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최명길 선생 묘 및 신도비

달이선생 2024. 9. 19. 12:52

지천(遲川) 최명길 선생은 영화 '남한산성'(2017)에서 이병헌 배우가 열연한 조선의 명재상이다. 2024년 9월 14일 묘소를 찾았다.

최명길 선생의 묘와 신도비는 선생이 1647년 졸하자 청주 대율리('대뱀이', 현 대율1리)에 장사지내고 이후 현달한 손자 최석정, 최석항, 증손 최창대의 노력으로 1702년 묘표와 신도비를 세웠다.

최명길 선생의 묘표는 여느 조선의 사대부와 달리 '유명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조선'만을 쓰고 있다. 명이 망하고 조선의 사대부가 조선을 소중화라는 의식하에 명이 망했지만 여전히 조선은 명을 잇는다는 생각으로 사대를 표방한 것과 달리 최명길 선생의 묘표는 '조선상국'이라고 단촐하게 적고 있다.

'조선상국증시문충 지천최공명길지묘'

영의정의령남구만서

이는 대명의리 존승을 놔두고 청과의 화의를 하면서 조선의 자주적 행보를 표방했던 선생의 뜻을 후손과 영의정 남구만이 묘표를 써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신도비의 본문은 여느 사대부와 같이 '유명조선~ '으로 시작한다. 그래도 묘표에서 당당히 '유명조선'을 안 쓴것은 지천 선생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유산(현재 묘소와 신도비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임)이다.

그러한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평이 조선왕조실록의 졸기에서 확인된다.

완성 부원군(完城府院君) 최명길(崔鳴吉)이 졸하였다.

명길은 사람됨이 기민하고 권모 술수가 많았는데, 자기의 재능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일찍부터 세상일을 담당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광해 때에 배척을 받아 쓰이지 않다가 반정할 때에 대계(大計)를 협찬하였는데 명길의 공이 많아 드디어 정사 원훈(靖社元勳)에 녹훈되었고, 몇 년이 안 되어 차서를 뛰어 넘어 경상(卿相)의 지위에 이르렀다. 그러나 추숭(追崇)과 화의론을 힘써 주장함으로써 청의(淸議)에 버림을 받았다. 남한 산성의 변란 때에는 척화(斥和)를 주장한 대신을 협박하여 보냄으로써 사감(私感)을 풀었고 환도한 뒤에는 그른 사람들을 등용하여 사류와 알력이 생겼는데 모두들 소인으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위급한 경우를 만나면 앞장서서 피하지 않았고 일에 임하면 칼로 쪼개듯 분명히 처리하여 미칠 사람이 없었으니, 역시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이라 하겠다. 졸하자 상이 조회에 나와 탄식하기를 "최상(崔相)은 재주가 많고 진심으로 국사를 보필했는데 불행하게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애석하다." 하였다.(完城府院君 崔鳴吉卒。 鳴吉爲人機警多權數, 自負其才, 嘗有擔當世務之志, 而光海時擯不用, 及反正, 協贊大計, 鳴吉之功居多, 遂錄靖社元勳, 不數年超至卿相, 而力主追崇、乞和之論, 爲淸議所棄。 山城之變, 脅送斥和之臣, 以逞私憾, 還都之後, 引用匪人, 傾軋士類, 人皆以小人目之。 然凡有緩急, 直前不避, 臨事剖析, 人無能及, 亦可謂救時之相也。 旣卒, 上臨朝歎曰: "崔相多才而盡心國事, 不幸至斯, 誠可惜也。")

인조실록 48권, 인조 25년 5월 17일 정사 2번째기사 1647년 청 순치(順治) 4년

조선왕조실록 (history.go.kr)

졸기의 평이 명 존숭과 사대, 명분과 의리에 빠졌던 당대 사류의 평이라 경학적 사고와 실천에 섰던 선생에 비판적이고 폄훼적이다. 그런데 그 내용을 따져보면 선생이 상당한 실력자이자 선견지명과 대세를 읽을 줄 아는 탁월한 인재임을 알 수 있다. 선생은 당대 인조의 평생 은인이다. 이러한 최명길의 행보를 벗이었던 계곡 장유는 다음과 같이 이르고 있다.

[최명길이 강화하자는 논의를 처음으로 냈다(崔鳴吉首發講和之議)]

상이 강도(江都 강화(江華))로 몽진(蒙塵)하는 길에 통진(通津 김포(金浦))에 대가(大駕)를 주차하였으므로 수행 관원들이 민가에 흩어져 묵게 되었다. 나는 이때 비국(備局)의 일을 맡고 있었는데, 밤이 깊어지고 나서 비국의 하례(下隷)가 와서 말하기를,

“호차(胡差 오랑캐의 차인(差人))가 장차 온다는 치계(馳啓)가 도착하였으므로 재신(宰臣)들이 모두 모이게 되었다.”

하였으므로, 정신없이 달려가서 들으니, 호차(胡差)가 강화(講和)할 목적으로 우리에게 오겠다는 것이었다. 그가 오도록 놔 둘 것인가 아니면 막을 것인가를 놓고 한참 의논하였으나 결론을 내지 못하던 차에, 최자겸(崔子謙 자겸은 최명길(崔鳴吉)의 자(字)임)이 말하기를,

“교전(交戰) 중에도 사신은 왕래하는 법이니, 무턱대고 배척하며 거절하는 뜻을 보여서는 안 된다. 우선 접견(接見)을 하고서 그의 말을 들어 보고 난 뒤에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대개 여러 사람들의 뜻도 모두 그러하였으나 섣불리 자기 입으로 말하기를 꺼려하던 차에, 자겸이 앞장서서 그런 주장을 내놓았으므로, 결국에는 그 사람을 진해루(鎭海樓) 안에서 만나 보게 되었고, 잇따라 유해(劉海)가 또 도착하면서 강화하는 일이 마침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당시에 오랑캐 군대가 강도(江都)에서 1백여 리(里)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평산(平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행조(行朝 피난 중의 임시 조정)의 수비 태세가 워낙 빈약해서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벌벌 떨고 있었다. 그리하여 척화(斥和)를 주장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겉으로는 큰소리를 쳤지만 속으로는 화의(和議)가 성립되는 것을 실로 바라고 있었는데, 다만 실속없이 떠들어대는 주장에 희생될까 두려워한 나머지 감히 분명하게 발언을 하지 못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유독 자겸이 이러한 사태에 직면하여 문득 앞장서서 그 말을 꺼내면서 주저하거나 피하는 것이 없었는데, 끝내는 이 일 때문에 그만 탄핵을 받고 물러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上幸江都。駕次通津。從官散寓村舍。余時忝備局。夜深後備局下隷來曰。有馳啓至。胡差將到。諸宰咸會矣。余蒼黃馳赴。聞胡差爲講和且至。方議其進止。不能決。崔子謙謂兵交使在其間。不當遽示斥絶。姑宜接致。聽其語而處之。群意大抵皆然。莫肯發口。子謙主其說。竟接其人於鎭海樓中。繼而劉海又至。和事遂成。時虜兵屯平山。去江都百餘里。而行朝守備寡弱。人情危懼。 雖斥和者外爲大言。內實幸和議之成。而畏浮議莫敢明言。獨子謙遇事輒首發。無所顧避。卒以是被彈去)

고전번역서 > 계곡집 > 계곡만필 제1권 > [만필(漫筆)]

청주에서 괴산에 이르는 좁은 길을 따라가다보면 야트막한 구릉이 펼쳐지고 평지 속 고요한 곳에 지천 선생 묘가 위치한다. 너른 자리에 앞에 신도비를 세우고 그 옆으로 신도를 내어 위엄 있게 단장하고 있다. 묘소는 너른 평지에 세개의 봉분이 한자 품자를 그리듯 안장되어 있다. 가운데 호석을 두른 묘가 지천의 묘고 후에 남양주에서 천장한 두 부인의 묘가 위치한다. 묘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은 안산이 앞을 두르고 물이 돌아나가며 먼산이 들이치지 않는 전형적인(풍수) 명당 자리이다.

묘소가 위치한 이곳은 대율리 대뱀이라고 하는 마을로 전주최씨의 집성촌으로 고려말 감찰대부를 지낸 최재의 묘가 있다. 최재의 묘는 최명길 묘소 서향 능선에 최창대 묘를 지나 산에 오르면 최석정 묘 바로 뒤에 위치한다. 묘제석물을 최근에 단장하여 비가 없는 최석정의 묘와 대비된다. 그렇지만 숙종대 영의정을 지낸 최석정의 묘는 무자비지만 호석을 두르고 위엄을 갖춘 묘소이다.

전주최씨는 성종의 부마로 왕가와 국혼을 통해 벌열하였다. 특히 부친 최기남은 성혼을 사사한 사림이며, 그 역시 예학자 논산 김장생을 사사하고 이어 이항복과 신흠 선생에게 배운 사람이다. 효종의 국구 계곡 장유, 이시백, 조익과 더불어 사우로 불리며 특히 친하였고 붕당 서인의 주류였다. 때문에 인조반정에서 정사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완성부원군에 책봉되고 영의정에 오르는 등 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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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유 선생 묘 및 신도비(시흥시 향토유적 제2호)

장유 선생 묘 및 신도비 2016년 9월 26일 신풍부원군 장유의 묘는 덕수장씨 세장지인 시흥시 장곡동 상양산 자락에서 장유 선생의 외손자인 조선 현종의 특별히 살핌으로 새롭게 자리를 잡은 곳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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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 역시 현달했는데 양자 최후량은 계곡의 문하로 문과 급제자이고 친아들 최후상도 문과 급제자다. 손자 최석정은 최후량의 차남으로 최후상의 양자가 되어 최명길의 적통이 되었는데 소론의 영수로 숙종대 영의정을 역임하고 숙종묘 배향공신이자 양명학자 하곡 정제두와 친구이다. 동생 최석항도 문과 급제 후 좌의정을 역임하고 소론의 영수로 노론 4대신을 축출하여 경종의 원임이었던 충신이다. 최석정의 아들 최창대 역시 문과 급제 후 학문이 높았다.

