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이면서 치雉가없으면 이것은 쓸모 없는 성이요,
문에 옹성甕城이 없으면 또한 쓸모 없는 성이니,
치와 옹성은 하나도 빠뜨릴 수 없다.
혹 바라볼 때의 아름다움 때문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나, 지키는 데에도 도움 되는 바가 없지 않다.
대개 누첩樓堞의 웅장하고 미려함은 선인들의 적의 기세를 빼앗기 위한 방법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바로 소하蕭何(한 3걸로 고조를 도와 찬후가 됨)가 말한
‘웅장하고 미려하지 않으면 무게나 위엄이 없다’
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는 장려함이 귀한 것이 아니라 견고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현안懸眼의 제도에 대해서 혹 말하기를
‘벽돌이 아니면 안된다’
고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벽돌이라야 현안을 조성할 수 있다고 한다면 돌로써도 안될까닭이 없는 것이다.
누조漏槽와 오성지五星池의 제도를 또한 검토 강구하여, 고금의 아름다운 제도를 이 성에 모두 갖추게 하라.
그리고 성에 치를 설치하고 나면 성의 모양은 저절로 구불구불 굴곡이 지게 된다. 평지 밖에 산세와 지형을 따라 자연히 굴곡을 이루게 되는 곳에는 치를 설치할 필요가 없다. 4 모서리와 같이 치를 설치해야 만되는 곳에는 혹 대를 쌓고 혹 루를 세우고 혹 포를 세울 수도있는데,
이것은 경들이 적절한 것을 헤아려서 시행하도록 하라.
『화성성역의궤』, 「연설편」 1793년 12월 초8일)
조선 후기 조선 성곽의 걸작 수원 화성의 남문은 팔달문이다.
사통팔달을 의미해서 팔달문이라고 하고 중국 북경 만리장성의 최고 걸작인 이 팔달준령을 본땄다고 해서 팔달이라고도 한다. 중국에 오는 사절들이 방문하는 코스였고 지금도 만리장성을 찾는 관광객 대부분이 가는 대표 명소이기도 하다.
보통 성곽의 정문은 남문인데 수원 화성은 북쪽인 한양으로 열린 북문 장안문이 정문이다. 정문 장안문은 한국전쟁 당시 엄청 파괴되어 복원된 것이지만 북쪽 성곽에 연결되어 옛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팔달문은 현재 화성 성곽과 도로로 단절되어 로타리 가운데 섬으로 남아있다.
이러한 팔달문이 여러차례 보수 공사가 있었다. 때문에 수원시는 팔달문을 알리는 차원에서 곁에 작은 전시공간을 마련하여 홍보('팔달문, 가까이 늘 우리 곁에')를 하고 있다. 이미 공사는 완료되었지만 홍보 공간이 남문 버스 환승 공간에 위치하다보니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최적의 홍보 공간이다.
앞으로 팔달문도 남쪽 성곽이 제대로 복원되어 연결되고 남문의 명소였던 남공심돈까지 온전히 복원되길 바란다.
우리나라 성곽 문화의 정수인 수원화성의 탄생은 제22대 정조(1752탄생 재위1776-1800)가 아버지 사도세자(1735-1762)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한(恨)과 효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정조는 지리적으로 교통이 사방으로 통하는 위치에 있는 수원을 상업 활동이 활발한 경제 신도시로의 건설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한 것이기도 하였다.
화성을 축조하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역모로 몰아 죽이고 영조 즉위부터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붕당 서인 노론이 집권하고 있었다. 영조 즉위 이래 강력한 왕권강화책으로 탕평책을 펼쳤으나 여전히 강력한 기득권을 누리던 노론은 자신들이 죽인 사도세자의 아들 세손 이성(李祘정조의 이름인 祘이 한자독음법에 따라 '산'으로 널리 읽히어 그간 정조의 이름을 '산'으로 불렀으나 정조가 지시하여 편찬한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에 따르면 정조가 자신의 이름을 훈민정음으로 '셩'이라고 쓰고 있어 당시 중세국어의 '셩'발음이 지금 '성'으로 자신의 이름을 '산'이 아닌 '성'으로 부르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밖에 당대 기록들 역시 '산'이 아닌 '성'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따라서 정조의 이름은 한자는 '祘'이 같으나 정조이름으로 부를 땐 '성'으로 불러야 한다.)의 즉위를 강력히 막고자 하였다.
