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제국주의의 시작과 끝. 히로시마

달이선생 2023. 8. 4. 11:51

2023년 5월 23일부터 6월 2일까지 일본이동수업을 다녀왔다.

일본 고대 문명의 산실 나라, 오사카, 교토와 일본제국주의의 시작과 끝이 된 히로시마

그리고 일본 미학의 정수로 꼽는 긴카쿠지(은각사) 등 다양한 문화유산을 돌아봤다.

일본의 고대는 왜, 즉 야마토 정권의 시작에 있다.

야마토 정권이 성장하는 시기 일본에는 새로운 문명이 싹튼다.

바로 나니와를 비롯한 근방의 문명이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고분 유적이 바로 오사카 사카이지역의 다이센고훈군이다.

확실한 것은 고대 왜를 정복한 이들은 한반도 도래인이고 그 대표적인 세력이 바로 가야였다.

오사카역사박물관과 다이센고훈, 나니와궁터에서 나오는 모든 유물은 가야를 가르킨다.

미국의 시작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몰아내고 서부를 개척했다는 프론티어를 말하지만 분명한 것은 정복이다.

가야 역시 정복으로 시작했다.

그러한 역사적 전통이 정이대장군이라는 일본의 중심 정책에서 근대에 이르는 막부 정권의 최고 통치자 쇼군의 직책으로 전승되었다.

그러나 가야의 정복은 정복으로 그치지 않았다.

백제가 문명을 전수하고 한반도 도래인이 적극적으로 왜로 건너가서 새로운 출발, 새로운 시작을 하였다.

바로 헤이안시대를 연 것이다.

만세일계라고 자부하는 덴노가의 영원한 조정 교토를 건설하였던 것이다. 당 장안성을 모방하여 나라의 정통을 세우고 스스로

해뜨는 곳, 일본이라고 한다. 바로 여기에 교토 아라시야마를 거점으로 대천을 막아 대언을 만들고 막대한 경제적 기반으로

교토의 중심세력이 된 신라계 도래인 하타씨가 중심에 있다.

워낙 성공하고 중심된 성씨라서 이후 도래계라는 설명은 서서히 사라지고 그들 세계의 뿌리를 진나라 시황제에 찾을 정도로 번성한

그들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타씨, 즉 진씨는 신라인이었고 고대 왜를 일본으로 개창한 주역이었다. 지금도 교토사람들은 그들의 문명이 시작된

아라시야마를 자신들의 고향으로 여긴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 서려있는 지명은 모두가 하타씨와 결부되어 일본을 연 하타씨, 큰 하타

등 다양하게 남아있다. 일본 국보 목조미륵반가사유상 역시 하타씨의 씨사인 고류지(광륭사)의 부처이다. 우지 뵤도인을 가면 대표적인

설명은 헤이안시대의 국풍 문화의 정수라고 한다. 재밌는 사실은 불상, 탱화, 건물 등 일본적인 요소도 많이 보이나 나라에서 시작된

백제의 불교 문화, 삼국의 불교 문화가 여전히 진하게 남아있다. 그들이 그들로 나아가고도 한반도의 여명은 여전했다. 하지만 막부가

개창되고 그들이 빗장을 걸어 잠그면서 오늘의 일본이 된다, 사무라이를 정수로 하는 무가와 격식과 법식을 이루는 승가 전통에 기층을

이루는 신토로 완성된 문화이다.

이후

긴 에도막부의 쇄국이 망국이 되고 일본 사무라이들은 머리카락을 자르고 게다를 벗고 칼을 내려 놓는다. 그렇게 시작된 문명 개화는

덴노를 중심으로 하는 기형적 근대 국가를 창출하였고 이는 일본의 팽창을 도모하는 명분이 되었다.

정한론이 끊임없이 대두하고 서남전쟁이라는 내전으로 치달았지만 결국 일본은 제국주의로 나아간다. 망국으로 가는 달콤한 유혹이었지만

1894년 히로시마의 항구는 일본 제국주의의 서막을 알리고 그 성공이 되는 조선 정벌과 청일 전쟁의 교두보였다. 히로시마성에 도쿄에서 옮겨온 대본영이 설치되어 전쟁을 이끌었으며 히로시마 남부의 우지나항(宇品港)과 주변으로 군수공장이 서고 막대한 전쟁물자들이 대륙으로 조선을 통해 건너 갔다. 바다에 뜬 도리이로 유명한 미야지마는 일본의 대표적인 휴양지다. 이곳에 토요쿠니진자(풍국신사)가 5층탑을 갖춰 위용을 뽐내는데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따라 출병했던 휘하 장병에 대한 위령을 목적으로 지어진 신사이다. 침략의 그림자가 센가쿠시대에서 임진왜란으로 이어지고 있어 그저 웃고 즐기기엔 씁쓸한 일본을 대표하는 절경지다.

마침내

1945년 8월 어느날 미 전략 폭격기가 히로시마에 날아든다. 그리고 엄청난 섬광과 폭발이 이루어진다.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원폭이다.

끝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끝

그런 그곳에 고향의 향수를 노래하고 타국 일본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움직인 시인 정지용과 윤동주가 있다.

암울한 시대 슬픔마저도 아름답게 노래하던 그들의 흔적이다.

오늘 그 역사를 돌아 본다.

