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양명학의 대종사로 정제두는 그간 강화(江華)를 중심으로 이야기되었다. 그가 강화로 이전하기 전, 시흥시 화정동 추곡(楸谷=가래울)에서 20년간 살았고, 그의 호는 ‘추곡’이다.
추곡(楸谷)의 학문에서 만약 범위의 넓은 곳을 가지고 논한다면 혹 옛사람에게는 조금은 손색이 있으나 밝게 나아가고 스스로 얻으려던(自得) 지취(旨趣)에서는 이 세상에서 뒤따라갈 이가 거의 없을 것이라.(楸谷之學 若論廣闊處 或少遜古人 而明造自得之趣 當世無幾及之者-『하곡집』,「연보」, 숙종 22년 병자)
정제두와 교분이 두터웠던 친구 민이승(閔以升, 1649-1698)이 정제두를 ‘추곡’으로 부르고 있다. 민이승은 안산시기에 양명학에 심취해 있던 정제두를 바로 잡으려 한 인물이다. 추곡시기 민이승은 자신의 둘째아들 민경창(閔景昌)을 정제두에 맡겨 공부를 시켰으며, 정제두가 추곡에 살 때 별세하였는데, 정제두는 제문을 지어 그를 추모하였다.
안산시기에 정제두가 ‘추곡’으로 불렸던 흔적은 많이 보인다. 정제두가 안산으로 내려가자 그 근처로 이사했던 박심(朴鐔, 1652-1707, 박문수의 종조부로 박정희 대통령이 박문수의 방계후손)은 「묘지명」에서 정제두를 ‘추곡’으로 적고 있다. 이밖에도 정제두의 제자인 이광신의 동문 김택수가 지은 제문(祭文)에도 정제두를 ‘추곡’이라고 하고 있다. 이처럼 하곡으로 널리 알려진 정제두지만, 강화 이전 안산시기에 ‘추곡’으로 불러진 것이 확실하므로 앞으로 그의 호인 ‘추곡’도 ‘하곡’과 더불어 병용되어야 한다.
정제두가 추곡(楸谷)에 정착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은 기사환국(己巳換局)이다. 환국 전해인 1688년(숙종 14)에 40세 이르러 재신(宰臣)들이 연거푸 정제두를 천거한 끝에 겨울에 평택현감을 제수 받자 1689년(숙종 15)년 봄에 부임 한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기사환국으로 사상적 스승인 서인(西人)의 우계 성혼(牛溪 成渾)과 율곡 이이(栗谷 李珥)가 남인(南人)들에 의해서 문묘(文廟)에서 출향(黜享)되자 정제두는 평택현감을 버린다. 이후 조정에서는 천리(擅離 : 멋대로 직책을 떠남)하였다는 죄목으로 문초를 가하고 면직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양을 떠나 안산(安山) 추곡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다.
정제두는 41세부터 안산(安山)에서 거주했는데, 현재 시흥시 화정동(花井洞) 가래울(楸谷)이다. 추곡은 가래울의 한자식 명칭으로 조선시대 안산군에 속했다. 이곳은 한국사상사에서 양명학을 집대성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던 정제두가 41세에 이주하여 60세까지 학문에 매진하였던 곳이다. 특히 정제두는 이곳에서 한국양명학의 중요한 저술인 『학변(學辨)』과 『존언(存言)』을 집필하고, 스승 박세채(南溪 朴世采, 1631-1695)에게 자신이 양명학을 성학(聖學)으로서 위기지학(爲己之學)한다고 밝혔던 역사적인 곳이다.
대개 제가 왕씨의 설에 애착을 가지는 것이 만약 남보다 특이한 것을 구하려는 사사로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면 결연히 끊어 버리기도 어려운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학문하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성인의 뜻을 찾아서 실지로 얻음이 있고자 할 뿐입니다.(蓋齊斗所以眷眷王氏之說 倘出於求異而濟私 則決去斷置 非所難焉 但未敢知吾人爲學 將以何爲耶 思欲求聖人之意而實得之而已-『하곡집』,「답박남계서[答朴南溪書]」정묘)
가래울은 화정동 고주물과 능곡동 능골 사이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고주물과 능곡동을 왕래하는 분기점이 되는 마을이다. 가래울 남쪽 지역을 웃말, 동북쪽 지역은 외딴말, 서쪽 지역을 양지말, 외딴말 북쪽 지역을 아랫말, 아랫말 서쪽 지역은 양지말, 동북쪽 지역은 외딴말이라 각각 부른다.
