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경남 함안 칠원, 창원 답사(칠원읍성)

달이선생 2018. 8. 3. 02:00

경남 함안 칠원, 창원 답사

 

  2018년 8월 2,3일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과 창원시 마산 등을 답사하였다.

  함안군은 현재 처가가 있는 곳으로 여름휴가로 가게되었다. 이날 처음으로 두살배기 아들 지환이와 함께하였다. 2일 저녁에 성곽에 흥미가 있어 늦었지만 칠원읍의  칠원읍성을 살펴보았으나 너무 늦어 다음날 다시 찾았다. 3일 칠원읍 칠원읍성의 잔존 성곽을 살펴보았다. 칠원초등학교와 칠원장 내 위치한 성곽부분은 기존에 볼 수 있던 성곽에 쓰인 석재와 달리 담장을 쌓던 돌과 유사하였다. 그래선지 주변 민가 등에 담장의 재료로 많이 사용되었다. 원래부터 큰 돌이 쓰이지 않았는지 정확히 판단이 어려웠다. 다만 현재 남아있는 석재로만 보면 칠원읍성은 관아에 대한 경계를 위한 마치 궁궐담장 같은 기능을 가진 것으로 방어시설로서의 기능은 상당히 떨어질 것으로 판단된다. 더욱이 평지에 위치하고 있어 이 정도의 규모와 시설은 적의 공격에 효과적인 방어를 수행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런 읍성의 한계를 칠원면 유원리에 위치한 칠원산성을 통해 보완하고 있어 아마도 평시에 읍성을 행정중심이자 생활지로 역할하고 위급할 때는 읍성을 비우고 산성에 웅거하여 적을 대비한 고구려의 이성체계(평지성+산성)를 따른 것으로 판단된다.

  칠원장은 아랫지방 장터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그 옆에 위치한 선정비군은 고종대 효자 권상찬의 효자정려각인 돈풍각과 같이 위치하였는데 비석 등이 많이 마모되어 확인이 쉽지 않았다. 그 중 숙종대 경상도관찰사로 지역민을 구휼하다 순직한 홍우녕의 영세불망비 등이 잘 보였다. 칠원장을 나와 칠원향교를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칠원교회 애국지사 손양원 목사 기념관을 끝으로 답사를 마무리하였다.

 

 

칠원읍성(漆原邑城)

  함안군 칠원읍 구성리 일원(728번지, 칠원초등학교, 해발25m)

 

  칠원(漆原)은 함안군 동부에 위치한 면으로서 총면적 50.54㎢이고, 구마고속도로가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다. 면의 경계는 창원시 동읍, 마산시 내서읍, 함안군 칠서, 칠북, 산인면과 접하고 있으며, 남북으로 넓게 펼쳐진 평야에는 광려천(匡廬川)과 칠원천(漆原川)이 북으로 흘러 낙동강과 합류한다.
  칠원(漆原)은 조선 선조(宣朝) 34년에 함안에 합속되었다가 광해군(光海君) 9년에 분리되었다. 인조(仁朝) 5년(1627년)에 창원도호부(昌原都護府)에 편입되었으나 다시 인조 7년(1629년) 함안에 합속되고 10년 만인 인조 17년(1639년) 함안에서 분리되어 나갔다. 그러다 광무(光武) 10년(1906년) 전국 행정구역 개편때 칠원 전역이 함안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1)  읍성에 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석축으로 둘레 1595척, 높이 11척으로 되어 있고2), 성종실록(成宗實錄) 23년 11월초에 높이 11척, 둘레 1660척으로 기록되어 있어3) 성의 둘레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구성리(龜城里) 일대에 있는 성으로 주변 지역에 민가가 들어서면서 석축(石築:城壁)은 대부분 허물어지고 일부만이 남아 있으나 그 또한 민가에서 집의 담 또는 울타리로 이용하면서 원형을 크게 변경시켰다. 성벽에 사용된 돌들은 장방형으로 가공한 것이며 가장 큰돌은 97×40cm의 것도 있다. 옛 성벽의 자취를 찾을 수 있는 곳은 칠원초등학교 서쪽으로 길이 29m, 높이 2.4m, 너비 2m 정도이며 내벽은 초등학교의 담장이고, 외벽은 성벽과 붙어 있는 논으로 미나리꽝으로 되어 있다. 초등학교의 담을 따라 교사(敎舍) 뒤편으로 약 200m쯤 가다 보면 길이 13m, 높이 2.4m의 성벽이 나타나며 현재는 구성리 728번지 정수식씨의 집 울타리로 사용되고 있다.  읍성의 문지(門址)는 동쪽과 남쪽에 있는데, 동문지(東門址)는 길이 22m, 높이 2.4m, 너비 2.4m의 흔적만이 남아 있으며, 현재 원구성리 상수도 저장 탱크가 설치되어 있다. 이 곳 주민 정수식씨에 의하면 70년대 초 새마을사업을 하면서 성벽을 허물고 소방 도로를 만들었다고 한다. 남문지(南門址)는 동문지로부터 약 12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외벽만 10m쯤 남아 있고 내벽은 칠원시장 안의 어시장으로 부분적으로 훼손되어 원형을 잃었다. 약 10년 전 까지만 해도 원형을 보존한 채 남아 있었다고 기억되나 불과 수년 사이에 개발이란 미명(美名)과 군민과 당국의 무관심으로 파괴되어 가고 있어 우리의 문화 유적 보호에 대한 현실을 대변하고 있다.
  현재 이 곳에서 과거의 유물이나 연대를 측정할 만한 자료는 채집하지 못하였으나, 문헌 기록으로 보아 조선시대 전기(15세기경)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1995. 5. 20. 구순근 정리)

 

 

 

 

 

 

 

 

 

 

 

 

 

무기리 삼층석탑
  칠원면 구성리 730번지

 

  무기 탑골에 흩어져 있던 탑재를 모아 3층석탑(三層石塔)으로 1959년에 면사무소에 세웠고 칠원종합고등학교 입구로 옮겼다가 현재 칠원초등학교에 옮겨 세운 것으로 옥개석(屋蓋石)이 부분적으로 파손(破損)되었으나 전체적인 형태는 양호(良好)하다. 일층탑신(一層塔身)에는 문비(門扉)가 조각되어 있으며 옥개(屋蓋)와 탑신(塔身)은 원래의 짝이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높이는 2.3m다.

