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남양만 두레마을 활빈교회 정착

달이선생 2024. 8. 29. 19:37

1974년 5월 22일 우여곡절 끝에 발안천 하구 분향만을 막는 남양만 방조제가 완공되었다. 박정희 정부가 야심차게 시작한 최초의 외국 차관을 도입하여 시행한 간척사업으로 아산만 방조제와 동시에 완공한 것이다. 이렇게 '남양황라'라 불리는 대규모 평야인 남양만 간척지가 생겨나는 순간이다.

남양만 간척지는 화성지역에서 경제적 변화는 당연하고 인문지리적 큰 변화를 몰고 왔다. 당시 1976년 화성군 우정면 (현 화성시 우정읍 이화리) 일대로 서울 청계천에 밀려나온 사람들이 들어온다. 바로 '활빈귀농개척단' 50가구(257명)이다. 이후 이주민들은 각기 7개 마을로 분산 정착하고 마을마다 활빈교회가 들어섰다. 바로 두레마을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남양만 간척지 이주 정착이 순조롭지 못하였다. 급기야 이들을 이끈 김진홍 목사도 비판(일시 화성을 떠나 제주도로 이주)받으며 부침을 겪었다. 마침내 1983년 김진홍 목사가 다시 화성으로 돌아와 화산리 봉화산(조선시대 연변봉수 흥천산 봉수) 아래 마을을 만들고 지금의 활빈교회를 건립하였다.

감리교회인 독정제일감리교회를 다닐 무렵 크리스마스인지 또는 여름방학인지 기억이 가물하지만 확실한 것은 당시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빨간벽돌의 고딕양식에 교회당이 아닌 요즘은 이 일대가 거대한 산업단지가 되어 대규모 창고형 공장이나 건축물이 흔하지만 당시만해도 흔하지 않고 더욱이 교회가 창고식이니 상상밖이었다. 그런데 그 큰 교회 안에 남녀노유 빽빽하게 찬 사람들이 저마다 찬송을 부르고 설교를 듣는 모습이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설교자는 다름 아닌 김진홍 목사였다. 김진홍 목사는 영화 '새벽을 깨우리로다'(1990)에서 임동진 배우의 명연기로 익히 알던터라 그 헌신적인 모습에서 동경했었는데 그 사람이 교회 설교단 위에 딱 서있는 것이다. 좌중을 압도하는 분위기에서 정말 유명인이란 것을 그제 알았다.

사실 두레마을과 활빈교회는 삼괴중학교, 삼괴종합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그 마을 출신 친구들을 통해 알게 된 것인데, 서울의 그 교회와 그 역사가 이 교회와 이 마을이라는 일치된 기억은 아니었다. 그러다 이렇게 알게된 것이다.

공부를 곧잘하고 결국 고대를 간 친구녀석 등으로 두레마을 아이들은 시골 촌놈들과는 생각이나 행동이 달랐다. 하물며 도시락 반찬도 우리들의 김치, 짠지 따위와도 달랐다.

시간이 흘러 마을도 떠나가고 장애인 등도 들어왔다고 하더니 1990년대 말 학교가 생겼다. 학교법인 수곡두레학원(1997)의 두레자연고등학교이다. 두레공동체가 남기고 간 자리 두레공동체 정신을 바탕으로 두레자연중학교, 두레어린이집까지 두레교육공동체가 들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교정 곳곳에 그 시절을 담고 있는 시설과 풍경이 서려있다. '남양만주민회'라는 알 수 없는 두레마을 역사의 흔적 등도 말이다.

 

활빈교회에서 석학 초청 사경회를 열었다.

2024년 8월 21일, 28일 19시 한일장신대학교 차정식 교수를 모신 것이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 마태복음 13장 44절

‘우발성의 은총’이라며 우리 인생의 우연한 기회를 설명한다. 이러한 은총을 진정한 은총으로 받아들이려면 시편 126편 5절과 같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은 기쁨으로 거둔다."

를 실천해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태복음 7장 7절

구하는 것은 질문이요 찾아 내는 것은 탐구요 문을 두드리는 것은 도전으로 성서해석을 통해 '담백한 낙관주의'에 따라 신실하게 살것을 주문하였다.

 

차정식 교수는 서울대 국사학과 82학번으로 시카고대 신학전공 박사로 현재 한일장신대교수이자 신약학의 전문가인 성서학자이다. 마가복음의 예수님 마지막에 대한 성서해석을 통한 박사학위를 받은 신학자이다.

한평의 농사꾼 운동을 담백한 낙관주의로 살아가는 석학의 모습이 퍽이나 인상적이다.