 

의정부 좌의정 최석항의 졸기

의정부 좌의정 최석항(崔錫恒)이 졸(卒)하였다. 최석항은 고(故) 상신(相臣) 최석정(崔錫鼎)의 아우인데, 외모는 왜소하였으나 강한 정신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관찰사로 나갔을 적에는 재국(才局)이 있다는 이름을 날렸고, 평생의 처사에 규각(圭角)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항상 후진(後進)에게 경계하기를, ‘잗단 일을 가지고 남과 서로 따지지 말라. 그러다가는 걸핏하면 실패하고 나랏 일을 성취하지 못한다.’ 하였다. 그러나 그가 정승으로 들어가 임인년046) ·계묘년047) 의 큰 옥사를 당하여서는 뜻을 아예 평반(平反)048) 에 두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필경 대각(臺閣)의 어긋나고 과격한 논의에 끌려서 모든 일을 스스로 주장하지 못한지라, 식자(識者)는 그의 역량이 적었던 것을 결함으로 여겼다. 부음을 알리자 임금이 하교하여 애도의 뜻을 전하였고, 세제(世弟)도 거애(擧哀)의 의식을 거행하였으니, 예문(禮文)을 따른 것이다.(戊辰/議政府左議政崔錫恒卒。 錫恒, 故相錫鼎弟也。 形貌矮小, 而精神內蘊。 按外藩, 以才局稱, 平生處事, 不露圭角。 常戒後進曰: "毋以細事與人相較。 如此則動致顚躓, 不能做國事也。" 然其入相, 當壬、癸大獄, 意未始不在於平反, 而畢竟牽於臺閣乖激之論, 凡事不能自主張, 識者病其少力量焉。 訃聞, 上下敎隱悼, 世弟亦爲之擧哀。 遵禮文也)
경종실록 14권, 경종 4년 2월 24일 무진 1번째기사 1724년 청 옹정(雍正) 2년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忠淸北道 淸原郡 北二面 大栗里)에 자리한 최명길묘소에 있는 최명길신도비(崔鳴吉神道碑)이다. 1702년(숙종 28)에 세워진 이 비는 몸돌(碑身) 위에 팔작지붕 모양의 덮개돌을 얹은 일반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는데, 비문(碑文)은 박세당(朴世堂)이 짓고, 최명길의 증손자인 최창대(崔昌大)가 글씨를 썼으며, 전액(篆額)은 손자인 최석정(崔錫鼎)이 쓴 것이다. 비의 마멸이 심해 비문은 거의 판독되지 않지만, 원문이 박세당의 문집인 『서계집(西溪集)』에 남아 있어 내용을 파악하기에는 어려움이 없다. 최명길(1586∼1647)은 1605년(선조 38)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을 거쳐 예문관전적(藝文館典籍)이 되었다가, 김유(金流)·이귀(李貴) 등과 함께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이 되고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났을 때, 그는 대세로 보아 강화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하여 청나라를 배척하는 당시의 여론에 맞서 현실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하였다. 이후 이조판서(吏曹判書)와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을 지냈으며, 평소 성리학과 문장에도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고, 글씨에 있어서는 동기창체(董其昌體)로 유명했다. 신도비는 1980년부터 비각(碑閣)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금석문 검색 - 국가유산 지식이음 (nrich.go.kr)

탁본 출처 : 금석문 검색 - 국가유산 지식이음 (nrich.go.kr)

 

신도비명은

비각에 위치하고 비석이 마멸이 심하여 잘 보이지 않으나 탁본에 의거하면 서계 박세당이 지은 글 앞에 유명조선 및 최명길의 관직, 시호 등을 부기하고 명 끝에 찬자 박세당과 전액 최석정, 서자 최창대를 덧붙였다. 제액은 비면 사면에 각각 정면 정사공신영의정완 측면 성부 후면 원군최공명길신도 측면 비명이라 썼다. 이으면 '정사공신영의정완성부원군 최공명길신도비명'이다.

박세당의 문집 서계집의 신도비명은 다음과 같다.

서계집 제11권 / 비명(碑銘) 5수(五首)

영의정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최공(崔公) 신도비명

 

재주가 한 시대의 위망(危亡)의 화(禍)를 구제할 만하고 식견이 의심스러운 중론(衆論)의 미혹을 깨뜨릴 수 있으며 충성은 사직의 계책을 위하여 일신과 집안을 돌아보지 않고 용기는 호랑이의 발톱과 이빨을 어루만지면서도 두려운 기색이 없는 것, 이는 모두 세상에서 지극히 어려운 것으로서 군자가 깊이 허여하는 바이다. 상국(相國) 문충공(文忠公) 같은 분은 간직한 지조와 세운 공업이 어찌 전후에 밝게 빛나고 고금에 우뚝하지 않겠는가. 비록 그 국사를 위한 고심(苦心)과 임금을 위한 혈성(血誠)은 신명(神明)에게 질정할 만했으나 독자적인 견해는 중의(衆議)에 부합하지 못하였고 심오한 의논은 세속과 화합하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헐뜯는 논의가 사방에서 일어나 거의 한 세대 동안 매몰되어 있었으나 하늘이 정한 이치는 결국에는 반드시 이기고 사람의 마음은 속일 수 없는 법이니, 채 백 년이 못 되어 선생과 장자(長者) 가운데 공과 동시대 사람으로서 공을 칭찬하는 자들의 말이 차츰 나오고 학사(學士)와 대부(大夫) 가운데 공보다 후대에 나온 사람으로서 공을 이야기하는 자들의 논의가 점차 공평해졌다. 이에 이르렀으니 공이 평소 스스로 의리에 편하게 여겼던 바에 대해서 천하와 후세에 할 말이 있어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공은 휘는 명길(鳴吉), 자는 자겸(子謙), 성은 최씨(崔氏), 본관은 전주(全州)이니, 고려로부터 본조(本朝)에 이르기까지 명망과 덕행이 있는 분이 계속 이어졌다. 증조 휘 업(嶪)은 빙고 별제(氷庫別提)를 지냈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조부 휘 수준(秀俊)은 벼슬하지 않았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부친 휘 기남(起南)은 영흥 부사(永興府使)를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3대가 추증된 것은 모두 공이 존귀해졌기 때문이다. 의정공(議政公)은 호가 만옹(晩翁)이니, 젊어서 우계(牛溪 성혼(成渾) )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문장과 행실로 이름이 드러났으나 세상의 배척을 받아 높은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 모친 전주 유씨(全州柳氏)는 관찰사 영립(永立)의 따님이다.

공은 선조(宣祖) 19년 병술년(1586)에 태어났다. 을사년(1605, 선조38)에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에 장원하였고 이어 문과에 급제하였다. 신 현헌(申玄軒 신흠(申欽) )이 어떤 이에게 말하기를, “자겸이 비록 병약하나 끝내는 반드시 이름을 떨치는 인물이 될 것이다.” 하였다. 승문원에 분관(分館)되었다.

기유년(1609, 광해군1)에 사관(史館)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전적에 서임(敍任)되었고 수년 동안에 감찰(監察)과 제조(諸曹)의 낭관을 두루 맡았으나 일에 연루되어 삭출(削黜)되었다.

병진년(1616)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기미년(1619)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광해(光海)가 도리를 잃어 영창(永昌)을 학살하고 대비(大妃)를 유폐(幽閉)하자 공이 제공(諸公)과 더불어 비밀히 논의하여 중대한 계책을 세웠다. 제공이 사저(私邸)에서 인조(仁祖)를 뵙고자 하였는데 공만 홀로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사사로이 뵙는 의리는 없다.” 하였다. 한참이 지나도록 논의가 제때에 결행되지 못하니, 공이 “시일을 오래 끌면 대사를 그르치기 십상이다.” 하고는 마침내 스스로 거사할 날짜를 잡고 계책을 정해 계해년(1623, 인조1) 3월 계묘일에 인조를 받들어 대통(大統)을 잇게 하고 대비를 서궁(西宮)에서 맞이하였다. 먼저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고 정랑으로 천전되었다. 여름에 참의에 발탁되었다. 이해 겨울에 정사 공신(靖社功臣) 1등(等)에 책록되고 자급이 올랐으며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지고 이조 참판이 되었다.

갑자년(1624) 봄에 역적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대가(大駕)가 남쪽으로 파천하자 공이 총독 부사(摠督副使)가 되어 장 원수(張元帥 장만(張晩) )와 만나 안령(鞍嶺)에서 역적을 격파하였다.

을축년(1625) 봄에 상차하여 관제(官制)를 논하여 의당 옛 제도를 차츰 회복하여 다스림의 근본을 바르게 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시행되지 못하였다. 부제학이 되었고 대사헌으로 이배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부제학에 배수되어 12가지 일을 차자로 진달하였는데 모두 시폐(時弊)에 꼭 맞는 것이었다.

상이 처음 대위(大位)에 올랐을 때 원종(元宗)을 추존하여 대원군이라 하고 인헌왕후(仁獻王后)를 높여 계운궁(啓運宮)이라 하였다. 병인년(1626, 인조4)에 인헌왕후가 훙서(薨逝)하매 상이 삼년복을 입고자 하였는데 조정의 논의가 “남의 후사(後嗣)가 되면 참최(斬衰)를 두 번 입지 않는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합사(合辭)하여 쟁론하였다. 그러자 상이 또 장기(杖期)의 복을 입고자 하였는데 제신(諸臣)이 또 부장기(不杖期)로 강복(降服)하고 상의 아우 능원군(綾原君)을 상주(喪主)로 삼을 것을 극력 청하였다. 그러나 공은 홀로 말하기를, “아비가 사(士)이고 아들이 천자(天子)이거나 제후(諸侯)이면 사의 예로써 장사 지내고 천자와 제후의 예로써 제사 지내는 법이니, 오늘날의 예는 오직 이것만이 확실한 전거가 된다.” 하였다. 이윽고 제공의 논의가 분분하여 예법을 정하지 못하자 공이 또 만여 자의 차자를 올려 강복과 입후(立後)의 잘못을 극론하여 아뢰기를, “전하는 승중(承重)한 것이지 출계(出繼)한 것이 아닙니다. 곧바로 조부의 대통을 이었는데 남의 후사가 된 것으로 간주하고 임금의 부모인데 방친(旁親)으로 대한다면 그 폐단이 장차 예제(禮制)를 무너뜨리고 대륜(大倫)을 멸절시키는 데에 이를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어 별묘(別廟)를 세워 몸소 제사를 주관할 것을 청하였는데, 거듭 조정의 의논에 거슬려 탄핵을 받고 해직되었다.

