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유엔군 초전기념비

달이선생 2024. 1. 24. 11:31

2024년 1월 20일 토요일.

화성에서 자라고 수원에서 살아 자주 찾았던 곳이 독산성 세마대지인데도

군생활을 오산에서 해서 셀 수 없이 많이 다니면서 건너 본 곳이지만

너무도 가깝기에 찾아 보는데는 정말 오래 걸렸다.

오늘 화성에서 오산으로 넘어가는 1번 국도변 유엔군 초전기념비를 찾았다. 1번 국도와 경부선이 지나는 이곳은 오래 전부터 교통의 요충지로 독산성 세마대지(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의 무용담이 전함)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유엔군 초전기념비가 위치한 곳은 야트막한 구릉이 동에서 동학산과 서로 세마대로 이어지는 산세로 이곳을 지나는 중요한 고개를 죽미령이라고 한다. 죽미령은 수원(화성)에서 오산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유엔에서 북한의 남침에 대한 자유수호의지를 담아 결의안이 채택되어 유엔 최초로 군대를 파견하였고 이 유엔군이 첫 작전으로 투입된 곳이 죽미령이다.

1950년 7월 5일 대대적인 남침을 개시한 북한군을 맞아 유엔군 최초로 지상군 미군 스미스부대가 1번 국도 좌우로 진지를 구축하고 미 24사단 52포병대대가 후방에서 지원하는 방비 체제를 갖추었다. 한국군 17연대도 함께하였다. 당시 수원에서부터 진군하는 북한군 전력은 105기갑사단 107전차연대와 제4보병사단 15 및 18연대의 대병력으로 이를 차례로 맞아 싸운 것이 죽미령 유엔군 초전이다.

첫 전투부터 한미연합군은 북한의 기갑사단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후방의 105mm 곡사포를 통해서 북한군 전차를 타격하였지만 107전차연대의 돌격에 속수무책으로 뚫렸다. 이어 북한군의 대단위 보병사단의 대규모 지상전에 따라 한미연합군은 패퇴한다. 당시 북한군 전력이 한미연합군에 상당히 앞선 전력인 것은 물론 북한군의 작전 역시 소련제 t-34전차를 앞세워 한미연합군의 진지를 쉽게 돌파하고 이어 보병사단이 좌우 정면으로 공격하는 한편 전략적으로 돌파한 전차부대와 동쪽 경부선으로 우회한 병력으로 포위 전술에 따른 아주 기본적인 전략 전술에 따라 연합군이 일순간 포위가 되면서 더이상의 전투는 불가능하자 전면 퇴각한 것이다. 이처럼 한국전쟁 첫 유엔군 파병 전투 치고는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사실 이와 같은 포위전술은 병법의 기본으로 한국전쟁 내내 북한군과 이후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한 중공군은 이러한 작전을 통해 유엔군과 한국군이 상당히 고전하였다. 특히 유엔군이 전세를 역전 시킨 인천상륙작전 이후 대대적인 북진을 통해 압록강에 이르게되지만 중공군이 자연지리적 정보 우위에 따라 비밀 혹은 공개적 작전에서 큰 성공을 하였다. 한미우정의 대명사이자 문재인 대통령의 일화로도 유명한 함흥대탈출은 이러한 중공군의 전술에 따른 유엔군의 패퇴에 기인한 것이었다.

죽미령 전투는 유엔군 첫 전투로 미군은 북한군 전력에 대한 정확한 이해(북한 전력의 규모, 북한군이 훈련이 잘 된 정규군임을 확인)를 하는 동시에 이후 천안, 대전 등 전략적 후퇴를 통한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방어선 구축과 인천상륙작전에 이르기까지의 중요한 단초가 된 유의미한 결과였다. 다만 미군의 많은 희생은 뼈아픈 일이다.

