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근대의 그늘 군산1

달이선생 2014. 7. 30. 15:24

근대의 그늘 군산

개항된 군산은 일제 수탈의 교두보로서 호남평야의 막대한 쌀이 일본으로 공출된 중심지였다.

일본식 근대가옥이 즐비하고 군산항이 일찍부터 정비되어 근대화의 상징이었지만 그 속에는

우리의 슬픔이 자리하고 있다.

 

 

금강하구둑

삼국시대 왜의 백제구원군과 나당연합군이 격전을 벌였던 장소였고 여말 최무선 장군이 우리나라 최초 화포를 사용

하여 왜구를 섬멸하였던 역사적인 장소(진포대첩, 1380)이다.

 

왜적의 배 500척이 진포(鎭浦) 입구에 들어와서는 큰 밧줄로 서로 잡아매고 병사를 나누어 지키다가 드디어 해안에 상륙하여 주군(州郡)으로 흩어져 들어가 불을 지르고 노략질을 자행하였으니, 시체가 산과 들을 덮었고, 곡식을 그 배에 운반하면서 쌀이 땅에 버려진 것이 한 자나 쌓였다. 나세(羅世)·심덕부(沈德符)·최무선(崔茂宣) 등이 진포에 이르러 처음으로 최무선이 제작한 화포를 사용하여 그 배를 불태우자 연기와 화염이 하늘을 가렸다. 왜구가 거의 다 타죽었고 바다에 빠져 죽은 자도 또한 많았다. 왜구가 포로로 잡은 자녀들을 모두 죽여 산처럼 쌓아놓으므로 지나가는 곳마다 피가 파도쳤으며, 오직 330여 인만이 탈출해서 왔다. 왜구 가운데 죽음을 벗어난 자들은 옥주(沃州)로 달아나서, 해안에 상륙해있던 적과 합세하여 이산현(利山縣)과 영동현(永同縣)을 불태웠다.

『고려사절요』 권31, 신우2, 우왕 6년(1380) 8월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을 당해 남해를 수호하면서 호남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기 이전부터 호남평야는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특히 호남평야가 밖으로 나아가는 길에는 목포와 군산이 있는데, 군산은 660년 백제 멸망의 그날 나당연합군에 맞서 왜 구원병이 군산 앞 바다이자 금강 하구인 백강구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마지막 백제 구원의 불씨가 꺼지고 수많은 백제 유민이 왜 수군과 함께 일본으로 도래했다. 그로부터 700년이 흘러 백강구는 진포로 이름이 바뀌었고 나라도 고려로 바뀌었는데 이곳에 500이 넘는 왜구의 선단이 출몰하여 고려의 발명가이자 영웅인 최무선 장군이 왜선을 우리나라 최초 화포를 써서 분멸하게 되었다.

10월 비로소 화통도감(火㷁都監)을 설치했는데, 판사(判事) 최무선(崔茂宣)의 말을 따른 것이다. 최무선이 원(元) 염초(熖硝) 기술자인 같은 마을 사람 이원(李元)을 잘 대우하여 몰래 그 기술을 묻고, 가동(家僮) 몇 명으로 하여금 익혀 시험해 본 후 마침내 왕에게 건의하여 설치하였다.

『고려사』 권133, 세가, 열전 권 제46, 우왕 3년(1377) 10월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송대 발명된 화약은 몽골의 세계 제패 이후 세계사를 바꾼다. 화포의 등장은 더이상 중세 기사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전쟁은 기사 중심이 아닌 일반 보병 중심을 바뀌고 성채에서 이루어지던 전쟁은 화포의 등장으로 더이상 무용지물이 되었다. 오스만제국이 비잔티움제국의 심장이자 난공불락 철옹성 콘스탄티노플을 함락(1453)하는데 청동으로 만들어진 우르반 대포의 사용은 세계사의 전환을 의미하였다.

원나라의 전유물이었던 화약, 즉 염초 제조 기술은 현대의 최첨단 무기의 이상에 비밀로 그 어려운 일을 최무선이 해낸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화약 제조와 무기 생산을 하는 화통도감을 설치했는데 최무선이 있다. 그가 그의 화포로 나아가 고려를 구한 곳이 바로 군산 앞 바다인 진포였다.