정묘년(1627) 봄에 북쪽 오랑캐의 군대가 패수(浿水)를 건너 내달아 나라 안 깊숙한 곳까지 쳐들어오니, 조야가 두려워하였다. 적의 군사가 평양(平壤)에 이르러서는 우리에게 글을 보내 강화를 요구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적이 한창 기세가 올랐으니, 부드러운 말로 답하여 그 예봉을 늦추어야 합니다.” 하니, 제공의 뜻이 일치하여 장 신풍(張新豐 장유(張維) )으로 하여금 글을 써서 적들의 뜻에 답하게 하였으나 적들은 진병(進兵)을 그만두지 않았다. 상이 도성을 나가 강도(江都)로 행행하였는데 오랑캐의 사신이 재차 강화 문제로 와서 상을 뵙기를 청하였다. 공이 다시 말하기를, “교전이 있기 전에는 사신이 그 사이에서 왕래하는 법이니, 들어줄 만합니다.” 하였는데 조정이 따랐다. 오랑캐의 군대가 평산(平山)에 이르러 화약이 비로소 맺어지니, 이에 적의 군대가 물러나 더 이상 진격하지 않았다. 당시 적병은 가까이 닥쳤는데 행재소(行在所)의 군대는 단약(單弱)하여 상하가 위태롭게 여기고 두려워하였다. 계책은 오직 화약을 맺는 것뿐이었지만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는데 적이 물러간 뒤에는 또 화약을 맺은 것을 분분하게 공의 탓으로 돌렸다. 언자(言者)가 교대로 소장을 올려 벼슬을 떼고 찬축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공은 조정에 있는 것이 편치 않아 오래도록 강가에 거처하였다. 가을에 장릉(章陵)을 옮길 때에 상구(喪柩)가 장차 도성을 지나가게 되었다. 중의(衆議)가 사친(私親)의 상구가 도성을 통과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백성을 동원하여 도성 동쪽의 비탈에 길을 닦고자 하였는데 공이 홀로 쟁변하여 불가하다고 하였고 대신 또한 잘못임을 깨달아 마침내 중지하게 되었다. 계운궁(啓運宮)의 담제(禫祭)가 끝나 합부(合祔)하려고 하였다. 공이 다시 별도로 묘(廟)를 세우고, 예(禰)라 칭하고, 악장(樂章)을 만들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논자들의 배척을 받아 경기도 관찰사로 나갈 것을 청하였다.

기사년(1629, 인조7)에 이르러 선후배들 간의 논의가 일치하지 못하여 노서(老西)와 소서(少西)의 색목(色目)이 있게 되었다.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가 상에게 참소하여 명류(名流) 5, 6인을 붕당으로 지목하니, 상이 매우 노하여 세당(世堂)의 선공(先公) 및 유공 백증(兪公伯曾), 나공 만갑(羅公萬甲)을 귀양 보내고 장공 유(張公維)도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보외(補外)하였다. 공이 선후배들이 서로 책망한 것이지 붕당을 지은 것은 아니라고 극력 진달하니, 상이 느껴 깨닫는 바가 있어 세 학사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귀양에서 풀려 돌아오고 장공 또한 부름을 받았다. 당시 공이 군적(軍籍)의 정리를 맡아 이를 완성하여 자급이 올라갔다.

이듬해에 우참찬에 배수되었다. 모문룡(毛文龍)이 죽자 진계성(陳繼盛)이 대신 그 무리를 거느렸는데 유흥치(劉興治)가 또 진계성을 죽이고 대신 거느렸다. 우리나라에서 군사를 일으켜 그 죄를 묻고자 하니, 공이 말하기를, “가도(椵島)의 무리가 비록 굶주리고 지쳤으나 그래도 그 무리가 수만에 달합니다. 곤궁에 처한 짐승도 오히려 사람을 상하게 할 수 있는데 하물며 수만의 무리가 반드시 죽겠다는 마음을 품고 험준한 지형에 의지하고 있는 경우이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마침내 외로운 섬을 포위하여 시일을 끌다가 식량이 고갈된다면, 싸우자니 어렵고 그만두자니 위엄이 손상될 것입니다. 군사를 일으켜 바다를 건너가 농사철을 헤아리지 않고 죽기를 각오한 도적과 대치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하였는데, 후에 과연 군사를 발동하지 않았다.

신미년(1631, 인조9) 봄에 여러 공신들을 춘휘당(春暉堂)으로 불렀는데 세자 및 두 왕자가 모두 시립하였다. 상이 친히 술잔을 들어 술을 권하고 또 공이 새로 득남한 것을 치하하니, 세상 사람들이 영광스러운 일로 여겼다. 여름에 상이 장릉을 추숭하고자 하였는데 조정의 논의가 불가하다고 다투었다. 그러자 또 천자에게 주문(奏聞)하고자 하였는데 또 불가하다고 하였다. 5월에 특별히 공에게 부제학을 제수하니, 이는 상이 공의 지론이 조정의 신하들과는 다소 다르다고 여겨 도움을 받고자 해서였다. 공이 또 차자를 올려 예제에 대한 조정 신하들의 논의가 잘못되었음을 진달하고 거듭 별묘(別廟)를 세울 것을 주장하여 아뢰기를, “추숭의 거조는 예경(禮經)에 분명한 글이 없고 의리에 맞게 예제를 바꾸는 일에 관계됩니다. 조정의 논의가 같지 않은데 중국 조정에 주청(奏請)부터 먼저 하고자 하니, 조정이 성상의 뜻을 받들어 따르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제를 논의한 지 지금 9년째입니다. 그간 노사숙유(老師宿儒)가 두루 전거를 찾고 널리 예문을 인용하였으나 모두 오늘날에 맞는 전거는 아니었습니다. 오직 사(士)의 예(禮)로 장사 지내고 제후의 예로 제사 지내는 것만이 가장 확실한 전거가 됩니다. 신이 쟁집(爭執)하는 것은 다만 이것뿐입니다.” 하였다.

임신년(1632)에 예조 판서에 배수되고 예문관 제학을 겸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성인의 효도는 어버이를 높이는 것을 으뜸으로 여기니, 아버지의 사당을 오래도록 누항(陋巷)에 둘 수 없고 아버지의 신위(神位)를 오랫동안 비워둘 수 없다.” 하고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속히 논의하게 하였다. 이에 공이 또 광무제(光武帝)의 고사를 따라 별묘를 세우기를 청하니, 상이 엄히 책망하였다. 공의 소청이 오직 별묘를 세우는 데에 있고, 낮추어 강복(降服)하는 것도 높이어 추숭하는 것도 모두 공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조정의 논의를 거슬렀고 끝내는 상의 책망을 받은 것이다. 겨울에 이조 판서에 배수되었고 자급이 숭정대부로 올랐다. 양관(兩館)의 대제학(大提學)에 제수되고 또 체찰 부사(體察副使)를 겸하였다. 공이 전후로 전조를 맡고 있는 동안에 붕당을 깨뜨리고 공도(公道)를 넓히며 어질고 재주 있는 자를 나아오게 하고 무능하고 나약한 자를 퇴출하여 제대로 된 사람을 선발하여 등용하니, 세상 사람들이 중흥(中興) 이래로 인사의 공정함은 공이 으뜸이라고 칭송하였다.

을해년(1635, 인조13) 봄에 전장(銓長)에서 해면(解免)되었다. 여름에 호조 판서가 되었다.

병자년(1636) 봄에 질병으로 사면하였다. 여름에 병조 판서가 되었으나 또 병으로 사직하였다. 가을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이해 봄에 청나라가 비로소 칭제(稱帝)하고 사신을 보내왔다. 조정의 논의는 그 글을 받아들이지 말고 단지 구두로만 거절하고자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저들이 중국 북쪽 변경지역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제재를 받을 대상이 없으므로 제멋대로 칭제하였으니, 누가 다시 금제(禁制)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기어이 우리한테서 구실을 찾고자 하니, 그 속셈을 알기 어렵습니다. 만약 단지 구두로만 거절하게 되면 일이 불분명해져 증거가 없게 됩니다. 만일 저들이 도리어 그 말을 뒤집어 우리를 무함한다면 우리는 무엇으로써 스스로 천하에 해명하겠습니까. 지금은 의당 답서 하나를 만들어 대호(大號)를 참칭해서는 안 되고 신절(臣節)을 바꿀 수 없음을 말하고, 이어 오랑캐의 글과 우리의 답서를 황조(皇朝)에 보고하는 한편으로 군사를 신칙하여 변란에 대비해야 합니다. 저들은 춘신사(春信使)와 조제(弔祭)를 명분으로 내세울 뿐입니다. 사리에 어긋난 것은 팔고산(八固山) 및 몽고(蒙古) 왕자(王子)의 글이니, 예에 관한 요구에는 대답하고 사리에 어긋난 것에 대해서는 거절하는 것이 마땅한 계책입니다. 지금은 시기의 차이만 있을 뿐 어차피 병화(兵禍)를 입는 것은 매일반이니, 공연히 불분명하게 처리하여 우리를 이용하게 하거나 경솔하게 거절하여 병화를 재촉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는데, 오랑캐의 사신이 과연 글을 받지 않은 것 때문에 노하여 지레 돌아갔다. 공이 반드시 침입이 있을 것을 알고 상을 뵙고 아뢰기를, “오랑캐의 사신이 곧장 돌아갔으니, 맹약을 어기는 것은 필연적인 형세입니다. 일찌감치 전쟁에 대비하소서.” 하였다.

당시 조정의 논의가 분분하여 척화(斥和)만 주장했지 적을 막을 계책이 없었다. 공이 홀로 이를 깊이 염려하여 상차하기를, “요즈음 대간(臺諫)은 모두 척화를 주장하나 묘당에는 정해진 계책이 없습니다. 대간의 말을 받아들여 결전하지도 못하고, 또 신의 말을 받아들여 재앙을 늦추려고도 않으니, 노기(虜騎)가 휘몰아쳐 와 생령(生靈)이 어육(魚肉)이 되고 종사가 파천(播遷)하게 된다면 그 허물은 장차 누가 떠맡겠습니까. 신은 원하건대, 체신(體臣)과 수신(帥臣)이 모두 관서(關西)에 개부(開府)하고 제장(諸將)과 약속하여 오직 전진만 있고 후퇴는 없게 하는 한편으로, 심양(瀋陽)에 글을 보내 대의(大義)를 모두 개진하고 이어 오랑캐의 정황을 탐지하여, 저들이 다른 생각을 품지 않았다면 우선은 형제지약(兄弟之約)을 지키면서 내부적으로 정사를 닦아 후일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만일 그것이 아니라면 용만(龍灣)을 굳게 지키면서 한바탕 결전해야 하니, 비록 이것이 만전지책은 되지 못하더라도 속수무책으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런데 나아가 싸우자는 말을 하자니 의구심이 없지 않고 화친의 주장을 펴자니 또 비방이 두려워 내내 미적거리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강물이 얼게 되면 화가 목전에 닥칠 것이니, 이른바 ‘너희들이 논의를 정하는 사이에 나는 이미 강을 건넌다.’라는 말과 불행히도 가깝습니다.” 하였다. 공이 창졸간에 적이 도발해 오면 반드시 멸망의 근심이 있을 줄 알고 매양 부드러운 말로 답하여 병화를 늦추는 동안 싸울 계책을 세울 시간을 벌고자 하여 중의(衆議)를 무릅쓰고 누차 계책을 진달하였으나, 화의를 주장한다고 언관이 공을 공격하였다.

