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경남 함안 칠원, 창원 답사(정열공 최윤덕 묘)

달이선생 2018. 8. 2. 17:00

정열공 최윤덕 묘(貞烈公 崔潤德 墓)

 

경남 함안 칠원, 창원 답사

  2018년 8월 2,3일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과 창원시 마산 등을 답사하였다.

  함안군에는 처가가 있어 인근지역을 둘러볼겸 여름휴가지로 가게되었다. 처음으로 두살배기 아들 지환이와 함께하였다. 2일 칠원읍의 주세붕을 배향하는 덕연서원을 둘러보고 창원 마산으로 가서 창원시립마산박물관과 회원현성지(會原縣城址)를 답사하였다. 마산 등 이웃한 여러 지역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가야의 여러 소국은 포상팔국(浦上八國)과 관계되었고 원간섭기 일본정벌을 위한 정동행성(征東行中書省)이 자리잡았던 곳이다. 근현대에 이르러 일본과 가까워 일찍이 개향과 수탈의 역사가 있었으며,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4.19혁명이 기폭재가 되었으며, 군부독재를 종식시키고자 일어난 부마항쟁(1979)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창원시 북면으로 이동하여 최윤덕 장상묘를 살펴보았다. 세종대 4군을 개척하여 북방경계를 확정시킨 최윤덕 장군은 지역에서 장상(將相)으로 추앙되는데 이는 장군으로 시작하여 재상까지 지낸 최윤덕 장군을 기리는 것이다. 저녁에 칠원읍성을 살펴보았으나 너무 늦어 다음날 다시 찾았다. 3일 칠원읍 칠원읍성의 잔존 성곽과 칠원장, 선정비군 등을 확인하고 칠원향교를 둘러보았다. 마지막으로 칠원교회 애국지사 손양원 목사 기념관을 끝으로 답사를 마무리하였다.

 

 

정열공 최윤덕 묘(貞烈公 崔潤德 墓)

  창원시 의창구 북면 대산리 산8

 

  최윤덕(崔閏德, 1376-1445)은 조선 전기의 명장이다. 세조의 왕위찬탈에 맞서 단종의 보위를 지킨 김종서와 더불어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오늘날 한반도 국경선을 완성한 장본인이다. 흔히 김종서는 알아도 최윤덕을 모르는데, 고향 창원에서는 그의 출세를 단순히 장군이 아닌 장상으로 일컬으며, 추앙하고 있다. 장상이라고 한다면 김종서 역시 빼놓을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김종서는 문과 급제(1405[태종5)한 문관이라 무관에서 재상이 되었다는 뜻의 장상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어쨌든 김종서보다 앞서 재상인 우의정에 제수된 사람은 최윤덕이다. 또한 김종서와 달리 최윤덕은 우의정에서 좌의정에까지 올랐지만 재상으로서 정사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 만주 파저강의 여진족 추장 이만주를 격퇴하고 4군을 설치한 업적으로 우의정에 제수될 때도 최윤덕은 무인이 재상이 될 수 없다고 사직소를 올린 것만으로도 그의 성품을 알 수 있다.  

  본관은 통천(通川), 자는 여화(汝和)·백수(伯修), 호는 임곡(霖谷)이다. 시호는 정렬(貞烈)이고, 종묘의 세종실에 배향된 종묘배향공신이다. 음관으로 시작하여 무과에 급제(1410[태종10])하여 좌의정에 오른 장상이다. 무신인 아버지 최운해 역시 공민왕대 요동정벌에 나선 명장으로 그의 묘소 위쪽에 안장된 곳을 찾아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다음을 기약한다. 

  묘소의 위치가 지도에서 검색하면 월촌리로 나오는데 잘못된 것으로 위 주소로 검색해서 찾아가야 한다. 묘의 모습은 사각형의 호석(護石, 둘레둘)을 갖춘 전형적인 조선 전기의 분묘 형태이다.  

 

 

 

 

 

 

 

 

 

 

 

 

 

 

 

 

 

 

 

 

 

 

 

 

 

 

 

 

 

 

 

 

 

 

 

 

 

 

 

 

 

 

정열공 최윤덕 묘(貞烈公 崔潤德 墓)

  비문 '세묘조배향공신좌의정 정열공 최윤덕지묘 배종정부인팔거도씨

(世廟朝配享功臣左議政 貞烈公 崔潤德之墓 配從貞夫人八莒都氏)'

 

