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경북 영주, 안동 답사(소수서원) 8

달이선생 2018. 5. 17. 16:00

경북 영주, 안동 답사 8


  경상북도는 안향(영주-순흥), 정몽주(영천)와 같은 일찍이 성리학을 들여오고 확립시킨 유교 성현의 출신지역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영남좌도의 퇴계 이황, 영남우도의 남명 조식 등 조선 유학의 대스승이 터를 일구고 후진 양성을 하여 그 역사적 뿌리와 문화가 면면히 오늘날까지 이어져 유교 문화를 잘 보존한 지역이다.

   이러한 문화를 연구하고자 국책기관인 한국국학진흥원이 안동시 예안에 자리하고 각 문중의 귀한 자료를 수집하여 연구, 보존에 앞장서고 있다. 오늘 안동의 도산서원(이황)과 한국국학진흥원 내 유교문화박물관, 영주의 소수서원(안향)을 간다.


주세붕(周世鵬)을 풍기 군수(豐基郡守)에 제수하였다. 【옛 순흥부(順輿府)이다.】

사신은 논한다. 풍기안향(安珦)의 고향인데, 주세붕안향의 옛집 터에 사우(祠宇)를 세워 봄·가을에 제사하고 이름을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이라 하였다. 좌우에 학교를 세워 유생이 거처하는 곳으로 하고, 약간의 곡식을 저축하여 밑천은 간직하고 이식을 받아서, 고을 안의 모든 백성 가운데에서 준수한 자가 모여 먹고 배우게 하였다. 당초 터를 닦을 때에 땅을 파다가 구리 그릇 3백여 근을 얻어 경사(京師)에서 책을 사다 두었는데, 경서(經書)뿐만 아니라 무릇 ·주(程朱)의 서적도 없는 것이 없었으며, 권과(勸課)도 게을리하지 않았다.(丁未/以周世鵬爲豐基 【古之順興府也。】 郡守。史臣曰: "豐基, 安珦之鄕。 世鵬, 於之舊居, 爲建祠宇, 春秋享之, 名曰: ‘白雲洞書院。’ 左右有序, 以爲儒生棲息之所, 儲穀若干, 存本取利, 使郡中凡民俊秀者, 聚食而學焉。 當初開基時, 掘地得銅器三百餘斤, 貿書冊於京師, 而藏之, 非徒經書, 凡之書, 無不在焉, 勸課不怠。)-중종실록 95권, 중종 36년 5월 22일 정미(1541년)                         


성리학의 다시 일으키다(소수서원) 1

   “쇠퇴해진 학문과 도의를 다시 이어서 닦게 하자” 대제학 신광한(1484~1550)의 「백운동소수서원기(白雲洞紹修書院記)」에 나오는 소수의 의미이다. 서원의 이름은 보통 지명을 따르지만 이와 같은 의미로 인해 이름을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지었다.

   소수서원은 성리학을 다시 잇자는 의미가 있었기에 성리학을 고려 말에 전한 회헌 안향 선생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안향의 옛집터에 처음 서원을 연 풍기군수 주세붕은 역시 주자를 모신 ‘백록동서원’을 따서 백운동서원으로 한 것도 이와 같다.


영의정 이기, 좌의정 심연원, 우의정 상진, 예조 판서 윤개, 예조 참의 서고(徐固)가 의논드렸다.

"풍기(豊基)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은 황해도 관찰사 주세붕(周世鵬)이 창립한 것인데, 【주세붕이 풍기 군수(豊基郡守)로 있을 때 이 서원을 창립하였다.】 그 터는 바로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 【본래 이름은 향(珦)이었는데, 어휘(御諱)를 피하여 유라 하였다.】 살던 곳이고, 그 제도와 규모는 대개 주 문공(朱文公)이 세운 백록동(白鹿洞)을 모방한 것입니다. 무릇 학령(學令)을 세우고 서적(書籍)을 비치하며, 전량(田糧)과 공급의 도구를 다 갖추어서 인재를 성취시킬 만합니다. 이황(李滉)이황풍기 군수로 있을 때 주세붕의 뜻을 훌륭히 여기고, 오래 전승되지 못할까 염려하여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가려고 할 때에 사연을 갖추어 계문하였기 때문에 삼공과 해조에게 명하여 의논하도록 한 것이다.】 편액(扁額)과 서적·토지·노비를 하사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다 따라줄 수는 없으나 편액과 서적 등 2∼3건만이라도 특명으로 내려보낸다면, 먼 곳의 유생들이 반드시 고무 감격하여 흥기할 것입니다.(領議政李芑、左議政沈連源、右議政尙震、禮曹判書尹漑、禮曹參議徐固議: "豐基 白雲洞書院, 黃海道觀察使周世鵬所創立, 【世鵬, 豐基郡守時, 創此書院。】 其基乃文成公 安裕 【名珦, 避諱稱裕。】 所居之洞, 其制度規模, 蓋倣朱文公 白鹿洞之規也。 凡所以立學令置書籍, 田糧供給之具, 無不該盡, 可以成就人才也。 李滉 【作宰豐基, 嘉世鵬之志, 恐傳守難久, (移) 〔稱〕病將歸, 具辭啓聞, 故命議三公、該曹。】 之請賜扁額, 書籍、土田、臧獲, 不可盡從, 而扁額及書籍二三件, 特命下送, 則遠方儒生, 必皷舞欣感而興起也。)-명종실록 10권, 명종 5년 2월 11일 병오(1550)                         

   퇴계 이황은 명종의 끊임없는 출사를 마다 못하고 풍기군수에 나아갔다가 병을 핑계로 물러 나오면서 풍기에 있는 백운동서원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여 장계를 올려 '소수'라는 사액을 받아 국가공인을 받았다. 아마도 퇴계는 안향을 흠모한 주세붕이 교학을 널리 펼치기 위해 실천하였듯 주세붕의 덕이 계속 이어질 수 있게 국가 사액을 통한 서원이 길이 보전될 수 있도록 한 것은 앞서 선현의 실천을 몸소 행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