공이 또 말하기를, “석진(石晉) 때에 경연광(景延廣)이 거란(契丹)의 분노를 자극하자 상유한(桑維翰)이 공손한 말로 사죄하기를 청하였으나 출제(出帝)가 듣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스스로 보전할 수가 없어 비로소 다시 칭신(稱臣)하기를 청하였으나 거란이 허락하지 않아 진나라가 드디어 멸망하였습니다. 주자(朱子)가 《통감강목(通鑑綱目)》에서 경연광을 폄하하고, 호안국(胡安國)이 경연광을 비난한 것은 약속과 우호를 가볍게 배반하고 스스로 흔단(釁端)을 만들어 그 몸을 망치고 나아가서는 그 임금을 망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신하가 국가의 계책을 세우면서 먼 앞일까지 내다보지 못해 멸망에 이르게 했다면 그 일이 비록 바르더라도 죄를 면할 수 없습니다. 선조 때에 천조(天朝)의 장수들이 싸우는 것이 싫어 화의할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로 하여금 천조에 청하게 하였는데 성혼(成渾)이 허락할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이정암(李廷馣)이 성혼의 뒤를 이어 주장하여 장차 죄를 입게 되었는데 성혼이 그 충성심을 가엾게 여겨 상 앞에서 신구(伸救)하니, 선조가 대로하였습니다. 이로부터 논자들의 성혼에 대한 공격이 더욱 치열하였는데 성혼이 말하기를, “한탁주(韓侂冑)가 금(金)나라를 공격한 것을 두고 선유(先儒)는 사직을 위태롭게 하였다고 책망하였고, 장 남헌(張南軒 장식(張栻) ) 또한 금나라를 칠 수 없다고 말하였으니, 이는 종묘와 사직이 중하기 때문에 시세(時勢)를 살피고 역량을 헤아리는 것을 의롭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였습니다. 오늘날은 석진만큼의 병력도 없는 데다가 또 북쪽 오랑캐가 조종(祖宗)의 원수도 아니니, 시비와 득실을 정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의하는 자들은 “정묘화약(丁卯和約)이 진실로 해롭지는 않으나, 지금 오랑캐가 이미 대호(大號)를 참칭하였으니, 상호 사신을 왕래할 수 없다.” 하는데, 저들이 대호를 참칭하는 것은 우리가 물어야 할 바가 아닙니다. 신이 이렇듯 강화론(講和論)을 주장하는 것은 감히 시비를 돌아보지 않고 한갓 이해에 관계된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의(時宜)를 참작하고 지난 사적을 참작해 보건대 필연적인 형세임을 확신해서입니다. 신이 일찍이 마음속으로 ‘나라는 약하고 오랑캐는 강하니, 우선은 정묘화약을 지켜서 몇 년 동안 전쟁의 화를 늦추어 그 사이에 성을 쌓고 군량을 비축하여 변방의 수비를 더욱 굳건히 하며 군사를 갈무리해 두고 저들의 빈틈을 엿보아야 하니, 이보다 나은 계책은 없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입술이 마르고 혀가 타도록 조정에서나 물러나서나 쟁변하면서 스스로 그만둘 줄 모르는 것이 어찌 다른 뜻이 있어서이겠습니까. 종사와 나라가 위태로워지는 것을 근심할 뿐, 일신의 이해를 헤아릴 겨를이 없었습니다.” 하니, 군의(群議)가 또 들고일어나 시끄럽게 공격하였다.

11월에 도로 이조 판서가 되었다. 12월에 청주(淸主)가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나라를 공격하여 그 선봉이 경기(輕騎)를 휘몰아 수일 만에 서교(西郊)에 이르렀다. 14일에 상이 강도(江都)로 행행하는 길에 남문(南門)에 이르렀는데 적기(敵騎)가 길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상이 어가를 멈추고 성루(城樓)에 올라 군신(群臣)을 소집하여 계책을 물었다. 당시 사세가 급박하여 상하가 사색이 되어 무슨 계책을 내야 할지 몰랐는데 공이 나아와 아뢰기를, “일이 경각에 달려 있으니,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신이 단기(單騎)로 저들을 맞이하여 맹약을 저버린 것을 책망하겠습니다. 저들이 만약 우호에 뜻이 없어서 멋대로 포악을 부린다면 신은 칼날 아래에서 죽을 것이고, 만약 신을 거부하지 않아서 쌍방이 서로 만나 문답하게 된다면 그 사이에 시간을 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서울에서 가까운 튼튼한 성으로 남한산성만 한 곳이 없으니, 어가를 돌려 그곳으로 들어가 사태의 변화를 관망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계책이 옳다. 하지만 경이 홀로 목숨을 내놓고 호구(虎口)로 들어가 임금의 위급을 풀어 주고자 하니, 이는 고인도 어려워하던 바이다.” 하고 탄식하면서 보냈다. 공이 또 아뢰기를, “이경직(李景稷)이 강개하여 기절(氣節)이 있으니 함께 가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하직하고 떠날 때에 금병(禁兵) 20기를 거두어 그들로 하여금 공을 따라 성을 나가게 하였는데 따르던 기병이 모두 흩어졌다. 공이 이공(李公) 및 군교(軍校) 한 명과 더불어 급히 말을 몰아 사령(沙嶺)에 이르러 적기와 마주쳤다. 말을 멈추고 더불어 이야기하여 맹약을 무시하고 군사를 일으킨 까닭을 따지니, 적장이 다만 강화할 것인지 싸울 것인지를 일찌감치 결정하기를 청하였다. 공이 일부러 그와 함께 오래도록 수작하면서 말을 반복하였는데 해가 기울려고 하였다. 이 틈에 상이 동쪽으로 수구문(水溝門)을 나와 어가를 달려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공이 적기와 더불어 도성으로 들어와서 적과 더불어 이야기한 바를 행재소(行在所)에 아뢰었다. 이튿날 해가 저물도록 통보를 받지 못하자 적들이 대로하여 공이 자신들을 속였다 하여 공을 해치고자 하였는데, 혹자가 불가하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강화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갑자기 죽여서는 안 된다.” 하여 남한산성으로 진군하였다. 공 등이 돌아와 상을 뵈니, 상이 공의 손을 잡고 위로하기를, “조정 신료들이 모두 경처럼 충성스럽다면 어찌 오늘과 같은 일이 있었겠는가.” 하고는 오열하며 눈물을 흘렸다.

당시 성 안에 있는 군사가 채 1만이 되지 않아 성가퀴를 분담하여 지킬 수가 없었는데 적기가 대대적으로 이르러 산과 들을 뒤덮었다. 성을 몇 겹으로 포위하고 사방에서 위협하니 상하가 두려워하여 조석을 보전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적들이 오히려 날마다 사람을 보내어 강화를 요구하기를, “강화가 이루어지면 군대를 즉시 철수하겠다.” 하였다. 그러나 군의가 분분히 일어 강화의 주장을 더욱 준엄하게 공격하여 대신이 망설이며 결정을 하지 못하니, 공이 홀로 개연히 말하기를, “오늘의 계책은 강화하든 싸우든 양단 간에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그런데 싸우자니 군사가 약하고, 강화를 주장하자니 거리끼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성이 함락되어 상하가 어육이 된다면 종묘와 사직을 어디에 두겠습니까.” 하였다. 포위되어 있던 40여 일 동안에 성이 거의 함락될 뻔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원군은 끊어지고 식량이 고갈되었을 뿐 아니라 땔감과 말먹이도 모두 떨어졌다. 적이 포를 쏘아 성곽을 공격하여 성곽에 온전한 성가퀴가 하나도 없게 되니, 사람들의 기가 완전히 저상되어 강화하고자 하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 이리하여 강화의 글이 비로소 작성되었는데 김공 상헌(金公尙憲)이 조정에서 통곡하면서 손으로 그 글을 찢으니, 공이 주워서 붙이며 말하기를, “문서를 찢는 자가 없어서도 안 되겠지만 붙이는 자도 있어야 합니다.” 하였다. 제공이 청성(靑城)의 치욕을 면키 어렵다고 근심하였으나 공이 홀로 말하기를, “오랑캐는 우리의 영토를 탐내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이 다만 강화하는 데에 있습니다. 다른 염려가 없다는 것을 장담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강도가 함락되어 패보(敗報)가 이르고 적이 또 우리에게 사로잡은 포로를 과시하니, 온 성 안이 두려워하고 놀랐다. 그리하여 마침내 성하지맹(城下之盟)을 맺으니, 실로 정축년(1637, 인조15) 정월 그믐날의 일이었다. 적의 군대가 물러가자 상이 비로소 환도하였다.

4월에 우의정에 올랐다. 당시 전란의 참화가 눈에 가득하여 모든 일이 경황이 없었는데 공이 나아가서는 임금의 마음을 위로하고 물러나서는 조정을 수습하니, 내외가 다소 안정되었다. 상이 성하지맹을 맺은 뒤로 늘 우울하여 조정에 임했을 때 기쁜 기색이 없었다. 공이 상에게 간언하기를, “뜻〔志〕은 만사의 근본이고 기(氣)는 또 뜻을 돕는 것이니, 그 뜻과 기를 길러 굽히거나 꺾이지 않을 수 있게 된 뒤에야 공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한 번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하여 기운이 저상되고 만다면 천하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쇠미한 나라를 부흥하는 일을 어찌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하(夏)나라는 사방 10리의 땅을 가지고도 소강(少康)이 부흥시켰고 월(越)나라는 궁벽한 회계(會稽)로 내몰려 있었으면서도 구천(句踐)이 패업(霸業)을 이루었습니다. 하물며 지금 국가의 영토는 결손된 바가 없고 조종(祖宗)의 덕택은 아직 다하지 않아 호령이 사방에 막히지 않고 재력이 오히려 삼남(三南)에 남아 있으니, 오직 전하께서 뜻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큰일을 하고자 한다면 어찌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근심하겠습니까.” 하였으니, 공이 임금을 위로하는 데에 고심하여 그 말이 이와 같았다. 또 의정부가 육조(六曹)의 일을 서리(署理)하던 제도를 회복하고 관제를 개정하며, 전조(銓曹)의 낭천(郞薦)과 대간의 피혐 제도를 혁파하여 조금씩 잘못된 규례를 바로잡아 난리를 극복하고 치욕을 씻을 계책으로 삼기를 청하였는데, 공경(公卿)에게 내려 논의에 부쳤을 때에 의견이 분분하여 끝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또 제도(諸道)로 하여금 전사한 장사(將士) 및 충신과 열녀를 기록하여 차례로 포장하도록 하며, 전장의 시신을 사람을 모집하여 묻어주고 관(官)에서 제사를 지내주기를 청하였다. 포로를 속환(贖還)할 때에 그 대가의 다소를 정하여 그 한도를 넘지 않도록 하고 길양식도 없이 돌아오는 자를 곡식을 운반하여 구제하니, 이 때문에 속환된 자가 매우 많았다.

가을에 좌의정으로 올랐다. 난리 뒤에 역병으로 죽은 소가 많아 농민이 어려움을 호소하자 공이 그 화(禍)가 병화보다 극심하다고 하고 도살을 엄히 금하였고, 호미와 괭이를 더 많이 주조하여 빈민에게 지급해서 농사에 이용하도록 하였다. 성하지맹을 맺은 날에 우리 군사를 동원하여 중국을 범하는 일이 없기로 약속하였는데도 마침내 이해 가을에 와서 군사를 요구하자 이 연양(李延陽 이시백(李時白) )이 공을 보내어 거절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공이 심양에 가서 말하기를, “우리가 명나라를 섬긴 지 300년이 되었으니 군사를 일으켜 공격을 돕는 것은 의리상 불가하다.” 하면서 반복하여 쟁론하니, 청인(淸人)이 그 뜻을 꺾지 못하였다. 돌아올 때에 포로 수천 명을 속환하여 왔다.