 


무기리사지(탑골)
  칠원면 무기리 무기마을 뒷산중턱


  현재의 구고사(九皐寺)터도 옛사지의 하나임에는 틀림없으나 기록에 전하는 바가 없어 아쉽기만 하다. 무기리 일대에 수많은 절이 있어 무기동 숲 밖 탑끌(탑골)들에 짚신을 벗어두고 사찰들을 모두 구경하고 되돌아와 보면 짚신은 이미 썩어 있었다고 전할 만큼 무기리에는 많은 탑과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구고사에 있는 석조부도, 칠원종고에 있는 3층석탑등이 무기리사지(탑골)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칠원읍지」불우조(佛宇條)에 “墨寺一云中興寺又云神興庵白石嫌於邑其故墨其石改各墨寺在靑龍山”이라 하였다. 청룡산은 작대산의 옛 이름이며 무기뒷산은 청룡산이므로 옛날 이곳에 사찰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으며 이 능선아래가 무기리이고 무기마을 북쪽 들녘이 〈탑골들〉, 또는〈탑끌들〉로 불리워지고, 돈담마을 동북쪽 골짜기가 암자골로서 골짜기 중간에 대숲, 기와편, 축대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칠원장

 

 

 

 

칠원 선정비군(석비군)
  칠원면 용산리123-2(칠원장 내)


  칠원장 내 돈풍각 옆에 있는 칠원현감들의 치적 비석군으로 모두 18기가 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것을 이곳에 모아둔 것으로 숭정(崇禎: 1628-1664)부터 광무(光武: 1897-1907)에 이르기까지 시대의 폭이 넓고 규모와 형태가 다양하다.

 

 

 

 

 

관찰사홍상국우녕영세불망비

 

본관은 남양이다. 1660년에 태어나 1684년(숙종10) 문과 급제이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고 1714년(숙종40) 경상도관찰사에 부임하였다. 1716년 경상도지역에 흉년이 들자 백성구휼을 위해 조정에 구호을 요청하는 한편, 관내 관리들에게 급여 성금 등을 모아 모두 2천석을 내어 부민들을 구휼하였다. 그해 병을 얻어 감영에서 순직하였다.

 

 

 

 

 

 

돈풍각
  칠원면 용산리123-2번지

 

  돈풍각 현판에 「효자6품 진용교위 행 선전관 안동 권상찬지려광무 9년(1905) 일월 이십삼일 명정(孝子六品進勇校尉行宣傳官安東權相贊之閭光武一月二十三日命旌)이라 하였다. 효자 권상찬(權相贊)은 일찌기 부모님을 여의고 백부님 댁으로 갔으나 백부님 마저 돌아가시자 백모님 섬기기를 지극정성으로 하였으며 백모님의 와병시엔 구하기 힘든 메추리와 박쥐를 잡아 약으로 사용하였고 돌아가신 후에도 예를 극진히 하였다고 한다. 비각은 목조와가 팔작지붕이다.

 

「효자6품 진용교위 행 선전관 안동 권상찬지려광무 9년(1905) 일월 이십삼일 명정(孝子六品進勇校尉行宣傳官安東權相贊之閭光武一月二十三日命旌)

 

 

 

 

 

 

참고자료

 

칠원의 문화유적 정리 내용

출처 : (사)감성공감 | 함안군 칠원면 문화유적 - Daum 카페

칠원의 문화유적
정리 : 端崖
1. 고인돌
■ 세만이 고인돌
<위치>칠원면 용산리 전387번지 외9 세만이들 일대
<지리적환경>칠계(漆溪, 지금의 漆原川)와 서천(西川, 지금의 匡蘆川)이 합류하기 전에 나즈막한 구릉이 용두산(龍頭山)이고 용두산의 북쪽 끝에 펼쳐진 넓은 들이 세만(世萬)이 들이다.동편에는 고둥산(해발 160m)이 솟아 있고 남서쪽에는 용두산(龍頭山 해발 100m)이 세만이들 아래에서 끝나고 있다. 고인돌은 넓은 하천 유역에 형성된 평야지대에 분포되어 있고 북쪽으로 넓게 펼쳐지는 들녘을 바라다보고 있다.
<연혁및전설>이 지역은 세만이,쇠만이,쇠많이 등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일설에는 옛날에 도인(道人)이 이곳에 7개의 쇠막대를 박아 놓았는데 이 쇠막대를 찾는 사람은 큰 부자가 된다고 하여 쇠많이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다른 일설에는 오랜 옛날부터 이곳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살았기 때문에 세만(世萬)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다고 전한다.22)
<규모와현상>이곳에는 약 10여기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3기만이 남 아 있다. 대부분이 중소형의 상석들로서 용두산 동북쪽 기슭에많이 분포되어 있어서 산에서 굴러 내린 자연석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현재까지 파악되고 있는 고인돌의 명세는 명세표와 같다.
<기타>이곳의 고인돌 중 1호 고인돌은 비교적 하천과의 거리가 아주 가까워서 옛날에는 고인돌 위에 올라앉아 낚시질을 하였다고 전하며 용두산 자락에 옹달샘이 하나 있어서 고인돌은 벼루이고, 샘은 먹물이므로 이곳에 집을 짓고 살면 큰 문필가가 배출된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각주>22) 지역주민인 노태관(77세)씨의 증언에 의함.