 

이 아래 청일전쟁과 조선 침략을 이끌었던 대본영이 있었다. 청일전쟁과 일제의 조선 출병으로 민간인은 물론 동학농민군과 을미의병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영령들의 희생이 이곳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의 슬픔과 절망인 원폭만을 추모하기엔 우리의 한이 너무나 크다.

녹두꽃 피다

일본은 철저하게 청일전쟁을 준비했던 것이다

동학농민혁명과 조선정부의 청군 파병 요청을 확인한 일본은 두 가지 의견이 대립하고 있었다.

외교계는 러시아의 개입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므로 청일전쟁을 반대했다.

이에 비해 군부는 전략 요충인 조선을 사전에 확보하기 위해 빠른 기회에 청나라와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절대로 필요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인식은 이미 1887년 <청국정토책안(淸國征討策案)>으로 완성되었다.

이 계획에 따라 일본은 철저하게 청일전쟁을 준비했던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일본 군부는 조선정부가 지금과 같은 정세에서는 반드시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고 청나라는 이에 응할 것이라 판단하고, ‘조선에 있는 신민(일본인)을 보호하고 일본 제국의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 또한 군사를 보낼 필요’가 있다고 결정했다.

특히 한국주재 일본공사 오토리(大鳥圭介 대조규개) 는 동학군이 서울로 진격한다면 ‘대단히 기뻐해야 할 기회’이며 ‘동양 정계의 일대 신천지’를 열 수 있고, 일본은 청나라와 함께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하고 이를 기회로 조선정부를 혁신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청일전쟁을 통해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실히 확보하겠다는 의지였다.

동학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조선정부는 청나라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청군 출병을 의뢰했다. 이 출병 의뢰가 청일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청군 출병 의뢰는 즉각 일본정부에 타전되었고, 일본도 각의에서 ‘지금 상세한 보고를 기다릴 것 없이 먼저 공사관 및 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기선을 잡는데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즉시 출병 준비를 해야 한다’는 출병결의안을 채택했다.

뿐만 아니라 청군의 병력이 5000명을 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양국 간 전쟁에서 일본이 필승하기 위해서는 6000명이나 7000명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를 위해 일본은 청나라가 출병을 촉진하도록 유도하기까지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조선정부는 공식적으로 청군 출병을 청원했다.

이에 철저한 준비를 마친 일본도 즉시 군사를 조선으로 파견키로 했다.

5월 2일, 일본은 청일전쟁을 대비하여 참모본부 내에 대본영을 개설하고 혼성여단의 조선 파견에 대한 허락을 받아 히로시마(廣島)의 제5사단에 1차 충원을 하달했다.

5월 5일 선발대로 800여 명의 대대 병력은 히로시마 우지나항(宇品港)에서 인천으로 출항했다. 5월 6일 인천에 도착한 오토리 공사는 조선정부로부터 병력을 대동하지 말라는 요청을 거부하고 다음날 7일 해군 육전대 420명과 함께 서울로 들어왔다.

이와 같은 시기 청군 2100명은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2일부터 7일까지 충남 아산에 상륙하고 충청도 일대에 주둔했다.

청나라와 일본에서 군대를 파견했다는 소식을 들은 동학군은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해 5월 8일 정부와 전주에서 화약을 체결했다.

이를 ‘전주화약(全州和約)’이라고 한다.

‘전주화약’ 후 조선정부는 청일 양군의 공동철병을 요구했다.

청나라는 이를 수용하였지만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철병안을 거부하는 한편 일본의 대본영은 제5사단의 잔여부대를 동원하여 조선에 출병할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일본의 공동철병 거부와 추가 출병은 청일전쟁으로 치닫는 막다른 길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톈진에 있던 한 일본 무관은 “청나라가 조선에 5000명의 병력을 증파한다”는 거짓 정보를 본국에 급전했다.

이를 기회로 일본은 양국의 충돌은 불가피해졌다고 확신하고 대본영은 출병을 연기했던 2대대를 조선에 증파하고 아산에 있는 청군을 분쇄할 능력이 있는 혼성여단을 완성할 것을 제5사단에 하달했다.

당시 일본 무쓰(陸奧宗光) 외상은 청일전쟁의 구실을 ‘명백한 청나라와 조선의 종속관계 파기’에 두었다.

혼성여단은 인천을 거쳐 서울로 향하였고, 인천과 서울 간은 일본군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이러한 급변한 청일 양국의 개전에 대해 러시아와 영국 등 서양세력은 중립적 자세를 취하였다.

이는 결국 일본의 개전을 확실하게 지원하는 꼴이 되었다.

청일전쟁을 일으키는데 역할을 한 주재조선공사 오토리

 

[출처] 녹두꽃 피다-일본은 철저하게 청일전쟁을 준비했던 것이다|작성자 byunsdd71074un

1894년 히로시마 남부의 우지나항(宇品港)의 사진과 일본 제국주의의 출병 모습들이다. 일제의 침략의 상징이 이곳 히로시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으로 지어진 토요쿠니 진자 풍국신사다. 전국시대 전장을 따랐던 그의 전몰장병에 대한 위령을 위한 장소인데 그가 저지른 야욕에 속절없이 죽어간 조선인들.. 그는 자기 나라사람 죽이기도 서슴치 않았다. 군인은 물론 한 성을 수공으로 전멸시킨 공적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가 그의 부하들을 추모한 곳이다. 그런 역사적 사실은 망각되고 아름다운 절경이라며 웃고 떠들고 노는 곳이 여기다 우리도 놀아 보자 그들의 망각을 비웃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