무인년(1638, 인조16) 가을에 영의정에 올랐다. 북쪽 오랑캐가 다시 중국을 침범하여 우리에게 군사를 요구하자, 공이 말하기를, “성하지맹은 형세가 급박하고 역량이 달려 어쩔 수 없이 나온 계책이었습니다. 오늘날 군사를 돕는 것은 의리상 허락할 수 없으니, 들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청인이 대로하여 힐책하는 글이 날마다 이르니, 온 조정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공이 상에게 아뢰기를, “우리 한두 사람의 대신이 이 일을 위해 죽어야만 비로소 천하와 후세에 떳떳이 할 말이 있게 됩니다. 더구나 이 일은 실로 신이 주도하였으니, 가서 스스로 감당해 보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공이 다시 심양에 가게 되었다. 도착하니 여러 귀인들이 당(堂)에 열좌(列坐)하고 있었다. 공을 맞아들이고 힐책하기를, “누가 군사를 돕는 일을 저지하였습니까?”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내가 상상(上相)으로 있으니, 주관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이 일이 내게서 나왔으니, 감히 죽음을 피하지 않겠습니다.” 하니, 청주가 의롭게 여기고 풀어 주었다. 이렇게 해서 공이 상부(相府)에 있는 동안에는 한번도 돕는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처음에 공이 떠날 때에 사람들이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고 하였고 공 또한 스스로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고 여겨 상구(喪具)를 가지고 갔다. 친척과 자제가 모두 길에서 곡송(哭送)하였으나 공은 태연하였다.

기묘년(1639, 인조17)에 상이 오래도록 몸져누워 있었는데 궁중에 무고(巫蠱)로 인해 옥사가 일어났다. 공초(供招)에서 정명공주(貞明公主)와 관련된 내용이 나오자 밀지(密旨)로 공으로 하여금 그 옥사를 철저히 조사하게 하였는데 공이 불가하다고 쟁집하였고 일이 맡겨지자 또 힘껏 쟁변하니 상이 더욱 노하였다. 그래서 공을 심양에 사자로 보내고 나서, 공의 죄를 논하지 않았다고 하여 삼사(三司)를 문책하였다. 공이 도중에 소장을 올려 파직을 청하기를, “신이 차마 공주를 다스리지 못하는 것은 감히 선왕(先王)을 저버릴 수 없고 감히 전하를 저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신이 한갓 원칙을 고수한다는 생각만 품고 경솔하게 큰 옥사를 일으킨다면 이야말로 참으로 신뢰하기 어려운 사람이니, 전하께서 그런 신하를 어디에 쓰겠습니까.” 하고, 또 강충(江充)과 이필(李泌)의 일을 반복하여 개진하였다. 그렇지만 이렇게 해서도 옥사가 끝내 종결되지 않았다. 용만(龍灣)에 이르러 병이 심해져 가지 못하게 되자 조정이 부사(副使)를 대신 보내는 것을 허락하였다.

경진년(1640) 봄에 사직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2월에 돌아와 경사에 이르러 또 일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임오년(1642) 가을에 다시 영의정에 배수되었다. 누차 사면을 청하였으나 돈유하여 마지않았으므로 나와 일을 보았다. 10월에 이르러 또 심양에 사신으로 갔다. 이에 앞서 정축년(1637)에 화약(和約)을 청한 본말을 갖추어 도독(都督) 진홍범(陳弘範)에게 이자(移咨)하여 그를 통해 황조(皇朝)에 보고될 수 있기를 바랐으나 해로(海路)가 멀고 험난하며 왕래가 단절되어 글이 반드시 전달되리라는 것을 장담할 수 없었으므로 다시 갈 만한 사람을 구해 글을 전한 다음 반드시 돌아와 보고하게 하려고 하였다. 마침 서변(西邊)에서 승려 한 사람을 구했는데 이름은 독보(獨步)이고 전에 살던 곳은 향산(香山)으로, 가도(椵島)에 들어갔다가 난리로 인해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으로 들어가 홍승주(洪承疇)의 군중에 머무르게 되었다. 무인년(1638, 인조16) 가을에 홍승주가 독보를 보내 우리나라로 돌아와 사정을 엿보게 하였는데 강을 순찰하던 군졸에게 붙잡혔다. 평안 병사 임경업(林慶業)이 경사로 보냈는데, 공이 그와 더불어 말을 해 보고는 이 일을 맡길 만하다고 생각하여 논의한 다음 상에게 아뢰어 주문(奏文) 및 군문(軍門)에 보내는 자문을 갖추어 독보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 다시 중국에 들어가게 하였다. 신사년(1641) 가을에 이르러 중국이 우리의 포로를 돌려보냈는데 독보가 또 그들과 더불어 와서 회자(回咨)를 받게 되었다. 그 회자는 대략 “귀국의 괴로운 정상은 하늘과 사람이 함께 알고 있는 바입니다. 대대로 절개를 지키고 순종한 그 공로가 민멸될 수 없으니, 비록 잠시 시세(時勢)에 내몰려 오랑캐에게 곤경을 당하고 있으나 어찌 차마 귀국을 독책(督責)할 수 있겠습니까. 안심하고 협력하여 뒤에라도 충성을 다하십시오.”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공은 벼슬에서 물러나 있었다. 신 평성(申平城 신경진(申景禛) )이 정승이 되어 공에게 다시 자문을 지을 것을 청하여 재차 독보를 보냈다. 청인이 이를 탐지하고 우리에게 화가 나서 와서 힐책하였으므로 만금(萬金)을 주고서야 일이 무마될 수 있었다. 그런데 홍승주가 싸움에 패해 항복하게 되자 그 일을 다 발설하였는데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마침 이계(李烓)가 한인(漢人)과 잠상(潛商)한 일이 드러나 청인이 세자를 위협하여 이계를 포박하여 봉황성(鳳凰城)으로 데리고 갔는데 이계가 국가의 기밀을 고해바치고 살고자 하여 드디어 독보의 일을 고하였다. 이에 청인이 우리 대신에게 와서 답변할 것을 요구하니, 일이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논의하는 자 중에 혹자가 “일이 증거가 없으니 발뺌하는 것만 못하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저들이 중국의 배가 왕래한 것을 알고 있으니, 지금 사실대로 밝히지 않으면 저들의 의심만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일이란 어찌될지 모르는 법입니다. 끝내 자취가 드러나는 데에 이른다면 재앙이 반드시 클 것이니, 사실대로 밝혀 재앙이 나와 임경업이 죽는 것에서 그치도록 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공으로 인해 주저하며 차마 결행하지 못하였다. 드디어 공이 떠나 용만에 이르니, 혹자가 공에게 말하기를, “전후에 걸쳐 승려를 보낸 것은 모두 임경업의 계책이니, 끝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가 죽기를 기다려 그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면 공은 화를 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그를 저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불가합니다. 처음에 명의(名義)를 천하에 세우고자 했다가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되어서는 남에게 전가하여 자신만 화를 모면하는 것이 가한 일이겠습니까.” 하니, 제공(諸公)이 차탄하며 말하기를, “충신과 열사는 진실로 이와 같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당시 임경업 역시 붙잡혔으나 도중에 도망하였다. 공이 봉황성에 이르자 청인이 군사의 위용을 성대히 갖추고서 공을 뜰로 인도하여 누가 승려를 보내는 일을 주관하였는지를 물으니, 공이 말하기를, “내가 실제로 주도하였고 임경업이 보냈으니, 이미 왕명으로 한 일도 아니고 여러 사람들과 모의한 것도 아닙니다.” 하였다. 이에 그 답변을 심양으로 보냈는데, 청주(淸主)가 공을 형틀에 묶어서 압송하게 하여 북관(北館)에 가두었으니, 북관은 사수(死囚)를 가두는 옥이었다.

계미년(1643, 인조21)에 비로소 남관(南館)으로 옮겨졌다. 당시 김공 상헌(金公常憲), 이공 경여(李公敬輿)도 같이 남관에 구금되어 있었는데 중국 사람으로 심양에 포로로 잡혀 온 자가 차탄하며 말하기를, “동방의 경상(卿相)으로 중조(中朝)를 위하여 이곳에 잡혀 온 자가 세 사람이니, 의(義)를 중시함을 족히 볼 수 있다.” 하였다. 공은 붙잡혀 갇혀 있는 4년 동안에 갖은 위험과 치욕을 당하면서도 늘 《역경(易經)》 읽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갑신년(1644)에 청인이 연경(燕京)에 들어가 대략 남북을 평정하였다.

을유년(1645)에 비로소 우리 세자 및 두 왕자가 돌아왔는데, 공과 제공도 함께 돌아왔다. 가을에 진천(鎭川)에 우거하면서 와룡계(臥龍溪) 가에 띳집을 엮었다. 겨울에 부름을 받고 도성으로 들어왔다.

병술년(1646)에 폐빈(廢嬪) 강씨(姜氏)를 사사(賜死)하자 공이 은혜를 온전히 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해 가을에 공의 병이 심해지자 어의(御醫)를 보내 간병하였고 어선(御膳)을 나누어 주었으며, 위독하게 되어서는 문병하는 사자가 연이어 나왔다. 마침내 정해년(1647, 인조25) 5월 17일에 집에서 운명하였다. 상이 공을 위해 5일 동안 고기를 들지 않았고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였다. 중사(中使)가 상사(喪事)를 살피고 관에서 염빈(殮殯)을 도왔으며 내탕(內帑)에서 옷과 이불을 내어 치부(致賻)하였고 3년 동안 녹봉을 지급하도록 하였으니, 애휼(愛恤)의 은전(恩典)이 규례를 벗어난 것이었다. 후에 상이 조정에 임하여 한숨을 쉬며 이르기를, “임금에 대한 충성이 최 완성(崔完城)만 한 자를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해 8월에 청주(淸州) 치소(治所)의 북쪽 대율리(大栗里) 감좌(坎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전 부인 인동 장씨(仁同張氏)는 우찬성 만(晩)의 따님이고, 후 부인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종묘서 영(宗廟署令) 린(嶙)의 따님인데 모두 공의 묘에 부장(祔葬)하였다. 처음에 장씨 부인에게 아들이 없어서 공이 조카 후량(後亮)을 취하여 후사로 삼았는데 뒤에 허씨 부인이 아들 후상(後尙)을 낳았다. 당시 사대부들은 이미 후사를 세운 뒤에 아들을 낳으면 소생자(所生子)로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풍속으로 굳어졌다. 그런데 공은 생각하기를, ‘부자 관계를 이미 정했고 천륜에 차서가 있으니 바꿀 수 없다.’ 하고 조정에 청하여 후량으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도록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이를 법으로 만들게 되었다. 후량은 마지막 벼슬이 한성부 좌윤이었고 완릉군(完陵君)에 습봉(襲封)되었다. 후상은 벼슬이 응교에 그쳤다. 측실에게서 나온 1녀는 첨지 구횡(具鐄)에게 시집갔다.