■ 예곡고인돌
<위치>칠원면 예곡리 답322번지 외11 야촌동 구름보들 일대
<지리적환경>이 지역의 주변은 동쪽으로 천주산(天柱山·해발 633.8m) 서쪽은 포덕산(飽德山·해발 262.0m) 남쪽으로는 무학산(舞鶴山·해발 767.4m)이 높이 솟아 있고 무학산에서 발원한 광려천(匡蘆川)이 북으로 흘러서 칠원천(漆原川), 운서천(雲西川), 가연천(佳淵川)을 흡수하여 낙동강으로 유입되고 있다. 현재 광려천은 마산시 호계리에서 서쪽으로 치우쳐 흐르지만 옛날에는 예곡리에서 국도 5호선을 따라 흐르다가 석전(石田)으로 넘어가는 갈티고개 아래에서 꺾여서 산자락을 따라 흘렀다 한다.19) 고인돌들은 모두 들판 가운데 자리한 마을 안에 분포되어 있으며 광려천이 흐르는 방향을 따라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다. 야촌마을은 구름보들과 뒷구름들 사이에 위치한 전형적인 농촌으로서 사방이 모두 넓게 트인 평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연혁및전설>야촌리의 옛 이름은 들마을 또는 들말, 들여울이었다고 하는데 이곳 노인들은 삼산봉,이용소(三山峰,二龍沼)를 자랑하였다. 이 두 곳을 둘러보지 않고서는 영남의 명승지를 구경하였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뛰어난 곳이었다는데 삼산봉은 갈티고개 서편에 있는 겹쳐진 세 봉우리를 말하며 이용소란 야촌들 북쪽에 있던 두 곳을 가리킨다. 지금은 소(沼)가 변하여 겨우 웅덩이 정도만이 남아 있으나 옛적에는 명주실 한 꾸러미가 풀릴 정도로 깊고 넓었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또, 이곳의 고인돌은 칠성바위 또는 칠성판이라 불리우며, 5호고인돌과 12호고인돌을 깨서 훼손시킨 사람의 집안이 망한 사례가 있다고 한다. 1982년 이곳에서 한 차례 수습 조사된 석관묘들로20) 미루어 보아 더 많은 매장유구가 이 지역에 밀집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규모와현상>현재 12기의 고인돌이 파악되고 있으나 옛적에는 더 많은 수의 고인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다수의 고인돌이 야촌마을 안 민가의 주변에 방치되어 있으며 훼손과 파괴가 심한 상태이다. 확인된 고인돌의 규모와 현상은 아래의 명세표와 같다.
<기타>12기의 고인돌 중 3호와 8호 고인돌은 야촌리고인돌 중 최대로 3호의 상부에 23개의 성혈(性穴)이 뚜렷이 새겨져 있고 상석의 모양이 꼭 범이 쪼그리고 앉은 형상이라서 이곳 주민들은 이를 범바위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3호고인돌 앞 정자나무 축대 위에는 들돌 이라고 하는 것이 놓여져 있는데 이는 옛날에 장정들이 힘자랑을 할 때 썼던 놀이 기구의 하나로서 힘의 세기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기 위한 것이다. 이 들돌을 들어올리는 정도에 따라 품삯을 정했다고 한다. 크기는 직경 30∼50㎝ 정도로 모양은 계란형인데, 옛날에 어떤 사람이 갱자리(심기풀)를 하러 감천골짜기에 갔을 때 풀짐속에 숨겨 온 것이라고 전한다. 그리고 5호고인돌은 누구든지 고인돌을 훼손하면 큰 화를 당한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어 마을에서 신성시(神聖視)하고 있다.

■ 오곡리 가메실 고인돌
<위치>칠원면 오곡리 전583-1 외1 부곡마을 입구
<지리적환경>포덕산(飽德山·해발 262.0m)에서 동으로 뻗은 줄기가 부곡마을 뒷산인 부봉산(釜峰山·해발 222.6m)이고 부봉산 줄기가 키 또는 소쿠리테와 같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 가마솥과 같다 하여 가메실이라 불리운다. 고인돌은 마을 입구 도로변에 위치하며 구마고속도로 건너편으로 넓게 이어지는 구름보들을 바라다보고 있다.
<연혁및전설>예부터 부곡마을은 부봉산 줄기가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로 갈라진 형상이어서 산신령이 머물던 길지(吉地)라 알려져 왔다. 특히 2호 고인돌은 전설에 의하면 옛날 옛적에 마을에 도둑과 산짐승이 자주 나타나서 그 피해가 심하자 부봉산 정상에서 주민들이 백일기도를 올렸다 한다. 그러자 산신령이 나타나서 큰 돌을 마을 입구 앞에 놓아두면 만사가 형통하리라는 계시를 하여 작대산(爵隊山·해발 647.8m)에서 큰바위를 가져와 마을 입구에 놓아두었다 한다. 이 바위는 범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형상이어서 '범바우'라고 불려지는데 지금도 마을의 수호신으로서 정월 대보름에 마을 사람이 모여서 동신제를 지낸다고 한다.
<규모와현상>현재 2기의 고인돌이 부곡마을 앞 도로변에 있는데 2호 고인돌은 속칭 범바우라 불리우는 거대한 규모의 것이고 1호 고인돌은 서쪽편 느티나무 아래에 위치한 것이다. 현재 파악되고 있는 고인돌의 규모와 현상은 아래의 명세표와 같다.
<기타>부곡 마을 앞에는 구마고속도로가 가로질러 있고 그 앞으로 광려천(廣蘆川)이 흘러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明堂)으로 알려져 있으며 옛날에는 크고 작은 7개의 고인돌이 줄지어 분포되어 이웃한 여시골고인돌과 들마을(野村)고인돌, 석전동(石田洞)고인돌들과 서로 연계되어 있었으나 구마고속도로 개설 공사와 경지정리시 모두 훼손되어 구체적인 현상은 알 수 없다. 지금 다만, 겨우 2기의 고인돌만이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남해고속도로의 우회도로 공사로 인해 또다시 현재 남아 있는 2기의 고인돌 마저 매몰 내지는 파괴될 운명에 처해 있다. 

■ 오곡리 여시골 고인돌
<위치>칠원면 오곡리 산25번지 외4 여시골 일대
<지리적환경>구마고속도로 중리 인터체인지에서 남지 방향으로 달리다 보면 마산시 내서면 호계리 뒷산 북서쪽 산자락에 다다른다. 고인돌은 비교적 좁은 산등성이의 계곡에 위치하고 있어서 넓은 농경지에 마을 안, 또는 하천부지 등에 위치하는 일반적인 고인돌의 분포상황과는 크게 벗어난 곳이다. 그러나 여시골 북쪽으로 넓게 펼쳐져 있는 새들보들을 바라다 보고 능선의 측사면과 정상부에서 구릉의 길이 방향에 맞추어 종열분포된 것으로 보아 이곳 지형의 특수성을 잘 이용해 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연혁및전설>1994년 6월경에 구릉상에 위치한 2기의 고인돌 중 1기가 정식 학술발굴조사된 바 있으며18) 그 외의 것은 구마고속도로 공사시 훼손되거나 주민들의 민묘 조성시 보호축대로 이용되고 있다. 규모와 현상  좁은 여시골 계곡을 따라서 5기의 고인돌이 줄지어 있는데 얼핏 보기에는 산에서 굴러 내린 일반적인 바위로 보이기도 한다. 현재 확인되고 있는 고인돌의 규모와 현상은 아래의 명세표와 같다. 