정제두의 후손인 정한일(1942년생으로 가래울 태생이다. 본적은 화정동 650번지. 지주사공파, 포은공파 32대손이다.)에 따르면 가래울은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5대손인 정광윤(鄭光胤 1483-1524)의 사패지로서 영일 정씨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 포은공파(圃隱公派)의 400년 세거지다. 따라서 이곳에는 정제두의 6대조이자 입향조 정광윤과 충주 정씨의 묘, 5대조 정운(鄭運), 고조 정구응(鄭龜應), 종증조 정열(鄭說), 증조모 창원 황씨(昌原黃氏)의 묘가 화정동 산90-4번지 및 그 일대에 위치한다.
추곡은 선대 묘소는 물론, 아버지와, 첫 번째 부인인 파평 윤씨(부 윤홍거)의 초장지였다. 따라서 추곡은 정제두가 한양에 살면서도 자주 들리던 곳이다. 후에 두 번째 부인인 남양 서씨(부 서한주)도 추곡에 권조(임시 장사)하였다가 천안으로 이장하였다. 이렇듯 추곡은 영일 정씨의 세장지로서 정제두 생전에도 영위되면서 여러 차례 집안의 장지(葬地)로 초장(初葬)과 이장(移葬)이 거듭되었다. 이러한 추곡은 정제두가 강화로 옮겨간 이후에도 자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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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가 위치한 추곡이 기록되어 있는 부분
檢閱公(鄭光胤, 1503-1544)墓表
有明,朝鮮,藝文館,檢閱,鄭公諱光胤,字胤仲,迎日人,高麗,侍中,圃隱先生,諱夢周,五世孫。祖諱永宣,考諱仁昌,監察,妣平山申氏,監司自準女。本生親,司勇,諱浣。
公生於弘治癸卯(癸亥年?,1503?),丙子(1516)司馬,癸未(1523)登謁聖文科,為翰林。甲申(甲辰?,1544)卒,壽四十二,葬安山楸谷癸坐原。
安人鄭氏,生一男曰雲,贈判書。是生參奉龜應,贈贊成,曾孫謹,承文院博士,贈領議政。玄孫維城,右議政,忠貞公。忠貞生二男,長男昌徵,郡守,贈贊成,生子齊賢,尚公主,為寅平尉。次男尚徵,進士,贈贊成,生二子,曰齊斗,贊成,曰齊泰,玉署,擢府尹。舊乙酉有表石,今頑缺,齊斗等改立石,識其陰,時我主上十二年丙辰三月日,皇明崇禎後九十二年。
명나라시기 조선국 예문관 검열 정광윤(鄭光胤, 1503-1544)은 자(字)가 윤중(胤仲)이며 영일 정씨다. 고려 시중 포은 정몽주 선생의 5세손이다. 할아버지는 정영선(鄭永宣)이며 아버지는 정인창(鄭仁昌)이며 감찰을 지냈고 어머니는 평산 신씨 감사 신자준의 따님이다. 낳아주신 생부는 사용을 지내신 정완(鄭浣)이다.
정광윤께서는 홍치 계묘(계해년?, 1503?)에 태어나서 병자년(1516) 사마시에 합격하고 계미년(1523)에 알성시 을과(謁聖試 乙科)에 합격하여 한림이 되었다. 갑신년(갑진년?, 1544?)에 돌아가시고 향년 42살이며 안산 추곡(楸谷) 계좌(癸坐)에 묘지를 모셨다.
부인 안인(安人) 정씨는 아들 정운(鄭雲)을 두었고 뒤에 판서를 추증 받았다. 정운은 참봉 정구응을 낳았고 찬성을 추증 받았댜. 증손 정근은 승문원 박사이며 영의정을 추증 받았다. 현손 정유성은 우의정이며 시호가 충정(忠貞)이다. 정유성은 아들 2명을 두어 큰아들 정창징이 군수이고 찬성을 추증 받았고 아들 정제현을 낳아 공주의 부마가 되어 인평위가 되었다. 둘째 아들 정상징은 진사이며 찬성을 추증 받았고 아들 2명을 낳아 정제두는 벼슬이 찬성이고 정제태는 옥당에 있다가 한성부윤에 발탁되었다.