이는 연산군 때 어머니 폐비 윤씨의 사건 이후 많은 신료들이 죽었던 갑자사화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노론 대신들의 강력한 의지였고 그에 따라 세손 이성의 즉위는 매우 어려운 처지였다. 뿐만 아니라 세손 시절 및 즉위 초까지도 정조는 끊임없이 노론 대신의 견제와 암살 위협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이 정사를 돌보았다.
그와 같이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조선의 제22대 왕으로 등극한 정조는 즉위부터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寡人思悼世子之子也)”
라고 천명하며 아버지에 대한 복권(장헌세자로 추존되고 고종 때 장조로 추존)과 노론에 대한 강력한 대처를 통한 왕권강화를 천명하며 개혁에 착수 하였고 그 개혁의 상징적 의미와 효과는 바로 ‘화성’으로 집약되었다.
화성의 명칭 유래에 대해서는 수원의 읍치는 원래 지금의 화성시 안녕동에 있는 화산(花山)에 있었는데, 정조가 현륭원(융건릉)을 조성하면서 지금의 팔달산 아래로 읍치를 옮기면서 새로 지은 성의 이름을 읍치가 있던 화산에서 따와 '화성(華城)'으로 하고, 수원도호부도 화성유수부(華城留守府)로 승격하였다. 따라서 화산에는 아직도 수원 고읍성(水原古邑城)이라는 흔적이 남아있다. 즉, 화성은 정조가 현륭원이 있는 화산의 '화(花)'자와 통용될 수 있는 '화(華)'를 써서 화성이라고 한 것으로 <장자>의 ‘천지’편에 나오는 고사 '화인축성(華人祝聖)'이라는 고사에서 따서 이름을 지은 것이다. 화(華)라는 지방의 제후가 요(堯) 임금에게 부귀, 장수, 다산을 기원했다는 의미로 정조는 이를 ‘백성은 왕실의 안녕을, 임금은 백성의 번영을 기원하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의 뜻으로 이어받아 화성이란 이름으로 지은 것이다.
여하튼 화성의 공식 명칭은 '화성'이지만 수원에 있는 성이므로 조선 시대부터 일명 '수원성'으로도 불렸는데, 1935년 조선총독부가 고시 제318호로 화성을 '고적 제14호 수원성곽'으로 등록했고,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문화재 분류 체계를 그대로 물려받으면서 화성의 공식 명칭은 그대로 '수원성곽'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역사 바로 세우기 일환으로 화성 이름을 되찾아주자는 운동(수원시장 심재덕이 화성 복원과 행궁 복원에 열심히 하며, 한신대 유봉학 교수 등의 학계 의견을 적극 수용한 결과였다.)이 일어나 마침내 1996년에 문화체육부 고시 제1996-40호로 '화성'이라는 공식 명칭을 찾았다. 특히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따라 지역명과 동시에 붙은 ‘수원 화성’을 공식화 하였다.
세계문화유산 화성 (tistory.com)
https://blog.naver.com/leelove97/223774599938?trackingCode=blog_bloghome_searchlist
화성 봉돈 팔달문 남수문 방화수류정
수원 화성(水原 華城) 봉돈(烽墩) 수원 화성 팔달문 동편 지동시장은 순대로 유명하다. 특별히 싸진 않지만...
blog.naver.com
















시청각 자료
팔달문 해체보수 과정(수원화성박물관, 2013년 특별기획전 '팔달문, 가까이 늘 우리 곁에'
1794년에 건립된 팔달문은 원형이 잘 남아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건물이 기울고 변형이 나타나 201년부터
2013년까지 해체보수 공사가 이루어졌는데 최대한 원형을
유지하기 위해 87% 부재를 재사용했다. 이 영상은 팔달문
해체보수 과정을 3D 영상으로 구현한 자료다.
