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시 37

연성촌사.. 박동량

연성촌사(蓮城村舍) 연성촌사는 조선 선조대 중신 박동량(朴東亮,1569~1635)의 손자인 박세채(朴世采, 1631~1695)가 남긴 시에서 시흥시 군자동 가능골과 비앞골을 이르는 말이다. 박세채는 시흥시의 가래울마을에 연고가 있는 양명학자 정제두(鄭齊斗)의 스승으로 이 마을 동쪽으로 가깝게 가래울이 위치한다. 그리고 박세채는 당대 소론의 영수였다. 노소분당과 갈등이 첨예하였으나 그는 노론의 영수 송시열의 손자인 송순석을 사위로 맞았을 정도로 평소 당론에 엄격하기보다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노소의 균형을 이루었다. 이러한 박세채 선생이 종손이자 사촌형인 박세교(朴世橋, 1611∼1663)가 있는 가능골과 비앞골의 연성촌사를 찾아서 시를 남겼다. 박세교는 금양위(禁陽尉) 박미(朴瀰)와 정안옹주(貞安翁主,..

벽처에서 울린 '독립만세'... 군자면 주민들 일제에 맞서다

벽처에서 울린 ‘독립만세’… 군자면 주민들 일제에 맞서다 군자면민들의 광복축하모임(군자면 거모리 1945.8) 출처 : 시흥시청 향토사료실 시흥시 삼일독립운동 기념비(군자초등학교) 2016.3.1 건립 군자면에서 만세운동이 감돌다 시흥시는 전근대 인천과 안산의 일부가 합쳐진 지역이다. 일제의 강점이후 1914년 군면통폐합으로 시흥군이 만들어지고 서남부 지역에 군자면(君子面, 현재 시흥시와 안산시의 일부가 합쳐진 지역)이 설치되었다. 이러한 군자면 중심에는 조선후기 안산군 최초의 장시 석곡산대장(石谷山垈場, 현재 서안산나들목 부근)이 위치하였다. ‘안산군읍지(安山郡邑誌, 1871)’에 따르면 “대월면에 산대장시가 있으며, 읍으로부터 서남쪽으로 20리 떨어져 있다. 벽처(僻處, 외따로 떨어져 있는 매우 후미..

시흥 추곡(가래울) 정제두 선생 유허지

한국양명학의 대종사로 정제두는 그간 강화(江華)를 중심으로 이야기되었다. 그가 강화로 이전하기 전, 시흥시 화정동 추곡(楸谷=가래울)에서 20년간 살았고, 그의 호는 ‘추곡’이다. 추곡(楸谷)의 학문에서 만약 범위의 넓은 곳을 가지고 논한다면 혹 옛사람에게는 조금은 손색이 있으나 밝게 나아가고 스스로 얻으려던(自得) 지취(旨趣)에서는 이 세상에서 뒤따라갈 이가 거의 없을 것이라.(楸谷之學 若論廣闊處 或少遜古人 而明造自得之趣 當世無幾及之者-『하곡집』,「연보」, 숙종 22년 병자) 정제두와 교분이 두터웠던 친구 민이승(閔以升, 1649-1698)이 정제두를 ‘추곡’으로 부르고 있다. 민이승은 안산시기에 양명학에 심취해 있던 정제두를 바로 잡으려 한 인물이다. 추곡시기 민이승은 자신의 둘째아들 민경창(閔景昌)..

카테고리 없음 2018.08.23

이숙번 묘 및 신도비(시흥시 향토유적 제18호)

이숙번 묘 및 신도비 시흥시 향토유적 제18호 "수리산에서 나오 맥 중에 서쪽으로 간 것이 가장 짧은 줄기이다. 안산(安山) 바닷가에서 그쳤는데, 경성 공경가(公卿家)들의 조상 묘가 많다. 또 서울과 가깝고 생선과 소금이 풍부하므로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 집도 많다."-택리지, 수원부 중 택리지에서 언급하였듯이 시흥시의 옛 권역인 안산에는 서울의 유력한 양반사대부가의 무덤이 즐비하다. 시흥시 소재 문화유산에도 조선 시대 임금의 국구(장인)였던 이름난 인물이 3명이나 된다.(류자신, 한준겸, 장유) 이처럼 공경가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인물이자 유명인의 무덤인 이숙번의 묘도 시흥시에 있다. 물왕저수지에서 금화로를 타고 안산시 화정동 방향으로 가다보면 시흥시 산현동 골월 입구 우측 도로가에 이숙번의 묘소..

시흥, 천안 답사(시흥 오이도 선사유적 공원 1)

시흥의 오래된 과거 '시흥 오이도 선사유적 공원' 답사 시흥시는 서해안에 위치한 중심 도시로 지리적으로 환경적으로 평택, 화성, 안산시와 비슷하며, 도시 규모와 도시의 경제적 활동도 유사하다. 시흥시의 국가지정문화재로는 사적이 두 개, 보물이 한 개 있는데, 국보와 같은 사적은 시흥 방산동 청자와 백자요지(413호)와 시흥 오이도 유적(441호)이 있고, 보물은 시흥 소래산 마애보살입상(1324호)이 있다. 특히 시흥 오이도 유적은 신석기 조개더미(패총)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흥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 유적이며, 문화유적이 개발의 논리로 파괴되거나 주민들의 무관심으로 방치되는 것이 허다한 것에 비해 오이도 유적은 그곳에 사는 오이도 주민들이 직접 나서서 문화유적으로 보존하고 지..

장유 선생 묘 및 신도비(시흥시 향토유적 제2호)

장유 선생 묘 및 신도비 2016년 9월 26일 신풍부원군 장유의 묘는 덕수장씨 세장지인 시흥시 장곡동 상양산 자락에서 장유 선생의 외손자인 조선 현종의 특별히 살핌으로 새롭게 자리를 잡은 곳이다. 이곳의 지명은 '장군재'로 성씨 '장' 봉군 '군' 고개 '재'를 따서 지은 것이다. 딸인 인선왕후가 현종을 낳아 이후 왕통은 모두 인선왕후의 혈육이 된다. 정조가 1789년 8월 행행(行幸)에서 16일 안산관아에 머물면서 "우리나라에 본디 현명한 국구(國舅)가 많으나, 문장과 공업(功業)의 성대함으로는 신풍부원군만한 이가 없다. 숭릉(崇陵-현종) 어필(御筆) 신도비(神道碑)의 성대한 유적을 추모하니 배나 슬픈 생각이 든다. 고 부원군 장유와 영가 부부인 김씨의 묘소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 그리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