Go with the flow 사자성어로 塞翁之馬(새옹지마)

 

청계천 판자촌 철거민들의 이주와 활빈교회 활동

1. 판자촌 철거와 남양간척지로의 이주

남양간척지에 입주한 서울시 철거민들은 청계천 판자촌 철거민들이었다. 『동아일보』(1975.8.9. 7면)에 당시 청계천 판자촌 철거민들의 상황과 이주 계기가 비교적 상세하게 나와 있다.

1975년 판자촌 철거령이 내려지면서 가구당 15만 원을 보상비로 받게 된 철거민들은 새로 정착할 곳을 집단으로 찾게 되었다. 이와 같은 집단적인 모색을 하게 된 데에는 판자촌 주민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해 왔던 활빈교회의 도움이 있었다.

활빈교회를 운영하던 김진홍 전도사는 1970년대 초반 청계천 판자촌으로 들어와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청계천 판자촌은 1967년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여 철거령이 내려질 즈음에는 무허가 가옥이 800여 채에 달하였다. 철거령에 따라 그해 6월 주민들은 자진해서 판자촌을 철거하였다. 그 무렵 정부는 남양간척지 분배 방침을 정하고 서울시 철거민 중 귀농 희망자를 우선 분배 대상자로 정한 상태였다. 김진홍은 주민의 대부분이 이농민이라는 데 착안하여 '집단귀농'을 준비하였다.

 

당시 김진홍과 함께 청계천 판자촌 빈민 운동을 주도한 제정구와 정일우 신부는 김진홍 전도사와 달리 하루벌이 노동자가 대다수인 주민들을 위해 처음 가까운 양평동으로 이동하였다가 이곳마저 철거가 닥치자 안양천 주변의 판자촌 철거민을 규합하여 다시 서울과 멀지 않은 집단 이주촌 건설을 모색하였다. 따라서 천주교 정일우 신부는 독일의 구호 단체인 미제레올(Misereor)재단의 도움을 끌어내어 현재의 시흥시 신천동으로 이주하여 ‘복음자리(김수환 추기경의 명명)’ 주택을 건설(1977년 시작, 170세대)하였다. 이후 은행동에 한독주택(1979년 시흥동 등 철거민 164세대), 목화연립(1985년 목동 지역 철거민 105세대) 등 차례로 이주촌을 건설하고 도시공동체로서의 자립을 위한 복음신용협동조합 설립, 복음 단오제 개최, 작은자리복지관 사업을 진행하였다. 현재는 시흥시의 도시화와 함께 재개발사업이 진행되어 복음자리 주택은 철거(2010년 신천 휴먼시아아파트)되고 복지법인 복음자리(작은자리복지관)와 복음신용협동조합, 제정구장학회가 유지 운영되고 있다.

(복음자리마을 - 디지털시흥문화대전)

 

철거민들은 세 차례의 현장 답사 후 7월에 '활빈귀농개척단'을 조직하고 이주에 응모한 500가구 가운데 1차로 100가구의 귀농민을 뽑았다. '활빈귀농개척단'이 파악한 귀농 예정자 100가구의 실태는 다음과 같다.

 

이들은 생활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는 생활수준을 더 향상시키겠다는 등의 이유로 고향을 떠나 상경하여 여기에 정착하였다. 가구주들 가운데 대학 졸업자는 5명이었다. 이들의 직업은 막노동과 행상이 대부분이었다. 가구당 한 달 수입은 평균 2~3만 원 정도였으며, 1만 원 미만도 6가구나 되었다. 겨울과 여름 장마철에는 일거리가 없어 실질적인 소득은 월평균 2만 원이 채 못 되었다. 평균 가족 수는 5명이며, 13세 이하 아동의 경우 20%가량이 학생이 고 나머지는 무직이거나 공장 직공으로 가계를 돕고 있었다. 100가구 중 96가구는 과거 1정보(3천 평) 이상의 농토를 가지고 영농의 경험을 쌓았거나 영농을 이해하고 있는 상태로 파악되어서 '활빈귀농개척단'은 철거민들이 농토만 있으면 농사일은 서툴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였다.

 

청계천 판자촌 철거민들의 귀농 계획이 알려지자 외국의 원조기관에서 이들에 대한 원조를 약속해 왔다. 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회 외국 지도부는 귀농민의 2년간 생계비로 6~10 만US$를 지원해 주기로 하였고, 독일아동구호단체에서도 탁아소를 마련해 주겠다고 알려 왔다. 미국연합장로교 선교부에서는 주민의 보건을 위해 진료소 건립을 지원하겠다는 뜻을 비쳤으며, 일본 기독교계에서도 농업기술자 파견 등을 제의해 왔다.