수원화성 현판, 잃어버린 색을 찾다(수원시, 2020년 팔달문 현판 단청복원 영상)
팔달문 현판은 1796년에 만들어 걸었다. 화성 축성 공사
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에 당시 사용된 단청 종류와 수량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1969년 현판을 보수하면서
단청이 바뀌어 2020년에 다시 원형 복원하였다. 그 과정을
기록한 영상이다.


<편액과 현판>
경복궁 광화문에 “光化門” 외에 한글로 “광화문”이라고 하나 더 붙이겠다고 문화체육부장관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고 한다.
이를 전하는 기사마다 그 설치물을 가리켜 ‘현판’이라고 쓰고 있다.
한글로 하나 더 달겠다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 여부는 차치하고,
그 설치물을 가키려 ‘현판’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가?
현판(懸板) : 글자나 그림을 새겨 문 위나 벽에 다는 널조각. 흔히 절이나 누각, 사당, 정자 따위의 들어가는 문 위, 처마 아래에 걸어 놓는다.
사전에는 현판이란 단어를 거의 위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전의 설명이 과연 정확한가 의문이다.
앞 부분에는 “문 위나 벽에” 단다고 해놓고,
뒷 부분에서는 “문 위, 처마 아래에 걸어 놓는다”고
설명이 서로 어긋나는 것부터 의문을 갖게 한다.
문 위, 처마 아래에 거는 것만을 가리키는가?
벽에 다는 것도 포함하는가?
또 글자나 그림 모두를 포함하는가?
문 위, 처마 아래에 그림을 걸어 놓은 예가 있는가?
문 위, 처마 아래에는 보통 그 건물의 이름을 새겨 건다.
이 경우에는 거의가 글자로 되어 있지,
그림으로 이름을 드러낸 것은 그 사례가 있는지 알지 못하겠다.
그렇다면 문 위, 처마 아래에 이름을 쓰거나 새겨 거는 설치물과
내부의 벽 위 등 그 밖의 자리에
건물 이름이 아니라 건물의 내력이나 시문, 그 밖의 필요한 기록을 쓰거나 새겨 건 설치물은
성격과 기능이 서로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
옛 기록들을 조사해 보면
후자를 여러 내용을 써서 건 나무판이라는 뜻으로 현판(懸板)이라 하였고,
전자, 곧 문 위, 처마 아래에 이름을 쓰거나 새겨 거는 설치물은
편액(扁額)으로 구별하여 썼다고 판단된다.
현판이 편액을 포함하는 넓은 뜻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
현편과 편액은 구별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이렇게 보자면 편액에 대한 다음과 같은 사전의 설명 역시 정확하다고 보기 어렵다.
편액(扁額) : 종이, 비단, 널빤지 따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써서 방 안이나 문 위에 걸어 놓는 액자.
편액이라고 할 때는 “액(額)”이라는 글자가
“그림, 글씨, 사진 따위를 끼우는 틀”이라는 뜻을 가진 액자(額子)를 뜻하는가?
문 위, 처마 아래에 이름을 쓰거나 새겨 거는 설치물인 편액(扁額)에 액자 형태가 있던가?
扁額의 “額”자는 “액자”라는 형태를 가리킨다기 보다는
이마, 곧 건물의 외부 중앙에 단다는 뜻을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정리하자면 편액은 건물에 다는 설치물인 현판의 일종이기는 하지만,
그 가운데서 “건물 외부 중앙 출입문 위 높은 곳에 다는 이름을 새긴 판”이라고 해야 하겠다.
이렇게 볼 때 요즈음 논란이 되는 광화문 이름을 한글로 써서 달자고 할 때
그것은 현판이 아니라 편액이라고 해야 맞다.
적어도 현판과 편액은 구별해 써야지 한글로 광화문이라고 더 다는 데 대해서
찬성과 반대 어느 쪽이 더 설득력이 있는가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나?
현판은 한 건물이 여럿이 달려 있는 예가 많지만,
편액은 한 건물에 두 셋이 달려 있는 예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두 셋인 경우에는 그럴 만한 사연이 깃들어 있다.
‘광회문 한글편액 더 달자는 논란에 대하여’, 홍순민 페이스북. 2026.1.28.
















<그래도 “사대문”은 없다>
오래간만에 도성에 대해서 자원봉사를 하겠다는 분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를 했다.