지난 을유년에 표석을 세웠으나 지금 깨어져서 정제두 등이 다시 세우고 비석의 글을 새겼다. 우리 임금 경종 12년(丙辰, 1736, 하곡선생 88살) 3월이며,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 이후 92년이다.(역주 하곡학연구원장 이경룡)
가래울 영일정씨 세장지의 입향조 정광윤 묘, 아래 정열 묘, 옆에 창원황씨 묘가 있다. 창원황씨 묘비의 가래울 표시 부분
贈貞敬夫人昌原黃氏墓表
惟我曾祖妣,贈貞敬夫人黃氏,葬安山郡磨河山西楸谷坐癸之原,即鄭氏先壟也。以府君別葬于江華,不克祔。
蓋我曾祖考,務功郎,承文院,博士,贈領議政府君,諱謹,字汝頊,迎日縣人。圃隱文忠公之八世孫,參奉,贈贊成,諱龜應之子。
夫人,其繼配也。黃氏,本昌原大姓,高麗,平章事石奇之後。高祖,諱衡,著武功,為工曹判書,莊武公。曾祖,諱琛,漢城判尹。祖,諱大任,同知中樞府事。考,諱致敬,全羅道觀察使。妣,昌寧成氏,司藝諱子濟之女。
以萬曆丙子十二月生夫人,端莊有女行,歸于議政府君。戊戌,府君捐館,夫人育一男,方三歲。上奉姑夫人孝慎,下訓孤幼,甚得母道。其辛勤成立,卒顯為名輔,則是惟我王父右議政諱維城。夫人嘗從養于南原府,崇禎乙亥八月十三日卒于府,壽六十。後累贈至今封。
孫男昌徵,郡守,尚徵,進士。郡守男,齊賢,寅平尉。進士男,齊斗,齊泰方仕,餘不能悉記。
齊斗等敬識此于墓石,時崇禎後甲子八月日。
증조할머니 정경부인을 추증 받은 황씨 묘지를 안산군 마하산 서쪽 추곡 계좌(癸坐)에 모셨는데 정씨의 선영이다. 증조할아버지 묘지는 따로 강화도에 모셔서 합장하지 못하였다.
증조할아버지는 무공랑이며 승문원 박사이고 영의정을 추증 받은 정근(鄭謹)이며 자(字)가 여욱(汝頊)이며 영일 정씨다. 포은 정몽주 선생의 8세손으로서 참봉을 지내고 찬성을 추증 받은 정구응의 아들이다.
증주할머니 황씨는 둘째 부인이다. 황씨는 창원이 본관이며 고려시기 평장사 황석기(黃石奇)의 후손이다. 고조할아버지는 황형(黃衡)이며 무공이 뛰어나고 공조판서를 지내고 시호가 장무공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황침(黃琛)이며 한성부 판윤을 지냈다. 할아버지는 황대임(黃大任)이며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아버지는 황치경(黃致敬)이며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어머니는 창원 성씨이며 사예를 지낸 성자제(成子濟)의 따님이다.
증조할머니 황씨는 만력 병자년(1576) 12월 태어났고 단정하고 여성의 덕행을 실행하다가 증조할아버지에게 시집왔다. 무술년(1598)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 아들이 겨우 3살이었다. 위로는 시부모님께 효도를 다하고 아래로는 어린 아들을 가르쳐서 어머니 도리를 다하였다. 고생하면서 아들을 길러 사람을 만들고 끝내 유명한 재상을 되도록 하였으니 바로 우리 할아버지 정유성이다. 할아버지가 증조할머니를 전라도 남원부(南原府)에서 모실 때 숭정 을해년(1635) 8월 13일 돌아가셨다. 향년 60살이며 점차 추증 받아 오늘 봉작에 이르렀다.
손자 정창징은 군수를 지내고 정상징은 진사이다. 정창징은 아들 정제현을 두어 인평위가 되었다. 정상징은 아들 정제두를 두고 정제태는 현재 관직을 시작하였다. 다른 손자들은 모두 기록할 수 없이 많다.