■ 용정리고인돌
<위치>칠원면 용정리 전163번지 외9 석전동 뒷들 일대
<지리적환경>마산 중리에서 칠원읍으로 연결되는 국도 5호선을 따라오다 보면 작은 갈티고개와 무기리(舞沂里)로 넘어가는 고갯길 사이의 협곡에 펼쳐진 농경지를 볼 수 있는데, 이곳이 용정리 석전동이다. 이곳은 동남쪽의 천주산(天柱山·해발 633.8m) 지류가 뻗어 내려 좁고 긴 계곡을 이룬 곳으로 오직 서쪽만이 트여서 광려천(匡蘆川)과 서로 마주보고 있다.<연혁및전설>지금은 마을 앞 멀리에서 북쪽으로 흘러드는 광려천은 옛날에는 작은 갈티고개에서 삼산봉(三山峰·해발 105.2m) 남서쪽을 감돌아 북쪽으로 흘렀다고 하며 고인돌들은 석전 마을의 형성 방향을 따라 10여기가 분포하고 있다. 이곳의 고인돌 역시 주민들은 신성시(神聖視)하여 칠성바위 또는 칠성판이라 부르며, 특히 1호고인돌을 여자, 7호고인돌을 남자로 비유하여 이 고인돌이 일어나면(훼손당하면) 마을에 큰 일이 생긴다고 믿고 있다.<규모와현상>이곳에는 모두 10기의 고인돌이 농경지와 민가 안에 분포하는데 지금까지는 일종의 금기사상(禁忌思想)에 의해서 비교적 잘 보존되어 왔으나 이미 오래전에 변전소가 설치되고, 최근에는 공장들이 농경지와 마을 안까지 속속 들어서고 있어서 고인돌의 수난이 예상되고 있다. 이곳에서 파악되고 있는 고인돌의 구체적인 명세는 명세표와 같다.     
<기타>이곳의 고인돌들은 다른 곳의 것들과 같이 매우 금기시(禁忌視)되어져 오고 있는데 특히, 1호와 6호·7호고인돌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6호고인돌의 경우 이 지역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21) 옛날에 이 돌이 벼락을 맞았는데, 벼락맞은 돌을 갖고 있으면 재수가 있다는 말을 믿은 동네의 모씨가 이 돌의 일부를 떼어 갔다고 한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모씨는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한다.

■ 운서리고인돌
<위치>칠원면 운서리 산132번지 고둥산 남쪽 기슭
<지리적환경>칠서면과 칠원면을 서로 잇는 운서천(雲西川) 운서교(雲西橋)에서 무릉산성(武陵山城)이 위치한 고둥산(해발 160m) 기슭의 산서제(山西齊) 옆에 위치한다. 작대산(爵隊山·해발 647.8m)에서 발원한 운서천은 계곡을 따라 서쪽으로 흘러 내려오다 칠원천(일명 칠계)과 합류하게 되는데 이 지역은 비교적 넓은 하천 유역에 위치하고 있어 함안지역 내 하천 주변에 인접한 농경지에 다수의 고인돌이 분포하는 특성으로 미루어 보아 과거 다수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규모와현상>현재는 고인돌 1기만이 남아 있을 뿐이며 주변 일대가 공장, 가옥들에 의해서 많이 변형된 모습이다. 고인돌의 상석은 고둥산자락의 지형을 따라 약 19°이상 기울어져 있으며 남동편 모서리 아래에는 사람 머리 크기의 냇돌이 2∼3개 놓여져 있다. 고인돌의 구체적인 명세는 아래의 명세표와 같다. 

2. 성곽
■ 칠원읍성
<위치>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728번지 일대(해발 25m)
<지리적 환경>칠원(漆原)은 함안군 동부에 위치한 면으로서 총면적 50.54㎢이고, 구마고속도로가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다. 면의 경계는 창원시 동읍, 마산시 내서읍, 함안군 칠서, 칠북, 산인면과 접하고 있으며, 남북으로 넓게 펼쳐진 평야에는 광려천(匡廬川)과 칠원천(漆原川)이 북으로 흘러 낙동강과 합류한다.
<연혁>칠원(漆原)은 조선 선조(宣朝) 34년에 함안에 합속되었다가 광해군(光海君) 9년에 분리되었다. 인조(仁朝) 5년(1627년)에 창원도호부(昌原都護府)에 편입되었으나 다시 인조 7년(1629년) 함안에 합속되고 10년 만인 인조 17년(1639년) 함안에서 분리되어 나갔다. 그러다 광무(光武) 10년(1906년) 전국 행정구역 개편때 칠원 전역이 함안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1)  읍성에 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석축으로 둘레 1595척, 높이 11척으로 되어 있고2), 성종실록(成宗實錄) 23년 11월초에 높이 11척, 둘레 1660척으로 기록되어 있어3) 성의 둘레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규모와 현상>구성리(龜城里) 일대에 있는 성으로 주변 지역에 민가가 들어서면서 석축(石築:城壁)은 대부분 허물어지고 일부만이 남아 있으나 그 또한 민가에서 집의 담 또는 울타리로 이용하면서 원형을 크게 변경시켰다. 성벽에 사용된 돌들은 장방형으로 가공한 것이며 가장 큰돌은 97×40cm의 것도 있다. 옛 성벽의 자취를 찾을 수 있는 곳은 칠원초등학교 서쪽으로 길이 29m, 높이 2.4m, 너비 2m 정도이며 내벽은 초등학교의 담장이고, 외벽은 성벽과 붙어 있는 논으로 미나리꽝으로 되어 있다. 초등학교의 담을 따라 교사(敎舍) 뒤편으로 약 200m쯤 가다 보면 길이 13m, 높이 2.4m의 성벽이 나타나며 현재는 구성리 728번지 정수식씨의 집 울타리로 사용되고 있다.  읍성의 문지(門址)는 동쪽과 남쪽에 있는데, 동문지(東門址)는 길이 22m, 높이 2.4m, 너비 2.4m의 흔적만이 남아 있으며, 현재 원구성리 상수도 저장 탱크가 설치되어 있다. 이 곳 주민 정수식씨에 의하면 70년대 초 새마을사업을 하면서 성벽을 허물고 소방 도로를 만들었다고 한다. 남문지(南門址)는 동문지로부터 약 12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외벽만 10m쯤 남아 있고 내벽은 칠원시장 안의 어시장으로 부분적으로 훼손되어 원형을 잃었다. 약 10년 전 까지만 해도 원형을 보존한 채 남아 있었다고 기억되나 불과 수년 사이에 개발이란 미명(美名)과 군민과 당국의 무관심으로 파괴되어 가고 있어 우리의 문화 유적 보호에 대한 현실을 대변하고 있다.
<추정연대>현재 이 곳에서 과거의 유물이나 연대를 측정할 만한 자료는 채집하지 못하였으나, 문헌 기록으로 보아 조선시대 전기(15세기경)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1995. 5. 20. 구순근 정리)

