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3

김준용 장군 묘 및 신도비

김준용 장군 묘 및 신도비 1636년 병자호란은 우리 역사에서 암울했던 역사이자, 치욕이었다. 군왕 인조가 삼전도에 나아가 청태종 황태극의 발 아래 항복례인 삼배구고두를 행했던 일로 인해 당시의 모든 일은 쉬쉬할 뿐, 말하기 꺼려했다. 더욱이 우리의 승전도 마찬가지였다. 김준용 장군은 병자호란 당시 몇 안되는 승장 중에 한 명이었지만 패전의 오명으로 파직과 유배를 당했던 인물이다. 다행히 억울한 누명은 곧 풀렸으나 그의 전공에 대한 포상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주장이 이러하였는데, 종군해서 용맹을 자랑했던 휘하 장졸들도 마찬가지다. 특히, 전라병마절도사 김준용 휘하에서 광교산 전투에 참가하여 만주 정황기의 주장이자 청태조 누루하치의 부마 양고리(백양고라, 슈무루 양구리(만주어: ᡧᡠᠮᡠᡵᡠ ᠶᠠᠩᡤᡠᡵᡳ ..

삼전도비

삼전도비(三田渡碑) 장유(張維)·이경전(李慶全)·조희일(趙希逸)·이경석(李景奭)에게 명하여 삼전도비(三田渡碑)의 글을 짓게 하였는데, 장유 등이 다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세 신하가 마지못하여 다 지어 바쳤는데 조희일은 고의로 글을 거칠게 만들어 채용되지 않기를 바랐고 이경전은 병 때문에 짓지 못하였으므로, 마침내 이경석의 글을 썼다.(己丑/命張維、李慶全、趙希逸、李景奭, 撰三田渡碑文。 維等皆上疏辭之, 上不從。 三臣不得已皆製進, 而希逸故澁其辭, 冀不中用, 李慶全病不製, 卒用景奭之文)-인조실록 35권, 인조 15년(1637) 11월 25일 기축 1번째기사 이 기록은 삼전도비를 세우기 위해 삼전도비문 혹은 송로 문자(頌虜文字)로 불리는 것을 지은 기사이다. 삼전도비의 정식 명칭은 삼전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