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민헌 4

윤강 선생 묘 및 신도비

윤강(尹絳, 1597~1667) 선생 묘(墓) 및 신도비 윤강 선생은 '안산윤씨'로 불린 안산지역의 명문가로 일군 인물로 가문이 현 시흥시 산현동에 대대로 세거하였다. 입향조는 윤승유(尹承柳)와 그 아들 성종의 부마 영평위(鈴平尉) 윤섭(尹燮)이지만 집안이 크게 현달하게 된 것은 증손 윤민헌(尹民憲,1562~1628)과 그 자손들이다. 윤강은 바로 윤민헌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를 역임하였고, 특히 아들들이 모두가 문과(지인,지선,지완,지경,지인)에 올랐다. 그중 윤지선(尹趾善)과 윤지완(尹趾完)은 형제정승이 되어 가문의 위상이 높았다. 윤강의 아버지 윤민헌은 사림으로 파주 우계서실에서 수학한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의 제자였다. 당시 동생 윤민일(尹民逸)과 함께 사사하였..

파산서원

파산서원(坡山書院) 파산서원은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의 아버지 성수침(成守琛, 1493~1564)을 기리고자 친우인 백인걸(白仁傑)과 이이(李珥), 그리고 그 문인들이 세운서원이다. 세울 당시는 청송서원이었고 '파산'으로 효종대 사액을 받은 것이다. 성수침은 조광조의 제자로 기묘사림인데 이때 처가에 낙향하였다.(파평윤씨 본향) 파산서원 자리는 성수침(죽우당)에 이어 성혼이 서실을 열어 후학을 양성하였는데, '우계서실(牛溪書室)'이다. 우계는 앞의 눌노천을 이르는 것으로 성혼은 일찍이 이곳에 살며, 후학을 양성하고자 서실을 열고 이름하였다. 현재 파산서원 왼쪽의 수풀이 우거진 곳이 서실터이고, 비석을 세워놓았는데 확인이 어렵다.(공덕비와 우계서실 유허비) 우계서실에 대해서는 성혼의 외..

시흥군(始興群) 수암면(秀岩面) 3․1운동과 윤동욱(尹東旭)의 사상(思想)

시흥군(始興群) 수암면(秀岩面) 3․1운동과 윤동욱(尹東旭)의 사상(思想) 산현동 윤동욱 선생의 생가(손자 윤성준 가옥)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이 전국적인 독립만세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이와 같은 만세운동의 촉발은 일본제국주의의 불법적 침탈에 따른 것으로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시작으로 1910년 한일병합으로 식민지배를 확정하였다. 따라서 일제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를 설치하고 헌병경찰제(憲兵警察制)를 통한 무단통치(武斷統治)를 실시하여 야만적인 탄압과 수탈을 자행한다. 3∙1운동은 바로 이러한 일제에 맞서 자발적이고 거국적으로 이루어진 민족적 저항이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각 지역의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전 계층이 일제에 맞서 항일만세운동을 일을 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