영중추원사 최윤덕의 졸기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최윤덕(崔閏德)이 졸(卒)하였다. 윤덕의 자(字)는 백수(伯脩)이니 양장공(襄莊公) 최운해(崔雲海)의 아들이었다. 음직(蔭職)으로 벼슬에 전보(塡補)되었고, 병자년에 아버지를 따라 영해(寧海) 반포(磻浦)에서 왜적을 쳐서 적을 쏘아 연이어 죽였다. 경진년에 태종(太宗)이 역마로 불러서[驛召] 접견하고, 인하여 반포(磻浦)에서 적(賊)을 쳐부순 상황을 묻고 훈련관(訓鍊觀)에 사진(仕進)할 것을 명하고, 이튿날 본관(本觀)의 부사직(副司直)을 제수하였다. 임오년에 낭장(郞將)으로 뛰어올라 호군(護軍)을 제수받고, 이듬해에 대호군(大護軍)에 승진하여 아버지의 상중(喪中)에 있었는데, 기복(起復)을 명하였다. 병술년에 나가서 지태안군사(知泰安郡事)가 되고, 정해년에 불러서 대호군(大護軍)을 제수하였다. 경인년에 무과(武科)에 합격하고, 이듬해에 특별히 우군 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를 제수하고, 조금 뒤에 나가서 경성(鏡城) 등지의 절제사(節制使)가 되었는데, 동맹가첩목아(童孟哥帖木兒) 등이 그 사어(射御)에 능함을 탄복하였다. 을미년에 영길도(永吉道) 도순문찰리사(都巡問察理使)로 고쳐 제수하고, 조금 있다가 우군 총제(右軍摠制)에 옮기었다. 무술년에 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에 승진하고, 이듬해에 의정부(議政府) 참찬(參贊)을 제수하였다. 태종(太宗)이 장수를 명하여 대마도(對馬島)를 치는데, 유정현(柳廷顯)으로 삼군 도통사(三軍都統使)를 삼고, 윤덕으로 도절제사(都節制使)를 삼아 가서 독려하게 하였다가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옮기고, 계묘년에 나가서 평안도 도절제사가 되었다. 만기가 되어 체임되게 되었는데, 임금이 특별히 유임(留任)을 명하고 말하기를,
"변경(邊境)에 변(變)이 있으니, 경이 아직 진(鎭)에 있어서 안정되기를 기다리라."
하였다. 을사년 가을에 다시 참찬(參贊)으로 소환되고, 이듬해에 판좌군도총제부사(判左軍都摠制府事)에 승진하였다. 무신년에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옮기고, 경술년에 판중군 도총제부사(判中軍都摠制府事)가 되었으며, 기유년에 명하여 충청(忠淸)·전라(全羅)·경상도(慶尙道)의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삼아 주현(州縣)의 성터[城基]를 살펴 정하였다. 임자년 겨울에 파저강(婆猪江) 이만주(李滿住) 여연(閭延)에 입구(入寇)하여 인민을 죽이고 노략하므로, 계축년 정월에 특별히 다시 평안도 도절제사로 삼아서 이를 치기를 명하였다. 4월에 윤덕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군사를 나누어 가서 쳐서 베고 잡은 것이 퍽 많았다. 5월에 발탁하여 의정부(議政府) 우의정(右議政)을 제수하였다. 뒤에 도적이 다시 와서 변경을 소요하므로, 명하여 도안무사(都安撫使)를 삼아 평안도(平安道)에 가서 진무(鎭撫)하게 하였다. 갑인년 봄에 스스로 무장(武將)이라 하여 전문(箋文)을 올려 의정(議政)을 사면(辭免)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이듬해 봄에 좌의정(左議政)에 승진하였다. 여름에 다시 전문(箋文)을 올려 정부(政府)는 사면하고 다만 안무(安撫)의 직임만을 행할 것을 빌었으나, 또 윤허하지 않았다. 병진년에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가 되었다. 경신년에 계모(繼母)의 상중(喪中)에 있었고, 복(服)이 끝나매 다시 영중추원사를 시켰다. 갑자년에 나이가 70세에 가까와서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을축년 11월에 궤장(几杖)을 내렸는데, 이때에 병으로 심히 위독하였다. 일어나서 명(命)을 배수(拜受)하려 하니, 자제(子弟)들이 말리며 말하기를,