■ 칠원산성
<위치>함안군 칠원면 유원리 산58번지 외 8(해발250m∼275m)
<지리적환경>대산면(代山面)에서 칠원으로 가는 협곡의 지방도로 1041호를 따라 가다보면 왼편에 어령터(於嶺洞)가 있고, 맞은편에 대규모의 채석장(大一産業)이 하나 있다. 산성은 이 채석장의 상부에 있고 문동재(問童峴) 서편 산의 정상부에 해당한다.
<연혁>이 산성에 대한 기록은 유일하게 1917년에 조사된 고적조사보고(古蹟調査報告)에 유원리산성(柳原里山城)으로 기록되어 있다.1) 그에 의하면 '유원리산성(柳原里山城)은 칠원면(漆原面) 유원리(柳原里)와 칠원면(漆原面) 신산리(新山里)에 있는 석축성(石築城)으로서 성내 면적(城內面積)은 1정 2반 7묘(약 3,621평)'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산성 명칭에 있어 '유원'이라 하지않고 '칠원'으로 한 것은 이 산성이 1993년 12월 27일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202호로서 '칠원 산성'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규모와현상>산성은 해발 250m 이상에 위치한 석성(石城)이며 총 길이가 450m의 소규모로서 동서의 길이가 길고(180m) 남북이 짧은(57m) 장타원형의 모양으로 축성되어진 퇴뫼식 산성이다. 성벽은 주로 협축식(夾築式)인데, 서벽은 길이 50m, 높이 3m, 너비 6m정도로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성벽 밖으로는 급경사를 이루어 천혜의 요새를 이루며 자연 암벽이 밖으로 돌출 되어 있어 전방 초소를 방불케 한다. 남벽은 대부분 성벽 돌이 노출되어 석축임을 짐작할 수 있으나 일부에는 성의 기저부(基底部)에만 돌을 쌓고 그 상부에 토축(土築)한 곳이 발견되기도 한다. 남벽의 길이는 약 170m이고 너비는 삭토된 부분까지 포함하여 3∼6m정도이다. 그리고 서벽과 연결되는 곳엔 암벽 사이로 좁은 길이 나 있는데 유사시의 암문(暗門)일 가능성도 있다. 동쪽 성벽은 길이가 70m 내외이지만 훼손이 극심한 상태이다. 동쪽의 허물어진 성벽밖에는 외황(外隍)이 있고, 외황 밖에는 토석혼축(土石混築)의 루(壘)가 확인된다. 북쪽 벽은 160m정도이며 대부분이 능선의 정상부 가까이에 축조되어 있다. 채석장으로 인해서 동벽에서 북쪽의 절반 이상이 인위적으로 파괴되었다. 일부 성벽이 잘 남아 있는 상태로 보아 축성은 주로 내탁기법(內托技法)에의해서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내의 문지(門址)는 동쪽과 서쪽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특히 동문지(東門址) 주변에서는 토기편이 집중적으로 수습되었다. 또한 성내에서 용도 불명의 석조 유물과 돌 절구통(?) 같은 것도 발견되었다.
<추정연대>산성(山城)의 지리적 위치나 성내에서 채집한 유물(遺物)들을 볼 때 삼국 시대(三國時代)에 축조(築造)된 산성(山城)으로 추정되며 조선 시대의 지리지(地理誌)나 읍지(邑誌) 등에 전혀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삼국 시대 이후에는 폐성(廢城)이 된 채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기타>토석 채취에 의하여 동쪽과 북쪽의 성벽이 고의적으로 많이 파괴되었는데 더 이상의 훼손이 되지 않도록 행정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3. 고분군
■ 문동제고분군
<위치>칠원면 유원리 산 41번지 일대 (해발 125m ∼150m)
<지리적환경>칠원면 유원리에서 칠서면 회산리 어령터로 넘어가는 고개를 문동재라 하는데, 이 문동재 동쪽의 구릉지 정상에 고분이 분포한다.  고분군의 서편으로 연결되는 능선 위에는 칠원산성(漆原山城)이 위치한다.
<유적현황>현재 고분군 지역은 잡목과 수풀이 무성하며 능선의 정상부에는 대형 봉토분1기가 심하게 파괴된 상태로 남아 있다.  석실의 규모는 길이 2.3m, 폭 1m 내외, 깊이 0.8m 정도이며 측벽은 할석(割石)으로 쌓았다.  개석(蓋石)은 발견되지 않으며, 주변에서 토기편도 찾기 어렵다.  또 남쪽 산등성이를 따라 유상마을 방향으로 200m 정도 내려오면 주씨 묘역이 있고 이 묘역의 주변에 직경 5m, 높이 1.1m 정도의 큰 봉분이 있다.
<기타>문동재(問童재)라는 지명은 옛날 문씨(文氏)가 고개 아래에 살았는데 문씨가 고개를 넘다가 동자(童子)에게 길을 물었다는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 오곡리고분군
<위치>칠원면 오곡리 산 25번지 일대(해발 45m∼80m)
<지리적 환경>마산에서 대구로 연결되는 구마고속도로와 인접한 구릉지역으로서 내서읍호계마을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고분군은 고속도로변의 북쪽으로 뻗은 능선과 하천가의 야산 일대의 넓은 범위에 걸쳐 분포하고 있으며, 인근의 여우골 사이에 형성된 넓은 들을 내려다 보고 있다.
<연혁 및 전언>이 유적은 1982년 3월에 청동기시대의 홍도(紅陶)가 출토된 인근의 예곡리(禮谷里) 야촌마을 지석묘(支石墓) 조사시 주민들의 제보에 의해서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 후 1994년 구마고속도로 확장공사를 계획하면서 창원대학교 박물관에 의해서 발굴 조사되었다.93)
<유적현황>고분군이 분포된 지역은 구릉의 정선부가 말안장 모양을 하고 있으며 구릉의 북쪽 하단부에서부터 정선부까지 중·소형급의 파괴된 봉토분(封土墳)이 확인되고 있다.  구릉의 상부는 대부분 밭으로 이용되고 있고, 토기편이 군데군데에서 채집되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에 의하면 이 곳의 고분들은 청동기시대의 매장 유구인 토광묘(土壙墓)와 석관묘(石棺墓)를 비롯하여 가야시대 목곽묘(木槨墓)와 석곽묘(石槨苗)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물로는 청동기시대의 홍도소호(紅陶小壺), 마제석촉과 5세기경 가야시대의 단경호, 고배, 파수부완 등이 다량 출토되고 있다.  이 지역은 청동기시대부터 가야시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매장 유적이 조영되고 있으며, 칠원지역의 상고사 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유적으로 생각된다.