좌윤의 아들로 장남 석진(錫晉)은 현령이고, 그다음 석정(錫鼎)은 영의정이고, 그다음 석항(錫恒)은 감사이다. 딸은 진사 윤제명(尹濟明), 정랑 신곡(申轂)에게 시집갔다. 응교는 석정을 후사로 삼았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영민하고 과감하였으며 생각이 깊고 식견이 넓었다. 큰 논란거리를 만나거나 큰 난리를 당해도 생각이 안정되고 기색이 편안하였다. 자신의 견해를 용맹하게 밀고 나가 일찍이 우유부단하게 행동하거나 중론에 뜻이 꺾인 적이 없었다. 멀리서 보면 매우 연약해 보이나 가까이 다가서면 목소리가 금석(金石)에서 우러나오는 듯하였으니, 공이 하늘에서 타고난 자질이 대개 이와 같았다. 젊어서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 현헌(玄軒 신흠(申欽) )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두 공이 모두 깊이 인정하고 허여하였다. 조공 익(趙公翼), 장공 유(張公維), 이공 시백(李公時白)과 일찍부터 교유를 맺어 절차탁마하였는데 늙어서도 우정이 변치 않자, 세상에서 사우(四友)로 일컬었고 학사(學士)와 대부(大夫)가 모두 아름답게 여겼다. 흉금이 넓어 경계를 짓지 않았으며 허물을 고치는 데에 용감하고 선을 따르는 것을 즐거워하여 남이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아주면 진심으로 받아들여 기쁨이 얼굴에 드러났다. 중흥의 시대를 만나 성군(聖君)이 위에 계시고 현사(賢士)가 조정에 가득하였는데 공은 원훈(元勳)으로 중추가 되는 직임을 맡아 몸소 경세제민(經世濟民)을 자임하여 매양 군재(群才)를 고루 등용하고 서정(庶政)을 개혁하여 국세(國勢)를 튼튼히 하고 외침을 막고자 하였으니, 장주(章奏)에 드러난 계획 치고 정확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앞서서는 예론(禮論)으로 곤경을 당하였고 뒤에는 화의(和議)로 배격을 받아 논의가 시론에 부합하지 못하여 끝내 뜻을 크게 펴지 못하였으니,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별묘(別廟)를 세우자는 주장은 변례(變禮)에서 절충하고 경사(經史)에서 근거하여 예조(禰祖)라 부르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밝혔고, 화의의 주장에 이르러서는 시의(時義)를 깊이 헤아려 애당초 함부로 강한 적을 자극하여 전복(顚覆)을 자초하지 않으려고 하였고, 또 스스로 목을 매는 필부의 하찮은 절개를 우선시하여 막중한 종사를 저버리는 일을 차마 하지 못하였다. 이는 명나라 가정(嘉靖) 때와 송나라 정강(靖康) 때의 일과는 함께 견주어서 논할 수 있는 바가 아님이 매우 분명한데도 사람들 중에는 혹 명분에 현혹되어 마음을 굽혀가며 남의 견해를 추종하여 같은 죄목을 붙여 함께 기롱하고자 하니, 사리에 어긋난 것이 아니겠는가. 일에 임해 결단을 잘하였으니, 시비를 가리는 것이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분명하여 중론이 분분할 때에도 굽히지 않고 주장을 견지하였다. 매번 상 앞에 나아가 일을 논할 때에 주장을 고집하였으니, 상이 혹 큰소리를 내면 공은 번번이 다시 분변하여 기어이 하고자 하는 말을 끝까지 다하였다. 어느 날 연양군(延陽君)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가 공이 반복해서 한사코 쟁변하여 허락을 받은 뒤에야 그만두는 것을 보고 나와서 공에게 이르기를, “작은 일을 무엇 때문에 그토록 힘써 간쟁합니까?”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일이 크든 작든 모두 시비가 있는 법이니, 어찌 작은 일로 치부하여 구차하게 임금의 뜻을 따르겠습니까.” 하니, 연양군이 탄복하였고, 후에 “대신 가운데 임금과 시비를 다투는 자는 오직 공뿐이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완성(完城)의 사업으로 그 큰 것이 8가지이니, 반정(反正)에 참여하여 나라를 바로잡아 부흥한 것이 첫째요, 예제(禮制)를 논하여 부자(父子)의 인륜을 밝힌 것이 둘째요, 단기로 적진에 나아가 그 예봉을 무디게 한 것이 셋째요, 비방을 무릅쓰고 화의를 주장하여 종사를 보존한 것이 넷째요, 군사의 징발을 극력 거부하면서 죽음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것이 다섯째요, 천조(天朝)에 글을 보내고서 스스로 그 책임을 감당한 것이 여섯째요, 남의 골육을 잘 대한 것이 일곱째요, 붕당에 물들지 않은 것이 여덟째이다.” 하였으니, 연양군이 공을 가장 깊이 알았기 때문에 그 말이 이와 같은 것이다. 장계곡(張谿谷 장유(張維) )은 매양 공을 칭송하기를, “일편단심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으니, 자겸(子謙)은 참으로 사직과 명운을 같이한 신하이다.” 하였고, 이공 경여(李公敬輿)는 말하기를, “굴원(屈原)의 충성은 충성스러우나 지나쳤고 지천(遲川)의 충성 또한 지나치리만큼 충성스러웠다.” 하였다.

세당이 삼가 보건대, 공은 경전을 깊이 연구하여 경훈(經訓)에 통달하였고 사서(四書)를 숙독하여 터득한 것이 심오하였다. 그러므로 사업에 나타나고 논의로 드러난 것이 모두 이를 근본으로 하였으니, 원래 학문이 얕고 식견이 천박한 자가 대번에 그 한두 가지라도 엿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질책과 비방이 벌 떼처럼 일어났던 것은 이러한 점을 대번에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오호라, 말류(末流)가 도도히 흘러 한번 가서는 돌아오지 않아 그 근원을 전혀 찾지 못하니,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이것이 공에게 무슨 손상이 되겠는가. 공에 대한 평가는 백세가 지나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공의 문장은 논리와 지취(志趣)를 위주로 하였고 주의(奏議)의 경우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붓끝에 혀가 달렸다고 칭찬하였다. 공의 저작은 시문(詩文) 19권과 《경서기의(經書記疑)》 약간 책이 있다. 세당이 일찍이 공의 유집(遺集)에 서문을 썼는데 지금 상국이 또 신도비명을 부탁하기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여 삼가 묘지(墓誌)와 행장에 의거하여 차례대로 사적(事蹟)을 기록하고 그 끝에 명을 붙인다. 명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영준한 인물을 내어 / 天生英彦

한 시대의 / 以爲一世

동량과 주즙으로 삼았다네 / 棟梁舟楫

큰 집을 부지하고 큰 내를 건너게 하여 / 乃扶乃濟

혹여라도 우리를 어그러지게 하지 않았으니 / 無我或戾

우리가 의지하는 바였다네 / 繄我所賴

문충공은 / 玆惟文忠

그 공적이 크다네 / 厥功之大

밝으신 성상을 보좌하여 / 羽翼明聖

재앙을 말끔히 제거하였으니 / 蕩除陰沴

그 덕에 천지가 안정되었으며 / 乾坤泰寧

일월이 밝게 드러났다네 / 日月廓霽

장릉의 복제를 논의할 때 / 章陵服議

유자들 거개가 정견을 잃어 / 群儒多蔽

모피로 울타리를 둘러치고 / 毛皮藩壁

안팎으로 빗장을 잠갔다네 / 外鍵內閉

추존의 예제가 정해지지 않아 / 尊親未定

대의가 장차 흐려지려 하거늘 / 大義將晦

공이 홀로 분연히 의견을 개진하여 / 公獨奮舌

의혹을 분변하고 편견을 깨뜨렸으니 / 剖疑破滯

천륜과 인륜이 / 天秩民彝

동방에서 밝게 드러났다네 / 待我昭揭

대운이 항구하지 않아 / 大運靡恒

의상이 바뀌고 말았으니 / 衣裳變改

가엾도다 우리 동토가 / 愍予東土

먼저 그 해독을 입었도다 / 先罹毒害

하늘을 삼킬 듯한 기세로 / 滔天勢壯

질풍처럼 짓쳐 내려오거늘 / 捲地鋒銳

호랑이의 아가리에 몸을 던져 / 身餌虎口

사직을 수호하였다네 / 爲社稷衛

고립된 성에 원군 끊어지고 / 孤城援絶

강도마저 궤멸되니 / 江都又潰

놀라 서로 돌아보며 / 爾我相顧

너 나 할 것 없이 혼란에 빠졌을 뿐 / 小大憒憒

일찍이 한 사람이라도 / 曾無一人

멀리 보고 깊이 생각한 사람이 없었다네 / 遠算深計

충성을 다하고 심력을 다해 / 竭忠殫力

안팎에서 분주히 주선하였으니 / 奔走內外

공에게 기대지 않았다면 / 非公是仗

그 누가 패망을 구했으리오 / 孰當救敗

영토를 그대로 보전하고 / 四封如舊

종묘에 제사할 수 있었으니 / 七廟以祭

우리나라를 보전하여 / 保我家邦

만년토록 이어지도록 하였다네 / 迄于萬載

이들 북쪽 오랑캐가 / 曁玆北人

천조를 치도록 위협하자 / 脅之反吠

의리를 지킬 것을 맹세하고 / 誓心守義

기꺼이 죽고자 하였네 / 甘於殞斃

북관 깊고 어두운 곳에 / 北館幽幽

몇 해를 갇혀 있었으나 / 經年縶繫

적들이 두려워하고 공경하여 / 敵知憚敬

큰 곤경에서 끝내 벗어났네 / 大難卒解

아 공의 공렬은 / 嘻公功烈

고인 중에도 필적할 이가 없도다 / 古無匹對

내가 지은 신도비명은 / 我銘神道

큰 행적만 들었으니 / 擧迹之最

금석에 새겨 / 刻之金石

영구히 민멸되지 않게 하노라 / 永久靡替

(領議政完城府院君崔公神道碑銘

才足以救一代危亡之禍。識足以破衆論疑似之惑。忠則爲社稷之計策而身家不顧。勇則撫虎狼之爪

吻而顧色不懾。斯皆爲天下之至難而君子之所深與也。若相國文忠公者。其志槩所存。功業所立。豈不亦炳朗前後。卓絶今昔也哉。雖其苦心血誠。可質神明。獨得之見。不同於衆。深至之論。難諧於俗。所以訾議四起。幾沈一世。天定終必勝。人心不可誣。蓋不待百年。先生長者並公時而稱公者。其言漸出。學士大夫後公時而談公者。其論漸平。至是則公之平日自靖於心者。可以有辭于天下後世而無愧色矣。公諱鳴吉。字子謙。姓崔氏。其先全州人。自高麗至本朝。名德相望。曾大父諱嶪。氷庫別提贈吏曹判書。大父