정제두 등은 삼가 기록하여 묘석을 세우며 숭정 이후 갑자년(1644+60=1704) 8월이다.(역주 하곡서원장 이경룡)
2016년 4월 16일 강화도 하곡학연구원 추곡 답사 안내 창원황씨 묘 앞
당시 가래울에서 교유(交遊)한 저명한 인물로 조부의 묘소(박동량, 시흥시 향토유적 12호, 순조의 모후 수빈 박씨의 조상)가 안산에 있던 스승 박세채와 함께 소론의 영수였던 동산 윤지완(東山 尹趾完, 1635-1718)과 친분이 두터웠다. 윤지완은 성혼의 제자 윤민헌(尹民獻, 1562-1628)의 손자이자 숙종(肅宗)의 총애를 받던 인물이다. 더욱이 그는 정제두를 따라 이웃한 곳에 살았던 친구 지포 박심의 장인이었다. 이렇게 정제두는 지역의 저명한 인물들과 교우관계를 맺고 그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정제두가 안팎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양명학을 연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둘러싼 가까운 사람들의 분위기가 큰 도움이 되었다. 첫 부인의 당숙 윤선거는 송시열과 대립한 박세당의 둘째 형의 장인이었고,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죽은 윤휴의 친구였다. 자신은 최명길의 형 내길(來吉)의 외손주 사위이자, 최명길의 손자인 석정이 친구였다. 이글에서 주목한 장유도 정제두와 관련이 깊다. 바로 그의 부인인 영가부부인 김씨가 김상용의 딸인데, 김상용은 권개의 사위로 정제두의 고조부인 정구응과 동서지간이다. 그리고 장유의 절친한 최명길의 손자가 그의 친우였다. 그밖에 그가 가깝게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첫 부인의 6촌으로 당시 송시열과 대립하던 윤증, 박세채이다. 박세채는 그런 뜻을 담아서 『양명학학변(陽明學學辨)』을 지었다. 민이승, 박심 등과도 편지를 통한 교류가 많았다. 물론 그들은 모두 정제두가 양명학을 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특히 추곡에서 스승 박세채, 윤증(尹拯, 1629-1714), 그리고 친구 최석정(崔錫鼎), 민이승(閔以升, 1649-1698), 박심과의 교우관계는 그의 사상인 양명학이 한층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이를 바탕으로 양명학의 큰 토대가 되는 『학변』과 『존언』이 추곡에서 저술되었다. 시흥시의 추곡은 바로 이러한 학문적 성취를 이룬, 역사적인 곳이다. 아울러 정제두가 양명학에 심취하여 그 학문적 성취를 하는데 있어서 영향을 끼친 것은 양명학의 선유 장유였다. 그가 장곡동에서 12년간을 살았던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시흥시가 한국양명학의 발상지(發祥地)임을 밣힌다.
가래울 마을비, 유허비와 마을 전경(시흥시 화정동 가래울)
가래울 마을 정제두 유허지(추정)
贈判書公(鄭雲)墓表
有明,朝鮮,贈判書,鄭公諱雲,迎日人,高麗,侍中,圃隱文忠公,諱夢周,六世孫。考翰林諱光胤,妣光州鄭氏。祖監察諱仁昌,其先系已見先記。
公生於正德中,至嘉靖辛亥卒,壽三十有□,葬安山楸谷先壟□坐。
貞夫人尹氏,生一男龜應,參奉,贈贊成。孫謹,承文院,博士,贈領議政。曾孫維城,右議政,忠貞公。忠貞生二男,長男昌徵,郡守,贈贊成,生子齊賢,尚公主為寅平尉。次男尚徵,進士,贈贊成,生二子,曰齊斗,贊成,曰齊泰,玉署,擢府尹。
舊有辛亥所立石頑缺,齊斗等改立石,識其陰,時我主上十二年丙辰三月日,皇明崇禎後九十二年。
명나라 시기 조선국 판서를 추증 받은 정운(鄭雲)은 영일 정씨이며 고려 시중 포은 정몽주 선생의 6세손이다. 아버지는 정광윤(鄭光胤)이고 어머니는 광주 정씨이다. 할아버지는 감찰을 지내신 정인창(鄭仁昌)이며 윗대 계보는 앞에서 기록하였습니다.
공께서는 정덕 연간(1491-1521)에 태어나시고 가정 신해년(1551)에 돌아가시니 서른 몇 살이며 안산 추곡 선영에 모셨다.
정부인(貞夫人) 윤씨는 아들 정구응을 낳았고 참봉을 지내고 찬성을 추증 받았다. 손자 정근은 승문원 박사이며 영의정을 추증 받았다. 증손 정유성은 우의정을 지내고 시호가 충정(忠貞)이다. 충정공은 아들 2명을 두어 큰아들 정창징은 군수를 지내고 찬성을 추증 받았으며 아들 정제현을 두고 정제현은 공주의 부마로서 인평위가 되었다. 둘째 아들 정상징은 진사이며 찬성을 추증 받았고 아들 2명을 두어 정제두는 찬성을 지내고 정제태는 옥당에 있다가 한성부윤에 발탁되었다.
지난 신해년에 세운 비석이 깨져서 정제두 등이 다시 비석을 세우고 비석의 글을 새겼다. 우리 임금 경종 12년(1736) 3월이며,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 이후 92년이다.(역주 하곡학연구원장 이경룡)
가래울 마을 정운 묘
가래울 마을 정구응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