독산성 세마대지는 역사적으로 수원지역의 대표적인 관방이다. 수원은 현재의 화성시 중남부와 오산, 평택시의 진위, 포승 일부를 포함한 대단위 지역으로 독선성은 수원 내륙의 지리적 요충지였다. 때문에 한성 백제시기 최초로 산성이 구축되었고 이를 주변으로 한성 위례, 고려 개성, 조선 한양과 삼남지방과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가 지나는 길목이 되었다. 특히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방어에 큰 공을 세우고 한양 탈환을 위해 북상한 권율 장군의 병력이 주둔하였던 일화 '세마 고사'에 따라 '세마대'라고 하였고 주변 골짜기 마다 이때 권율 부대를 일러 '삼천병마골'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인근 화산 아래 현륭원으로 천봉하고 수원에 대단위 신읍성이 '화성'을 축조하면서 고구려때부터 중심 관방체제인 이성체제로서 독산성을 수축한다. 특히 화성 행행 당시 독산성에 친히 올라 주변 지세를 살피고 민정을 돈독히 하였다. 정조가 독산성을 찾았던 일은 사사로이 아버지 사도세자가 이곳에 올라 활을 쏜적이 있던 일도 영향이 있었다.

근현대에 들어서는 경부선이 놓이고 세류, 병점역 사이에 간이역이 설치되어 순종이 융건릉을 참배하였다. 신장로인 1번 국도의 대대적 개설로 수원지역의 중요한 인프라가 되었으며, 중요 군사시설인 수원군공항이 1936년 중일전쟁에 맞춰 건설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대에 독산성 아래로 지금도 넓게 펼쳐진 농경지는 박정희 정부의 야심찬 농촌근대회사업의 일환으로 정비된 곳으로 물론 미국 존슨 대통령 방한에 따른 급조된 상황도 있지만 이미 농업분야에 있어서 수원은 정조 이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현대의 농업진흥청과 공사, 서울 농대가 위치한 중심지였다.

화성시 태안읍 화산동 현충탑이 위치한 구릉은 지금도 일명 '존슨 동산'이라고 부르는데 헬기에서 내린 존슨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의 안내를 받아 오를때 낙후한 우리내 사정으로 존슨 대통령이 이때 길을 오르다 고꾸라진 일화가 유명하기도 하다. 축구 명가 차범근의 고향이자 차범근과 박지성의 모교 안용중학교가 바로 옆에 위치한다.

10.26 이후 서울의 봄(12.12)을 거쳐 5.18을 지나 대대적인 민주화운동이 불어닥칠 당시 독산성 아래 위치한 한신대는 박정희 정부로부터 서울에 쫓겨와 이곳에 터(1979)를 잡으며 학생민주화운동을 선도하였다. 한적한 농촌마을에 수시로 경찰과 전경 중대가 출동하여 시위 진압에 따른 체류탄 냄새가 그칠날이 없었다. 이 당시 지역에 아주 큰 사건이 발생하는데 바로 '화성연쇄살인사건'이다. 다행히 범인 이춘재가 다른 범죄로 교도소에 수감되어 일단락되었지만 민주화운동에 따른 치안 공백이 미친 영향으로 이 일대의 부녀자들은 크나 큰 공포에 시달렸다.

현재는 동탄신도시 개발과 교통로 확장에 따라 상전벽해가 되었다.

유엔군초전기념비는 1982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크게 재건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처음 기념비가 세워진 것은 1955년 스미스장병들이 방한하여 현 자리 건너편 99고지 아래 쌓았다. 이어 한미연합으로 지역민이 참여한 추도식을 매년 거행하였다. 이러한 구 기념비는 현재 스미스평화관 뒤 평화공원 한 켠에 위치하고 있다. 99고지 주변의 돌들을 모아 하나하나 정성스레 쌓았던 기념비의 유래를 떠올려 보면 지금 기념비처럼 현충시설 어느 곳에나 볼직한 조형물이 아닌 당시 처절하게 싸웠던 전몰장병과 그 숭고함을 잊지 않았던 지역민이 하나되어 쌓아 올린 옛날 기념탑이 더욱 애착이 간다. 기념관을 둘러 보며 없어진 것은 아닌가 했다가 너무나 반가웠는데 구석에 쓸쓸히 방치된 거 같아 마음이 안 좋다. 차라리 원래 자리에 있었다면 더 좋았을텐데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