諱秀俊。不仕。贈左贊成。父諱起南。永興府使贈領議政。三世贈官。皆以公貴。議政公號晩翁。少游牛溪之門。文行著名。爲時所擠。宦不達。母全州柳氏。觀察使永立女。公生以宣祖十九年丙戌乙巳。爲生員狀元。仍擢文科。申玄軒謂人。子謙雖羸疾。終必爲名世器。選槐院。己酉。薦史館不就。敍典籍數年中。歷監察諸曹郞。坐事削黜。丙辰丁內艱。己未丁外艱。光海失道。虐殺永昌。幽閉大妃。公與諸公。密議建大策。諸公謁仁祖於私第。公獨不肯曰。義無私謁。久之。議不時決。公以爲引日持久。大事易敗。乃自卜日定計。

癸亥三月癸卯。奉仁祖承大統。迎大妃於西宮。首除吏曹佐郞。轉正郞。夏。擢拜參議。是冬。策靖社功臣一等。進階。封完城君。參判吏曹。甲子春。逆适稱兵。大駕南巡。公爲摠督副使。會張元帥破賊於鞍嶺。乙丑春。上箚論官制。宜稍復古。以正治本。不果用。爲副提學。移大司憲。俄拜副學。箚陳十二事。皆切中時病。上之始踐大位。追尊元宗爲大院君。尊仁獻王后爲啓運宮。及丙寅仁獻薨。上欲服三年。朝議引爲人後不貳斬。合辭爭之。上又欲服杖期。諸臣又力請降服不杖期。以上弟綾原爲喪主。公獨言

父爲士。子爲天子諸侯。葬以士。祭以天子諸侯。今日之禮。唯此爲的證。旣而。諸公論說紛紜。莫適所定。公又上劄萬餘言。極論降服立後之失曰。殿下乃承重也。非出繼也。直承祖統而目以爲人後。君之父母而待之以旁親。其蔽將至於毀禮制滅大倫。可不懼哉。仍請立別廟而自主祭。重忤朝議。被參解職。丁卯春。北兵渡浿。長驅深入。朝野洶懼。旣師及平壤。則騰書於我以要和。公以爲敵張甚。宜巽辭緩其鋒。諸公意合。令張新豐爲書答其意。然敵人進兵不已。上出幸江都。而北使再以和未求見上。公復言兵

交使在其間。可聽。朝延從之。北兵至平山而和始決。於是師退不復東。時敵近而行朝兵單弱。上下危怖。計唯在和。但不敢言。及至敵退。則又紛然以和咎公。言者交章請貶竄。不許。公旣不安於朝。久處江上。秋。遷章陵。將過都城。衆議以私親之喪。不當穿城以過。欲發民治道城東峻坂。公獨爭以爲不可。大臣亦悟乃止。啓運旣禫。將合祔。公復請別建廟稱禰制樂章。爲論者所斥。求出觀察京畿。至己巳。前後輩論議不合。有老少之目。昇平愬於上。指名流五六人爲朋黨。上怒甚。竄世堂先公及兪公伯曾,羅公

萬甲。而張公維。亦出補羅州。公極陳前後輩相責望。非爲朋黨。上感悟。三學士俄皆放還。張公亦徵。時公掌治軍籍成。進階。明年。拜右參贊。毛文龍旣死。陳繼盛代領其衆。劉興治又殺繼盛而代之。我欲興兵問罪。公曰。椵島雖飢疲。衆猶數萬。困獸猶能傷人。況數萬之衆。懷必死之心。憑依險阻。今乃環守孤島。曠日糧竭。欲戰則難。欲罷損威。動衆越海。不計農時。與死寇角。非計也。後兵果不發。辛未春。召諸功臣於春暉堂。世子及兩王子皆侍上。親擧觴勸酒。又賀公新得男。一時以爲榮。夏。上欲追崇章陵。廷議

爭不可。欲請之天子。又以爲不可。五月。特授公副提學。蓋上意以公持論稍異廷臣。欲以自助。公又劄陳廷臣議禮之失。且申別廟之說曰。加隆之擧。禮無明文。事涉義起。廷議不同。而奏請居先。朝廷之不敢承順。固也。議禮以來。于今九年。老師宿儒。旁搜廣引。皆非今日的證。獨葬以士。祭以諸侯。最爲可据。臣之所執。只此耳。壬申。拜宗伯。兼藝文提學。上敎曰。聖人之孝。以尊親爲大。考廟不可久在陋巷。禰位不可遂空。令禮官速議。公又請倣光武故事。建別廟。上嚴責之。蓋公所請。唯在別廟。減之爲降服。加

之爲追崇。皆非公意。故始忤朝議。終被上責。冬。拜吏曹判書。進崇政。授兩館大提學。又兼體察副使。公前後秉銓。破朋黨恢公道。進賢才退罷軟。選用得人。世稱中興以來。秉政公明。以公爲首。乙亥春。解銓。夏。長地官。丙子春。以疾免。夏。長夏官。又以病辭。秋。判漢城。是年春。淸人始稱帝使來。朝議欲無納其書。但以口語拒之。公謂彼跨據大漠。無所受制。肆然稱帝。誰復禁止。而必欲藉口於我。其心或難知。若但拒以口語。事暗昧無證。如使反其辭以誣我。我則何以自解於天下。今宜爲一書。言大號不可僭。臣節不可易。因

將虜書及我所答。聞于皇朝。飭兵馬以待其變。彼以春信弔祭爲名而已。悖者乃八固山及蒙古王子書也。報其禮而拒其悖。於計爲宜。今特有早晩。等是被兵。但不可朦朧以見賣。輕絶以促兵。北使果以不受書。發怒徑歸。公知必有兵。見上曰。虜使徑歸。渝盟必矣。請早講戰守。時朝議紛然。斥和而無備敵之策。公獨深憂之。上箚曰。近日臺諫皆斥和。而廟堂無定算。旣不用言者決戰守。又不用臣策以緩禍朝。虜騎長驅。生靈魚肉。宗社播越。咎將誰任。臣願體臣帥臣。開府關西。約束諸將。有進無退。移書瀋陽。備

陳大義。因探虜情。使彼無他意。姑守兄弟之約。內修政事。以爲後圖。如其不然。堅守龍灣。決於一戰。雖計未萬全。猶愈於束手待亡。一向媕婀。欲言進戰。不無疑懼。欲言羈縻。又恐謗議。江氷將合。禍迫目 前。特汝議定。我已渡江者。不幸近之矣。公知倉卒挑釁。憂在必亡。每欲巽辭緩禍。得以其間爲戰守策。冒衆議屢陳計。言者爭以主和攻公。公又言石晉時景延廣激契丹之怒。桑維翰請遜辭以謝出。帝不聽。其後不能自存。始復請稱臣。契丹不許而晉遂亡。朱子於綱目敗延廣。胡安國亦譏延廣。輕背信好。自生釁端。亡其

身以及其君。夫人臣謀國。不存遠慮以致亡。其事雖正。罪不可逃也。宣祖時。天朝諸將倦用兵有和計。令我請於天朝。成渾謂可許。李廷馣繼發。將被罪。渾憐其忠。於上前救解。宣祖大怒。自是論者攻渾益急。渾言韓

胄伐金。先儒罪之以危社稷。張南軒亦言金不可伐。此以宗社爲重。而相時度力爲義耳。今日旣無石晉兵力。又非祖宗之讎。是非得失。不難定矣。議者謂丁卯和固不害。今虜已僭號。不可通使。彼之僭號。非我所當問也。臣爲此羈縻之言者。非敢不顧是非。徒爲利害之說。酌之以時義。參之

以往迹。信其必然。嘗竊以國弱虜強。姑守丁卯之約。緩數年之禍。築城儲糧。益固邊備。斂兵觀釁。計無出此。出入爭議。焦唇乾舌。不自知止。豈有他哉。閔宗國之將危。一身利害。不暇計耳。群議又譁然改之。十一月。還天官。十二月。淸主自將伐我前鋒。輕騎疾馳。數日至西郊。十四日。上幸江都。至南門。而敵騎塞路。上駐駕御城樓。召群臣問計。時事急。上下失色。不知所出。公進曰。事在呼吸。不可緩也。臣以單騎逆之。責其渝盟。彼若意不在好。肆其兇暴。臣死劍下。若不拒臣。客主相遇。往復難問。躊躇之頃。可以得間。近

京之固。無如南漢。請回駕馳入。以觀其變。上曰。計則可矣。卿獨捨命投虎口。以解君之急。古人所難。嗟歎而遣之。公又言李景稷慷慨有氣節。請與俱。及辭行。徹禁兵。二十騎使從出城。從騎皆散。公獨與李公及一軍校疾馳。及於沙嶺而遇敵騎。駐馬與語。詰其敗盟興兵之故。敵將但請早決和戰。公故久與之。言語反復。日且昃矣。於是上得東出水溝門。馳入南漢。公與敵騎俱行入都城。以所與敵言者。聞於 行朝。至明日將夕而不得報。敵人大怒。以公欺己。欲害公。或不可曰。和未成。不可遽殺。進兵南漢。公等歸

入見上。執手勞公曰。使廷臣皆如卿忠。豈有今日。因嗚咽流涕。時城中兵不滿萬。不能分堞以守。而敵騎大至。被山布野。圍城數重。旁出四劫。上下凜凜不保朝夕。然敵猶日遣人索和曰。和成。兵可卽罷矣。顧群議紛紛。攻和益峻。大臣持不決。公獨慨然曰。今日之計。和與戰耳。而欲戰兵弱。言和則忌。一朝城陷。上下魚肉。置宗社何地。被圍四十餘日。城幾陷者數矣。援絶糧竭。薪蒭並盡。敵以飛礟擊碎。城無完堞。人心崩沮。欲和者益多。於是而和書始成。金公尙憲痛哭於朝。手裂其書。公拾而補之曰。裂書者不可無。而

補書者亦宜有。諸公皆憂不免靑城之辱。公獨曰。虜非貪我土地。其意止在於和。保無他虞。江都陷而敗報至。敵又誇我以俘獲。滿城震駭。乃有城下之盟。實丁丑正月晦日。師退而上始還都。四月。進登右揆。時煨燼盈目。庶事草草。公進以慰勉君心。退以彌縫朝政。內外稍定。上自下城後。常悒悒臨朝不怡。公諫上以爲志者。萬事之本。氣又輔志以行。養其志氣。不撓不挫。然後功可以成。一不如意。參爾摧喪。天下事無可爲。興衰傾否。更何望乎。又曰。夏有一成少康以興。越棲會稽。句踐以霸。況今國家境土無缺。

