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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이궁(離宮)을 창덕궁(昌德宮)이라 하였다.(號離宮曰昌德宮。)태종실록10권, 태종 5년(1405) 10월 25일 정해 2번째기사 이궁의 이름을 창덕궁이라 하다창덕궁은 조선 왕조의 동궐이다. 동궐은 한양도성 5대 정궁 중 창덕궁과 창경궁을 이른다. 보통 북궐은 경복궁, 서궐은 경희궁을 말하고 여기에 본래 경운궁을 고종 때 확장한 덕수궁까지 5궁이다. 조선 왕들이 실제로 정궁으로 사용한 것은 창덕궁이다. 창덕궁은 왕위를 찬탈한 태종이 경복궁으로 들어가기 꺼려 세운 것으로 궁궐 뒤 후원은 조선 왕들의 쉼과 역경의 역사가 넘쳐난다. 조선후기 문예중흥을 이끈 영조는 후원 영화당에서 과거 전시를 보았으며, 정조는 주합루에 규장각을 열어 자신을 보좌할 관료를 양성하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2010.7.10.2017...

경희궁

전은 호탕하고, 풍도(風度)가 있었으며 궁마술(弓馬術)이 남달리 뛰어나고 외모도 훤칠하였다. 어떤 사람이 왕에게 참소하기를 "정원군(定遠君) 및 전에게 특이한 상(相)이 있고 그들이 사는 곳인 새문리(塞門里)의 집 부근에 왕성한 기운이 있습니다." 하니, 왕이 전을 시기하여 죽이고 그 집을 빼앗아 허물어 경덕궁(慶德宮)을 지었다.((佺豪爽有風, 度弓馬絶人, 相表瓌偉。 而或讒之王曰: "定遠及佺有異相, 所居塞門里, 第有旺氣。" 王忌佺殺之, 奪其第毁之, 建慶德宮。)광해군일기[중초본]97권, 광해 7년(1615) 11월 17일 기축 6번째기사 능창군 이전의 졸기경덕궁은 경희궁이다. 광해군이 짓고 영조가 사랑한 궁궐이다. 그런데 경희궁을 짓는데 광해군의 이복동생 정원군의 집을 빼앗았다는 것이 특기하다. 더욱이 정..

북궐 경복궁

궁원(宮苑)의 제도는 사치하면 반드시 백성을 힘들게 하고 재물을 잃는다. 너무 누추하면 조정의 존엄을 보일 수 없다.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아름다우나 사치스럽지 않게 하는 것, 이것이 미(美)이다. 검소한 것은 덕과 같고, 사치스러운 것은 악(惡) 중에서도 큰 것이다. 사치스러운 것보다는 검소한 것이 낫다.(宮苑之制, 侈則必至勞民傷財. 陋則無以示尊嚴於朝廷也. 儉而不至於陋, 麗而不至於侈, 斯爲美矣. 然儉 德之共也, 侈 惡之大也. 與其侈也 寧儉.)'조선경국전' 궁원, 정도전'하늘이 내린 큰 복''경복(景福)'이다. 경복궁은 조선의 법궁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창하고 한양 천도를 하면서 지은 최초의 궁궐이다. 조선을 대표하는 곳이나 조선의 영화보다는 역사의 비운이 점철된 곳이다. 조선을 만든 정도전은 조선..

종묘사직

종묘사직(宗廟社稷)​동아시아문화권에서 종묘사직은 국가를 의미한다. 이는 국가의 지존 역대 군왕의 신주를 받드는 왕실사당 종묘와 국가경영에 있어 제일 중요한 토지와 곡식을 신격화하여 받드는 사직이 합쳐져 있기 때문이다.유교국가에서 열성조를 받드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례이다. 종묘가 없는 일본조차 만세일계라하여 덴노를 모신 신사(진무덴노 가시하라신궁)를 떠받들고 있다.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과 같은 엄숙함과 경이로움, 이러한 영감을 주는 종묘는 박제화 되고 쓰러져 가는 그것과는 다른 생동하는 공간이다. 이는 단순히 공간과 건축적 미학만이 아닌 실제적 쓰임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종묘제례이다. 조선은 망했지만 왕실성인 전주이씨 종약원을 주축으로 제례를 이어가고 있으며, 특히 제례에 이어지는 종묘 제례악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