■ 용산고분군
<위치>칠원면 용산리 산 4번지 일대 (해발 25m ∼ 105m)
<지리적환경>5번 국도를 따라 칠서 방향으로 가다보면 칠원면 사무소가 있는 구성리에 이른다.  이 곳에서 대산으로 이어지는 1041호 지방도를 따라가면 용산리 세만이 마을이 나온다.  고분군은 세만이 마을 뒷산에서부터 용두산 정상부와 칠원향교까지 이어지는 대규모 고분군이다.  남서쪽으로는 유원리 고분군이 있는 능선과의 사이에 광려천이 흐르고 있으며 그 사이에 새들이라는 곡간 평야가, 북으로는 칠서 벌판이 펼쳐져 있으며 동으로는 칠원천(漆原川)과 운서천(韻書川)이 무릉산성(武陵山城)과 마주하고 있다.
<연혁및전언>30여년전 북쪽 하단부 경작지에서 고배, 항아리류가 출토된 것을 비롯하여 남쪽 정선부 경작지에서도 유,무개고배 밑이 둥근 항아리 팔각형의 옥이 출토되었다고 하며 이 유물은 가야초등학교에 기증하였다고 한다.88)  용산리 529-1번지 밭에서 1991년 9월 개와, 고배 1점이 발견되어 관계기관에 신고하였는데 이 곳은 예로부터 고려장터로 알려져 있다.
<유적현황>유적내에는 밭, 과수원, 민묘, 잡목림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용두산 정상부(1호)와 근처 남쪽(2호), 서쪽(3호)에 대형봉분이 있으며 북쪽 하단부 묘 411번지에도 봉분(4호)이 있다.  특히 2호 봉분은 도굴되어 석실이 노출된 상태이며 내부는 폭 0.9m, 높이도 개석(1.9m × 0.78m × 0.16m)이 있다.  석실의 내부는 세일계 판석으로 정교하게 쌓였고 3호분은 밭 개간시에 절반이나 파괴되었다.  그 주위에서도 기대편과 단경호편들을 수습할 수 있으며 향교 뒷편까지 토기가 수습되었다.
<채집유물과연대>삼국시대 경질토기편이 다수 채집되고 있으나, 특징적인 것으로는 발형기대편이 있다.  치밀한 파상문이 수발부의 구연부와 대각부에 정연하게 시문되어져 있고, 회청색조를 띤다.  대체로 5세기 중반 이 후에 이 지역에서 유행된 토기의 한 형태로 파악된다.
<기타>이 곳은 옛날에 백여우가 살았다고 하여 “여시덤”이라고 불렀다.  30여년전 세만이마을 입구에 있는 정자나무 옆에서 길이 28cm 정도의 돌칼이 나왔다고 하는데 89) 유물의 행방은 현재 알 수 없다고 한다.

■ 유하고분군
<위치>칠원면 유원리 임 592번지 일대(해발 30m∼130m)
<지리적환경>산인면 자양산(紫陽山, 해발 401m)에서 동북쪽으로 뻗어내린 산등성이가 칠원산성(漆原山城)과 문동재고분군을 거쳐 동족으로 향하다 광려천(匡勵川)에 이르러 낮은 구릉지대를 이룬다.  고분군은 유원리 유사아을 북쪽 구릉지에 위치하며 남쪽 경사면 일대 전역에 넓게 분포되어 있다.
<연혁및전언>40여년전 구릉지에 있는 정씨 묘역 주변에서 금장식환두대도, 옥 등이 발견되었으며, 다수의 석실(石室)고분이 묘역 주변에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90)
<유적현황>유상마을 북쪽의 산등성이 아래에서부터 구릉의 정상에 이르기까지 토기편이 흩어져 있고 정상부의 서쪽 경사면 일대에는 도굴된 채 방치된 석실들이 다수 있다.  대옹편도 주변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인근의 묘지 조성에 사용된 많은 돌들이 석실의 축조에 사용된 석재로 추정되고 있다.
<채집유물과연대>고배편과 호편 등 약간의 유물이 수습되었는데 모두 도질제로서 소성은 양호하다.  발형토기 구연부편은 원문(圓紋)이 기면전면에 새겨져있고   호에는 치밀한 파상문이 그려져 있어서 당시의 뛰어난 미적감각을 느낄 수 있다.  대체로 5세기 후반대에 유행한 토기형식으로 추정된다.
<기타>유원리 유하 고분군Ⅰ과 유원리 가야시대 취락지 경계의 서쪽 경사면 8부능선에 가야시대의 도요지로 추정되는 가마터가 있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가마터로 추정되는 지점에서 불에 탄 황토 흙 조각이 다수 수습되었다.  그리고 가마터의 서쪽 약 50m 거리의 경사면에는 자연 동굴이 있는데 이 굴에서 불을 지피면 칠원산성(漆原山城)에서 연기가 솟아 올랐다고 한다.  가야시대(伽倻時代) 취락지(聚落地)는 유하마을 입구의 유원황씨 비석군이 있는 뒷산 정선부로서 이 곳 전역에서 토기편이 수습되며 조개껍질과 굴껍질이 간혹 발견된다. 이 곳의 토기편들은 주변 고분군들에서 발견되는 토기와 동시대의 것으로서 대략 4세기 전후의 것으로 보인다.  유적이 입지한 지역의 세 방향은 급경사를 이루고, 취락지 면적도 소규모여서 유원리 일대에 분포한 고분군을 조성한 집단의 생활 유적지로 추정된다.

