시(回示)한 뒤에 훈련 대장(訓鍊大將)으로 하여금 청파교(靑坡橋)에서 효시(梟示)하게 하여 강변(江邊)에 3일 동안 머리를 달아 놓도록 하고, 그들의 처자[妻孥]는 흑산도(黑山島)에다 관노비(官奴婢)로 영속(永屬)하게 하였으며, 인하여 박필순을 앞으로 나오도록 명하고 이르기를,
"상소의 요지[疏槪]를 어떻게 만들었는가?
하자, 박필순이 대답하기를,
"선원 계파(璿源系派)의 허위의 역사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노여워하여 하교하기를,
"그 상소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지금 상소의 요지를 듣건대 나도 모르게 마음이 내려 앉았다. 상(賞)을 줄 것은 상을 주고 경계할 것은 스스로 경계해야 하는데 이와 같은 큰 요지를 중외(中外)에 반포(頒布)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진주(陳奏)하는 의미이겠는가? 전 승지(承旨) 박필순을 회양부(淮陽府)에다 멀리 귀양보내도록 하라."
하였다.(丙寅/上御建明門, 拿入冊儈, 推問冊子買賣處, 金履復ㆍ沈恒之等, 以次定罪。 又問於李羲天, 羲天供以爲: "雖買置《明記輯略》, 而實未嘗考見, 乃聞朴弼淳疏槪後, 仍卽付丙矣。" 遂敎曰: " 嗚呼! 今者陳奏之時, 我國買來者, 若不定法, 崩心痛迫, 何可勝言? 以次盤問。" 果得李羲天及冊儈裵景度等, 其若相雜於《鳳洲綱鑑》, 則未及見, 亦非異事。 此則罔測之書, 互相買賣, 聞來心寒骨靑, 不可循例處之者。 李羲天及冊儈裵景度, 帳殿回示三匝後, 令訓將靑坡橋梟示, 江邊懸首三日, 其妻孥黑山島永屬官奴婢, 仍命弼淳進前曰, "疏槪何以爲之?" 弼淳對以: "璿泒誣史云云。" 上怒下敎曰: "其章雖嘉, 今聞大槪, 不覺心隕。 賞自賞飭自飭, 如此大槪, 頒布中外, 是豈陳奏之意乎? 前承旨朴弼淳, 淮陽府遠竄。")
영조실록116권, 영조 47년(1771( 5월 26일 병인 1번째기사
이 사건으로 연암은 친우 이희천을 잃었다.(1771년) 그는 8촌형이자 영조의 사위 박명원(화평옹주)이 소장했던 ‘명기집략’을 읽은 죄로 죽임을 당했다. 물론 박명원은 불문에 붙여졌다. 억울한 친우의 죽음으로 그늘 과거를 응시를 단념하고 깊은 체념과 슬픔을 억눌렀다. 그런 사정을 잘아는 그가 젊은 이옥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연암은 신분 따위로 사람을 구별하고 원근으로 사귐을 한 사람이 아니다. 이렇게 노회한 박지원은 본인보다 이옥을 더 생각했으리라 이희천이 그랬듯 이 문체 반동으로 그 보다는 한미한 이옥이 더 큰 화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이다. 그리고 그 둘은 이래나저래나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둘만이 통하는 정신적 교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는 말과 기록은 더 이상 필요 없으리라 한사람은 조선의 자유로운 문체를 널리 퍼트린 자유인이요 또 한사람은 그런 자유로운 문체를 고수하며 스스로 고난을 자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1800년 2월 18일 이옥 선생은 삼가현감의 허락을 얻어 과거 응시를 위해 상경하였다. 공주에 이르러 이미 사면령이 내려져 자유의 몸이 됨을 알았다. 삼가의 체류한 날이 118일, 왕래한 거리가 1,780리에 달했다.
(이옥전집 문여 1 봉성문여 추기남정시말[남쪽 귀양길의 시말을 적다] 참조)
재밌는 것은 이옥의 글쓰기와 말이 사람들을 움직였는지 그가 삼가현을 떠날 때 마을 부로와 동자 수십이 잔치를 베풀고 떠날 때도 아전과 이원식 등이 십오 리 밖까지 따라와 울며 전송했다고 한다. 정조의 미운털은 박혔어도 사람들과의 정리에서 풍족했던 그였다. 실제로 가계 살림도 신분적인 한계는 있어도 경제적으로는 풍족했다. 이렇게 1815년 돌아간 그해까지 이옥은 자유였다.
이옥 선생이 거주한 곳으로 추정되는 화성시 송산면 매화동 마을이다. 멀리 화량진 앞바다가 보인다. 이옥 선생이 활동하던 당시에는 사진의 오른쪽 일대가 간척되기 전이라 모두 바다였다.그가 43세 때인 1802년에 지은 ‘효반안인한거부’에 배경으로 등장한다. 시화방조제 건설(1987) 이후 바다가 막히며 순연한 농촌으로 변하였다.