100가구가 귀농하기로 했던 원래의 계획과 달리 실제 귀농한 가구는 50가구 257명이 있다.『동아일보』(1976.6.25. 6면) 이들은 영농의 경험이 있고, 한 가구당 2명 이상의 노동력이 있는 가구들이었다. 귀농 시기는 정확하지 않은데, 1976년 6월에 활빈교회가 주도한 남양지역사회관이 우정면 이화리에 건립된 것으로 보아 이미 이 무렵에 철거민들은 남양간척지 일대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 청계천변 판자촌 철거민 50가구가 서울에서의 찌든 생활을 청산, 집단귀농의 꿈을 심었다. 이들 철거민들은 지난 20일 처음으로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이화리 남양만 간척지에 집단이주, 7백만 평의 광활한 간척지에서 지역개발을 위한 첫발을 내딛는 한편, 남양만 개발의 전초지로서 우선 400여 평 대지 위에 92평의 남양지역사회관을 건립, 농촌 풍습에 따라 지신밟기를 하는 등, 이날 다채로운 개관식도 가졌다.

이 자리에는 청계천변에서 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이들의 집단귀농을 주선한 활빈교회 김진홍 전도사(35) 등 교인과 이화리 원주민 등 200여 명도 참석, 이주민들의 무궁한 발전을 축복해 주었다. 이 지역사회관은 청계천 철거민 이주를 돕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 서독, 일본 등의 교회에서 보낸 1,600만 원으로 건립, 주일예배 시간 외에는 농민교육위탁소로 이용키로 했으며, 특별히 냉난방시설이 되어 있어 농한기의 농민교육에 집중적으로 이용할 예정···• 간척지엔 아직도 염분이 많아 제대로 농사가 안 될 것을 고려, 이들 이주민들에겐 앞으로 2년간 생계비·영농비를 호주교회측이 담당키로 했다. 또 탁아소의 운영과 생계비 일부는 독일교회가 부담키로 했으며, 주민들의 건강관리를 위한 보건소 설치 운영은 미국교회가 맡고 지역사회개발을 전공한 두 명의 박사를 파견키로 했다는 것. 일본교회에서도 두 명의 농업기술자를 파견, 이들의 영농기술을 지도키로 했다.

이들 50가구 주민들은 한 가구 당 3,000평의 토지를 분할받았는데 3년 거치 후 7년 분할 상환으로 땅값을 물기로 하고, 현재 건설부에서 이곳에 주택 마련을 끝내는 대로 입주, 개간사업에 박차를 가하리라는 것.

『동아일보」, 1976년 6월 25일 6면

 

이 기사에 따르면, 1976년 6월 당시 청계천 철거민들은 우정읍 이화리 일대에 거주하였으며, 이들의 이주를 도왔던 활빈교회는 외국 기독교단체의 지원을 받아 이화리에 '남양 지역사회관'을 건립하였다. 남양지역사회관은 교회 공간이자 농민교육위탁소 등으로 이용될 계획이었다. 철거민들은 이후 7개 마을에 분산되어 정착하였으며, 한 가구당 1정보의 농지를 분양받았다. 7개 마을로 분산되었던 철거민들 중에는 몇 년 살지 못하고 떠난 이들도 많아 1986년 당시에는 50가구 중 20가구만 남아 있었다.『동아일보』(1983.2.3. 7면, 1986.6.19. 9면)

남양간척지 분양 이전 장안6리 물구리에 들어와 살면서 자활회를 조직했던 주민은 활빈교회 김진홍과의 인연을 다음과 같이 구술하고 있다. 이것은 남양간척지 이주민들이 본격적으로 정착하기 이전인 1976년의 일인 것으로 보인다.

내가 자활회장 할 때 김진홍 씨가 우리 집에 몇 번 왔는데, 내가 없을 땐 집사람에게 예기하고 한번 만나서 무엇을 어떻게 도와줄 거냐고 내가 물으니까, 외국에서 선교사업을 하는 데에서 도움을 주겠다고 하더라고. 활빈교회가 처음에는 이화리에 있었어요.

김진홍 목사가 도와준다고 한 후에 같이 이화리에 갔어요. 거기 가니까 모르는 사람들이 7~ 8명 있는데, 들어가자마자 사진 후레시가 터지는 거야. 미리 촬영 준비를 해 놓은 거지. 보니까 거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 외국인이야. 일본인도 몇 명 있고.··· 그 사람들이 내가 없을 때 와서 물구리에 와서 사진을 찍어 갔어. 많은 사람들이 와서 사진을 찍어 가고 저녁에 회장이라고 나를 부른 거더라고, 외국말로 자기들끼리 뭐라 하는데 나는 알아들을 수 없고, 그래서 누구냐고 물어보니 "외국에서 온 선교단체인데, 당신들을 돕기 위해서 와서 답사를 하고 당신을 만나려고 한 거다."라고 답하는 거야. 그래서 내용은 모르고 고맙다고 했는데, 그러고 나서 한 20일 있는데 지서장이 찾아온 거야. 일본 엔에치케이(NHK) 신문에 내가 나왔는데, 긴급조치9호 대상자인 김진홍하고 손을 잡았다고 졸지에 내가 정치범이 된 거야. 그래서 내가 목사가 어려운 사람들 돕겠다고 하는데, 싫다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따졌지. 그러고는 또 우정지서에서 나오고, 오산에 있는 화성경찰서에서 나오라고 하고. 내가 활동기록을 보여 주면서 "우리는 정부에서 발표한 대로 믿고 내려왔는데, 정부가 하루아침에 뒤집으니 우리도 살아야 할 거 아니냐. 그런데 우리를 돕겠다고 하는 목사가 왔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하고 답했지. 우정에서 조사를 받고 나오니 나중에 오산으로 한 번 더 불렀는데, 깨끗하다고 해서 그냥 나 올 수 있었어.