끝나고 뒷풀이 모임에서 기존 기수 자원봉사자 한 분이 질문을 했다.
“사대문이 없다고 하시는데 실록을 검색해 보니까 많이 나오는데요?
백 개가 훨씬 넘는데요?”
일순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제까지 도성에 사대문이란 없다는 주장을 해왔고,
당연히 내 나름 그 근거를 확인했는데... 이 무슨 말씀인가?
그런데 뒷풀이 자리에서 손전화기를 들이대며 이러면 어쩌나?
나는 손전화에 실록을 보는 앱을 깔지도 않았는데...
그래서 그쪽 손전화기를 보자고 하면서 물었다.
“뭐라고 검색하셨어요?”
한글로 “사대문”을 검색했단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는 그냥 “사대문”이라고 검색해서는 정확하게 판단하기가 어렵다고,
번역문만 볼 것이 아니라 원문까지 확인해야 한다고,
뭐라고 뭐라고 말을 했다.
그랬더니 그 분과 주위 사람들이 일단 수긍.
뭔가 찜찜해서 집에 와서 확인해 보았다.
실록에서 “사대문”을 검색해보면 국역 171, 원문 191건이 나온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事大文”이 국역 77, 원문 117 포함되어 있다.
또 “사대문” 가운데 원문이 “四門”으로 된 것이 40개가 포함되어 있다.
원문은 “四門”, 곧 네 문이라고 한 것을 “사대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또 원문에서 그냥 “門外”라고 한 것을 “사대문 밖”이라고 번역한 것이 14건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것들을 걸러내고 보니 번역문 “사대문” 가운데 원문이 “四大門”인 것은 23건이 남는다.
그 가운데 몇은 또 도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평양성, 남한산성 등에 관한 것이다.
이렇게 걸러내고 보니 실록 원문에 도성의 “사대문”이라는 표기는 20건 쯤 된다.
그러니 “사대문”이라는 말을 전혀 쓰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사대문”이라는 말을 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본 뜻은
“사대문”이라고 할 때 구체적으로 특정한 문 넷을 가리키며,
그 네 문이 대문인가?
그렇지 않더라는 주장을 하려는 데 있다.
실록의 “사대문”이라는 표기는 거의 다 그저 “도성문”이라는 뜻으로 쓴 것이다.
도성에는 네 문만 있지 않다.
이름 있는 문만 해도 여덟, 시기에 따라서는 아홉이 있었다.
그 가운데 대문은 남대문―숭례문과 동대문―흥인문 둘 뿐이었다.
대문은 홍예문이 커서 임금과 왕비의 국장시 관을 실은 대여가 통과할 수 있어야 한다.
대문은 대문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문루를 겹지붕 2층으로 지었다.
이 조건에 맞는 것은 위의 둘 뿐이다.
서쪽의 돈의문은 이 조건에 맞지 않는다.
대문이라고 할 수 없다.
나머지 문들은 물론 대문이 아니다.
그럼 소문(小門)인가?
다 소문도 아니다.
소문은 숭례문과 돈의문 사이의 소의문과 동북쪽의 혜화문 둘 뿐이었다.
소의문이 서소문, 혜화문이 동소문이었다.
이 두문은 특히 작아서 소문이라고 부른 것은 아니었다.
대문 못지 않게 출입하는 사람과 물산이 많았기에
익숙하게 부르느라 소문이라 부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정조 이후에는 도성문을 정문(正門)과 간문(間門)으로 구별하였다.
중요도에 따라 수비 관리하는 병력의 규모를 달리하는 데 따른 구별이었다.
정문은 숭례문, 흥인문, 돈의문에 혜화문이 포함되었다.
나머지 소의문, 창의문, 숙정문, 광희문은 간문이었다.
사대문이라는 말을 쓰든 말든 무슨 상관이 있느냐?
고 무지르지 마시라.
도성 문에 대해서, 도성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더 정확하게
이름을 부르는 것이 도성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는 데 필요하고,
도성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는 것이
도성이 있는 서울이라는 도시를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나아가 서울이라는 도시를 함부로 다루지 않고 잘 가꾸어
후대에 넘기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나?
홍순민 페이스북. 2026.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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