반안인의 한거부를 본받아 짓다(효반안인한거부)
...이에 선인이 남긴 낡은 집
나라 남쪽 기내에 있는데
집은 이 한 몸 노숙을 가릴 만하고
전답은 내 식구의 주림 구할 만하네
산기슭에 기대어 담을 두르고
바다를 향한 사립문 닫아 두었기에
사람의 왕래는 드물로
세상의 시비와는 떨어져 잇네
그 남쪽에는
바다에 걸쳐 진(화량진)이 설치되어
전선이 백 척이나 되는데
나각을 불어 새벽을 깨우니
다섯 가지 병기(도검모극시)가 산처럼 쌓여 있네
그 북쪽에는
목도가 물을 따라 둘려 있는데
심들은 구름에 연해 있고
오는 짐대 가는 돛에
뱃노래 서로 들린다네
산은 와룡의 호를 전하고
땅은 도화원에 가까운데
한 골짜기를 차지하여 삶의 터 마련하고
두세 집 어울려 마을을 이룩했네
이에 네모난 못을 파고
또 작은 후원을 만들고
버드나무 심어 문을 가리고
앵두나무 가꾸어 울타리로 삼았네.
(중략)...
이옥 저,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역주, 2001, 『역주 이옥전집』 1권, 소명출판, 183~184쪽
그의 본가는 경기도 남양 매화동에 있엇고 얼마간의 전장과 노비가 있었다. 그의 '물고기 기르는 못에 대하여'에 따르면 바닷물을 막아 어장을 조성하는데 아흐레 걸려 오십여 명의 공력을 투입했다고 하며, '차조 이야기'에는 차조밭을 가꾸는데 "어른 종 한 명, 아이 종 넷, 여종 셋"이 동원되었고, 또 넓고 한적한 땅에 온갖 곡식을 가꾸며 "집안에 수백 권의 장서"를 갖추고 "마당에는 기십 본의 꽃을 심었다"고(효반안인한거부) 한다. 비교적 여유가 있는 경제적 여건 아래 독서와 창작에 몰두할 수 있었던 셈이다.
이옥 저,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역주, 2001, 『역주 이옥전집』 1권, 소명출판, 9쪽
답사 : 2018년 4월 30일
화성향토문화연구소 이경열, 백도근 안내
·조선 후기 자유인 이옥 유허지(추정)
위치 :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지화리 217-1(이봉산 서길)
이옥(李鈺, 1760 ~ 1815)은 조선 후기 자유로운 문인으로 화성문화원에서 발굴 선양하고 있다. 이옥이 성균관 유생시절 정조에게 문체반정으로 과거가 막히고 여러번 군역에 보충되다 합천에 유배를 가는 등, 어려움을 겪고 외가가 있는 남양으로 낙향하여 은둔하며 말년을 보낸 곳이다. 이옥의 가계는 조부가 왕족의 서얼로 무관으로서 인조반전에 참여한 이후 부친이 진사를 지냈다.(화성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정찬모 부소장 족보 발굴)
김려(金鑢,1766~1822)와 강이천(姜彛天, 1769 - 1801)과 교류하였다. 특히 김려의 『담정총서 (潭庭叢書)』에 이옥이 쓴 11편의 시가 실려있다. 이 시는 당대 자유로운 민중생활을 묘사하고 있어 당대 교조화된 주자학 풍토를 비판하고 있다.
이옥이 거주한 곳은 집앞 연못을 넓게 파고 화초를 기르며 부유하게 살았다. 작품을 보면 근처 화량진의 수군 범선이 지나는 것을 확인하여 수군의 돛을 본 기록이 있는데 이를 통해 마을 앞 시화호로 나가는 수로가 옛 해로로 그 사실을 입증해준다.
대중국 무역항 마산포
위치 :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고포리
고대부터 중요 포구로 당성(당은포)과 함께 대중국 무역로의 중요 항구 중 하나이다. 특히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임오군란(1882) 진압을 목적으로 출병한 청나라 군대에 붙잡혀 이곳 최씨 종가에서 하루를 머물고 청나라로 납치된 역사적 장소이다.
또한 수원 출신의 소설가 홍성원의 대하역사소설 '먼동'의 중요 배경이기도 하다. 먼동의 주요인물(프로타고니스트)인 마름이자 친일부역자로 거듭난 송근술(안타고니스트)이 한양 필운방에서 낙향하여 김대감댁 마름과 당두리선 선두를 했던 곳이고 그의 딸 쌍순(보경)이 김대감댁 막내 손자 태환의 아이를 낳고 서울로 떠나간 곳이다.
예전에 조선 문인의 문집을 보고 고전, 고문이 수두룩하여 흥미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이익 선생의 성호사설과 장유 선생의 계곡집을 보며 흥미를 얻었다.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안산 아래의 지금의 화성지역이 면포를 심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흥미로웠고 계곡집에서는 고위 권신이 향촌에 은거하며 부로들과 어울리는 모습이 재밌었다.
오래 전에 알았고 다시 찾은 이옥 선생의 글에서 재미를 느낀다. 그가 딛고 살았던 삶터의 이야기가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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