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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 고궁

통화에서 이어지는 서간도 일대는 만주족이 많이 사는 곳이다. 곳곳에 그들이 신성시하는 버드나무가 가로수로 펼쳐져 있고 그들 농가 한켠에는 고구려의 2층 창고인 부경에 옥수수가 그득하다. 버드나무는 고구려 시조 주몽의 어머니 하백의 딸 유화부인의 상징이다. 청나라 이후 정립된 그들의 태초 신화는 결국 우리의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 더욱이 그들의 삶은 고구려의 생활문화인 부경이 남아 동화든 어쨌든 반농반목의 여진족의 지금의 만주족의 고유 생활문화로 남아있다.심양은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땅이었다. 원나라 시절에는 원으로 끌려온 고려 유민들이 집단을 이루어 원나라에서 고려왕을 심양왕에 봉하였고 입성책동을 야기했던 부원배의 상징이다. 최영과 이성계 장군이 요동정벌을 단행했고 조선 후기 163..

중국 자금성

북경은 전국 7웅이었던 연나라의 수도 계 (薊) 라 연경이라고 불렸고 원나라는 그들의 수도로 대도라 불렀던 곳, 명나라의 홍무제(주원장)가 원을 피해 남경으로 수도를 옮긴 것을 다시 아들 영락제(주체)가 천도하여 북경이라고 했고 청나라가 들어서며 다시 연경이 된 곳이 북경이다. 북경은 중국 정치의 중심지로 중국 1등지라는 자부심이 있는 곳이다. 바로 이를 상징하는 곳이 명청대의 자금성이고 천안문과 광장이다.영락제는 경항대운하를 완공하여 물산의 안정적 공급을 확보하자 남북으로 천, 동서로 팔백 미터, 성곽 높이 십, 너비 칠 점 오 미터, 해자 너비 오십이 미터, 축조 기간 약 십사 년 장인 약 십만, 연인원 백만 명을 무보수로 멀리 안남인도 동원하는 등 15년 만인 1421년 980개 전각, 9천여 방의..

카테고리 없음 2025.07.04

청 망국의 유산 이화원 그리고 북경 798 예술구 따산스

해가 쨍쨍한 날 중국 자금성을 걷는 것은 고역이다. 더욱이 공기질은 지금이야 숨 쉴 수 있지 그냥 턱 막히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교외로 나가서 맞이한 곳이 이화원이다. 너른 호수에 우뚝 선 산 위 황금색 건물의 위용이 웅장했다. 자금성이 웅장한 거대하고 엄숙한 곳이라면 소소하게 화려하고 장대한 곳이 이화원이다. 끝 모를 장랑을 걸으며 한 칸 한 칸 걸린 그림과 시구는 이것이야말로 중국 문화의 극치라고 생각이 든다.(화려함) 그렇게 둘러본 이화원을 나오려는데 갑자기 주위가 칠흑처럼 어두워진다. 잔잔한 곤명호에 파도가 일렁인다. 그렇게 바람이 일고 비가 들이치며 폭풍이 분다. 장랑에서 비를 피해보려 하나 소용이 없다. 황급히 장랑을 빠져나와 좀 더 넓은 전각 안에 몸을 들이민다. 엄청난 일파에 자리나 틈이 ..

최명길 선생 묘 및 신도비

지천(遲川) 최명길 선생은 영화 '남한산성'(2017)에서 이병헌 배우가 열연한 조선의 명재상이다. 2024년 9월 14일 묘소를 찾았다.최명길 선생의 묘와 신도비는 선생이 1647년 졸하자 청주 대율리('대뱀이', 현 대율1리)에 장사지내고 이후 현달한 손자 최석정, 최석항, 증손 최창대의 노력으로 1702년 묘표와 신도비를 세웠다. ​최명길 선생의 묘표는 여느 조선의 사대부와 달리 '유명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조선'만을 쓰고 있다. 명이 망하고 조선의 사대부가 조선을 소중화라는 의식하에 명이 망했지만 여전히 조선은 명을 잇는다는 생각으로 사대를 표방한 것과 달리 최명길 선생의 묘표는 '조선상국'이라고 단촐하게 적고 있다.​'조선상국증시문충 지천최공명길지묘'영의정의령남구만서​ 이는 대명의리 존승을 놔..

만리장성과 자금성, 중국국가박물관

2024년 5월 20일부터 30일까지북간도 조선족연변자치주 연길시와 두만강 북중 접경지 도문(남양), 한인 개척지인 용정시, 민족의 영산 백두산과 우리 역사 고구려 도읍 국내성인 집안시(만포시) 그리고 비류수가 흐르는 통화,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고토이자 고려와 조선 유민의 땅 심양까지 1천 km 오늘날 중국의 중심 북경으로 7백 km 상해까지 1천2백 km까지 일명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현장을 다녀왔다. 장장 3천 km의 '독립 로드'였다. '중국에서는 10리를 가면 풍경이 바뀌고 100리를 가면 말이 바뀐다."드넓은 중국, 장성 너머는 중국이 아니다. 중국의 딜레마이다. 그래서 지금도 장성을 확대하고 있다. 들리는 말로는 동으로는 우리나라 평양성까지 확장할 기세다. 만리장성은 중국에서는 쓰지 않..

삼전도비

삼전도비(三田渡碑)  장유(張維)·이경전(李慶全)·조희일(趙希逸)·이경석(李景奭)에게 명하여 삼전도비(三田渡碑)의 글을 짓게 하였는데, 장유 등이 다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세 신하가 마지못하여 다 지어 바쳤는데 조희일은 고의로 글을 거칠게 만들어 채용되지 않기를 바랐고 이경전은 병 때문에 짓지 못하였으므로, 마침내 이경석의 글을 썼다.(己丑/命張維、李慶全、趙希逸、李景奭, 撰三田渡碑文。 維等皆上疏辭之, 上不從。 三臣不得已皆製進, 而希逸故澁其辭, 冀不中用, 李慶全病不製, 卒用景奭之文)-인조실록 35권, 인조 15년(1637) 11월 25일 기축 1번째기사   이 기록은 삼전도비를 세우기 위해 삼전도비문 혹은 송로 문자(頌虜文字)로 불리는 것을 지은 기사이다. 삼전도비의 정식 명칭은 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