 

2. 신규 간척지에서의 농사

이들은 1976년도부터 남양간척지에서 영농을 시작한 것으로 나와 있다.『동아일보』(1983.2.3. 7면, 1986.6.19. 9면) 이는 남양간척지를 분양받은 다른 이주민들이 1977년부터 본격적으로 농사를 지었던 것과 비교가 된다. 당시 신문기사에 실린 1976년 농사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주민들은 76년 봄 첫 농사부터 큰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이 교회는 당시 헛간 하나를 빌려 ‘활빈교회' 간판을 달았다. 간척지 영농은 4~5년이 지나야 80%의 수확을 올리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는데, 바로 그해부터 80%의 수확을 목표로 영농을 시도한 것이다. 그해 농사를 지어 수확을 거두지 않으면 떼거지가 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분양받은 소금벌 위에 천막을 세우고 공동생활을 하며, 무성한 바닷풀을 뽑아내고 정지 작업을 하여 개펄을 농토로 일궈 가며 소금기를 줄이기 위해 물을 넣어다 빼었다가 하기를 일과로 삼아 도전을 계속했다. 행정당국에선 "소금 함량이 너무 높으니 올 농사를 포기하라."는 권고도 있었다.

그러나 첫 모내기를 시도했다가 실패를 거듭, 논의 모가 붉게 타버리곤 하여 애간장을 태웠 다. 강원도 산골까지 찾아다니며 모를 구걸하다가 네 번째 모심기를 시도하여 기적적으로 활착에 성공, 기어이 80%의 수확에 성공을 거두었다. 농수산부에서도 "그 비결이 무엇이냐."고 현지조사까지 나왔다. 첫 농사에 성공한 뒤 교회당이자 마을회관인 '농민의 집을 건축, 봉산탈춤 등을 농악을 울리며 문을 열기도 했다.

이 기사에서 언급된 '농민의 집’은 앞에서 소개한 '남양지역사회관‘인 것으로 보인다. 이 기사에 따르면 1976년 모내기에 성공한 후 철거민들과 활빈교회는 교회 공간이자 주민 이용시설인 이 건물을 지었던 것이다.

3. 활빈교회의 활동

청계천 철거민들이 7개 마을로 분산되자 활빈교회도 주민들이 거주하는 마을에 각각 교회를 세웠다. 교회가 자리를 잡은 후 신용협동조합과 탁아소 사업을 시작했다.『동아일보』(1983.2.3. 7면, 1986.6.19. 9면)

이후에도 활빈교회는 지역에서 농민들을 위한 사업을 이어 나갔다. 1977년 풍년이 들자 김진홍 목사는 이듬해 공동으로 비육우(肥肉牛) 단지를 조성하기 위해 뉴질랜드에서 500 마리의 소를 수입해 왔으나 소 값이 떨어지고 사로 값이 비싸 실패하였다. 1978년에 다시 젖소 600여 마리를 들여왔으나 또다시 실패하여, 1979년에는 부채액이 1억 4,000만 원에 이르게 되었다. 김진홍 목사는 주민들로부터 '사기꾼 목사"라는 소리까지 듣게 되었다.(『동아일보』, 1983. 2.3. 7면 비육우 단지 조성 실패에 대해 동지 1986. 6. 19.자 기사는 뉴질랜드 소 수입 당시 검역 원산지 증명 등 까다로운 통관절차 등으로 석 달 동안 인천항에서 수백 마리의 소가 묵히는 바람에 뜻하지 않던 낭패를 보게 된 것으로 쓰고 있다.)

이 일로 김진홍 목사는 제주도로 떠났다가 다시 남양만으로 돌아온 후, 1983년에 화산리에 두레마을을 세웠다. 공동체 생활을 하는 두레마을에서는 유기농법으로 농산물을 생산하였다.『동아일보』(1986.6.19. 9면), 『한겨레』1994.2.15. 13면)

『화성시사』4, 「연해지역의 간척과 주민 생활의 변화」 (2018), 316~3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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