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을 답사하였다. 함안 칠원은 처가이다. 처음으로 두살배기 아들 지환이와 함께하였다. 주세붕을 배향하는 덕연서원을 찾았다. 처음 동림서원(선조 24, 1591)이세워지고 임진왜란 때 불타자 숙종 때 지금의 덕연서원으로 재건(1676)되어 영정 등을 모셨다. 그러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면서 영정 등은 무산사로 옮겨졌으나 유림들의 공의로 1964년 다시 재건하기에 이른다.
주세붕은 우리나라 서원을 최초로 건립한 인물로 그가 세운 서원은 영주가 고향인 성리학자 안향이다. 고려 충렬왕의 충신으로 원나라에서 처음 성리학을 도입하였다. 그러한 연유로 안향이 처음 공자 초상을 모신 곳이 바로 강화 교동도에 위치한 교동향교이다. 수도 개성과 가까운 해로이기에 교동은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러한 유지를 받들어 풍기군수 주세붕이 처음 백운동 서원을 건립하였다.
주세붕(周世鵬)을 풍기 군수(豐基郡守)에 제수하였다. 【옛 순흥부(順輿府)이다.】
사신은 논한다. 풍기는 안향(安珦)의 고향인데, 주세붕이 안향의 옛집 터에 사우(祠宇)를 세워 봄·가을에 제사하고 이름을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이라 하였다. 좌우에 학교를 세워 유생이 거처하는 곳으로 하고, 약간의 곡식을 저축하여 밑천은 간직하고 이식을 받아서, 고을 안의 모든 백성 가운데에서 준수한 자가 모여 먹고 배우게 하였다. 당초 터를 닦을 때에 땅을 파다가 구리 그릇 3백여 근을 얻어 경사(京師)에서 책을 사다 두었는데, 경서(經書)뿐만 아니라 무릇 정·주(程朱)의 서적도 없는 것이 없었으며, 권과(勸課)도 게을리하지 않았다.(丁未/以周世鵬爲豐基 【古之順興府也。】 郡守。史臣曰: "豐基, 安珦之鄕。 世鵬, 於珦之舊居, 爲建祠宇, 春秋享之, 名曰: ‘白雲洞書院。’ 左右有序, 以爲儒生棲息之所, 儲穀若干, 存本取利, 使郡中凡民俊秀者, 聚食而學焉。 當初開基時, 掘地得銅器三百餘斤, 貿書冊於京師, 而藏之, 非徒經書, 凡程、朱之書, 無不在焉, 勸課不怠。)
중종실록 95권, 중종 36년 5월 22일 정미(1541년)
주자를 모신 ‘백록동서원’을 따서 백운동서원으로 한 것으로 후일 퇴계 이황은 명종의 끊임없는 출사를 마다 못하고 풍기군수에 나아갔다가 병을 핑계로 물러 나오면서 풍기에 있는 백운동서원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여 장계를 올려 '소수'라는 사액을 받아 국가공인되었다.
이렇듯 서원의 시조로 성리학자 주세붕을 기리는 곳이 덕연서원이다. 인근에 주세붕 선생 고향 칠서 무릉리에 사당인 무산사가 있으며, 이곳은 종가 사당으로 선생 영정을 봉안했으며 무산서당이 있다. 함안군은 이를 기념하여 무산사부터 칠원읍까지의 도로를 ‘신재주세붕로’ 명예도로로 명명하였다. 가까이에 주세붕 선생 묘(경남 함안군 칠서면 계내리 576)가 있다.
이밖에 칠원읍에는 성리학자 주세붕 일족인 상산 주씨가 많이 세거하여 그들의 자취가 여럿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중추원 의관을 지낸 주시성의 혜율각이 있다. 그는 친족 민 주민 구휼에 힘썼으며, 비밀리 독립자금을 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덕연서원(德淵書院)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 용정리 966-1
주세붕(周世鵬)은 사림의 정신 올곧게 세우고자 성리학을 받아들인 안향을 모신 백운동서원을 세운 사람이다. 이 서원은 이후 이황에 의해 소수서원으로 사액받았다.
주세붕은 생전에 의복이 가난한 선비와 같았고 고기도 좋은 고기는 먹지 않았으며 앉을 때는 털 방석에 앉지 않았고 마구간에는 좋은 말이 없었으며 집도 빌려서 살았다. 봉급이 풍족했지만 입고 먹는 것 이외에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김훤주, 2022, 재미있는 우리 칠원읍지, 도서출판 피플파워, 119쪽
주시성 효자각(혜휼각) 등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구성길 91
주시성(周時成)[1843~1923]의 자는 치익(致翼), 호는 계은(溪隱)이며, 본관은 상산(商山)이다. 생부는 주도민(周道敏)이며, 생모는 윤필범(尹弼範)의 딸인 칠원 윤씨(漆原尹氏)이다. 백부가 아들이 없어 29세 때 양자로 들어가 후사가 되었다. 아버지는 주도세(周道世)이며, 어머니는 설홍원(薛弘元)의 딸인 순창 설씨(淳昌薛氏)이다. 부인은 김학룡(金學龍)의 딸인 김해 김씨(金海金氏)이다. 아들은 주석용(周錫庸), 주석간(周錫幹), 주석현(周錫玹)이다. 사위는 김창직(金昌稷)과 구상린(具相麟)이다. 12세 때 생부가 죽자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그만두고 농사에 전념하였다. 생가와 친가에 모두 극진히 효를 행하여 현감이 두세 차례 쌀과 고기를 내려주었다. 두곡(斗谷)의 선영에 감모재(感慕齋)를 건립하여 제사를 모시는 장소를 마련하였으며, 수천 권의 책을 구입하여 후손 및 마을 사람들이 공부할 수 있게 하였다. 재산을 3등분해서 1/ 3은 자신이 소유하고, 1/3은 집안 제사를 위해 사용하며, 1/3은 친척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후로도 5차례나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주었다. 친척들이 주시성의 선행에 감동하여 감모재 동쪽에 목인비(睦婣碑)를 세웠다. 옛날 사창(社倉) 제도와 같이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주고 수확기에 돌려받는 방식으로 마을 사람들의 어려움을 도와주었다. 함안군 칠원면의 8개 리에 각각 곡식 3섬을 나누어주어 그것으로 각 리가 기본 자산을 삼아 증식해서 활용하도록 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감사한 마음을 잊기 않기 위해 남귀리 큰길 가에 혜휼비(惠恤碑)를 세웠다. 1899년 순릉 참봉(順陵參奉)에 제수되었으며, 1900년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명되고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다. 1902년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1923년 8월 25일 향년 81세로 죽었다. 함안 두곡의 선영에 안장하였으며, 이후 창원 신감(新甘)에 이장하였다.
문집으로 1936년에 주시성의 셋째 아들 주석현, 장손 주필홍(周馝洪), 사위 김창직 등이 주도하여 편찬하고 감모재에서 3권 1책 목활자본으로 간행한 『계은 실기(溪隱 實記)』가 전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5년 6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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