祖宗德澤未艾。號令無壅於四方。財力尙餘於三南。唯在殿下立志如何。苟欲有爲。何憂不濟。公之苦心調護。其言如此。又請復署事改官制罷。銓曹郞薦。臺諫避嫌。稍正謬規。以爲撥亂刷恥之圖。下公卿議。言多異同。卒不行。又請令諸道錄陣亡將士及忠臣烈女。次第旌褒。戰場胔骼。募人掩瘞。官爲設祭。俘人贖還。制其價多少。毋得踰越。在途無資者。運粟以濟。以此所還甚衆。秋。進左揆。亂後。牛多疫死。農告病。公謂禍劇於兵。嚴屠禁。益鑄鋤斸。給貧民以利耕。下城日。約無召我兵以犯中國。是秋。竟來徵兵。李延陽請

遣公以辭。公赴瀋。言我之事明三百年矣。興兵助攻。義不可。反覆爭論。淸人不能奪。其還贖俘人數千以歸。戊寅秋。進上相。北人復侵中國徵我兵。公以爲城下之盟。勢窮力屈。計非得已。今日助兵。義不可許。不肯從。淸人大怒。嘖言日至。擧朝大震。公言於上曰。我一二大臣。爲此事死。始有辭於天下後世。況此臣實主之。請往自當。於是復赴瀋。旣至則諸貴人列坐於堂。引公入詰曰。誰沮助兵。公對曰。我爲上相。無所不當。知事出於我。不敢逃死。淸主義而釋之。終公在相府。一不助兵。始公之行。人謂必死。公亦自度不免。

以喪具隨。親戚子弟。皆哭送於道。公乃夷然。己卯。 上寢疾久。而宮中有巫蠱獄。辭連貞明公主家。密旨令公窮其獄。公執不可。事下。又爭之力。上益怒。故遣公使于瀋。而責三司以不論公之罪。公道封章乞罷曰。臣所以不忍於公主者。不敢負先王也。不敢負殿下也。使臣待懷一切。輕起大獄。是誠難信之臣殿下安所用之。又反復江充李泌事。然以此獄終不竟到龍灣。疾甚不可行。朝廷許副价致命。庚辰春。乞解得請。二月。歸至京。又坐事罷。壬午秋。復拜相。屢祈免。敦勉不已。出視事。至十月而又赴瀋。丁丑。具

請成。本末移咨陳都督弘範。冀得轉聞于皇朝。海道險遠。往來斷絶。書之必至。不可知。欲更得可往者。必歸報。會西邊獲一僧名獨步。舊居香山。游椵島。因亂不得還。轉入中國。留洪承疇軍中。戊寅秋。承疇遣獨步。歸詗東事。而爲巡江卒所得。西帥林慶業。送至京。公與語。謂堪屬此事議。白上具奏文及移咨軍門。遣獨步泛海。復入中國。至辛巳秋。中國還我俘。而獨步又與俱來得回咨。略曰。貴國苦情。天人共鑑。歷世貞順。勞不可泯。雖暫迫時勢。見窘於虜。豈復忍督過。安心協力。以效桑楡。時公居閑矣。申平城爲相。請

公更撰咨文。再遣獨步。淸人覘知之。怒我來詰。捐萬金得不究。及洪承疇兵敗降。備言其事。我不知也。會李烓潛商事覺。淸人挾世子縛致烓鳳凰城。烓欲謁國陰事以祈生。遂告獨步事。於是淸人責我大臣來置對。事將不測。議者或謂事無證。不如諱之。公曰。彼知漢船往來。今不以實。益其疑。且事不可知。終至跡露則禍必重。不如以實禍。止吾與慶業死而已。 上以公故。猶豫不忍決。遂行至龍灣。或謂公曰。前後送僧。皆出慶業。終不得免死。等死以委之。公可脫禍。非有負也。公曰。不可。初欲立名義於天下。臨死生則

委諸人以自免可乎。諸公歎曰。忠臣烈士。固不當如是耶。時慶業亦被逮道亡命。公旣至鳳城。淸人盛兵威。引公于庭。問誰主遣僧。公曰。我實爲之主。而林慶業裝遣。旣非王命。又不與諸人謀。於是以其對。致之瀋陽。淸主使械送公。幽之北館。北館者。死獄。癸未。始移南館。時金公尙憲。李公敬輿。亦同拘一館。華人俘瀋者嗟歎言曰。東方卿相。爲中朝被執於此者三人。足見其重義也。公幽縶四年。危辱備至。常讀易不輟。甲申。淸人入燕。略定南北。乙酉。始歸我世子及兩王子。公與諸公同還。秋。寓居鎭川。結茅臥龍溪

上。冬被召入都。丙戌。賜廢姜死。公乞全恩。不許。是秋。公疾甚。御醫來視。分御膳以賜。旣殆則候問相望。竟以丁亥五月十七日。告終于家。上爲之五日不御肉。三日輟朝。中使視喪。官尤殯殮。內出衣被以襚。三年致祿。所以哀恤。出於例後。上臨朝喟然曰。安得忠於上如崔完城者乎。是年八月。葬于淸州治北大栗里負坎之原。前夫人仁同張氏。右贊成晩之女。後夫人陽川許氏。宗廟令嶙之女。皆祔葬。初張夫人無子。公取從子後亮爲嗣。後許夫人生子後尙。時之士大夫。旣立後而子生。使所生子主祀。流而爲俗。公

以爲父子已定。天倫有序。不可易也。請於朝。以後亮主祀。因著爲令。後亮卒官漢城左尹。襲封完陵君。後尙官止應敎。側出一女。適僉知具鐄。左尹男長錫晉縣令。次錫鼎領議政。次錫恒監司。女適進士尹濟明,正郞申轂。應敎以錫鼎爲後。公資性英果。有沈機遠識。處大議當大難。慮安而色定。勇往直前。未嘗游移兩端。沮奪衆口。望之而體不勝衣。接之而聲出金石。其所得於天者蓋如此。少游白沙,玄軒之門。二公皆深見推許。與趙公翼,張公維,李公時白。早年定交。講磨切磋。至老不變。世稱四友。學士大夫。咸歸美焉。襟

懷坦夷。不設畦畛。勇於改過。樂於從善。人規其失誠心開納。喜形於色。及際遭中興。聖君在上。賢士滿朝。公以元勳。職居樞要。身任經濟。每欲保合群才。改紀庶政。以固國勢。以禦外侮。其所區畫。見於章奏。莫不精確。然前困禮論。後激和議。枘鑿不入。終不克大展。可勝歎哉。然別廟之說。折衷變禮。根据經史。以明禰祖之失。至於和議。審量時義。初不欲橫挑強敵。自速顚覆。又不忍以宗社之重。從溝瀆之諒。此與明之嘉靖。宋之靖康。不可比論也甚明。而人或眩於名實。絀心徇跡。至欲同科而共譏。不亦舛乎。臨事善斷。

剖析是非。若指諸掌。衆言叢雜。卓守不撓。每至上前。論事堅執。上或厲聲。公輒更辨。必極所言。一日。延陽進對。見公反覆固爭。得請乃已。出謂公曰。小事何爭之力。公曰。事無大小。皆有是非。豈可委以細事而苟徇人主意乎。延陽歎服後嘗曰。大臣爭是非於上者。唯公而已。又曰。完城事業。其大者有八。反正贊臣復之業一也。議禮明父子之倫二也。單騎赴敵。以緩其鋒三也。冒謗主和以存宗社四也。力拒徵兵。視死如歸五也。送信天朝。以身自當六也。善處人骨肉七也。不染朋比八也。延陽知公最深。故

其言如此。張谿谷每稱公曰。赤心殉國。不避死生子謙眞社稷臣也。李公敬輿曰。屈子之忠。忠而過。遲川之忠。亦過於忠者也。世堂竊觀公精硏經傳。會通典訓。上下四子所得者深。故其見於事業。發諸論議。皆本於此。固非膚學淺識遽能窺其一二。所以詆疵紛然。蜂起蝟集。猝不可解。嗚呼。末流滔滔。一往不返。大迷其源。至於如此。無足異也。雖然。此於公奚損。要之可質於百世耳。公之文章。理趣爲主。至於奏議。世皆推以筆端有舌。所著詩文十九卷。經書記疑若干冊。世堂旣嘗序公遺集矣。今相國又屬以墓刻之銘。不

敢辭。謹據誌狀。敍次事行。系之銘曰。

天生英彥。以爲一世。棟梁舟楫。乃扶乃濟。無我或戾。繄我所賴。玆惟文忠。厥功之大。羽翼明聖。蕩除陰沴。乾坤泰寧。日月廓霽。章陵服議。群儒多蔽。毛皮藩壁。外鍵內閉。尊親未定。大義將晦。公獨奮舌。剖疑破滯。天秩民彝。待我昭揭。大運靡恒。衣裳變改。愍予東土。先罹毒害。滔天勢壯。捲地鋒銳。身餌虎口。爲社稷衛。孤城援絶。江都又潰。爾我相顧。小大憒憒。曾無一人。遠算深計。竭忠殫力。奔走內外。非公是仗。孰當救敗。四封如舊。七廟以祭。保我家邦。迄于萬載。

曁玆北人。脅之反吠。誓心守義。甘於殞斃。北館幽幽。經年縶繫。敵知憚敬。大難卒解。嘻公功烈。古無匹對。我銘神道。擧迹之最。刻之金石。永久靡替。)

출처 : 한국고전종합DB (itkc.or.kr)

 

 

'조선상국증시문충 지천최공명길지묘'

영의정의령남구만서

明谷集卷之二十八 / 墓表

先祖文忠公表陰

文忠公系完山。字子謙號遲川。晩谷公第二子。降丙戌科乙巳。翊仁祖贊中興。策元功封完城。判兩銓典文衡。位上相摠百揆。丁亥終六十二。葬淸州大栗里。元配張繼室許。並祔葬爲三墓。子其姪曰後亮。官左尹襲完陵。繼有子曰後尙。官應敎贈政丞。側出女適具鐄。李延陽嘗稱曰。公事業大者八。立人紀建大勳。論邦禮明大倫。馳單騎緩賊鋒。冒積謗主和戎。拒徵兵當西嘖。通天朝滯燕獄。處骨肉開主聰。絶朋

比秉至公。心如箕谿谷云。忠如屈白江言。節如婼浦渚文。李澤堂謂公文。筆有舌同陸宣。朴西溪深推服。稱公文勝谿谷。公事行具碑誌。於表陰述其槩。孫男前議政府領議政錫鼎識。

 

표음은 1702년 당시 영의정 최석정이 짓고

홍문관 부교리 최창대가 쓰고 경상도관찰사 최석항이 세웠다.

출처는 명곡집에 남아있다. 자료는 한국고전번역원 DB 한국문집총간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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