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청 망국의 유산 이화원 그리고 북경 798 예술구 따산스

달이선생 2025. 4. 10. 12:34

해가 쨍쨍한 날 중국 자금성을 걷는 것은 고역이다. 더욱이 공기질은 지금이야 숨 쉴 수 있지 그냥 턱 막히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교외로 나가서 맞이한 곳이 이화원이다. 너른 호수에 우뚝 선 산 위 황금색 건물의 위용이 웅장했다. 자금성이 웅장한 거대하고 엄숙한 곳이라면 소소하게 화려하고 장대한 곳이 이화원이다. 끝 모를 장랑을 걸으며 한 칸 한 칸 걸린 그림과 시구는 이것이야말로 중국 문화의 극치라고 생각이 든다.(화려함) 그렇게 둘러본 이화원을 나오려는데 갑자기 주위가 칠흑처럼 어두워진다. 잔잔한 곤명호에 파도가 일렁인다. 그렇게 바람이 일고 비가 들이치며 폭풍이 분다. 장랑에서 비를 피해보려 하나 소용이 없다. 황급히 장랑을 빠져나와 좀 더 넓은 전각 안에 몸을 들이민다.

엄청난 일파에 자리나 틈이 없지만 웬일인지 중국 사람 하나 불평하는 사람 없고 표정이 밝다. 우리와 같은 외국인들만 낭패라는 모습이고, 그러다 어느새 그랬는지 갑자기 개다. 황급히 자리를 물리고 나와 버스에 오르려고 보니 이화원 출입구에 있던 큰 나무가 쩌억 갈라져 뒹굴고 있다.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다.

그때 가이드의 말이 귀가 뜨인다.

북경 사람들은 오늘 같이 내리는 비를 복비라고 합니다. 낭패라고 생각되시겠지만 여기 사람들은 복을 받은 것이지요

툴툴거리며 나왔지만 사람들 누구나 밝았던 이유는 복비라서였다. 평소에 너무도 건조한 이곳이 맑게 개는 축복, 복비이다.

자금성 북서쪽으로 청나라의 황실 원림인 3산 5원이 위치한다. 그중 이화원은 3산의 만수산에 들어간 것을 청나라가 망하는데 큰 역할을 한 서태후가 다시금 중건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보통 이화원의 대단위 호수인 곤명호를 파서 그 흙을 쌓아 만든 것이 이화원의 중심산 만수산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서태후에 앞서 만수산 아래 서호(항주 서호를 본뜸)를 곤명호라고 하고 서호를 더 확장하여 터 파기로 하여 만수산의 원래 산인 옹산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든 이는 청나라 최절정의 군주 건륭제의 작품이다.

하지만 이러한 건륭제가 이룩한 만수산은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당시 영불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하면서 폐허가 되었다. 이들은 자금성은 물론 3산 5원의 황실 원림에 들이닥쳐 막대한 양의 청나라 보물을 탈취한다. 그 과정에서 서양식으로 바로크 양식의 화려하고 웅장한 원명원의 서양루도 같이 파괴되는 등 수난을 겪는다.

문제는 이렇게 파괴된 황실 사치 흔적을 청나라 중흥기도 아니고 쇠퇴기에서 이를 복원하려는 야심가가 나오는데 그가 바로 중국 악녀의 대가 서태후였다. 계비로 시작하여 동태후를 죽이고 권력을 잡은 서태후는 본인의 아들인 황제를 죽이면서까지 권력욕에 찌든 인물이다. 문제는 그가 복벽 내지는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정치를 잘하고 정책가 다운 면모를 갖췄다면 모를 일이지만 사상만 고루하고 실력이 없으며, 사치 향락에 위세만 쫓은 인물이다. '공정과 상식'으로 정권을 잡고 검찰 공안 독재를 편 윤석열 대통령과 같다.

망국의 청을 다시 일으키려는 서태후는 자신이 황제로 오를 수는 없었으나 황제와 같은 전처로 청에 군림하고자 하였고 이때 그는 자금성을 떠나 자신만의 황궁을 이룩하고자 했는데 그게 바로 만수산을 재건하여 이화원으로 만든 것이다. 이화원은 서태후 권력의 상징이자 서태후가 청나라 중심의 대권을 행사한 자신의 황궁이었다.

결국 청나라 일 년 예산의 30%라는 막대한 자금을 써서 이룩한 이화원은 망국의 상징이 되고야 만다. 바로 이 즈음 청나라는 동양의 패권을 두고 신생 근대국가를 이룩한 메이지유신의 일본과의 대결을 하였다. 청과 일본은 모두 제국주의 국가로서의 변화를 추구하면서 이들이 패권을 쥐고자 호시탐탐 노린 곳은 조선이었다. 조선은 이미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의 속방이 되어 후일 중화 총통이 되는 원세개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당시 원세개의 위세는 고종 위에서 감국으로 행세를 하였다. 이러한 시기 군사와 무기, 영국과 미국의 지원으로 실력을 쌓아가던 일본이 드디어 1894년 조선으로 출병한다. 일제의 출병은 철저한 청나라 타도에 있었고 결국 두 나라의 군대는 바다 풍도에서 육지 성환, 평택, 평양을 거쳐 요동반도에서 전투가 끝이 난 청일전쟁이 발발한다.

청일전쟁의 결과 일본은 청나라에 대해서 막대한 배상금을 받아 일본 제국주의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문제는 청나라가 아무리 약해도 일본에 진 것이다. 아편전쟁 이후 중체서용을 바탕으로 양무운동을 하여 어느 정도 근대화를 이룩하였고 더욱이 양무대신이자 북양대신 이홍장을 통해 막대한 전력의 북양함대를 구축하고 있던 청이지만 이화원을 재건하였던 서태후가 이 청나라 해군과 군대에 들어갈 예산을 전용하여 종이호랑이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일본의 전함보다 크고 영국에 만든 배수량 7,000톤이 넘는 정원, 진원함을 보유하고도 포를 운용할 해군 훈련과 양성이 되어 있지 않았고 잘 갖춘 무장에 필요한 포탄이 제대로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결국 청나라는 일본에 패했고 이후 1911년 신해혁명으로 망했다.

이화원을 나와 그래도 문화기획자로서의 답사인데 중국 예술의 현주소를 알아야 하지 않을까 북경 798 예술구 따산스를 찾았다. 거리의 풍경은 우리네 홍대나 인사동 등 카페와 상점 등 크게 다르지 않으나 그 속에 보이는 중국 미술의 격조였다. 중국 경제가 승승장구하면서 이러한 자국의 풍요와 강성을 외국에서 성장한 예술가들이 그대로 투영하고 있었다. 근데 조금은 한계가 느껴지긴 했다. 예술이 예술다워야 하는 것은 자유가 있어야는 데 중국 예술에는 국가와 중국 공산당이 희화화할 수 없다. 결국 이런 조짐은 코로나를 거치며 시진핑 시대 국가 선전 예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됐다. 그래 천진난만한 아이들이면 족하다. 너희들이 만들어갈 중국 세계는 어떤 곳일지..

2013.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