4. 불교유적
■ 구고사석불
<위치>칠원면 무기리 산90번지
<내용>구고사는 근대에 세워진 사찰이지만 옛부터 절이 있었다고 하며 석불, 탑재, 주춧돌, 숯등이 발견되는 곳이다. 대웅전 상부에 천막으로 지어진 곳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데 우측의 불상은 근래에 조성된 것이고 좌측의 관세음상도 중세에 조영된 것으로 보이지만 가운데 있는 약사불은 신라때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이 약사여래불은 좌불로서 백호와 육계가 없는 대신 나발은 뒤 목까지 늘어져 있고 귀는 해학적으로 표현하였다. 오른손은 손가락을 펴고 자연스럽게 무릎에 얹었으며 왼손은 배 앞에서 약함을 받쳐들고 있다. 목에는 삽도가 없고 통견의 주름살은 선명하다. 불거져나온 눈. 비뚤어진듯한 코 등 얼굴의 전체적인 모습은 장엄하다기보다 아주 서민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특이한 불상이다. 또 대웅전 앞 언덕 계단에 손바닥 크기의 비로자나불이 있는데 얼굴옆에 10번(十番)이란 명문이 있다. 연화대위에 양각된 이 좌불의 크기는 가로30㎝, 세로50㎝의 가공석이다.

■ 구성리 삼층석탑
<위치>칠원면 구성리 730번지
<내용>1940년경 3층석탑(三層石塔)을 칠원초등학교에 옮겨 세운 것으로 옥개석(屋蓋石)이 부분적으로 파손(破損)되었으나 전체적인 형태는 양호(良好)하다. 일층탑신(一層塔身)에는 문비(門扉)가 조각되어 있으며 옥개(屋蓋)와 탑신(塔身)은 원래의 짝이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높이는 2.3m인데 이곳 주변에 구성리 사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무기리사지
<위치>칠원면 무기리 무기마을 뒷산중턱
<내용>현재의 구고사(九皐寺)터도 옛사지의 하나임에는 틀림없으나 기록에 전하는 바가 없어 아쉽기만 하다. 무기리 일대에 수많은 절이 있어 무기동 숲 밖 탑끌(탑골)들에 짚신을 벗어두고 사찰들을 모두 구경하고 되돌아와 보면 짚신은 이미 썩어 있었다고 전할 만큼 무기리에는 많은 탑과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구고사에 있는 석조부도,칠원종고에 있는 3층석탑등이 무기리사지(탑골)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칠원읍지」불우조(佛宇條)에 “墨寺一云中興寺又云神興庵白石嫌於邑其故墨其石改各墨寺在靑龍山”이라 하였다. 청룡산은 작대산의 옛 이름이며 무기뒷산은 청룡산이므로 옛날 이곳에 사찰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으며 이 능선아래가 무기리이고 무기마을 북쪽 들녘이 〈탑골들〉, 또는〈탑끌들〉로 불리워지고, 돈담마을 동북쪽 골짜기가 암자골로서 골짜기 중간에 대숲, 기와편, 축대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

■ 석조부도
<위치>칠원면 무기리 산90번지
<내용>부도탑은 함안군에서 유일한 것으로 높이1.5m이며 반구형(半球形)의 하대석(下臺石)과 8각의 중대석(中臺石)이 1매석(一枚石)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그위에 난형탑신(卵形塔身)이 세워지고 이것을 4각의 옥개석(屋蓋石)이 덮고 있다. 무기리 탑골에서 1959년 칠원면사무소로 이안(移安)한 것을 1999년 9월 구고사로 재 이전 하였다.

5. 서원
■ 덕연서원
<위치>함안군 칠원면 용정리 966-1 외1
<내용>조선 선조(朝鮮 宣祖)24년(1591)에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선생의 업적을 추모하기 위하여 사림(士林)에서 뜻을 모아 동림서원(桐林書院)을 창건(創建)하였으며 선조(宣祖)25년(1592)에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불에 타버렸고, 현종원년(顯宗元年1660) 칠원현(漆原縣) 남고(南皐)에 중건(重建)하여 남고서원(南皐書院)이라 불렸다. 그 후 숙종(肅宗)2년(1676) 4월에 왕(王)으로부터 덕연서원(德淵書院)이란 현판(懸板)을 사액(賜額)받았다. 고종(高宗)5년(1868)에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고, 1911년에 다시 덕연서당(德淵書堂)을 세웠으며 1964년에 중건복원(重建復元)하여 향례(享禮)를 봉행(奉行)하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3량구조(三樑構造) 팔작지붕인 강당(講堂)은 가운데 3칸을 대청, 양측 1칸을 방으로 하였으며 전면(前面)에 퇴칸(退間)이 없다. 강당 후면 높은 지대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인 존덕사(尊德祠)에는 문민공(文民公)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선생을 모시고 그 우측의 덕연별사(德淵別祠)에는 삼칠선현(三漆先賢) 다섯분을 봉안(奉安)하여 제향(祭享)하고 있다.

■ 상봉서원
<위치>칠원면 유원리  746번지                      
<내용>상봉서원은 숙종 병자년(1696)에 사림이 유원에 용산사(龍山祠)를 세워 독오당(獨梧堂)선생을 봉안하다가 무진년 훼철후 상봉서당을 건립하여 선생의 생신일인 3월 5일에 채례를 행한다. 독오당 황협(黃 )선생은 1606년에 출생하여 어릴적부터 자질이 초범(超凡)하고 기상이 탁월(卓越)하여 어른들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10세(1616년) 때에 부친을 따라 창원 향교에 갔다가 글짓기에 등참(等參 )되어 주변 선비들을 놀라게 했다.   일찌기 부모를 여의어 벼슬길에 뜻이 없으신 선생은 치가(治家)와 수기치인(修己治人)에 힘쓰는 한편 간송(澗松), 미수(眉수 )같은 당세 명현들과 자주 추종(追從)하면서 학문과 덕행을 닦았다.   서원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이다.

■ 운곡서당
<위치>칠원면 운곡리 885번지 
<내용>이 서당은 순조 정해년(1827)에 창건하여 1868년에 훼철된 것을 1950년에 복원하여 주윤창(周允昌)선생을 봉향하는데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팔작지붕이며 제례일은 10월 26일이다.