이렇게 배를 잃게 된 왜구는 호남평야를 휩쓸고 기세가 등등했는데 이를 물리친 영웅이 바로 조선의 건국자 태조 이성계이다. 같은 해 9월 왜구의 신출귀몰 적장 아지발도를 사살한 싸움이 '황산대첩'이다. 이 전투로 이성계는 고려의 구국의 영웅이 되었고 그 무용담은 고려인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결국 고려의 몰락과 조선의 건국이 이 싸움에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보고 싶었다. 지금은 금강하구둑으로 막혀있으나 예전 진포바다이다. 더 나아가면 남쪽 연안 군산항이 있어 외해로 뻗어가기 좋고 그 북쪽은 충청남도 장항이다.

우리나라에서 드넓은 지평선을 볼 수 있는 유일의 장소가 호남평야이다. 그 중 김제는 호남평야의 중심이다. 곡창지대로 병참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순신 장군이 그 수호를 천명했던 곳이다. 근대에 이르러 이곳 김제는 조선과 조선 민중을 위한 땅이 아니게 되었다. 제폭구민, 보국안민을 외치면 1894년 전봉분, 김개남, 손화중이 기포하여 나약하고 부패한 민씨척족의 조선 봉건정부를 타도하고 나아가 일본제국주의를 쳐부수고자 하였으나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이 땅은 일본 근대화의 식량창고 일본제국주의의 병참이 되었다.

김제에는 지금도 일본인 지주의 저택이 남아있다. 당시 이 하시모토와 같은 일본인 지주는 전체 0.2%에 불과하였지만 조선 농토 54%를 소유하고 조선인을 소작인으로 부렸다. 이른바 식민지 지주소작제이다. 이렇게 탄생한 새로운 토지경제는 절대적으로 수탈경제였다. 일제의 산미증식계획에 따라 조선에서 생산된 양질의 쌀은 1899년 개항한 군산항에서 모두 실려 나갔다.

이렇게 반출된 쌀은 일본 근대화의 기반이되었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 배를 대기 어려운 것을 일제는 부잔교라는 기술을 통해 배의 정박과 수탈품을 싣는데 요기를 부렸다. 이러한 부잔교는 역시나 비슷한 조건이었던 제물포, 즉 인천항에도 설치된 것이다. 따라서 군산, 인천, 목포 등 일제가 개항하여 수탈장으로 만든 곳은 대개가 비슷한 모습이다. 이러한 개항장의 모습은 바다 건너 일본 큐슈의 모지항도 비슷하다. 원산은 가보지 못해 잘 모르겠으나 일본 큐슈의 모지항에서 받은 인상은 '일제의 조선지배는 진심이었다.'는 것이다. 항구 조성과 항구를 둘러싼 세관, 운영사, 은행 등 각종 시설들이 일본과 식민지 조선과 차이가 없었다.

서양식 건물이 즐비하고 살펴보면 일제의 수탈기관이 대부분이다. 한쪽에 중식집 빈해원은 당시 풍광을 잘 보여주는 이색적인 공간이다. 전형적인 중국풍의 식당 내부 모습으로 옛 정취가 물씬 풍긴다. 이밖에도 일본인 적산가옥들이 인천보다는 잘 보존되었다. 개발이 더딘 결과이나 이는 아주 좋은 근대 유산으로 군산의 자원이 되고 있다. 영화 타짜에서 평경장 가옥으로 유명한 히로쓰 가옥은 규모면에서 일본인 지주들이 조선에 누린 호사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는 쓰라린 현장이다.

근대의 그늘 군산. 그 시작은 야트막한 산 위에서 개항장을 굽어보는 일본식 사찰 동국사였다. 전형적인 일본식 사찰이고 숭유억불 조선에서 그 어느 때보다 활발히 교세를 확장했던 곳도 일본 불교다. 일본 불교의 확장 이전 조선의 사찰과 승려는 모두 비구였지만 요즘 보듯이 결혼한 승려인 대처승이 많이 보이는 것도 식민지 유산이다. 동국사는 일본 사찰이나 지금은 조계종의 소속이다. 이러한 특성을 반영하여 동국사가 소장했던 당대의 유물을 전시관을 통해 일제치하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이곳은 사죄와 반성, 화해와 용서의 역사로 일본 불교와 한국 불교가 화합한 곳이기도 하다. 가장 눈에 띈 유물은 안중근 의사 의거에 따른 일본에서 발행된 엽서 한장이다.

 

 

 

진포대첩기념탑

동국사

일제침략으로 한국불교계가 일제에 적극 협조하는 가운데 일제의 불교가 한국에 들어왔다.

현존하는 일본식 사찰로 유일한 군산의 동국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