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통영(統營)은 이순신 장군이 최초 삼도수군통제사로 있었던 ‘통제영(統制營)’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통영의 또 다른 이름인 충무는 이순신 장군의 시호‘충무공(忠武公)’에서 따온 것이다.
통영은 임진왜란 당시 그 앞바다가 학익진으로 유명한 한산대첩의 현장이다. 작은 어촌이 변화한 것은 1604년 삼도수군통제영이 이곳으로 옮겨온 후 군사요충지로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제6대 삼도수군통제사 이경준은 1603년 작은 포구인 두룡포에서 터를 닦고 1605년 통제영 세병관(洗兵館)을 지으면서 통영이 갖춰지기 시작됐다. 이 세병관의 정식명칭은 통영세병관이다.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설치했던 중심 건물로 궐패(闕牌)를 모시고 출전하는 군사들이 출사(出師) 의식을 행하던 곳이다. 앞면 9칸, 옆면 6칸의 단층 팔작지붕 건물로, 여수의 진남관(鎭南館)과 함께 남아있는 군사용 건물 가운데 면적이 넓은 건물 중 하나이다.
수원과 화성의 인물로 이곳 통영과 관련 깊은 인물이 있다. 바로 해풍김씨 남양쌍부파 김영 장군이다. 김영 장군은 통영에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1829)하였을 때 큰불이 일어나 4개동의 인가 수백호가 불타버리자 남망산(南望山)의 소나무를 베어다 집을 짓게 하여 주민을 구휼(救恤)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일로 금송(禁松)을 남벌(濫伐)하였다는 국법으로 파직(罷職)을 당하니 이듬해에 통영의 주민들은 김영의 은덕을 기리는 비문을 뜬 바위에 세웠다.
이 바위는 김영이 올라가 수일동안 진화작업을 지휘하였던 바위이며 통영군지(統營郡誌) 인편에 실려 있다. 비문에는
「화재(火災)의 고난(苦難)을 겪은 백성(百姓)들이 공이 안전(安全)하게 조치해주신 덕택으로 걱정근심을 덜어 버리니 춥고 배고픔 막아주시니 은혜(恩惠)크고, 많은 집들을 전과 같이 다시 짓게 해 주시니 재난은 이미 지난일 되었고 옛 과 같이 살게 되었도다」
라고 기록(記錄)되어 있다. 그밖에 세병관(洗兵館) 후정에도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져 있다.
자헌대부형조판서겸오위도총부도총관지훈련원사(資憲大夫 刑曹判書兼五衛都摠府都摠管 知訓鍊院事) 해풍김공휘영지묘 정부인밀양박씨부좌
원래 장군의 묘소는 화성시 향남면 행정리에 위치하며, ‘장군총‘으로 불리며 숭상되었다. 이는 포도대장을 무려 24번 하고 도적떼를 잘 잡아 민생을 편안케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명성을 두고 백성들이 동요로 불러 졌다.
세월아 네월아 가지를 말어라
이현장신(이현장신)이 다 늙어 가노라
영웅호걸은 늙던지 말던지
이현장신만 늙지를 마소서
세월아 네월아 가지를 말어라
이현장신이 다 늙어 가노라
앉아서 천리요 서서 만리라
눈만 뜨시면 자버대령
세월아 네월아 가지를 말어라
이현장신이 다 늙어 가노라
좌우포장 스물네 번에
조선천지가 잔잔하고나
붙잡던 세월은 가고야 말었오
이현장신도 가고야 말었오
유명한 포장 이현장신공
이 세상 이 때에 다시 한 번 오소서
*이현장신은 김영이 한양 이현에 살아서 불여진 이름이다. 김영이 죽고 50여년이 넘어 고종대 도적이 들끓자 김영을 그리워한 동요가 불려졌다.
화성문화원, '화성 사람들, 정조를 만나다', 2004, 98~99쪽 : 김영규, '해풍김씨세덕록, 해풍김씨대종회, 1999, 176~177쪽
이러한 전력은 집안의 자랑이 되었다. 그래서 5대손 애국지사 김연방(대한제국 시종원 시어[선전관 후신]를 지내고 고향에 낙향해 3.1운동인 수원군 삼괴 4.3항쟁을 주도하여 일제의 보족으로 순국)의 고모들이 무반 명문가 아산 충무공가로 출가하였고, 그의 손부도 충무공의 후손인 이신열을 종부로 맞았다. 무반의 전통이 무반가의 통혼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렇듯 김영이 충무공과 같은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한 것은 대단한 자랑이었다.
이후 김영 장군은 한성판윤(漢城判尹)(833대)을 거쳐 형조판서(刑曹判書) 도총관(都摠管) 금위영대장, 어영대장 총융사(禁衛營大將, 御營大將 摠戎使)에 오른다.
세병관(洗兵館) ]
경상남도 통영시 세병로 27에 있는 조선 시대의 목조 건축이다. 국보로 이 건물은 본래 1604년에 이순신의 전공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졌으며, 후일 삼도수군통제사영(三道水軍統制使營)의 건물로 사용되었다. 이 세병관은 정면 9칸, 측면 5칸의 장방형 평면으로 모든 칸에는 창호나 벽체를 만들지 않고, 통간(通間)으로 개방하였다. 다만, 우물 마루로 된 평면 바닥의 중앙 일부를 한 단 올림으로써 위계성(位階性)을 주고 있다.
이밖에 통영에 군사도시가 생기면서 살림을 도와주는 12공방도 함께 들어왔다. 여기서 나전칠기를 생산하여 400년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기에 통영은 나전칠기의 본 고장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통제영은 이경준 통제사부터 208대 홍남주 통제사까지 300년 가까이 존재했다.
통영의 이런 역사는 우리나라의 해상문화의 역사와도 그 맥을 같이 한다. 임진왜란 당시 그 유명한 한산대첩의 현장이기도 한 통영은 삼도의 중심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 결과 수군의 각종 병선과 세곡을 실어 나르던 조운선, 화물을 싣고 다니던 화물선과 장배들의 출입이 빈번한 도시이다.
현대의 통영은 조선시대 대도회로 발달하여 일제강점기에 풍부한 물산을 바탕으로 음식문화 발달하는데, 바로 다찌집이다. 통영 앞바다에서 갓잡은 해산물로 차려진 진미가 술안주상으로 한상이다. 또한 전국 휴게소 어딜가나 있는 충무김밥은 선상 허기를 달래주기 위해 먹던 별미 중에 별미고 든든하다. 김밥집만으로 포구가 다 들어 차 어느 집을 가나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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