■ 칠원향교
<위치>함안군 칠원면 용산리 299 외1
<내용>칠원향교의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칠원읍지(漆原邑誌)에 의하면 현(縣)의 서쪽에 있던 건물을 광해(光海) 13년(1621)에 현의 동쪽 삼리허(三里許)에 이건(移建)했다가 숙종(肅宗) 26년(1700) 현의 서쪽인 지금의 위치에 다시 이건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당시의 건물구조 및 규모는 알 수가 없다. 1906년 칠원군(漆原郡)이 함안군(咸安郡)에 통합되어 칠원향교도 함안향교에 병합되었던 것을 1961년 칠원유림(漆原儒林)들의 뜻을 모아 중수복원(中壽復原)하여 다시 칠원향교의 이름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향교의 건물은 외삼문(外三門), 명륜당(明倫堂), 내삼문(內三門), 대성전(大成殿)이 하나의 축상(軸上)으로 일렬로 배치된 형식이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인 민도리집 형식으로 전면에 툇마루가 없으며, 이 건물내에 공자(孔子)를 비롯해 중국성현(中國聖賢) 7위(七位)와 한국성현(韓國聖賢) 18위를 모셔서 제향(祭享)하고 있고,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인 초익공계(初翼拱系) 집으로 되어 있고 동. 서재는 맞배지붕으로 1990년 초에 신축하였다.

6. 비각
■ 돈풍각
<위치>칠원면 용산리123-2번지
<내용>돈풍각 현판에 「효자6품 진용교위 행 선전관 안동 권상찬지려광무 9년(1905) 일월 이십삼일 명정(孝子六品進勇校尉行宣傳官安東權相贊之閭光武一月二十三日命旌)이라 하였다. 효자 권상찬(權相贊)은 일찌기 부모님을 여의고 백부님 댁으로 갔으나 백부님 마저 돌아가시자 백모님 섬기기를 지극정성으로 하였으며 백모님의 와병시엔 구하기 힘든 메추리와 박쥐를 잡아 약으로 사용하였고 돌아가신 후에도 예를 극진히 하였다고 한다. 비각은 목조와가 팔작지붕이다.

■ 석비군
<위치>칠원면 용산리123-2
<내용>돈풍각 옆에 있는 칠원현감들의 치적 비석군으로 모두 18기가 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것을 이곳에 모아둔 것으로 숭정(崇禎: 1628-1664)부터 광무(光武: 1897-1907)에 이르기까지 시대의 폭이 넓고 규모와 형태가 다양하다.

■ 수풍각
<위치>칠원면 용산리 43-7번지
<내용>목조와가 팔작의 비각으로서 비명(碑銘)은 「효자 김상욱표리비(孝子金翔郁表里碑)」라 하였는데 첫 돌전에 모친을 여의었다. 어려서 조 밭에 새를 쫓으러 보냈는데 까마귀는 어미의 반포(反哺)라 하여 쫓지 않았다고 하며 앞 못보는 부친을 위하여 백방으로 치료하였으나 효험이 없자 밤마다 목욕재계하여 치성을 올렸더니 7년만에 꿈에 노인이 나타나서 “가야산 정상의 영초를 구하라”하기에 3일만에 영지 다섯뿌리를 캐어다가 다려드렸더니 앞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부친이 돌아가시니 애통하다가 기절까지 하였고 장례후 매일 성묘하고 3년동안 울어 눈물이 자리를 적셔 자리가 썩었다고 한다.

■ 순화각
<위치>칠원면 용산리 43-7번지
<내용>순화각은 목조와가의 비각으로 비명(碑銘)은 “효자 김창직 표리비(孝子金昌稷表里碑)”라 하였다. 효자 김창직은 천성이 효제(孝悌)하고 친지간 극진하여 마을과 고을에 여러번 표창과, 현감(縣監) 윤영직(尹永稷)의 표창도 있었다. 정묘년에 부친상을 당하여서는 법도에 따라 매일 새벽 성묘하니 성묘길에 개가 나타나 이슬을 털고 길을 인도하여 그 길을 효자정(孝子程)이라 하였고 90노모의 의식(衣食)과 대소변, 탕제수발을 손수하였으며 돌아가시자 66세의 노령에도 예법대로 행하여 상복을 벗지 않았다고한다.   또한 선대의 유고(遺稿)을 발간하고 제사와 선산(先山)함례를 살아생전같이 하였다고 한다.

■ 황학지여각
<위치>칠원면 유원리 421번지                  
<내용>유원리 입구 도로변에 있는 목조와가 비각으로 현판에는 「효자 처사 창원황학 지려 광무 9년 을사 5월 명정(孝子處士昌原黃 之閭, 光武九年(1905)乙巳五月命旌)」이라 하였다. 효자 황학의 정여 입안은 궁내부대신(宮內府大臣)겸임 예식원장례경신(禮式院掌禮卿臣) 이재극(李載克)이 올린 것으로 칠원의 옛 선비 황학은 학문이 성리(性理)의 근본을 연구한 효성이 지극하며 부모가 병이나면 인분 맛을 보는 등 정성이 하늘에 닿아 마을 아래 연못에 갑자기 잉어가 모여들어 이것을 잡아 부모를 봉양케 하였고, 부모가 별세 후에는 상례(喪禮)를 법도에 따라 행하였으며 제사때에도 생전에 즐겨먹던 꿩고기를 제수로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제삿날 눈이 많이 내려 꿩을 구할 수 없어 탄식할 때 꿩 한마리가 날아와 이를 잡아 제수로 썼다고 한다. 숙종의 국상시엔 조석으로 곡을 하고 3년동안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경종 승하시에도 이와같이 행 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광무 9년(1905)에 조정에서 정려의 명이 내려 각을 짓게된 것이다.

7. 화석
 함안층의새발자국화석
<위치>칠원면 용산리 산4번지
<내용>이새 발자국화석이 박혀있는 지층은 중생대 백악기 말기(7천만년∼1억2천만년전)에 퇴적된 함안층이다.  공룡의 발자국화석은 세계각처에서 발견되나 조류(鳥類) 발자국화석은 흔치않다. 이 화석은 새발자국과 함께 물결자국, 벌레자국이 함께 나타나며 한 개의 층면에서 만 발견된다. Koreaormis Hamanensis KIM이라고 명명된 이 화석은 “함안에서 발견된 한국새”라는 뜻의 신종이다. 이 새는 물갈퀴가 없어 멧새로 추정되며 제1지는 불분명하고 제2, 3, 4의 길이는 각각 1.8㎝, 2.5㎝, 1.8㎝이다. 발톱의 길이는 모두 0.3㎝정도로서 발자국의 크기로 보아 비둘기정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명명자 : 서울대 김봉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