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실천궁행.. 지성의 산실 성균관

달이선생 2019. 3. 21. 11:56

실천궁행

명리

거거거중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우리의 정신과 가치도 죽었다

대학로 예술과 흥은 넘치지만 지성은 죽은 거리

 

가을 9월에 당나라에 갔던 대감(大監) 수충(守忠)이 돌아와, 문선왕(文宣王 : 공자), 십철(十哲), 72제자(弟子)의 초상화를 바치자, 곧 〔이것들을〕 대학(大學)에 안치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8신라본기 제8 성덕왕(聖德王) 수충이 당나라에서 돌아오다(717년 09월)

문묘는 공자를 위시한 유교성현을 받들어 제향하는 곳이다. 이러한 제향의 공간으로 시작은 통일신라의 유학 교육기관인 국학에서 시작되었다. 유학의 본격적인 받아들임은 일찍이 고구려의 태학이 있다. 이러한 우리의 유학에 대한 공부는 송나라 사신 서긍에게 큰 울림이 있었다.

근래에 사신이 고려에 갔을 때 현종[王詢]이 임천각에 장서가 수만 권에 이르렀으며 또 청연각(淸燕閣)이 있어서 경(經)ㆍ사(史)ㆍ자(子)ㆍ집(集)의 사부(四部)의 책으로 채운 것을 알았다. 국자감(國子監)을 세워 유관(儒官)을 뽑아 〈제도를〉 잘 갖추었고 학교를 새로 만들어[新敞黌舍], 매달 배운 책을 확인하고 계절별로 시험 보던[月書季考] 태학의 제도를 열심히 본받아 여러 유생을 급제시켰다. 위로는 조정에 관리들이 포진하여 위의(威儀)를 넉넉히 하면서도 문장[辭采]은 여유 있었고 아래로는 여염집[閭閻]과 누추한 거리[陋巷]에 경서와 책을 파는 서사(書肆)[經館書社]들이 두셋씩 마주보고 있다. 결혼하지 않은 백성 자제는 함께 거처하면서 스승을 좇아 경서를 익혔으며[授經] 조금 더 커서는 벗을 골라 비슷한 부류끼리 절과 도관(道觀)에서 강습하였다. 아래로는 평민[卒伍]의 어린 아이들[童穉]까지도 시골 선생을 찾아가 배웠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선화봉사고려도경』 권40 동문(同文) 유학(儒學)

위로는 임금에서 아래로 어린 아이들까지 열심인 고려에서의 문묘를 세운 것은 다음과 같다.

자감은 옛날에는 남쪽 회빈문(會賓門) 안에 있었는데, 앞쪽에는 큰 문이 있고 국자감이라는 방문[榜]이 있다. 중앙에는 선성전(宣聖殿)과 양무(兩廡)를 세웠고, 재사(齋舍)를 만들어 많은 학생들[諸生]을 머물게 하였다. 옛날 규모는 매우 협소했으나 현재는 예현방(禮賢坊)으로 옮겼으니 학도(學徒)가 점차 많아져서 그 규모를 넓힌 것이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선화봉사고려도경』 권16 관부(官府) 국자감(國子監)

이처럼 신라이래 공자를 모신 사당은 유학을 가르치는 교육공간에 함께 배향 공간을 두는 것이 원칙이 되었다. 따라서 문묘와 성균관의 건립은 고려 충렬왕을 거쳐 조선에서도 이어졌다. 다만 고려의 수도 개성의 문묘와 성균관은 조선왕조 개창에 따라 한양 도성에 새로이 건축되면서 지방 향교로 전락하고 서울의 문묘와 성균관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특기할 것은 공자를 위시한 중국의 유교 성현을 받들었으나 1020년(현종 11)에 동국유현인 신라의 최치원(崔致遠)을 시작으로 설총, 안유(안향), 정몽주 등 4현 이후 조선에서 14현을 도합 18현을 모셨다. 동방 18현 또는 동국 18현이라고 한다. 대성전을 중심으로 좌우 동무와 서무에 각각 배향되었다.

동배향 제1위 : 홍유후(弘儒侯) 설총

동배향 제2위 : 문성공(文成公) 안유

동배향 제3위 : 문경공(文敬公) 김굉필

동배향 제4위 : 문정공(文正公) 조광조

동배향 제5위 : 문순공(文純公) 이황

동배향 제6위 : 문성공(文成公) 이이

동배향 제7위 : 문원공(文元公) 김장생

동배향 제8위 : 문경공(文敬公) 김집

동배향 제9위 : 문정공(文正公) 송준길

 

서배향 제1위 : 문창후(文昌侯) 최치원

서배향 제2위 : 문충공(文忠公) 정몽주

서배향 제3위 : 문헌공(文憲公) 정여창

서배향 제4위 : 문원공(文元公) 이언적

서배향 제5위 : 문정공(文正公) 김인후

서배향 제6위 : 문간공(文簡公) 성혼

서배향 제7위 : 문열공(文烈公) 조헌

서배향 제8위 : 문정공(文正公) 송시열

서배향 제9위 : 문순공(文純公) 박세채

이러한 문묘 종사는 조선에서는 가문의 큰 영광이자 학파와 정파를 아우르는 붕당의 큰 일이기 때문에 조선 정치사에 있어서 정치격변으로 이어졌다. 사색당파의 교체와 정변의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문묘와 성균관이 위기가 찾아온다. 더이상 유학은 나라의 중심이 될 수 없는 위기였다. 서구열강의 침략과 일제 침략으로 위기를 맞은 것이다. 이러한 때 우리의 애국지사와 지식인들은 서구의 발달된 문명을 받아들이는 데 열심이었다. 교육입국 운동 그것이다. 일제강점기 민립대학설립운동으로까지 이어지지만 쉽지 않았다. 결국 일제 패망과 함께 우리 문묘와 성균관이 변화하였다. 문묘는 1949년 전국유림대회 결의에 의해 동무와 서무에 종사한 중국 명현의 위판(位板)을 매안(埋安)하고, 우리 나라의 명현 18위를 대성전으로 승당(陞堂)하여 오늘날 대성전의 석전 제향의 모본이 되고 있다. 더욱이 성균관은 더이상 국가교육기관으로서 설 수 없어 유림이 주축이 되어 근대교육의 중심인 대학교로 일신하는데 바로 성균관대학교다. 이러한 움직임의 중심에 선 인물이 마지막 유림으로 일컬어지는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이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심산 선생은 나라를 잃자 대성전 중국 명현은 모두 빼고 우리 동국 18현만 배향하자고 주장할 정도로 열렬한 민족주의자였다. 그의 꼿꼿한 기개는 해방 후 이승만 독재를 비판했고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를 인정하지 않았다. 더욱이 선생은 민족 분단에 따른 아픔을 죽는 그날까지 애통해 하며 남북통일을 염원하였다. 이러한 심산의 곧은 기개를 이은 학문의 전당이 바로 성균관대학교이다.

한인물입. 일 없는 사람 들어오지 말라

2012.1.27.

서울 성균관대학교. 네이버
심산 동상. 서울 성균관대학교. 공훈전자사료관
심산 동상. 수원 성균관대학교. 공훈전자사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