"병환이 위태하니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하매, 윤덕이 정색(正色)하고 말하기를,
"내가 평생에 동료를 접하더라도 오히려 병으로 예(禮)를 폐하지 않았거늘, 하물며 임금이 주시는 것이겠는가."하고, 병을 참고 일어나 관대(冠帶)하고 나가서 맞이하여 당하(堂下)에서 배수(拜受)하고, 도로 들어가서 누웠다. 임금이 의원을 보내어 병을 묻고 은사(恩賜)가 중첩하였다. 유명(遺命)으로 신불(神佛)의 일을 하지 말고 치상(治喪)을 검소하게 하라 하고,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 70이었다. 임금이 매우 슬퍼하여 조회를 3일 동안 폐하고, 예관(禮官)을 명하여 조상하고 치제(致祭)하였으며, 미두(米豆) 70석과 종이 1백 권을 부의(賻儀)하고, 관(官)에서 장사(葬事)를 지내 주고, 시호(諡號)를 정렬(貞烈)이라 하였으니, 청백(淸白)하게 절조(節操)를 지키는 것이 정(貞)이요, 공(功)이 있어 백성을 편안히 한 것이 열(烈)이었다. 윤덕은 성품이 순진하고 솔직하며, 간소하고 평이하며, 용략(勇略)이 많아서 일시(一時)의 명장(名將)이 되었다. 그 아우 최윤복(崔閏福)·최윤온(崔閏溫)·최윤례(崔閏禮)를 혼인시키기 전에 아버지가 죽었으므로, 자기 집에 모아 길러서 모두 혼수를 마련하여 혼인하게 하고, 토지와 노비를 밀어 주었다. 다만 일찍이 군기감(軍器監) 제조(提調)가 되어서 별군(別軍)을 사역시켜 집을 지었는데, 사람들이 비난하였다. 아들은 최숙손(崔淑孫)·최경손(崔敬孫)·최광손(崔廣孫)·최영손(崔泳孫)이었다.(領中樞院事崔閏德卒。 閏德伯脩, 襄莊公 雲海之子, 以蔭補官。 歲丙子, 從父征寧海磻浦, 射賊連斃之。 庚辰, 太宗驛召賜見, 因問磻浦破賊之狀, 命仕訓鍊觀, 明日, 拜本觀副司直。 壬午, 以郞將超授護軍, 明年, 陞大護軍。 居父憂, 命起復。 丙戌, 出知泰安郡事, 丁亥, 召拜大護軍, 庚寅, 中武擧, 明年, 特拜右軍同知摠制, 尋出爲鏡城等處節制使, 童孟哥帖木兒〔童猛哥帖木兒〕 等服其能射御。 乙未, 改永吉道都巡問察理使, 俄遷右軍摠制, 戊戌, 進中軍都摠制, 明年, 拜議政府參贊。 太宗命將征對馬島, 以柳廷顯爲三軍都統使, 閏德爲都節制使, 往督之, 移工曹判書。 癸卯, 出爲平安道都節制使, 期滿當遞, 上特命留之曰: "邊境有變, 卿姑在鎭, 以待安靜。" 乙巳秋, 復以參贊召還, 明年, 陞判左軍都摠制府事, 戊申, 遷兵曹判書, 庚戌, 判中軍都摠制府事, 己酉, 命爲忠淸全羅慶尙道都巡察使, 審定州縣城基。 壬子冬, 婆猪江 李滿住入寇閭延, 殺掠人民, 癸丑正月, 特復爲平安道〔節〕 制使, 命征之, 四月, 閏德率諸將分軍往討, 斬獲頗多。 五月, 擢拜議政府右議政。 後賊復來警邊, 命爲都按撫使, 往鎭平安。 甲寅春, 自以武將, 上箋辭議政, 不允。 明年春, 進左議政, 夏, 復上箋乞辭政府, 只行按撫之任, 又不允。 丙辰, 領中樞院事, 庚申, 居繼母憂, 服闋, 復領中樞院事。 甲子以年近七十辭職, 不允。 乙丑, 十一月, 賜几杖。 時得疾甚篤, 欲起拜受命, 子弟止之曰: "疾殆矣, 不宜動作。" 閏德正色曰: "吾平生雖朋僚相接, 尙不以疾廢禮, 況君賜乎!" 力疾而起, 冠帶出迎, 拜受堂下, 還入臥上。 遣醫問疾, 恩賜稠重。 遺命不作神佛事, 治喪以儉素。 至是卒, 年七十。 上悼甚, 輟朝三日, 命禮官弔祭, 賻米豆七十石、紙百卷, 官庀葬事。 諡貞烈, 淸白守節貞, 有功安民烈。 閏德性眞率簡易, 多勇略, 爲一時名將。 其弟閏福閏溫閏禮未昏而父歿, 聚養其家, 皆資給以昏, 土田(贓)〔臧〕 獲, 推以與之, 但嘗爲軍器監提調, 役別軍起第, 人譏之。 子淑孫敬孫廣孫泳孫)-세종실록 110권, 세종 27년 12월 5일 갑진 3번째기사(144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